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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녀 요크의 엘리자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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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로, 1466년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여러 차례 정략결혼 대상이 되었으나 무산되었고, 1483년 에드워드 4세 사후 동생 에드워드 5세가 즉위했지만, 숙부 리처드에 의해 런던 탑에 갇히고 결혼이 무효화되어 서자 신분이 되었다. 이후 헨리 튜더와 결혼하여 헨리 7세가 왕위에 오르도록 도왔고, 헨리 7세와 결혼하여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다. 헨리 7세와의 사이에서 아서, 마거릿, 헨리, 메리 등 4남 4녀를 두었으며, 헨리 7세는 엘리자베스의 결혼을 통해 왕위 계승권을 강화했다. 엘리자베스는 1503년 산욕으로 사망했으며, 튜더 왕조의 상징인 튜더 장미는 그녀와 헨리 7세의 결혼으로 잉글랜드 왕실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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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녀 요크의 엘리자베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영국 학교, 16세기 - 요크의 엘리자베스 (1465-1503) - RCIN 403447 - 왕실 컬렉션
요크의 엘리자베스 (1465-1503)
칭호잉글랜드의 왕비
재위 기간1486년 1월 18일 – 1503년 2월 11일
배우자yes
대관식1487년 11월 25일
출생일1466년 2월 11일
출생지미들섹스, 웨스트민스터 궁전, 잉글랜드
사망일1503년 2월 11일
사망지런던, 잉글랜드, 런던탑
배우자헨리 7세 (잉글랜드) (1486년 결혼)
자녀웨일스 공 아서
스코틀랜드의 여왕 마거릿
헨리 8세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튜더
프랑스의 여왕 메리
서머싯 공 에드먼드
가문요크 가문
아버지에드워드 4세 (잉글랜드)
어머니엘리자베스 우드빌
매장일1503년 2월 24일
매장지웨스트민스터 사원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서명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서명
왕비 정보
정배 칭호잉글랜드 왕비
재위 기간1486년 1월 18일 - 1503년 2월 11일
대관일1487년 11월 25일
출생일1466년 2월 11일
출생지잉글랜드, 웨스트민스터 궁전
사망일1503년 2월 11일
사망지잉글랜드, 런던탑
매장일1503년 2월 24일
매장지잉글랜드, 웨스트민스터 사원
배우자 1헨리 7세 (잉글랜드)
자녀아서
마거릿
헨리
메리
가문요크 가문
아버지에드워드 4세 (잉글랜드)
어머니엘리자베스 우드빌

2. 유년기

1466년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잉글랜드 왕국 국왕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우드빌 사이의 장녀이자 맏이로 태어났다.[46] 이름은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아버지의 고모인 서퍽 공작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따서 '엘리자베스'로 지어졌다. 그녀의 세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으며, 외할머니인 룩셈부르크의 자케타 베드포드 공작부인과 친할머니인 세실리 네빌 요크 공작부인이 후원했다.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자매들. 그녀는 왼쪽에서 첫 번째이다.


1469년, 세 살 때 존 네빌의 아들 조지 네빌 (베드퍼드 공작)과 약혼했다. 조지 네빌은 이 약혼을 위해 베드포드 공작 작위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존 네빌이 에드워드 4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면서 약혼은 취소되었다.

1475년, 아홉 살 때 프랑스루이 11세는 엘리자베스와 자신의 아들인 도팽 샤를 8세(훗날 샤를 8세)과의 결혼에 합의했다. 하지만 1482년 루이 11세가 약속을 어기면서 이 약혼 역시 파기되었다.

1477년, 엘리자베스는 열한 살의 나이에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 아버지의 고모 서퍽 공작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함께 가터 훈작사로 임명되었다.

3. 에드워드 5세의 누나

1483년 4월 9일, 아버지 에드워드 4세 국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엘리자베스의 삶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3] 남동생 에드워드 5세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아버지의 동생이자 엘리자베스의 숙부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훗날 리처드 3세)가 섭정 겸 보호자로 임명되었다.[3]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즉시 어린 조카들을 외가인 우드빌 가문, 특히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조치를 취했다. 그는 웨일스의 러들로(Ludlow)[49]에서 즉위식을 위해 런던으로 이동하던 에드워드 5세를 가로막아, 표면상으로는 보호를 명분으로 런던 탑에 가두었다. 에드워드 5세를 호위하던 외삼촌 앤서니 우드빌과 이복 오빠 리처드 그레이는 체포되어 폰테프랙트 성으로 보내졌다.[4]

상황이 급변하자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엘리자베스를 포함한 나머지 딸들과 어린 아들 요크 공작 리처드를 데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 내의 피신처(Sanctuary)로 피신했다. 그러나 글로스터 공작은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보처를 보내 요크 공작 리처드 역시 형인 에드워드 5세와 함께 지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런던 탑으로 데려갈 것을 요구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사실상 강요에 못 이겨 이를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두 달 뒤인 1483년 6월 22일, 에드워드 4세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 자체가 무효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기 전 이미 엘레노어 탤봇 부인과 혼인한 상태였다는 것이 이유였다. 의회는 이 주장을 받아들여 Titulus Regius|티툴루스 레기우스la(왕의 칭호)라는 법령을 통과시켰다.[50] 이 법령으로 인해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모두 사생아로 전락하여 왕위 계승권을 상실했다. 엘리자베스의 외삼촌 앤서니 우드빌과 이복 오빠 리처드 그레이는 6월 25일 글로스터 공작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4]

결국 왕위 계승권은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에게 돌아갔고, 그는 1483년 7월 6일 리처드 3세로 공식 즉위했다. 한편, 런던 탑에 갇혀 있던 어린 두 왕자,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작 리처드는 이후 종적을 감추었다. 곧이어 그들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국내외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이는 점차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5]

4. 리처드 3세의 조카

1483년 4월 9일,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4세 국왕이 예기치 않게 사망했다. 그녀의 남동생인 에드워드 5세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삼촌이자 아버지의 남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어린 조카의 섭정 겸 보호자로 임명되었다.[3] 글로스터 공작은 어린 조카들을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우드빌 가문으로부터 격리시키고자 했다.

글로스터 공작은 에드워드 5세가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러들로에서 런던으로 이동하는 것을 가로막고, 표면상 보호를 명목으로 런던 탑에 가두었다. 에드워드 5세를 호위하던 외삼촌 앤서니 우드빌과 이복 형제 리처드 그레이는 체포되어 폰테프랙트 성으로 보내졌다.[4]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어린 아들 리처드와 딸들을 데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피신했다. 글로스터 공작은 토마스 보처를 보내 리처드 공작 또한 형 에드워드 5세와 함께 지내도록 런던 탑으로 데려가게 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강요에 못 이겨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두 달 후인 1483년 6월 22일,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은 무효로 선언되었다.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할 당시 이미 엘레노어 탤봇 부인과 결혼한 상태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의회는 이를 지지하는 법안인 ''티툴루스 레기우스''(Titulus Regius, 왕의 칭호)를 발표했다. 이 조치로 에드워드 4세의 자녀들은 법적으로 서자가 되어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었고, 글로스터 공작이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았다. 엘리자베스의 외삼촌 앤서니 우드빌과 이복 형제 리처드 그레이는 6월 25일 글로스터 공작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4] 글로스터 공작은 1483년 7월 6일 리처드 3세로 즉위했고, 런던 탑에 갇혀 있던 에드워드 5세와 리처드 공작은 그 후 행방이 묘연해졌으며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5]

리처드 3세에게 밀려난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당시 랭커스터 왕가의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던 헨리 튜더의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다.[6] 헨리 튜더는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었지만,[7] 그의 증조부모인 곤트의 존과 캐서린 스윈퍼드의 후손은 왕위 계승에서 제외한다는 헨리 4세의 특허장 때문에 왕위 계승권 주장이 약했다.[7] 두 어머니는 헨리 튜더가 왕위를 차지하면 요크 가문의 상속녀인 엘리자베스와 결혼시켜 그의 약한 계승권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1483년 12월, 프랑스 의 대성당에서 헨리 튜더는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잉글랜드 침공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1484년 3월,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그녀의 딸들은 리처드 3세의 "잦은 간청과 끔찍한 위협"에 못 이겨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피난처에서 나왔다.[8] 리처드 3세는 그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감금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맹세했다.[9][10] 이후 리처드 3세의 왕비 앤 네빌이 사망하자, 리처드 3세가 조카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크로일랜드 연대기''에 따르면 리처드 3세는 이 불미스러운 소문을 강력히 부인해야 했다.[11] 앤 네빌이 죽은 직후, 리처드 3세는 엘리자베스를 셰리프 허튼 성으로 보내고, 포르투갈의 주앙 2세와 협상을 시작했다. 자신은 주앙 2세의 여동생 포르투갈의 조안 공주와 결혼하고,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사촌이자 미래의 왕인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와 결혼시키려는 계획이었다.[12]

1485년 8월 7일, 헨리 튜더와 그의 군대는 웨일스에 상륙했다. 8월 22일, 보즈워스 전투에서 헨리 튜더는 리처드 3세와 맞붙었다. 리처드 3세는 더 큰 군대를 가졌지만, 윌리엄 스탠리 경의 배신으로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했다. 이로써 리처드 3세는 전투에서 사망한 마지막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헨리 튜더는 정복권을 통해 헨리 7세로 즉위하며 튜더 왕조를 열었다.[13]

5. 잉글랜드 왕비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랭커스터 왕가의 헨리 튜더가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헨리 7세로 즉위하였다.[13] 헨리 7세의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는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미리 동맹을 맺고, 헨리가 왕위에 오르면 엘리자베스와 결혼시키기로 약속한 상태였다.[51] 이는 요크 왕가의 강력한 왕위 계승권을 가진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통해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을 통합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헨리 7세는 정복권을 통해 스스로 왕위에 올랐음을 강조하고자 했고, 요크 가문의 상속녀와의 결혼을 통해 왕위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15] 따라서 그는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기 전인 1485년 10월 30일에 먼저 대관식을 치르고 왕위에 올랐다. 이후 헨리 7세는 에드워드 4세의 자녀들을 서자에서 적자로 되돌리는 ''티툴루스 레기우스(Titulus Regius)''를 폐지하여 엘리자베스의 정통성을 인정하였다.

교황의 결혼 승인을 받은 후,[18] 1486년 1월 18일,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같은 해 9월 장남 아서가 태어났고, 엘리자베스는 이듬해인 1487년 11월 25일에 정식으로 왕비 대관식을 치렀다. 이후 엘리자베스는 마거릿 튜더, 훗날 왕위에 오르는 헨리 8세, 메리 등 여러 자녀를 낳았다.

비록 정략적인 결혼이었지만, 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의 결혼 생활은 순탄했으며 서로 존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비로서 엘리자베스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않았으나, 주변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음악과 춤, 주사위 놀이를 즐겼으며 그레이하운드를 길렀다.[25]

5. 1. 헨리 7세와의 관계

에드워드 4세의 장녀로서 남자 형제들이 모두 사망한 상태에서 엘리자베스는 강력한 왕위 계승권자였으나, 여왕으로서 통치권을 행사하지는 않았다.[19] 한편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랭커스터 왕가 출신으로 왕위에 가장 가까웠던 헨리 튜더의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와 비밀리에 연락하여, 헨리 튜더가 왕위에 오르면 엘리자베스와 결혼시킨다는 약속을 맺었다.[51] 1483년 12월, 프랑스 의 대성당에서 헨리 튜더는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겠다는 선서를 하고 왕위 찬탈을 위한 침략을 준비하였다.

헨리 7세는 자신의 통치를 안정시키고 다른 요크 왕가 생존자들의 왕위 계승 주장을 약화시키기 위해 엘리자베스와 결혼해야 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14] 하지만 그는 곤트의 존의 후손이라는 희박한 근거로 스스로 왕위를 주장하며, 요크 가문의 상속녀와의 결혼이 아닌 정복을 통해 자신의 권리로 왕위에 오르려 했다. 그는 권력을 나눌 생각이 없었기에,[15]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기 전인 1485년 10월 30일에 먼저 대관식을 치르고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헨리 7세는 ''티툴루스 레기우스(Titulus Regius)''를 폐지하여 에드워드 4세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을 다시 합법화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적자로 인정했으며, 엘리자베스의 남동생 에드워드 5세를 선왕으로 인정했다. 이는 엘리자베스가 가진 정통성을 확고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 헨리와 엘리자베스는 4촌 관계였기 때문에[16][17] 결혼을 위해 교황의 관면이 필요했고, 1486년 3월 교황 인노첸시오 8세로부터 결혼을 승인하는 교황 칙서를 받았다.[18] 이보다 앞서 1486년 1월 18일,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부어치어 추기경의 주례로 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8개월 후인 1486년 9월 20일, 첫 아들 아서가 태어났다. 엘리자베스는 이듬해인 1487년 11월 25일에 왕비로 즉위했다. 이후 부부는 마거릿 튜더, 헨리, 메리 등 여러 자녀를 더 낳았으나, 성인으로 자란 것은 네 명뿐이었다.

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와 그들의 자녀들


1667년 찰스 2세가 의뢰한 1536–37년 한스 홀바인의 화이트홀 벽화 유화 복사본. 왼쪽부터 헨리 8세, 헨리 7세, 요크의 엘리자베스, 제인 시모어


비록 정략결혼으로 시작했지만, 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의 결혼 생활은 성공적이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에게 깊은 애정과 존경심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토머스 펜은 헨리 7세의 전기에서 "실용주의에 기반했지만, 헨리와 엘리자베스의 결혼은 지난 18년 동안의 불확실성과 격변 속에서도 꽃을 피웠다. 이것은 '충실한 사랑', 상호적인 매력, 애정, 존경의 결혼이었고, 왕은 여기에서 큰 힘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기록에 따르면 헨리 7세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자주 선물을 샀으며, 값비싼 옷감을 사는 데 많은 돈을 썼다.[24] 또한 엘리자베스가 추천한 인물을 주교로 임명하는 등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왕비로서 엘리자베스는 시어머니인 마거릿 보퍼트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힘은 거의 없었다.[52] 하지만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온화하고 친절하며 관대하게 대했다고 전해진다. 엘리자베스는 매우 독실했으며 자선 활동에 많은 돈을 기부하여 여러 번 빚을 지기도 했다.[21] 그녀는 또한 윌리엄 캑스턴과 같은 인쇄업자를 후원했으며, 책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엘리자베스는 음악과 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주사위 놀이를 즐겼고, 그레이하운드를 길렀다.[25] 그녀는 헨리 8세를 포함한 어린 자녀들의 교육을 직접 챙겼으며, 1500년에는 남편과 함께 칼레를 방문하여 펠리페 1세를 만나는 등 외교 활동에도 참여했다. 또한 자녀들의 결혼을 위해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 여왕과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

엘리자베스가 잉글랜드 여왕으로 재위했을 때의 문장


1501년 11월, 15세의 장남 아서 왕세자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하여 웨일스 공의 전통적인 거주지인 러들로 성으로 떠났다. 그러나 결혼 5개월 만인 1502년 4월, 아서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아들의 죽음은 헨리 7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왕조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슬픔에 잠겼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을 위로하며 "당신도 어머니의 외아들이었지만 왕위에 오르지 않았느냐"며, "신께서 우리에게 아직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남겨주셨고, 우리는 아직 젊으니 더 많은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엘리자베스 역시 깊은 슬픔에 빠졌고, 이를 본 시종들이 헨리 7세를 불러와 서로를 위로하게 했다.[26]

이후 엘리자베스는 다시 임신하여 1503년 2월 2일 막내딸 캐서린을 낳았지만, 공주는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사망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자신도 출산 후유증인 산욕열[53]로 인해 자신의 생일인 2월 11일에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의 죽음에 슬퍼하는 헨리 7세와 아이들. 왼쪽 위가 어린 헨리 8세. 헨리 7세는 6주 동안 은둔했다.


헨리 7세는 아내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도 자신을 방해할 수 없는 은둔처로 몰래 들어갔다"고 한다. 평소 검소하기로 유명했던 헨리 7세였지만, 엘리자베스를 위해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그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레이디 채플에 안장되었다. 헨리 7세는 이후 나폴리 왕의 미망인 조안나, 카스티야의 후아나, 사보이 공작의 미망인 마가렛 등과의 재혼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결국 재혼하지 않고 1509년 사망했다. 그는 엘리자베스 곁에 함께 묻혔다. 엘리자베스의 사망 이후 헨리 7세의 인색함과 편집증적인 면모가 더욱 심해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9세기 엘리자베스의 무덤 발굴 과정에서, 그녀의 납 관을 덮었던 나무 상자가 후손인 제임스 1세의 묘 자리를 만들기 위해 치워진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6. 말년

1501년 장남 아서(당시 15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한 후, 왕세자의 거주지를 밖에 두는 전통에 따라 러들로 캐슬로 거처를 옮겼으나 5개월 뒤인 1502년 4월 사망했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헨리 7세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는 아들을 애도하는 동시에 왕조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슬픔에 잠겼다. 엘리자베스는 헨리 7세 역시 외동아들이었지만 살아남아 왕이 되었고, 부부에게는 아직 아들(헨리 8세)과 두 딸이 남아 있으며, 둘 다 아직 젊으니 아이를 더 낳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26] 그러나 자신의 침실로 돌아온 엘리자베스 역시 깊은 슬픔에 빠졌고, 이를 본 시종들이 헨리 7세를 부르자 이번에는 그가 엘리자베스를 위로했다.[26]

1502년, 엘리자베스는 다시 임신하여 런던 타워에서 출산을 준비했다. 그녀의 자수 기술자인 로비넷은 구름과 장미로 장식된 새로운 호화로운 침대를 만들어주었다.[27] 1503년 2월 2일, 그녀는 막내딸 캐서린 공주를 낳았으나, 아기는 며칠 만에 사망했다.[1] 엘리자베스 또한 산후 감염으로 인해 자신의 37번째 생일인 2월 11일에 세상을 떠났다.[53]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의 죽음에 깊이 슬퍼하며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 기록에 따르면, 엘리자베스의 죽음은 남편 헨리 7세의 "마음을 산산조각" 내고 "그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헨리 7세가 "은밀히 외딴 곳으로 떠났으며 아무도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고 전한다.[28] 엘리자베스의 죽음 직후 헨리 7세가 병에 걸려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 외에는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가 허약함을 보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채색된 나무 장례 조각상 (옷 없음), 1503년, 웨스트민스터 사원


2012년 웨일스 국립 도서관에서 재발견된, 한때 헨리 7세의 소유였던 채색 필사본 ''보스 파시날'' (Vaux Passional|보스 파시날la)은 엘리자베스 사후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다.[29] 헨리 7세는 슬픈 표정으로 애도복을 입고 책을 받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배경에는 아버지 뒤로 검은 베일을 쓴 딸 메리와 마가렛이 서 있다. 당시 11세였던 헨리 왕자는 어머니의 빈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검소하다고 알려진 헨리 7세였지만, 엘리자베스를 위해 화려한 장례식을 열었다. 그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레이디 채플에 안장되었다. 헨리 7세는 스페인과의 동맹을 갱신하기 위해 나폴리의 조안나, 카스티야의 후아나, 사보이의 마가렛 등과의 재혼을 고려하기도 했으나,[30] 결국 1509년 독신으로 사망했다.[31] 그는 엘리자베스의 기일마다 매년 진혼 미사를 드리고, 종을 치며, 그녀를 기리기 위해 100개의 촛불을 켜도록 명령했다. 또한 새해마다 그녀의 음유시인들을 계속 고용했다. 엘리자베스의 죽음 이후 헨리 7세의 인색함은 더욱 심해졌다는 평가도 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엘리자베스 요크와 헨리 7세의 조각상 묘.


헨리 7세는 엘리자베스 곁에 묻혔다. 19세기에 그녀의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납으로 된 관을 덮었던 나무 상자가 후손인 제임스 6세와 1세를 묻을 공간을 만들기 위해 제거된 것으로 밝혀졌다.[33]

비록 정략결혼으로 시작했지만, 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의 결혼 생활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에 대한 애정과 존경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토마스 펜은 헨리 7세의 전기에서 "실용주의에 기반했지만, 헨리와 엘리자베스의 결혼은 지난 18년 동안의 불확실성과 격변 속에서도 꽃을 피웠다. 이것은 '충실한 사랑', 상호적인 매력, 애정, 존경의 결혼이었고, 왕은 여기에서 큰 힘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7. 자녀

엘리자베스는 헨리 7세와의 사이에서 4남 4녀, 총 8명의 자녀를 두었으며[47], 이 중 마거릿, 헨리, 메리 3명이 성년까지 생존했다. 이후 잉글랜드의 군주는 모두 엘리자베스의 혈통을 이은 자손이다.

사진이름생년월일사망년월일(나이)비고
아서 튜더
아서1486년 9월 20일1502년 4월 2일(15세)콘월 공작, 웨일스 공.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했으나 자녀 없이 사망.
마거릿 튜더
마거릿1489년 11월 28일1541년 10월 18일(51세)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됨. 사별 후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재혼(이혼), 제1대 메스번 영주 헨리 스튜어트와 재혼. 잉글랜드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의 증조모.
헨리 8세
헨리1491년 6월 28일1547년 1월 28일(55세)처음에는 요크 공작. 형 아서 사망 후 왕세자가 되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국왕 즉위 (헨리 8세).
아라곤의 캐서린 (이혼), 앤 불린 (처형), 제인 시모어 (사별), 클레페의 앤 (이혼), 캐서린 하워드 (처형), 캐서린 파와 차례로 결혼.
엘리자베스1492년 7월 2일1495년 9월 14일(3세)요절.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성 에드워드 예배당에 매장.[34]
메리 튜더
메리1496년 3월 18일1533년 6월 25일(37세)프랑스 왕 루이 12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됨. 사별 후 찰스 브랜던과 재혼. 제인 그레이의 할머니.
에드워드1498년1499년요절. 일부 기록에는 에드먼드와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하나, 별도 인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에드먼드1499년 2월 21일1500년 6월 19일서머셋 공작. 요절.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34]
캐서린1503년 2월 2일1503년 2월 10일[1]요절. 어머니 엘리자베스도 이 아이를 낳은 후 산후 감염으로 사망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34]


8. 유산 및 평가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모든 내용을 다루고 있어 중복을 피하기 위해 내용을 작성하지 않음)

8. 1. 외모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당대 미인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뚜렷한 이목구비와 흰 피부를 가졌다.[11] 이러한 외모는 아버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와 당시 영국 제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여겨진다.[11] 또한 그녀는 약 168cm (5피트 6인치)의 키로 동시대 대부분의 여성들보다 신장이 컸는데, 이는 아버지의 키를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38]

8. 2. 유산

튜더 왕조의 상징인 튜더 장미는 1486년 엘리자베스가 헨리 7세와 결혼하면서 잉글랜드의 왕실 상징이 되었다. 그녀의 요크 백장미는 남편의 랭커스터 적장미와 결합하여 오늘날까지도 면류관 없이 잉글랜드의 꽃 문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헨리 8세는 실크 커튼과 함께 전시된 엘리자베스의 초상화 버전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헨리 8세의 재산 목록에는 "노란색과 흰색 사르세넷이 함께 묶인 커튼이 있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그림이 있는 테이블"로 묘사되어 있다. 이 초상화는 메이나르트 웨윅이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36] 또한 피에트로 토리자노는 엘리자베스와 헨리 7세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기념물을 위한 청동 조각상을 만들었다.[37]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당대에 미인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키가 컸으며 흰 피부를 가졌다. 이는 아버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와, 한때 영국 제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여겨졌던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로부터 많은 특징을 물려받은 것이다.[11] 그녀는 동시대 대부분의 여성들보다 키가 컸는데, 이는 아버지의 키를 물려받은 것으로 보이며, 키는 약 1.52m였다.[38]

8. 3.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 그림자 탑 (1972): 노르마 웨스트가 연기함.
  • '''리처드 3세''' (1995): 케이트 스테븐슨-페인이 연기함.
  • 하얀 여왕 (2013): 프레야 메이버가 연기함.[40]
  • 하얀 공주 (2017): 조디 코머가 연기함.[41]
  • 스페인 공주 (2019): 알렉산드라 모엔이 연기함.[42]
  • 화이트 프린세스 - 요크의 엘리자베스 이야기: 엘리자베스를 중심으로 다룬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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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웹사이트 Pontefract Castle – 15th Century https://pontefractsa[...] 2023-01-13
[5] 웹사이트 BBC – History – Historic Figures: The Princes in the Tower https://www.bbc.co.u[...] BBC 2019-12-20
[6] 서적 The Anglica Historia of Polydore Vergil A.D. 1485–1537 1950
[7] 문서 Genealogical Tables 1988
[8] 서적 Elizabeth of York Palgrave Macmillan 2011
[9] 서적 Elizabeth of York Palgrave Macmillan 2011
[10] 서적 Richard III: a ruler and his reputation Bloomsbury 2017
[11] 서적 The rise of the Tudors: The family That Changed English History St. Martin's Griffin 2015-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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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웹사이트 Henry VII http://tudorhistory.[...] 201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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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뉴스 The White Queen, a new ten-part drama for BBC One https://www.bbc.com/[...] BBC 201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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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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