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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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용 외국인은 일본이 서구 열강의 기술과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해 에도 시대 후기부터 메이지 유신 이후 적극적으로 추진한 정책으로, 다양한 분야의 외국인을 고용하여 근대화에 기여했다. 1868년부터 1889년까지 2,690명 이상의 외국인이 고용되었으며, 영국인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들은 법률, 경제, 외교, 예술, 의학, 공업 기술,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했고, 일본 문화를 해외에 알리는 역할도 했다. 하지만, 긴축 재정 정책으로 인해 해고되거나 일본을 떠나는 경우도 있었으며,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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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 외국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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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에도 시대 후기,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에 직면하면서 일본은 외국인 고용을 시작하였다. 막부는 서구 기술 도입을 위해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 얀 요스텐, 윌리엄 애덤스 등을 고용하였다. 이들은 외교 및 기술 고문으로 활동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두터운 대우를 받았다.[5]
1868년(메이지 원년)부터 1889년(메이지 22년)까지 공공기관, 사적 기관, 개인이 고용한 외국 국적자는 2,690명에 달한다.[9][10] 이 중 영국인이 1,127명으로 가장 많았고, 미국인 414명, 프랑스인 333명, 중국인 250명, 독일인 215명, 네덜란드인 99명, 기타 252명 순이었다. 1900년까지 기간을 연장하면 영국인 4,353명, 프랑스인 1,578명, 독일인 1,223명, 미국인 1,213명으로 늘어난다.[11]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선진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각 분야에서 외국인을 초빙하였다. 이들은 '고용 외국인'(お雇い外国人, 오야토이 가이코쿠진)으로 불렸으며, 산학 각 분야에 걸쳐 일본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을 목표로 외국인 초빙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공부성을 설립하여 많은 외국인 기술자를 고용하고, 철도망 건설 등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2~3년 계약으로 고용되었으며, 계약을 갱신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점차 일본인으로 대체되었다.[5]
1871년 당시 태정대신 사죠 쓰네타미의 월급이 800엔이었던 데 비해, 외국인 최고 월급은 조폐료 지배인 윌리엄 킨더의 1,045엔이었다.[14]
사가의 난부터 세이난 전쟁에 이르는 긴축 재정으로 인해 1876년 많은 오야토이 외국인이 해고되었고, 공부대학교 졸업생이나 해외 유학 귀국자가 나오면서 외국인 고용은 점차 줄어들었다.[8]
3. 고용 현황 및 특징
고용 분야는 다양했으며, 1890년(메이지 23년)까지의 고용처를 보면 다음과 같다.[12][13][14]국적 고용처 및 특징 영국 정부 고용 54.8%, 특히 공부성 43.4%. 메이지 정부 고용 외국인의 50.5%가 영국인이었다. 에드먼드 모렐 등 철도 건설 기술자, 리처드 브랜턴 등 등대 건설 기술자, 헨리 다이어 등 공부대학교 교사단, 콜린 맥베인의 측량 기술자 등이 있다. 미국 민간 고용 54.6%, 교사가 많음. 정부 고용 39.0% (문부성 15.5%, 개척사 11.4%). 개척사 외국인의 61.6%가 미국인 (호레스 케플런,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등). 프랑스 군 고용 48.8%, 육군 고용의 87.2%는 프랑스인이었다. 프랑스 군사 고문단 초빙. 사법성의 기스타브 에밀 보아소나르, 좌원의 알베르 샤를 뒤 부스크 등 법률 분야에서 활약. 독일 정부 고용 62.0% (문부성 31.0%, 공부성 9.5%, 내무성 9.2%). 엘빈 폰 베르츠 등 의사, 지질학의 하인리히 에드문트 나우만 등. 네덜란드 민간 고용 48.5%, 해운 관련 선원 다수. 해군 초창기 지도. 토목의 하천 기술자 요하니스 더 레이케 등. 이탈리아 공부미술학교의 안토니오 폰타네지 등. 에드알도 키요소네는 여러 분야에서 공헌.
이들은 고액의 보수를 받았는데, 1871년 당시 태정대신사죠 쓰네타미의 월봉이 800엔이었던 데 비해, 외국인 최고 월봉은 조폐료지배인윌리엄 킨더의 1,045엔이었다.[14] 1890년까지 평균 월봉은 180엔이었다.[14]
대부분 임기를 마치고 일본을 떠났지만, 일본 문화에 매료되어 일본에 결혼하거나 정착한 라프카디오 허른, 조사이어 콩돌, 에드윈 던 같은 사람도 있었다.
4. 분야별 주요 인물 및 활동
국가별로는 영국 출신이 가장 많았으며, 해군 분야에서도 영국인을 고용했다. 육군에서는 초기에는 프랑스인을 다수 고용했으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독일 제국이 승리한 이후 군제 개혁을 위해 독일인을 다수 고용하였다. 홋카이도 개척 과정에서는 미국인이, 토목 기술 분야에서는 네덜란드인이, 미술 학교 등에서는 이탈리아인이 주로 고용되었다.
이들 고용 외국인은 고액의 보수를 받았다. 정부 고위 관료의 월급이 수백 엔이었던 시대에, 이들은 수백 엔에서 수천 엔을 넘는 급여를 받았다. 이는 당시 엔화가 극도로 약세였던 탓도 있지만, 당시 일본이 극동의 변방이었고, 구미인 입장에서는 신변 안전 등의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최고급 기술과 지식을 보유한 전문가를 초빙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임무를 마친 대부분의 초빙사들은 귀국하였으나, 일부는 일본에 잔류하여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고용 외국인들은 단순한 기술, 지식 전수뿐 아니라 일본의 문화와 생활 양식을 해외에 소개하고, 반대로 서구의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분야별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조)4. 1. 국가 체제
국가 | 인물 및 역할 |
---|---|
Deutsches Reich|독일 제국de | |
United Kingdom|영국영어 | |
Regno d'Italia|이탈리아 왕국it | |
France|프랑스프랑스어 | |
United States|미국영어 |
4. 2. 학술 및 교육
에드워드 S. 모스는 미국의 동물학자로, 오모리 조개더미를 발견했다.[15]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는 삿포로 농학교 초대 교감이었다.[15] 베이실 홀 체임벌린은 영국의 일본학자로, 고사기를 영어로 번역했다.[15] 라파엘 폰 쾨베르는 러시아 태생 독일 철학자이자 음악가였다.[15] 헨리 다이어는 영국의 공학자로 도쿄대학 공학부 초대 도검이었다. 호레이스 윌슨은 미국의 영어 교육자로, 일본에 야구를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5]4. 3. 법률
귀스타브 에밀 보아소나드(프랑스)는 형법, 형사소송법, 민법 제정에 기여하였다.[3] 조르주 부스케(프랑스)는 사법성 법학교 교원이었다.[4]4. 4. 경제 및 금융
알렉산더 앨런 섄드(Alexander Allan Shand)는 대장성 고문으로 일했던 영국인이다.[19]4. 5. 외교
미국인 헨리 윌러드 데니슨(Henry Willard Denison)은 외교관으로 외무성 고문으로 일했다.[4] 그는 시모노세키 조약과 포츠머스 조약 협상에 참여했다.4. 6. 예술 및 미술
어니스트 페놀로사는 철학을 가르쳤으며, 일본 미술을 재평가하는 데 기여했다.(미국)[17] 안토니오 폰타네시는 공부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가르쳤다.(이탈리아)[17] 빈첸초 라구사는 조각가였다.(이탈리아)[17] 프란츠 에케르트는 현재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편곡(작곡했다는 설도 있음)했다.(독일)[17]4. 7. 의학
에르빈 폰 벨츠는 독일상인으로, 의학 분야에서 활동했다.[15]4. 8. 공업 기술 및 건축
요하니스 더 레이케는 하천 사방 정비를 맡았다.(네덜란드)[15] 조시아 콘더는 건축학 교육과 카나메칸 설계를 담당했다.(영국)[15] 에드먼드 모렐은 신바시~요코하마 간 철도 건설을 이끌었다.(영국)[15] 레옹 베르니는 요코스카 조선소와 나가사키 조선소 건설을 지도했다.(프랑스)[15] 리처드 헨리 브런턴은 등대 건설과 요코하마시의 가로 정비를 담당했다.(영국)[15]4. 9. 군사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선진 군사 기술과 지식을 배우기 위해 외국인 군사 전문가들을 고용했다. 초기에는 프랑스 출신 군사 고문이 많았으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한 이후에는 독일 출신 군사 고문을 다수 고용하였다. 해군 분야에서는 영국 출신 군사 고문이 활약하였다.
국가 | 성명 | 역할 |
---|---|---|
프랑스 | Jules Brunet|쥘 브뤼네프랑스어 |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이끄는 막부군 군사 고문[17] |
네덜란드 | Willem Hoijsen van Kattendijke|빌렘 호이젠 판 카텐디케nl | 근대 해군 교육 |
영국 | Archibald Lucius Douglas|아치볼드 루시우스 더글러스영어 | 해군병학교 교관 |
독일 | Klemens Wilhelm Jakob Meckel|클레멘스 빌헬름 야코프 메켈de | 육군대학교 교관 |
5. 오야토이 외국인의 영향과 유산
오야토이 외국인들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선진 기술과 지식을 전수하여 일본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다양한 국가 출신으로,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했다.[5]
오야토이 외국인들은 공부성을 중심으로 척산흥업 정책 추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철도, 광산, 조선 등 산업 기반 시설 구축에 필요한 기술을 전수하고, 근대적인 공장 시스템 도입을 지원했다. 또한, 법률, 군사, 의학,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근대적인 제도 도입과 인재 양성에 기여했다.[8]
오야토이 외국인들은 단순한 기술 전수를 넘어, 일본인들에게 서구의 생활 방식을 소개하고, 일본 문화를 해외에 알리는 역할도 수행했다. 얀 요스텐, 윌리엄 애덤스와 같이 에도 시대 초기부터 일본에 거주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교 고문이나 기술 고문을 역임한 인물들도 있었으며, 막부 말기에는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 빌렘 호이젠 판 카텐디케, 레옹 베르니, 리처드 브랜턴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초빙되었다.[5]
메이지 정부는 공부성을 설립하여 척산흥업을 추진하고, 많은 외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했다. 이들은 높은 보수를 받았는데, 1871년 당시 태정대신 사죠 쓰네타미의 월급이 800엔이었던 데 비해, 외국인 최고 월봉은 조폐료 지배인 윌리엄 킨더의 1,045엔이었다.[14]
오야토이 외국인 중에는 일본 문화에 매료되어 일본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었다. 라프카디오 허른, 조사이어 콩돌, 에드윈 던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어니스트 페놀로사는 일본 미술을 재평가했고, 호레이스 윌슨은 일본에 야구를 전파했으며, 윌리엄 고랜드는 일본 고분을 연구하고 일본 알프스를 명명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적을 남겼다.[5]
오야토이 외국인들은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지만, 사가의 난 이후 긴축 재정 정책으로 인해 1876년에 많은 수가 해고되었고, 공부대학교 졸업생과 해외 유학 귀국자들이 등장하면서 점차 그 수가 줄어들었다.[8]
오야토이 외국인의 고용은 '관고외국인(官雇外国人)'을 본떠 민간에서도 이루어졌으며, 학교나 회사에서 '사고외국인(私雇外国人)'을 채용하는 경우가 많았다.[23]
주요 오야토이 외국인
국적 | 성명 | 분야 | 비고 |
---|---|---|---|
네덜란드 | 구이도 풀베키(Guido Fulbecki) | 법률, 구약성서 번역 | |
프랑스 | 귀스타브 에밀 보아소나르(Gustave Émile Boissonade) | 형법, 형사소송법, 민법, 사법성 법학교 교원 | |
프랑스 | 조르주 부스케(Georges Busquet) | 사법성 법학교 교원 | |
프랑스 | 알베르 샤를 뒤 부스케(Albert Charles du Busquet) | 법률, 군사 등 다수의 프랑스어 자료 번역 | |
독일 | 오토마르 폰 모르(Ottmar von Moll) | 궁정 의례, 훈장 제도 | |
독일 | 헬만 테히오(Hermann Teuchert) | 민사소송법 | |
이탈리아 | 알레산드로 파테르노스트로(Alessandro Paternostro) | 사법성 고문 | |
독일 | Carl Rudolph (Verwaltungsjurist)|카를 루돌프de | 내각 고문 | |
독일 | 오토 루돌프(Otto Rudolph) | 사법성 고문, 도쿄대학교 교원 | |
프랑스 | 조르주 아페르(Georges Appert) | 사법성 법학교·도쿄제국대학교 교원 | |
프랑스 | 미셸 르봉(Michel Lévy) | 도쿄제국대학교 교원, 사법성 법률고문 | |
스위스 | 루이 아돌프 브리델(Louis Adolphe Bridel) | 도쿄제국대학교 교원 | |
영국 | 윌리엄 커크우드(William Kirkwood) | 주일 영국 공사관 법률고문에서 사법성 법률고문 | |
독일 | 파울 마이에트(Paul Mayet) | 태정관 고문, 도쿄의학교(현·도쿄대학교 의학부), 게이오기주쿠 대학부 재정과 교원, 독일학회 명예회원 | |
프랑스 | 프로스페르 갱베 그로스(Prosper Gambier-Gros) | 경시청 법률고문 | |
미국 | 헨리 테일러 테리(Henry Taylor Terry) | 도쿄대학교·도쿄제국대학교 법학 교원 |
6. 비판적 시각
오야토이 외국인은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지만,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 팽창의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특히, 군사 분야에서 이들은 일본 군국주의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7. 한국과의 관계
고용 외국인 중 일부는 대한제국 시기 한국에서도 활동했다. 예를 들어, 헨리 데니슨은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한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일본의 고용 외국인 정책은 대한제국에도 영향을 미쳐, 대한제국 역시 서구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의 강제 병합 이후, 한국에서의 고용 외국인 정책은 일본의 식민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참조
[1]
서적
Japanese-English and English-Japanese Dictionary
[2]
뉴스
Hardy's Case
The Japan Weekly Mail
1875-01-04
[3]
웹사이트
Appert, Georges (1850-1934)
http://catalogue.bnf[...]
2013-04-02
[4]
웹사이트
Georg Michaelis
http://www.archontol[...]
2013-04-04
[5]
서적
Japanese-English and English-Japanese Dictionary
[6]
간행물
A Table of Salaries of D.P.W., British India, the Engineers
1869-01-09
[7]
뉴스
In The Shiho Saibansho of Tokei
The Japan Weekly Mail
1874-12-19
[8]
논문
東京外国語学校魯語科とナロードニキ精神
http://www.tufs.ac.j[...]
1983-09
[9]
서적
資料 御雇外国人
小学館
[10]
서적
近代日本産業技術の西欧化
東洋経済新報社
[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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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 of British Columbia Press
[12]
논문
明治前期お雇い外国人の給与
http://www.umds.ac.j[...]
[13]
논문
ヘンリー・フォールズ 『ニッポン(Nipon)滞在の9年間 -日本の生活と仕来りの概観』-
https://hdl.handle.n[...]
[14]
문서
植村、同上
[15]
웹사이트
気象庁|気象庁の歴史
https://www.jma.go.j[...]
2022-03-07
[16]
간행물
叙任及び辞令
官報
1889-01-19
[17]
간행물
叙任及び辞令
官報
1890-11-24
[18]
간행물
叙任及び辞令
官報
1891-02-04
[19]
논문
Alexander Allan Shand(1844~1930)の事歴と人間像について--明治初年の日本における銀行経営教師としての事歴を中心として
[20]
서적
ドイツ研究 = Deutschstudien
日本ドイツ学会
[21]
웹사이트
ヱビスビール記念館
http://www.sapporobe[...]
[22]
웹사이트
下総御料牧場の関係者であるアップ・ジョーンズについて、次のことが知りたい。 1.御料牧場時代とその前...
https://crd.ndl.go.j[...]
国立国会図書館
2021-07-04
[23]
서적
国史大辞典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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