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문석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임문석은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위를 한 인물로,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관료로 활동하며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해방 후에는 전라남도 내무국장, 변호사, 대구변호사회 회장,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그는 친일파 708인 명단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27년 3월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졸업했으며 1930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평안북도 내무부 산업과 속(屬, 1931년 ~ 1933년)과 평안북도 지사관방 속(屬, 1934년)으로 근무했고 1933년 11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및 사법과에 합격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전라남도 내무국장으로 임명되었고 1947년 변호사로 선임된 뒤부터 대구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1950년 민주국민당 경상북도 도당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52년 경북대학교 연합후원회 회장을 역임했다. 제4대와 제5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1966년 신한당 정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2. 일제강점기 활동
1934년 8월 28일 평안북도 운산군수, 1935년 11월 27일 평안북도 선천군수로 각각 임명되었으며 1937년 7월 14일 황해도 도이사관 겸 내무부 산업과장, 물산진열관장, 순사징계위원회 예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8년 6월 23일 전라북도 도이사관 겸 내무부 지방과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39년 5월 27일 전라북도 임시국세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전라북도 도이사관 겸 내무부 지방과장 재직 시절에 일어난 중일 전쟁 당시 중국 각지에 파병된 일본군을 위문하는 한편 전라북도 내에서 위문보고회를 개최하는 등 일본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으며 1941년 1월 24일 광주세무감독국 사무관 겸 관세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9월 30일 충청남도 참여관 겸 도사무관, 산업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43년 12월 1일 충청남도 광공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광주세무감독국 사무관 재직 시절 징병제와 일본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글을 발표했으며 충청남도 광공부장 재직 시절 군수물자 증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발표했다.
1944년 11월 22일 전라남도 도사무관 겸 재무부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45년 광복 이전까지 받은 서위는 고등관 3등과 종5위였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도 참여관 부문과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관료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 1. 주요 관직
1927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졸업하고 1930년 같은 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31년부터 평안북도 내무부 산업과 속 및 지사관방 속으로 근무했고, 1933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및 사법과에 합격했다. 1934년 평안북도 운산군수, 1935년 평안북도 선천군수, 1937년 황해도 도이사관 겸 내무부 산업과장, 1938년 전라북도 도이사관 겸 내무부 지방과장을 역임했다. 중일 전쟁 당시 일본군 위문 및 위문보고회를 개최하는 등 일본의 침략 전쟁에 협력했고, 1940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1년 광주세무감독국 사무관 겸 관세부장, 1943년 충청남도 참여관 겸 도사무관, 산업부장, 광공부장, 1944년 전라남도 도사무관 겸 재무부장을 역임했으며, 광복 당시 고등관 3등과 종5위였다. 광복 후 1945년 전라남도 내무국장, 1947년 변호사로 선임된 뒤 대구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2. 2. 친일 행적
임문석은 1927년 3월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졸업했으며 1930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평안북도 내무부 산업과 속 및 평안북도 지사관방 속으로 근무했고, 1933년 11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및 사법과에 합격했다. 1934년 8월 28일 평안북도 운산군수, 1935년 11월 27일 평안북도 선천군수로 임명되었다. 1937년 7월 14일 황해도 도이사관 겸 내무부 산업과장, 물산진열관장, 순사징계위원회 예비위원으로, 1938년 6월 23일 전라북도 도이사관 겸 내무부 지방과장, 1939년 5월 27일 전라북도 임시국세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전라북도 도이사관 겸 내무부 지방과장으로 있던 중 중일 전쟁 당시 중국에 파병된 일본군을 위문하고 전라북도 내에서 위문보고회를 개최하는 등 일본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1년 1월 24일 광주세무감독국 사무관 겸 관세부장, 1943년 9월 30일 충청남도 참여관 겸 도사무관, 산업부장, 1943년 12월 1일 충청남도 광공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광주세무감독국 사무관으로 있을 때 징병제와 일본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글을, 충청남도 광공부장 시절에는 군수물자 증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발표했다.
1944년 11월 22일 전라남도 도사무관 겸 재무부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45년 광복 이전까지 고등관 3등과 종5위에 서위되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도 참여관 부문과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관료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3. 해방 이후 활동
친일파 708인 명단의 도 참여관 부문과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관료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된 것은 그의 일제 강점기 행적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를 보여준다.
3. 1. 정계 활동
1927년 3월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졸업했으며 1930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평안북도 내무부 산업과 속(屬, 1931년 ~ 1933년)과 평안북도 지사관방 속(屬, 1934년)으로 근무했고 1933년 11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및 사법과에 합격했다.
1934년 8월 28일 평안북도 운산군수, 1935년 11월 27일 평안북도 선천군수로 각각 임명되었으며 1937년 7월 14일 황해도 도이사관 겸 내무부 산업과장, 물산진열관장, 순사징계위원회 예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8년 6월 23일 전라북도 도이사관 겸 내무부 지방과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39년 5월 27일 전라북도 임시국세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전라북도 도이사관 겸 내무부 지방과장 재직 시절에 일어난 중일 전쟁 당시 중국 각지에 파병된 일본군을 위문하는 한편 전라북도 내에서 위문보고회를 개최하는 등 일본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으며 1941년 1월 24일 광주세무감독국 사무관 겸 관세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9월 30일 충청남도 참여관 겸 도사무관, 산업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43년 12월 1일 충청남도 광공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광주세무감독국 사무관 재직 시절 징병제와 일본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글을 발표했으며 충청남도 광공부장 재직 시절 군수물자 증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발표했다.
1944년 11월 22일 전라남도 도사무관 겸 재무부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45년 광복 이전까지 받은 서위는 고등관 3등과 종5위였다. 광복 이후인 1945년 전라남도 내무국장으로 임명되었고 1947년 변호사로 선임된 뒤부터 대구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1950년 민주국민당 경상북도 도당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52년 경북대학교 연합후원회 회장을 역임했다. 제4대와 제5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1966년 신한당 정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도 참여관 부문과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관료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3. 2. 기타 활동
1945년 광복 이후 전라남도 내무국장으로 임명되었고, 1947년 변호사로 선임된 뒤부터 대구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1950년 민주국민당 경상북도 도당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52년 경북대학교 연합후원회 회장을 역임했다. 제4대와 제5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1966년 신한당 정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도 참여관 부문과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관료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4. 평가
5. 역대 선거 결과
임문석은 1954년 제3대 총선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북 영천군 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13,036표(44.15%)를 얻어 2위로 낙선했다. 1958년 제4대 총선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경북 대구시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13,677표(38.44%)를 얻어 당선되었으나, 당선재결정으로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총선에서는 같은 선거구에서 20,750표(53.61%)를 득표하여 재선에 성공했다.
1963년 제6대 총선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경북 대구시 동구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11,388표(23.58%)를 얻어 2위로 낙선했다. 1967년 제7대 총선에서는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24,534표(41.65%)를 얻어 2위로 낙선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