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란화친조약
1. 개요
일란화친조약은 쇄국 체제 하에서 네덜란드와의 관계를 변화시킨 조약이다. 이 조약 체결 전, 네덜란드는 무역 관계만 유지하는 통상 국가였으나, 조약 체결 후에는 국교를 맺는 통신 국가로 관계가 격상되었다. 또한, 조약으로 인해 네덜란드인은 나가사키 데지마 밖 시내 출입이 허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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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2. 쇄국 체제 하의 대외 관계
2.1. 조선, 류큐 왕국과의 관계
2.2. 네덜란드, 중국과의 관계
3. 나가사키 데지마와 네덜란드인
3.1. 데지마 이전의 네덜란드 상관
3.2. 데지마로의 이전과 활동 제한
4. 조약 체결과 영향
4.1. 네덜란드와의 관계 변화
쇄국 체제에서 조선과 류큐 왕국과의 관계는 무역뿐 아니라 국교도 존재하는 “통신(通信)”으로 간주되었지만, 네덜란드와 중국과의 관계는 무역은 있었지만 국교는 없는 “통상(通商)”으로 간주되었다.
1641년 네덜란드 상관이 히라도에서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옮겨진 이후, 네덜란드인의 활동 범위는 데지마로 제한되었다.
일란화친조약 체결 결과, 네덜란드와의 관계는 “통상”에서 “통신”으로 바뀌어 양국 간의 국교가 맺어졌다. 또한, 네덜란드인의 데지마에서 나가사키 시가지 출입이 허용되었다.
4.2. 네덜란드인의 활동 범위 확대
1641년에 네덜란드 상관이 히라도에서 현재의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옮겨진 이후, 네덜란드인의 활동 범위는 데지마로 제한되었다. 일란화친조약 체결 결과로 네덜란드와의 관계는 “통상(通商)”에서 “통신(通信)”으로 바뀌어 양국 간의 국교가 맺어지게 되었다. 또한, 네덜란드인의 데지마 밖 나가사키 시내 출입이 허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