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당 (1963년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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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유민주당은 1963년 5·16 군사 정변 이후 정치 활동 규제가 해제된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4·8 성명"에 호응하여 결성된 정당이다. 초기에는 군부 원로와 구 정치인을 흡수하고 박정희의 지지를 받는 등 여당의 성격을 띠었으나, 박정희가 민주공화당을 지지하면서 야당으로 전환되었다. 1963년 9월 3일 창당대회를 열고 김준연을 대표 최고위원으로 선출했으며, 같은 해 대통령 선거에서 송요찬을 후보로 내세웠으나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해 사퇴했다. 1963년 11월 26일 치러진 제6대 총선에서 9석을 얻었으나, 1964년 12월 26일 민정당에 흡수되어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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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민주당 (1963년 대한민국) - 송요찬
송요찬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부사관으로 복무하고 대한민국 국군 소위로 임관하여 4·3 사건 진압을 지휘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정치적 갈등으로 구속된 인물이다. - 자유민주당 (1963년 대한민국) - 서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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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군부는 1923년 전덕원, 채상덕 등이 만주에서 결성한 복벽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로, 융희 연호 사용, 국내 진공 작전 전개 등의 활동을 펼쳤으나, 통의부와의 내분 및 복벽주의 세력 약화로 1924년 참의부에 합쳐지며 해체되었다. - 한국독립당 - 서북청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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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당 (2016년)은 2016년 안철수의 탈당으로 시작되어 20대 총선에서 38석을 얻었으나, 리베이트 의혹 등으로 당 대표가 사퇴하고 바른정당과 통합하여 바른미래당으로 해산되었다.
자유민주당 (1963년 대한민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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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 | |
약칭 | 자민당 |
정당 이념 | 반공주의, 자유주의 |
역사 | |
창당 | 1963년 5월 |
해산 | 1963년 9월 |
주요 관련 사건 | 5·16 군사정변 이후 정치활동정화법에 의해 정치활동이 규제된 구 정치인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 |
주요 인물 | |
주요 인물 | 김준연, 이범석, 장경근, 조흥만, 윤재욱, 김동성, 김응조, 이정석, 이용설, 정문흠, 민복기 |
2. 창당 배경 및 과정
5·16 군사 정변 이후 정치 활동 규제가 해제되면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범국민 정당" 운동을 제창하자 이에 호응한 야당 인사들이 자유민주당을 창당하였다.[1]
민주공화당과의 합당에 반발한 일부 세력은 당에 남아 야당으로 전향, 1963년 9월 3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창당대회를 열고 대표 최고위원(당수)에 김준연, 최고위원에 송요찬(전 내각 수반), 소선규(참의원[2] 초대 부의장), 김봉재, 김재춘(제3대 중앙정보부 부장)을 선출했다.
2. 1. 범국민 정당 운동
5·16 군사 정변 이후 정치 활동 규제가 풀리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3년 4월 8일 "4·8 성명"[1]을 발표하여 "범국민 정당" 운동을 제창했다. 이에 호응한 야당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6월 10일 범국민당(가칭)이 발족되었고, 이것이 자유민주당 창당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자유민주당은 군부 원로와 다수의 구 정치인을 흡수하고 박정희 의장으로부터 축전도 받는 등 준 여당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당 발족 전인 5월 25일 민주공화당(공화당) 지지를 표명했고, 공화당은 이틀 후 임시 전당대회에서 박정희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이에 최고회의는 6월 20일, 자유민주당에게 공화당으로 합류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2. 2. 민주공화당과의 관계
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3년 4월 8일에 발표한 "4·8 성명"[1]에서 제창한 "범국민 정당" 운동에 호응하여, 자유민주당은 초기에는 군부 원로와 구 정치인을 흡수하며 준 여당으로 발족했다. 그러나 박정희 의장이 1963년 5월 25일에 민주공화당 지지를 표명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민주공화당은 자유민주당에게 합당을 제안했지만, 이에 반발한 일부 세력은 자유민주당에 남아 야당의 길을 걸었다.[1]3. 주요 활동 및 해산
5·16 군사 정변 이후 정치 활동 규제가 풀리면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범국민 정당" 운동에 호응한 야당 인사들이 1963년 6월 10일 범국민당(가칭)을 발족했는데, 이것이 자유민주당의 전신이다.
자유민주당은 군부 원로와 구 정치인을 흡수하며 준 여당으로 출발했지만, 박정희는 민주공화당 지지를 표명했다. 이에 따라 대다수는 공화당에 합류했고, 반발한 일부 세력은 당에 남아 야당으로 전환했다. 1963년 9월 3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창당대회를 열고 김준연을 대표 최고위원으로, 송요찬, 소선규(참의원[2] 초대 부의장), 김봉재, 김재춘 (제3대 중앙정보부 부장)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같은 해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의 후보로 송요찬최고위원이 지명되어 입후보 하였으나, 야당 후보의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11월 26일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9석(지방구 6석 / 전국구 3석, 득표율: 8.0%)을 획득했지만, 다음 해 1964년12월 26일에 야당 제1당인 민정당에 흡수되어 소멸했다.
3. 1. 1963년 대통령 선거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옥중에 있던 송요찬[3] 최고위원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나, 송요찬은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했다.3. 2. 제6대 총선
1963년 11월 26일에 치러진 제6대 총선에서 9석(지방구 6석, 전국구 3석)을 획득하며 원내 진출에 성공했다.[3]3. 3. 민정당에 흡수 합당
1964년 12월 26일에 야당 제1당인 민정당에 흡수되어 소멸했다.[1] 이는 자유민주당의 태생적 한계와 군사정권 협력 시도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참조
[1]
문서
3・16声明을 사실상 철회하는 것을 주旨로 하는 성명
[2]
문서
제2공화국 시대의 국회 상원
[3]
문서
송요찬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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