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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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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 4세는 랭커스터 왕가의 첫 번째 왕으로, 1399년부터 1413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그는 존 개런트와 블랑슈 드 랭커스터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리처드 2세의 사촌이었다. 헨리 4세는 리처드 2세의 통치에 반기를 들고 왕위를 찬탈하여 랭커스터 왕조를 열었지만, 재위 기간 동안 잦은 반란과 암살 시도에 시달렸다. 그는 스코틀랜드,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웨일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힘썼다.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1413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사망했다. 헨리 4세의 아들 헨리 5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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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4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헨리 4세의 초상화
1402년경의 채색 삽화
이름헨리 4세
로마자 표기Henry IV
다른 이름헨리 볼링브로크
출생일1367년 4월경
출생지잉글랜드 링컨셔 볼링브로크 성
사망일1413년 3월 20일 (향년 45세)
사망지잉글랜드 웨스트민스터 예루살렘 회의실
매장지잉글랜드 켄트 캔터베리 대성당
헨리 4세 서명
헨리 4세 서명
통치
왕위잉글랜드 국왕
재위 기간1399년 9월 30일 ~ 1413년 3월 20일
대관식1399년 10월 13일
선임 국왕리처드 2세
후임 국왕헨리 5세
작위
랭커스터 공작1399년
노샘프턴 백작1384년 ~ 1399년
아키텐 공작1399년 ~ 1400년
잉글랜드 최고 궁내경1399년
가문
왕가랭커스터 가문
아버지존 오브 곤트
어머니블랑슈 오브 랭커스터
결혼 및 자녀
배우자메리 드 보헌 (1381년 결혼, 1394년 6월 4일 사망)
조앤 오브 나바르 (1403년 2월 7일 결혼)
자녀헨리 5세
토머스 오브 랭커스터
존 오브 랭커스터
험프리 오브 랭커스터
블랑쉬 오브 잉글랜드
필리파 오브 잉글랜드

2. 초기 생애

헨리는 링컨셔의 불링브루크 성(Bolingbroke Castle)에서 존 개런트(John of Gaunt)와 블랑슈 드 랭커스터(Blanche of Lancaster) 사이에서 태어났다.[10] 그의 별명인 "불링브루크"는 그의 출생지에서 유래했다. 개런트는 에드워드 3세(King Edward III)의 셋째 아들이었고, 블랑슈는 부유한 왕실 정치인이자 귀족인 랭커스터 공작 헨리(Henry, Duke of Lancaster)의 딸이었다.

헨리의 누이들은 포르투갈 왕비 필리파(Philippa, Queen of Portugal)와 엑서터 공작 부인 엘리자베스(Elizabeth, Duchess of Exeter)였다. 그의 이복 여동생 카스티야 왕비 캐서린(Katherine, Queen of Castile)은 개런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콘스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헨리는 또한 원래 누이들의 가정교사였고, 이후 아버지의 오랜 애인이자 세 번째 부인이 된 캐서린 스윈퍼드(Katherine Swynford) 사이에서 태어난 네 명의 이복 형제자매를 두었다. 이들은 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Auvergne-Rhône-Alpes)의 보포르 성(Château de Beaufort)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보포르라는 성을 받았다.

헨리와 계모 캐서린 스윈퍼드의 관계는 좋았지만, 보포르 가문과의 관계는 다양했다. 젊었을 때는 모두와 가까웠던 것 같지만, 1406년 이후 헨리, 토마스 보포르와의 경쟁 관계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 네빌 남작 랄프(Ralph Neville, 4th Baron Neville)은 헨리의 이복 누이인 조안 보포르와 결혼했다. 네빌은 헨리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고, 헨리가 리처드 2세가 존에게 부여한 후작(marquess) 작위를 취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큰 이복형인 존 보포르도 마찬가지였다. 캐서린 스윈퍼드의 첫 번째 결혼으로 태어난 아들 토마스 스윈퍼드(Thomas Swynford)는 리처드 2세가 사망했다고 알려진 폰테프랙트 성(Pontefract Castle)의 성주였다.

2. 1. 출생과 가족 배경

헨리는 링컨셔의 불링브루크 성(Bolingbroke Castle)에서 존 개런트(John of Gaunt)와 블랑슈 드 랭커스터(Blanche of Lancaster) 사이에서 태어났다.[10] 그의 칭호인 "불링브루크"는 그의 출생지에서 유래되었다. 개런트는 에드워드 3세(King Edward III)의 세 번째 아들이었고, 블랑슈는 부유한 왕실 정치가이자 귀족인 랭커스터 공작 헨리(Henry, Duke of Lancaster)의 딸이었다.

헨리의 누이들은 포르투갈 왕비 필리파(Philippa, Queen of Portugal)와 엑서터 공작 부인 엘리자베스(Elizabeth, Duchess of Exeter)였다. 그의 이복 여동생 카스티야 왕비 캐서린(Katherine, Queen of Castile)은 개런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콘스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헨리는 또한 원래 그의 누이들의 가정교사였고, 이후 아버지의 오랜 애인이자 세 번째 부인이 된 캐서린 스윈퍼드(Katherine Swynford) 사이에서 태어난 네 명의 이복 형제자매를 두었다. 이들은 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Auvergne-Rhône-Alpes)의 보포르 성(Château de Beaufort)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보포르 성을 성씨로 받았다.

헨리와 그의 계모 캐서린 스윈퍼드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지만, 보포르 가문과의 관계는 다양했다. 젊었을 때 그는 그들 모두와 가까웠던 것 같지만, 1406년 이후 헨리와 토마스 보포르와의 라이벌 관계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다. 네빌 남작 랄프(Ralph Neville, 4th Baron Neville)은 헨리의 이복 누이인 조안 보포르와 결혼했다. 네빌은 헨리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고, 헨리가 리처드 2세가 존에게 부여한 후작(marquess) 작위를 취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큰 이복형인 존 보포르도 마찬가지였다. 캐서린 스윈퍼드의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인 토마스 스윈퍼드(Thomas Swynford)는 리처드 2세가 사망했다고 알려진 폰테프랙트 성(Pontefract Castle)의 성주였다.

1380년, 헨리는 제7대 헤레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헌의 차녀 메리 드 보헌(Mary de Bohun)과 결혼했다. 메리의 언니 엘레오노르는 헨리의 삼촌인 글로스터 공 토마스 오브 우드스톡과 결혼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친척이자 동시에 사돈 관계가 되었다. 메리는 1394년에 사망했으므로, 왕비가 되지는 못했다.

헨리 4세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1. 잉글랜드의 헨리 4세
2. 랭커스터 공작 존 고트
3. 랭커스터의 블랑슈
4.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12]
5. 헤노의 필리파[12]
6. 랭커스터 공작 헨리 그로스몽[13]
7. 보몽의 이사벨[13]
8.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14]
9. 프랑스의 이사벨[14]
10. 헤노 백작 빌헬름 1세[15]
11. 헤노 백작 부인 잔 드 발루아[15]
12. 랭커스터 백작 헨리 3세[16]
13. 모드 쇼워스[16]
14. 뷰캐넌 백작 헨리 드 보몽 4세[17]
15. 뷰캐넌 백작 부인 앨리스 코민 4세[17]


2. 2. 메리 드 보헌과의 결혼

1380년, 제7대 헤레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헌의 차녀 메리 드 보헌과 결혼했다.[21] 메리의 언니 엘레오노르는 헨리의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 토마스 오브 우드스톡과 결혼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친척이자 동시에 사돈 관계였다. 메리는 1394년에 사망했으므로, 왕비가 되지는 못했다.[21]

정확한 결혼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헨리 4세의 아버지인 존 오브 곤트가 1380년 6월에 구입한 결혼 허가서가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다.[18] 결혼식은 1381년 2월 5일 메리의 가족 집인 에식스주 로치포드 홀에서 거행된 것으로 보인다.[18]

당시 연대기 작가인 장 프로이사르는 메리의 언니인 엘리너 드 보헌이 플레시 성에서 메리를 납치하여 아룬델 성에 감금하고 수녀로 만들려 했다고 기록했다. 엘리너는 보헌 가문 상속 재산 중 메리의 몫을 장악하거나, 남편인 글로스터 공작 토마스가 장악하도록 하려는 의도였다.[18]

헨리 4세와 메리 드 보헌 사이에는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18]

이름문장설명
잉글랜드의 헨리 5세 (1386–1422), 장남--헨리 4세의 문장: 프랑스 현대식과 플랜태저넷 분기
클래런스 공작 토마스 (1387–1421), 차남, 서머싯 백작 존 보퍼의 미망인이자 켄트 백작 토마스 홀랜드의 딸인 마가렛 홀랜드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헨리 4세의 문장에 3개의 점으로 된 라벨, 각각 3개의 담비 반점이 있고, 붉은색의 칸톤이 있다는 차이를 나타내는 문장
베드퍼드 공작 존 (1389–1435), 셋째 아들, 두 번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첫 번째 부인은 자녀 없이 사망한 용감한 존의 딸인 부르고뉴의 앤(사망 1432년)이었고, 두 번째 부인은 룩셈부르크의 자케타였다.
헨리 4세의 문장에 담비와 프랑스의 5개 점으로 된 라벨이 차이를 나타내는 문장으로 추가되었다.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 (1390–1447), 넷째 아들, 두 번 결혼했지만 생존한 적법한 자녀는 없었다. 첫 번째 부인은 헤이나우트 백작 윌리엄 6세의 딸인 헤이나우트와 홀란드 백작부인 자클린(사망 1436년)이었다. 이 결혼을 통해 글로스터는 "홀란드 백작, 자일랜드와 헤이나우트" 작위를 얻었다. 두 번째 부인은 그의 정부인 엘리너 콥햄이었다.
헨리 4세의 문장에 은색 테두리가 차이를 나타내는 문장으로 추가되었다.
잉글랜드의 블랑슈 (1392–1409) 1402년 팔라티나 선제후 루이 3세와 결혼||
잉글랜드의 필리파 (1394–1430) 1406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왕인 에릭 포메라니아와 결혼||



헨리 4세는 첫 번째 결혼에서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는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요소였다. 반면 리처드 2세는 자녀가 없었고, 리처드의 예비 상속인인 에드먼드 모티머는 겨우 7살이었다. 헨리 4세의 여섯 자녀 중 적통 자녀를 낳아 성년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헨리 5세와 블랑슈뿐이었는데, 블랑슈의 아들 루퍼트는 20세에 사망할 때까지 팔라티나 선제후령의 상속인이었다. 그의 다른 세 아들은 모두 사생아를 두었다. 헨리 4세의 남성 랭커스터 가계는 랭커스터와 요크 가문 사이의 장미 전쟁 중인 1471년, 그의 손자인 헨리 6세와 헨리 6세의 아들인 웨일스 공 에드워드의 죽음으로 끝났다.

3. 리처드 2세와의 관계 및 왕위 찬탈

1399년, 영적 및 세속 귀족들의 호위를 받는 헨리 볼링브룩이 왕위를 주장하는 모습. 당대 사본, 영국 도서관, 해럴리안 컬렉션


1397년, 리처드 2세가 글로스터 공 등 탄핵파 귀족을 추방·처형할 때, 헨리는 예외적으로 헤리퍼드 공작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이듬해 1398년, 노퍽 공작 토마스 모브레이와의 다툼을 꾸중받아 갑자기 추방당했다. 프랑스 파리로 추방된 헨리는 상속권을 박탈당했고, 1399년 2월 아버지가 사망하여 남은 랭커스터 공작령도 몰수되었다.

같은 해 5월,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 원정을 떠나 잉글랜드를 비운 틈을 타 7월 4일에 잉글랜드에 상륙했다.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핫스퍼 부자,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 등 북부 귀족들의 협력을 얻어 8월에는 귀국 중인 리처드 2세를 웨일스 국경에서 패배시키고 체포했다. 9월 30일, 의회는 리처드 2세의 폐위와 헨리의 왕위 계승을 결정했고, 헨리는 헨리 4세로 즉위하여 랭커스터 왕조를 열었다(리처드 2세는 이듬해 1400년 2월 감옥에서 사망).[21]

3. 1. 리처드 2세와의 갈등

헨리는 아버지와 달리 리처드 2세와 일관성 없는 관계를 맺었다. 사촌이자 어린 시절 친구였던 두 사람은 1377년 함께 가터 훈장 기사단에 입단했지만, 헨리는 1387년 왕에 대항하는 반역 귀족들의 반란에 참여했다. 권력을 되찾은 리처드는 다른 반역 귀족들을 처형하거나 추방했음에도 불구하고 헨리를 처벌하지 않았다. 사실 리처드는 헨리를 더비 백작에서 헤리퍼드 공작으로 격상시켰다.

1380년, 제7대 헤레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헌의 차녀 메리 드 보헌과 결혼했다. 메리의 언니 엘레오노르는 헨리의 삼촌인 글로스터 공 토마스 오브 우드스톡과 결혼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친척이자 동시에 사돈 관계가 되었다. 메리는 1394년에 사망했으므로, 왕비가 되지는 못했다.

사촌인 리처드 2세와는 대립 관계에 있었으며, 글로스터 공 등과 함께 탄핵파 귀족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1388년 무자비 의회에서 국왕의 측근 추방에 관여했다. 직후 아버지가 탄핵파 귀족과 리처드 2세 양측을 중재했기 때문에 사태는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고, 헨리는 1390년부터 1392년까지 튜턴 기사단리투아니아 원정(리투아니아 내전(1389년-1392년) 참전)에 참여했다.[20]

헨리는 1390년 한 해 동안 튜턴 기사단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인 빌뉴스를 공격하는 실패한 공성전을 지원하며 70~80명의 가신 기사들과 함께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포로로 잡힌 리투아니아 여성과 어린이들을 사서 쾨니히스베르크로 데려와 개종시켰는데, 당시 리투아니아인들은 이미 10년 전부터 폴란드 사제들에 의해 세례를 받았었다.

1392년 헨리가 리투아니아로 두 번째 원정을 떠난 것은 기사단이 이러한 외국인 십자군으로부터 얻는 재정적 이익을 보여준다. 그의 소규모 군대는 100명이 넘는 병력으로, 장궁 궁수와 6명의 음유시인을 포함했으며, 랭커스터 가문의 재정에는 4360GBP가 들었다. 헨리와 그의 영국 십자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년 동안 빌뉴스를 공격하는 것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1392년에서 1393년 사이에 헨리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 성묘 교회와 올리브 산에서 예물을 바쳤다. 나중에 그는 "예루살렘을 이교도로부터 해방시킬" 십자군을 이끌겠다고 서약했지만, 그 전에 사망했다.

헨리와 리처드의 관계는 두 번째 위기를 맞았다. 1398년 노퍽 공작 토마스 드 모브레이가 리처드의 통치에 대해 한 발언이 헨리에 의해 반역으로 해석되어 왕에게 보고되었다. 두 공작은 (리처드에 의해 요구된) 명예의 결투코번트리에 있는 칼루돈 성 근처 고스퍼드 그린에서 벌이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결투가 시작되기 전에 리처드는 더 이상의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헨리를 왕국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했지만 (헨리의 아버지인 존 오브 곤트의 승인을 받았지만) 그가 망

3. 2. 추방과 귀환

헨리는 1380년 제7대 헤레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헌의 차녀 메리 드 보헌과 결혼했다. 메리의 언니 엘레오노르는 헨리의 삼촌인 글로스터 공 토머스 오브 우드스톡과 결혼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친척이자 동시에 사돈 관계였다. 메리는 1394년에 사망하여 왕비가 되지는 못했다.

사촌인 리처드 2세와는 대립 관계였으며, 글로스터 공 등과 함께 탄핵파 귀족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1388년 무자비 의회에서 국왕의 측근 추방에 관여했다. 직후 아버지가 탄핵파 귀족과 리처드 2세 양측을 중재했기 때문에 사태는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고, 헨리는 1390년부터 1392년까지 독일 기사단리투아니아 원정(리투아니아 내전(1389년-1392년) 참전)에 참여했다.[20]

1397년, 리처드 2세가 복수를 꾀해 글로스터 공 등 탄핵파 귀족을 추방·처형했을 때, 헨리는 예외적으로 헤레퍼드 공작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이듬해 1398년, 리처드 2세에게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와의 다툼을 꾸중받아 갑자기 추방당했다. 프랑스 파리로 추방된 헨리는 상속권을 박탈당했고, 이듬해 1399년 2월 아버지가 사망하여 남은 랭커스터 공작령도 몰수되었다.

같은 해 5월,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 원정을 떠나 잉글랜드를 비운 틈을 타 7월 4일에 잉글랜드에 상륙했다.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핫스퍼 부자, 그리고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 등 북부 귀족들의 협력을 얻어 8월에는 귀국 중인 리처드 2세를 웨일스 국경에서 패배시키고 체포했다. 그리고 9월 30일, 의회는 리처드 2세의 폐위와 헨리의 왕위 계승을 결정했고, 헨리는 헨리 4세로 즉위하여 랭커스터 왕조를 열었다(리처드 2세는 이듬해 1400년 2월 감옥에서 사망).[21]

4. 통치 기간

15세기 장 프로이사르의 『연대기』 사본에 나오는 잉글랜드의 헨리 4세의 대관식


헨리 4세는 의회와 자주 상의했지만, 특히 교회 문제에 있어서는 의원들과 종종 갈등을 겪었다. 1401년, 토머스 아룬델은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롤라드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했다.[1] 헨리 4세는 성직자들에게 이단을 해결하고 책임자들에게 벌을 줄 것을 요청했고,[2] 공의회와 하원은 헨리 4세에게 롤라드파에 대한 조치를 취할 것을 청원했다.[3] 이에 헨리 4세는 1401년 의회에서 『De heretico comburendo』 제정을 이끌어냈는데, 이는 롤라드파 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조치였다.[4] 1404년과 1410년 의회는 교회 토지 몰수를 제안했지만, 지지를 얻지 못했다.[5]

1406년, 잉글랜드 해적들은 프랑스로 향하던 11세의 미래 스코틀랜드제임스 1세를 플램버러 헤드 해안에서 납치했다.[1] 제임스는 헨리 4세에게 넘겨졌고, 헨리 4세가 죽을 때까지 포로로 잡혀 있었다.[2] 당시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내전으로 분열된 상태였고 제임스의 안전을 고려하면 무모한 행동을 할 수 없었기에 잉글랜드에 대한 위협은 되지 못했다.[3]

즉위 초, 헨리 4세는 1400년 12월부터 1401년 2월까지 엘섬 궁전에서 영국을 방문한 유일한 비잔티움 황제인 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고스를 환영했고, 그의 명예를 위해 기사 결투가 열리기도 했다. 헨리 4세는 떠나는 마누엘 2세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것을 돕기 위해 금전적 지원을 했다.[4]

백년 전쟁 휴전 중, 헨리 4세는 프랑스와의 외교에서 왕세자와 대립했다. 프랑스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헨리 4세는 군사 개입에 신중했지만 왕세자는 북부 프랑스 진출을 주장했다. 1412년, 헨리 4세는 왕세자를 비롯한 주전파를 토마스 등으로 교체했고, 부자간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악화되었으나 곧 화해했다.[5]

1403년, 헨리 4세는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의 미망인 잔느 드 나바르와 재혼하여 브르타뉴 공국 개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브르타뉴 귀족 올리비에 드 클리송의 계략으로 잔느와 전 남편 사이의 아들들은 프랑스 왕실에 맡겨졌고, 헨리 4세의 계획은 실패했다. 잔느와 헨리 4세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6]

4. 1. 잦은 반란과 음모

헨리 4세는 재위 기간 대부분을 음모, 반란, 암살 시도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데 보냈다. 헨리 4세가 군주로서 처음 맞닥뜨린 주요 문제는 폐위된 리처드 2세를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1400년 1월 초 암살 음모가 실패한 후, 리처드 2세는 33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사망했는데, 아마도 헨리 4세의 명령에 따라 굶주림으로 죽었을 것이다.[1] 일부 연대기 작가들은 낙담한 리처드 2세가 스스로 굶어 죽었다고 주장했다.[2] 이는 리처드 2세의 성격에 대해 알려진 것과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의회 기록에 따르면 폐위된 국왕의 시신을 운반하기 위한 준비가 2월 17일 초에 이루어졌지만, 여러 연대기에서 언급한 대로 그가 2월 14일에 사망하지 않았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 그의 유골을 조사한 결과 폭력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가 실제로 스스로 굶어 죽었는지, 아니면 굶주림이 강요되었는지는 활발한 역사적 추측의 대상이다.[2]

사망 후, 리처드 2세의 시신은 구 세인트 폴 대성당에 공개적으로 전시되었다.[3] 이는 그의 지지자들에게 그가 진정으로 죽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한 그가 폭력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 수년 동안 그가 여전히 살아서 왕위를 되찾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전시된 시신은 그와 매우 닮은 모들레인이라는 사제인 리처드 2세의 사제의 시신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헨리 4세는 시신을 도미니크 수도원(킹스 랭글리)에 조용히 매장했다.[4] 그는 헨리 5세가 시신을 런던으로 가져와 리처드 2세가 자신을 위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의뢰한 묘에 안치할 때까지 그곳에 남아 있었다.[5]

헨리 4세 재위 초기 10년 동안 반란이 계속되었는데, 여기에는 1400년에 자신을 웨일스 공으로 선포한 오웬 글린더의 반란[6]1403년부터 헨리 퍼시 1세(노섬벌랜드 백작)이 이끈 반란이 포함된다. 첫 번째 퍼시 반란은 1403년 슈루즈베리 전투에서 백작의 아들인 "핫스퍼"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유명한 군인 헨리 퍼시의 사망으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헨리 4세의 장남인 헨리 5세가 되는 몬머스의 헨리는 얼굴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그는 왕실 의사인 존 브래드모어의 치료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루즈베리 전투는 왕당파의 승리였다. 몬머스의 헨리의 군사적 능력은 국왕의 승리에 기여했지만(몬머스는 1410년에 아버지로부터 많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헨리 4세 재위 마지막 해에 반란은 빨라졌다. 한 기록에 따르면 "살아있는 리처드라는 옛 이야기가 다시 살아났고, 헨리 4세 재위 마지막 해에 스코틀랜드의 사절들이 잉글랜드의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리처드가 스코틀랜드 궁정에 거주하고 있으며 친구들의 신호만 기다리면 런던으로 가서 왕위를 회복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적절한 외모의 사기꾼이 발견되었고, 리처드 2세의 옛 마구간지기가 그의 주인이 스코틀랜드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도시에 퍼뜨렸다. 엘리아스 리벳(리벳) 경과 그의 동료 토마스 클락은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약속하며 남부 런던을 폭동으로 선동했다. 궁극적으로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리벳은 석방되었고 클락은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1]

초기부터 헨리 4세는 잇따른 반란에 시달렸고, 1400년 1월에는 리처드 2세의 총신들이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 전 엑서터 공 존 홀랜드와 그의 조카인 전 솔리 공 토마스 홀랜드, 솔즈베리 백작, 전 글로스터 백작 토마스 르 디스펜서 등 4명은 주현절에 헨리 4세를 암살하려 했으나 곧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었다.[22]

같은 해, 웨일스의 호족 오웨인 글린두르(오웨인 그린다워)가 반란을 일으켜 15년이나 지속되는 장기전이 시작되었다(1400년 - 1415년). 스코틀랜드 귀족 더글러스 백작은 북잉글랜드를 유린하며 돌아다녔고, 이에 맞서 나선 노섬벌랜드 백작 부자가 1402년 9월 14일의 홈던의 언덕 전투에서 더글러스 백작을 사로잡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헨리 4세는 더글러스 백작의 인도와 스코틀랜드로부터의 몸값을 요구함으로써 퍼시 가문과도 대립하여 그들을 더글러스 백작과 글린두르와 결탁하게 만들었다.[23]

헨리 4세는 반란군 토벌에 나서 1403년 7월 21일 서부 슈루즈베리 근교에서 핫스퍼와 더글러스 백작의 군세와 격돌했다(슈루즈베리 전투).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핫스퍼를 죽인 헨리 4세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노섬벌랜드 백작을 사면했지만, 글린두르의 반란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프랑스가 글린두르를 지원했으며, 노섬벌랜드 백작은 1405년요크 대주교, 노퍽 백작 토마스 모브레이 등과 함께 다시 반란을 일으키는 등 여전히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장남 헨리 왕세자(후의 헨리 5세),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등의 활약으로 이들은 진압되었고 대주교와 노퍽 백작은 처형되었으며,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던 노섬벌랜드 백작도 1408년에 브래멈 무어 전투에서 패사하여 북잉글랜드는 안정을 되찾았다. 글린두르도 왕세자의 군세에 패하여 행방불명이 되었고, 웨일스의 상황도 진정됨에 따라 말년의 통치는 안정되었다.[24]

4. 2. 퍼시 가문과의 대립

헨리 4세는 재위 초기 10년 동안 반란에 시달렸다. 1400년에는 오웬 글린더가 웨일스 공으로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며[23], 1403년부터는 헨리 퍼시 1세(노섬벌랜드 백작)이 반란을 주도했다.[24] 첫 번째 퍼시 반란은 1403년 슈루즈베리 전투에서 백작의 아들인 "핫스퍼" 헨리 퍼시가 사망하면서 끝났다.[24] 이 전투에서 헨리 4세의 장남인 몬머스의 헨리(훗날 헨리 5세)는 얼굴에 화살을 맞았으나 왕실 의사 존 브래드모어의 치료를 받았다. 슈루즈베리 전투는 왕당파의 승리였으며, 몬머스의 헨리의 군사적 능력도 이에 기여했다.[24]

같은 해, 웨일스의 호족 오웨인 글린두르(오웨인 그린다워)가 반란을 일으켜 15년 동안 장기전이 이어졌다(1400년 - 1415년).[23] 스코틀랜드 귀족 아치볼드 더글러스도 북잉글랜드를 유린했고, 이에 맞서 노섬벌랜드 백작 부자가 1402년 9월 14일 홈던의 언덕 전투에서 더글러스 백작을 사로잡는 승리를 거두었다.[23] 그러나 헨리 4세는 더글러스 백작의 인도와 몸값을 요구하여 퍼시 가문과 대립했고, 이로 인해 퍼시 가문은 더글러스 백작, 글린두르와 결탁하게 되었다.[23]

헨리 4세는 반란군 토벌에 나서 1403년 7월 21일 슈루즈베리 근교에서 핫스퍼와 더글러스 백작의 군대와 격돌했다.[24] 이 전투에서 핫스퍼를 죽이고 승리한 헨리 4세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노섬벌랜드 백작을 사면했다.[24] 하지만 글린두르의 반란은 계속되었고, 프랑스가 글린두르를 지원했으며, 노섬벌랜드 백작은 1405년요크 대주교 리처드 스크루프, 노퍽 백작 토마스 모브레이 등과 함께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24] 그러나 장남 헨리 왕세자(후의 헨리 5세),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등의 활약으로 이들은 진압되었고, 대주교와 노퍽 백작은 처형되었다.[24]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던 노섬벌랜드 백작도 1408년 브래멈 무어 전투에서 사망하여 북잉글랜드는 안정을 되찾았다.[24] 글린두르도 왕세자의 군대에 패하여 행방불명이 되었고, 웨일스의 상황도 진정되었다.[24]

4. 3. 왕세자와의 갈등

헨리 4세는 의회와 자주 자문을 구했지만, 특히 교회 문제에 있어서는 의원들과 종종 충돌했다. 1401년 1월, 아룬델은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롤라드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했다.[1] 헨리 4세는 성직자들에게 잉글랜드의 혼란과 기독교인들 사이의 혼란을 야기하는 이단을 해결하고 책임자들에게 처벌을 가할 것을 간청하는 대표단을 파견했다.[2] 얼마 후 공의회와 하원은 헨리 4세에게 롤라드파에 대한 조치를 취할 것을 청원했다.[3] 이러한 조언에 따라 헨리 4세는 1401년 의회로부터 이단자를 화형에 처하도록 규정한 『De heretico comburendo』의 제정을 얻어냈는데, 이는 주로 롤라드파 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조치였다.[4] 1404년과 1410년 의회는 교회 토지를 몰수할 것을 제안했지만, 두 번 모두 지지를 얻지 못했다.[5]

4. 4. 프랑스 및 스코틀랜드와의 관계

1406년, 잉글랜드 해적들은 프랑스로 향하던 11세의 미래 스코틀랜드제임스 1세를 플램버러 헤드 해안에서 납치했다.[1] 제임스는 헨리 4세에게 넘겨졌고, 헨리 4세가 죽을 때까지 포로로 잡혀 있었다.[2] 당시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내전으로 분열된 상태였고 제임스의 안전을 고려하면 무모한 행동을 할 수 없었기에 잉글랜드에 대한 위협은 되지 못했다.[3]

즉위 초, 헨리 4세는 1400년 12월부터 1401년 2월까지 엘섬 궁전에서 영국을 방문한 유일한 비잔티움 황제인 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고스를 환영했고, 그의 명예를 위해 기사 결투가 열리기도 했다. 헨리 4세는 떠나는 마누엘 2세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것을 돕기 위해 금전적 지원을 제공했다.[4]

백년 전쟁 휴전 중 프랑스와의 외교에서 헨리 4세와 왕세자는 대립했다. 프랑스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프랑스에 대한 군사 개입에 신중했던 헨리 4세와 달리 왕세자는 북부 프랑스에 대한 적극적인 진출을 주장했다. 결국 1412년 헨리 4세는 왕세자를 비롯한 주전파를 측근인 토마스 등으로 교체하며 측근들을 개편했고,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부자간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곧 화해했다.[5]

하지만 헨리 4세도 프랑스 진출에 의욕적인 시기가 있었다. 1403년 재혼을 계기로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공국 개입을 노리고,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의 미망인 잔느 드 나바르와 재혼했다. 하지만 브르타뉴 귀족 올리비에 드 클리송의 계략으로 잔느와 전 남편 사이의 아들들(장 5세, 아르튀르 등)은 잉글랜드로 끌려가지 않도록 프랑스 왕실에 맡겨졌고, 헨리 4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잔느와 헨리 4세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6]

5. 죽음과 유산

캔터베리 대성당에 있는 헨리 4세와 조앤의 묘비 세부 묘사


16세기 헨리 4세를 상상하여 그린 그림,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대부분의 전임 국왕들과는 달리, 헨리 4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인 조앤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아닌 캔터베리 대성당 성 삼위 일체 예배당 북쪽, 성 토마스 베켓의 묘소 바로 옆에 묻혔다. 베켓의 추종은 수도원 회계 기록과 ''캔터베리 이야기''와 같은 문학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도 여전히 번성하고 있었으며, 헨리 4세는 특히 이를 숭배했거나, 적어도 베켓과 관련되기를 열렬히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캔터베리에 매장된 이유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후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적 편의를 위해 의도적으로 순교 성인과 자신을 연결 지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6] 그의 즉위식에서 그는 1170년 사망 직전 성모 마리아가 베켓에게 주었다고 알려진 성유로 기름부음을 받았다.[7] 이 기름은 독특한 금으로 만든 독수리 모양의 용기에 담겨 있었으며, 이야기의 한 가지 버전에 따르면, 그 기름은 그 후 헨리 4세의 외할아버지인 랭커스터 공작 헨리 그로스몽트에게 전해졌다.

헨리 4세가 베켓과 의도적으로 연결되었다는 증거는 묘의 구조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묘의 서쪽 끝에 있는 나무 패널에는 베켓의 순교 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묘 위의 천개에는 헨리 4세의 개인적인 모토인 'Soverayne'이 왕관을 쓴 금빛 독수리와 번갈아 그려져 있다. 천개 그림을 지배하는 세 개의 큰 문장은 SS 훈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각각의 훈장에는 금빛 독수리가 새겨져 있다.[8] 이러한 독수리 모티프는 헨리 4세의 즉위식 성유와 베켓과의 이념적 연관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5. 1. 건강 악화와 사망

헨리 4세는 말년에 심각한 건강 문제로 고생했다. 얼굴을 변형시키는 피부병을 앓았고, 1405년 6월, 1406년 4월, 1408년 6월, 1408년 겨울, 1412년 12월에 심각한 질병의 급성 발작을 겪었다.[4] 1410년에는 왕실 외과의사 토마스 모르스테드(Thomas Morstede)에게 연금 40파운드를 지급했는데, 이는 헨리 5세가 즉위하자마자 승인했다.[4] 의학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이러한 질병의 성격에 대해 논쟁해왔다. 피부병은 나병(15세기의 나병이 현대 의학의 나병과 정확히 같은 의미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일 수도 있고, 건선 또는 다른 질병일 수도 있다. 급성 발작에 대해서는 간질에서 심혈관 질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설명이 제시되었다.[5] 일부 중세 작가들은

홀린셰드(Holinshed)에 따르면, 헨리 4세는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이라고 예언되었고, 헨리 4세 2부(Henry IV, Part 2)(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도 이 예언을 반복한다. 헨리 4세는 이것을 자신이 십자군 원정 중에 죽을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1413년 3월 20일 의회 소집 중 웨스트민스터 사원 수도원장 관저에 있는 예루살렘 챔버(Jerusalem Chamber)에서 사망했다.[29] 그의 유언 집행자인 토마스 랭글리(Thomas Langley)가 그의 곁에 있었다.

대부분의 전임 국왕들과는 달리, 헨리 4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인 조앤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아닌 캔터베리 대성당의 성 삼위 일체 예배당 북쪽, 성 토마스 베켓의 묘소 바로 옆에 묻혔다. 헨리 4세는 특히 베켓을 숭배했거나, 적어도 베켓과 관련되기를 열렬히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캔터베리에 매장된 이유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후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적 편의를 위해 의도적으로 순교 성인과 자신을 연결 지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6] 특히 그의 즉위식에서 그는 1170년 사망 직전 성모 마리아가 베켓에게 주었다고 알려진 성유로 기름부음을 받았다.[7]

헨리 4세 사후 언젠가 그와 그의 왕비를 위한 인상적인 묘가 세워졌는데, 아마도 조앤 왕비 자신이 의뢰하고 비용을 지불했을 것이다.[8] 묘석 위에는 헨리 4세와 조앤의 왕관을 쓰고 의례용 로브를 입은 정교한 석고 묘비가 놓여 있다. 1832년 발굴 조사에서 헨리 4세의 시신이 잘 미라 처리되었음이 확인되었으므로, 역사가들은 묘비가 정확한 초상화를 나타낸다고 상당히 확신할 수 있다.[9][10]

6. 가족 관계

배우자자녀
메리 드 보훈
나바라의 조앤없음[19]
정부 (이름 미상)자녀
(이름 미상)에드먼드 르보르드 (1401년 – 1419년 12월 19일 이전 사망)


참조

[1] 서적 The Book of the Princes of Wales, Heirs to the Crown of England https://books.google[...] Richard Bentley 2012-08-17
[2] 웹사이트 St Alban's chronicle https://images.lambe[...]
[3] 서적 The Letters of Manuel II Palaeologus Dumbarton Oaks Center for Byzantine Studies, Trustees for Harvard University 1977
[4] 서적 Cutting Edge: Early History of the Surgeons of London Lund Humphries Publishers 1974
[5] 서적 Religion and Devotion in Europe, c. 1215 – c. 1515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6] 서적 The St Albans Chronicle: The Chronica Maiora of Thomas Walsingham Clarendon Press
[7] 간행물 Pope John XXII to King Edward II of England, 2 June 1318 Archibald Constable & Co. 1901
[8] 서적 A History of Canterbury Cathedral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9] 서적 Memorials of the Cathedral and Priory of Christ in Canterbury E.P. Dutton & Co. 1912
[10] 학술지 Exhumation of Henry IV 1902-05-10
[11] 웹사이트 Marks of Cadency in the British Royal Family http://www.heraldica[...] Heraldica.org
[12] 서적 John of Gaunt: The Exercise of Princely Power in Fourteenth-Century Europe Routledge
[13] ODNB Henry IV (1366–1413) 2006-05
[14] 서적 King Edward II: His life, his reign and its aftermath, 1284–1330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2003
[15] 서적 Blood Royal: Issue of the Kings and Queens of Medieval England, 1066-1399: the Normans and Plantagenets Heritage Books 2007
[16] ODNB Henry of Lancaster [Henry of Grosmont], first duke of Lancaster (c. 1310–1361), soldier and diplomat https://www.oxforddn[...]
[17] 서적 Burke's Guide to the Royal Family Burke's Peerage 1973
[18] 서적 Chronicles of England, France and Spain Longman
[18] 서적 Lives of the queens of England from the Norman conquest with anecdotes of their courts https://books.google[...] Henry Colborn
[19] 서적 The Creation of Brittany https://archive.org/[...] Hambledon Press
[20] 서적 森、P164 - P165、P184 - P186、川北、P111 - P112、ロイル、P56 - P60、君塚、P151 - P152。
[21] 서적 森、P166 - P169、エチュヴェリー、P61、川北、P112 - P113、城戸、P64、ロイル、P74 - P82、君塚、P152 - P156。
[22] 서적 森、P186 - P187、ロイル、P83、P87 - P92、P424。
[23] 서적 森、P187 - P189、ロイル、P93 - P97。
[24] 서적 森、P189 - P190、川北、P113 - P114、ロイル、P97 - P107。
[25] 서적 川北、P115 - P116、城戸、P102 - P110、ロイル、P107 - P111、君塚、P156 - P159。
[26] 서적 森、P198、エチュヴェリー、P61 - P62、ロイル、P100。
[27] 서적 川北、P113 - P114、ロイル、P107。
[28] 서적 森、P179、ロイル、P88。
[29] 서적 森、P190 - P192、ロイル、P118 - P119、君塚、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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