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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효문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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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효문황후는 명나라 영락제의 황후로, 명나라 건국 공신 서달의 딸이다. 주원장의 배려로 영락제와 혼인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정난의 변 당시에는 북평을 지키기 위해 직접 갑옷을 입고 성을 방어했다. 영락제 즉위 후 황후가 되었으며, 동생의 작위 추서를 반대하는 등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또한, 내훈 등을 편찬하고 불교 서적을 저술하는 등 문화 사업에도 기여했다. 46세에 사망했으며, 영락제는 그녀를 기려 장례를 치르고 이후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다. 사후 인효황후로 추존되었으며, 정식 시호는 인효자의성명장헌배천제성문황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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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효문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인효문황후 서씨
서대사(徐待査)
씨족서(徐)
가문서(徐)
출생일1362년 3월 5일
출생지응천부(현재의 난징시, 장쑤성, 중국)
사망일1407년 8월 6일
사망지자금성, 난징시
묻힌 곳명십삼릉 장릉
배우자
배우자영락제
자녀
자녀홍희제
주가후, 한왕
주가수이, 조간왕
영안공주
영평공주
안성공주
함녕공주
가계
아버지서달, 중산왕
어머니사씨 부인
형제자매서휘조
왕조
왕가명나라 서(徐)씨
작위 정보
작위명나라 황후
재위 시작1402년 12월 7일
재위 종료1407년 8월 6일
전임효민양황후
후임성효소황후
작위 (얀 왕비)얀 왕비
재위 (얀 왕비) 시작1376년
재위 (얀 왕비) 종료1402년
존호
시호인효자懿성명장헌배천제성문황후(仁孝慈懿誠明庄獻配天齊聖文皇后)

2. 생애

서씨는 주원장(홍무제)을 섬기고 명나라 건국에 공헌한 서달의 장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성격이 온화하여 '여학생(女學生)'이라 불릴 정도였다. 홍무 9년(1376년), 주원장은 서달에게 사돈을 맺자고 청했고, 서씨는 연왕 주체와 혼인했다.[3] 부부 사이가 좋았으며 7명의 자녀를 두었다. 마황후에게 특히 총애를 받았다.[3]

건문 원년(1399년) 정난의 변이 일어나자, 연왕 주체의 근거지인 북평(현재 베이징)에 건문제군의 장수 이경룡이 쳐들어왔다. 이때 북평을 지키고 있던 것은 주능과 적은 수의 군사였지만, 서씨는 출정 중인 군사들의 아내들을 모아 스스로 갑옷을 입고 성을 지켰다. 건문 4년(1402년) 정난의 변이 종결되자, 아우인 서휘조의 목숨을 남편에게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고, 남편이 황제에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후에도 신중한 성격으로 교만해하지 않았고, 자신의 일족을 등용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영락제는 자신을 돕기 위해 죽은 서씨의 동생 서증수에게 작위를 추서하려고 했지만, 서씨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3] 영락제가 서씨 몰래 작위를 주고 나중에 알리자 서씨는 끝까지 감사해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서씨는 꿈에서 계시를 받아 불경을 기록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 작품의 제목은 『대명인효황후몽간불설제일희유대공덕경(大明仁孝皇后夢感佛說第一稀有代功德經)』이다. 그녀는 경전 서문에서 명상을 하고 향을 피우던 어느 밤, 관세음보살이 꿈에 나타나 그녀를 성스러운 곳으로 데려가 재앙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경전을 보여주었다고 적었다. 경전을 세 번 읽은 후, 그것을 암기하고 깨어난 후 완벽하게 기억하여 적어낼 수 있었다.[2]

문화 사업에 열심이었으며, 고인의 금언과 선행을 편찬한 「내훈(內訓)」, 「고황후성훈(高皇后聖訓)」, 「권선(勸善)」 등을 남겼다.

영락 5년(1407년) 7월에 4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서씨는 "백성을 아끼고 널리 인재를 구하여 황실에 예를 다하되 자신의 외가 친척들을 절대 돌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3] 영락제는 그녀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여 티베트에서 승려를 초청하여 성대한 장례를 치렀다고 전해진다.

2. 1. 어린 시절과 혼인

서달의 장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여학생(女學生)'이라 불릴 정도였다. 주원장은 주체의 정실 부인으로 삼고자 서달에게 간청하였고, 홍무 9년(1376년)에 혼인하였다.[3] 마황후에게 특히 총애를 받았다.[3]

그녀는 슬하에 徐輝祖, 徐添福, 徐膺緒, 徐增壽 네 명의 남동생과, 홍무제의 열세 번째 아들인 代簡王 주규(朱桂)와 스물두 번째 아들인 安惠王 주영(朱楹)의 부인이 된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2. 2. 정난의 변과 내조

홍무 9년(1376년) 주원장은 서달에게 사돈을 맺자고 청했고, 서씨는 연왕 주체와 혼인했다.[3] 정난의 변이 발발했을 때, 연왕 주체의 근거지인 북평(현재 베이징)에 건문제군의 장수 이경룡이 쳐들어왔다. 이때 서씨는 출정 중인 군사들의 아내들을 모아 스스로 갑옷을 입고 성을 지켰다고 한다. 건문 4년(1402년) 연왕이 정난의 변에서 승리하여 황제가 되자 황후로 책봉되었다.[3]

영락제는 자신을 도운 서씨의 동생 서증수에게 작위를 추서하려 했지만, 서씨는 이를 반대했다.[3] 영락제가 몰래 작위를 주고 알리자, 서씨는 끝까지 감사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2. 3. 황후 시절

서씨는 어릴 적 독서를 좋아하고 성격이 온화했는데, 홍무 9년(1376년)에 주원장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서달에게 사돈을 맺자고 청하였다.[3] 연왕 주체와 혼인했으나, 그의 친정은 주원장의 공신 대숙청 때 큰 화를 입기도 했다. 건문 4년(1402년)에 연왕이 정난의 변에서 승리하고 황제가 되자, 황후로 책봉되었다. 영락제는 자신을 돕기 위해 죽은 서씨의 동생 서증수에게 작위를 추서하려고 했지만, 서씨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3] 영락제가 서씨 몰래 작위를 주고 나중에 알리자, 서씨는 끝까지 감사해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주원장(홍무제)을 섬기고 명나라 건국에 공헌한 서달의 장녀로, 아우로는 정난의 변에서 건문제 측에 서서 끝까지 싸운 서휘조가 있다. 어릴 적부터 독서를 좋아했던 재녀로, "학자"라고까지 불렸다. 그 소문을 들은 주원장은 장래가 촉망되는 넷째 아들 주체의 정실 부인으로 삼고자 서달에게 간청하였고, 홍무 9년(1376년)에 결혼하였다. 용모는 아름답지 않았으나 기지가 풍부했고, 부부 사이가 좋았으며 7명의 자녀를 두었다. 주원장의 황후인 마씨에게 특히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건문 원년(1399년) 정난의 변이 일어나자, 연왕 주체의 근거지인 북평(현재 베이징)에 건문제군의 장수 이경룡이 쳐들어왔다. 이때 북평을 지키고 있던 것은 주능과 적은 수의 군사였지만, 서씨는 출정 중인 군사들의 아내들을 모아 스스로 갑옷을 입고 싸웠다고 한다. 건문 4년(1402년) 정난의 변이 종결되자, 아우인 서휘조의 목숨을 남편에게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고, 남편이 황제에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서씨는 꿈에서 계시를 받아 불경을 기록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 작품의 제목은 『대명인효황후몽간불설제일희유대공덕경(大明仁孝皇后夢感佛說第一稀有代功德經)』이다. 그녀는 경전 서문에서 명상을 하고 향을 피우던 어느 밤, 관세음보살이 꿈에 나타나 그녀를 성스러운 곳으로 데려가 재앙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경전을 보여주었다고 적었다. 경전을 세 번 읽은 후, 그것을 암기하고 깨어난 후 완벽하게 기억하여 적어낼 수 있었다. 이 경전은 전통적인 대승 불교 철학을 전달하며, 염송하는 만트라(mantra)는 티베트 불교의 전형적인 수행 방식이었다.[2]

황후가 된 후에도 교만해하지 않았고, 자신의 일족을 등용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문화 사업에 열심이었으며, 고인의 금언과 선행을 편찬한 「내훈(內訓)」, 「고황후성훈(高皇后聖訓)」, 「권선(勸善)」 등이 있다.

2. 4. 죽음과 사후

영락 5년(1407년) 7월에 서씨는 4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인효황후'''(仁孝皇后)로 추시되었고, 영락제 사후 추시된 정식 시호는 '''인효자의성명장헌배천제성문황후'''(仁孝慈懿誠明莊獻配天齊聖文皇后)이다. 능호는 장릉(長陵)이다.[3] 영락제는 그녀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여 티베트에서 승려를 초청하여 성대한 장례를 치렀다고 전해진다.

서씨는 "백성을 아끼고 널리 인재를 구하여 황실에 예를 다하되 자신의 외가 친척들을 절대 돌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3]

그녀가 죽은 후 영락제는 그녀의 여동생 서묘금(徐妙錦)과 재혼하려 하였으나 청혼을 거절당하였다. 서묘금은 재주와 용모가 친언니인 서황후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정비의 모습을 닮은데다가 그녀의 뛰어난 용모와 재주를 본 영락제는 1407년 그해에 새로운 황후 간택령을 내렸다가 취소하고, 바로 서묘금을 불러들여 청혼을 시도하려 했다.

서묘금은 학식도 뛰어나고 역사서와 고전에 능했다 한다. 그러나 영락제를 멸시하던 서묘금은 영락제의 청혼을 여러 번 사양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서신을 보내 영락제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이 서신에서 자신은 양가집 규수로 태어났지만 욕심도 없고 부귀영화도 꿈꾸지 않으며 오직 불교에 귀의하고 싶다는 것과 열심히 불공을 드려 황제의 앞날을 축원하겠다는 것과 다시는 세속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 세상을 떠나 불교에 귀의하여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은 것이 소원이라 하였다. 마지막으로 묘금의 장문으로 된 청혼 거부 서신을 받자 결국 그는 결혼을 포기하였다. 이후 그는 새 황후를 맞이하지 않고 여생을 보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서달(徐達)
어머니사씨(謝氏)
남편홍무제(洪武帝)
장녀주옥영(朱玉英)원융(袁容)과 혼인, 1남 3녀
장남주고치(朱高熾)
차남한왕(漢王)
차녀영평공주(永平公主)이랑(李讓)과 혼인, 1남
3남조간왕(趙簡王)
3녀안성공주(安成公主)1402년 송호(宋琥)와 혼인, 1남
4녀함녕공주(咸寧公主)1403년 송영(宋瑛)과 혼인, 1남


4. 평가 및 영향

인효문황후에 대한 평가는 현재까지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참조

[1] 논문 Palace Women in the Ming dynasty: 1368-1644 Princeton University 1987
[2] 서적 Ming Buddhism
[3] 서적 중국사 열전, 후비 - 황제를 지배한 여인들 달과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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