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장녹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장녹수는 조선 연산군의 후궁으로, 충청도 문의 현령의 딸이자 천민 출신 첩의 딸로 태어났다. 제안대군의 노비로 살다가 가노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며, 이후 기생이 되었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숙원, 숙용에 봉해졌으며, 막대한 재물과 권력을 누렸다. 연산군 폐위 후 반정군에게 붙잡혀 처형되었으며, 역사적으로 '조선 3대 악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중종반정 - 김개 (조선 중기의 문신)
    김개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연산군 시절 언관으로 활동하다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 안정에 기여했으며 사후 수산사에 제향되었다.
  • 중종반정 - 연산군일기
    연산군일기는 조선 10대 왕 연산군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1509년 완성되었으며 대외 관계, 사론, 연산군과 신하들의 시를 담고 있으나, 내용 부실과 객관성 결여의 한계도 존재한다.
  • 1506년 사망 - 안드레아 만테냐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는 프란체스코 스콰르치오네에게 사사하여 고대 로마 미술에 대한 관심과 원근법 사용을 특징으로 하며, 만토바 궁정 화가로서 곤차가 가문 묘사, 〈카이사르의 개선〉,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함〉 등의 작품을 남겨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 1506년 사망 - 연산군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은 초기 국방 강화와 빈민 구제에 힘썼으나,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폭정을 자행하여 폐위된 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폭정, 한글 탄압, 사찰 훼손, 방탕한 사생활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조선 연산군 - 중종반정
    중종반정은 1506년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하여 일으킨 정변으로, 연산군을 폐위하고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왕권 약화, 붕당 정치 심화 등 조선 정치에 여러 문제점을 야기했다.
  • 조선 연산군 - 폐비 윤씨
    조선 성종의 왕비였던 폐비 윤씨는 질투심과 후궁을 해하려 했다는 의혹 등으로 폐위되어 사사되었으며, 그녀의 죽음은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어 조선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장녹수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장녹수
한글장녹수
한자張綠水
로마자 표기Jang Nok-su
신상 정보
출생1484년경
사망1506년 9월 2일 (음력)
사망 당시 나이21-22세
가족 관계
아버지장한필
가문흥덕 장씨
배우자연산군
자녀1녀 (이영수)
경력
주요 경력기생 (전직), 후궁
품계숙용
재위 기간1503년 - 1506년
기타
참고연속 투고하는 IP에 대한 주의

2. 생애

장녹수는 충청도 문의 현령(文義縣令)을 지낸 장한필의 딸로, 어머니는 천민 출신의 이었다.[16] 이 때문에 성종의 종제인 제안대군의 노비로 살았다.[16] 제안대군의 가노(家奴)와 결혼해 아들을 낳은 뒤 기생이 되었다.[17] 얼굴은 보통을 넘지 못했으나 매우 동안(童顔)이었고, 노래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18] 특히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목소리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30세가 넘었을 때도 16세 소녀와 같은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5][6]

연산군은 장녹수의 소문을 듣고 입궐시켜 숙원(淑媛)에 봉하고 많은 재물과 노비, 전답, 가옥을 내렸다.[19] 그녀의 청으로 제안대군의 장인 김수말에게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20] 장녹수는 연산군을 젖먹이 다루듯 하였지만,[21] 연산군은 그녀를 무척 총애하여 모든 상벌이 장녹수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다.[21] 1503년 연산군은 장녹수를 숙용(淑容)에 봉했다.[22] 1502년 12월 8일에는 옹주 '''영수'''(靈壽, 영수)를 출산했다.

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형부 김효손(金孝孫)에게 함경도 전향 별감(傳香別監) 등의 벼슬을 주게 하였다.[23] 장녹수가 궁 안에 살고 있는데도 그녀의 집을 새로 짓기 위해 민가를 헐게 하였으며,[24] 동지중추부사 이병정(李秉正)은 장녹수의 집 하인에게 크게 모욕을 당했지만 오히려 사재를 털어 뇌물을 바치고서야 화를 피할 수 있었다.[25] 1505년 12월에는 장녹수의 치마를 밟았다는 이유로 하급 기생인 운평(運平)에 속하는 옥지화(玉池花)를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취홍원(聚紅院), 뇌영원(蕾英院)에 돌려 보이고, 연방원(聯芳院)에 효시(梟示)하기도 하였다.[26] 1506년 1월에는 내수사의 여종이었던 언니 장복수(張福壽)와 조카들을 면천해 양인(良人)의 신분으로 올렸다.[27]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장녹수는 반정군에게 붙잡혀 군기시 앞에서 참형(斬刑)을 당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수당한 그녀의 시체에 돌을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으며, 던져진 돌의 수가 너무 많아 순식간에 돌무덤이 만들어졌다고 한다.[6]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장녹수는 충청도 문의 현령을 지낸 장한필의 딸로, 어머니는 천민 출신의 첩이었다.[16] 이 때문에 성종의 종제인 제안대군의 노비로 살았다.[16] 제안대군의 가노(家奴)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지만, 이후 노래와 춤을 배워 기생이 되었다.[17] 얼굴은 평범했지만, 매우 동안(童顔)이었고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18] 특히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목소리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30세가 넘었을 때도 16세 소녀와 같은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5][6]

2. 2. 연산군의 후궁이 되다

장녹수는 충청도 문의 현령(文義縣令)을 지낸 장한필의 딸로, 어머니는 천민 출신의 이었다.[16] 이 때문에 성종의 종제인 제안대군의 노비로 살았다.[16] 제안대군의 가노(家奴)와 결혼해 아들을 낳은 뒤 기생이 되었다.[17] 얼굴은 보통을 넘지 못했으나 매우 동안(童顔)이었고, 노래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18]

연산군은 장녹수의 소문을 듣고 입궐시켜 숙원(淑媛)에 봉하고 많은 재물과 노비, 전답, 가옥을 내렸다.[19] 그녀의 청으로 제안대군의 장인 김수말에게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20] 장녹수는 연산군을 젖먹이 다루듯 하였지만,[21] 연산군은 그녀를 무척 총애하여 모든 상벌이 장녹수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다.[21] 1503년 연산군은 장녹수를 숙용(淑容)에 봉했다.[22]

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형부 김효손(金孝孫)에게 함경도 전향 별감(傳香別監) 등의 벼슬을 주게 하였다.[23] 장녹수가 궁 안에 살고 있는데도 그녀의 집을 새로 짓기 위해 민가를 헐게 하였으며,[24] 동지중추부사 이병정(李秉正)은 장녹수의 집 하인에게 크게 모욕을 당했지만 오히려 사재를 털어 뇌물을 바치고서야 화를 피할 수 있었다.[25] 1505년 12월에는 장녹수의 치마를 밟았다는 이유로 하급 기생인 운평(運平)에 속하는 옥지화(玉池花)를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취홍원(聚紅院), 뇌영원(蕾英院)에 돌려 보이고, 연방원(聯芳院)에 효시(梟示)하기도 하였다.[26]

2. 3. 권력 남용과 몰락

장녹수는 성종의 종제인 제안대군의 노비였다가[16] 가노(家奴)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은 뒤 기생이 되었다.[17] 연산군은 장녹수를 입궐시켜 숙원(淑媛)에 봉하고 재물, 노비, 전답, 가옥을 내렸으며,[19] 1503년 숙용에 봉했다.[22]

연산군의 총애를 바탕으로 장녹수는 권력을 남용했다. 형부 김효손(金孝孫)에게 벼슬을 주게 하고,[23] 자신의 집을 새로 짓기 위해 민가를 헐게 하였으며,[24] 장녹수의 집 하인에게 모욕을 당한 동지중추부사 이병정(李秉正)은 뇌물을 바치고서야 화를 피할 수 있었다.[25] 1505년에는 장녹수의 치마를 밟았다는 이유로 기생 옥지화(玉池花)를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처형하고 효시(梟示)하기도 하였다.[26] 1506년 1월에는 내수사의 여종이었던 언니 장복수(張福壽)와 조카들을 면천해 양인(良人)의 신분으로 올렸다.[27]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장녹수는 반정군에게 붙잡혀 군기시 앞에서 참형(斬刑)을 당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수당한 그의 시체에 돌을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2. 4. 최후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된 후, 장녹수는 반정군에게 붙잡혀 군기시 앞에서 참형(斬刑)을 당했다.[6] 수많은 사람들이 참수당한 그의 시체에 돌을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으며, 던져진 돌의 수가 너무 많아 순식간에 돌무덤이 만들어졌다고 한다.[6]

3. 가족 관계

아버지 장한필과 측실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언니는 장복수로 김효손의 처이다.[14]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옹주 이령수를 낳았다.[4] 그 외에,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이총수(李寵壽), 이영수(李永壽)라는 아들과 옹주 이영수(李寧壽)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4. 평가

장녹수는 종종 장옥정, 정난정과 함께 "'''조선 3대 악녀'''" 중 한 명으로 꼽힌다.[6] 작가 강희봉은 칼럼에서 후세의 경계로 삼기 위해 장녹수의 악행이 더욱 강조되어 기록되었다고 언급했다.[6]

4. 1. 부정적 평가

장녹수는 종종 장옥정, 정난정과 함께 "'''조선 3대 악녀'''" 중 한 명으로 꼽힌다.[6] 작가 강희봉은 칼럼에서 후세의 경계로 삼기 위해 장녹수의 악행이 더욱 강조되어 기록되었다고 언급했다.[6]

4. 2. 긍정적 평가

장녹수는 종종 장옥정, 정난정과 함께 "'''조선 3대 악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작가 강희봉은 칼럼에서 후세의 경계로 삼기 위해 장녹수의 악행이 더욱 강조되어 기록되었다고 언급했다.[6]

5. 대중문화

장녹수는 수많은 문학 작품과 드라마·영화 등에서 그 이야기를 다루었다.

5. 1. 드라마


  • 1972년 TBC 드라마 《사모곡》에서 배우 윤정희가 장녹수 역을 연기했다.[2]
  • 1984년부터 1985년까지 MBC 드라마 《설중매》에서 배우 이미숙이 장녹수 역을 연기했다.[2]
  • 1988년 영화 《연산일기》에서 김진아가 장녹수를 연기했다.
  • 1995년 KBS 드라마 《장녹수》에서 배우 박지영이 장녹수 역을 연기했다.[2]
  • 1998년부터 2000년까지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 배우 유니가 장녹수 역을 연기했다.[2]
  • 2005년 영화 《왕의 남자》에서 강성연이 장녹수를 연기했다.
  • 2007년부터 2008년까지 SBS 드라마 《왕과 나》에서 배우 오수민이 장녹수 역을 연기했다.[2]
  • 2011년부터 2012년까지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 배우 전소민이 장녹수 역을 연기했다.[2]
  • 2015년 영화 《간신》에서 차지연이 장녹수를 연기했다.
  • 2017년 MBC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배우 이하늬가 장녹수 역을 연기했다.[2]
  • 2017년 KBS2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 배우 손은서가 장녹수 역을 연기했다.[3]

5. 2. 영화

1962년 영화 《폭군 연산》에서 도금봉이 장녹수 역을 연기하였다.[2] 1987년에는 영화 《연산군》에서 강수연이,[2] 1988년 영화 《연산일기》에서는 김진아가 장녹수 역을 맡았다.[2] 2005년 영화 《왕의 남자》에서는 강성연이,[2] 2015년 영화 《간신》에서는 차지연이 장녹수를 연기했다.[2]

5. 3. 연극

2000년 초연된 김태웅 극본·연출의 연극 《》는 영화 《왕의 남자》의 원작이다.[2] 1988년 영화 《연산일기》에서는 김진아가, 2005년 영화 《왕의 남자》에서는 강성연이, 2015년 영화 《간신》에서는 차지연이 장녹수를 연기했다.[2]

2007년부터 2008년까지 SBS TV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오수민이, 2011년부터 2012년까지 JTBC TV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전소민이 장녹수 역을 맡았다.[2] 2017년 MBC TV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는 이하늬가,[2] 2017년 KBS2 TV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는 손은서가 장녹수를 연기했다.[3]

5. 4. 가곡

전미경의 노래 '왕비 장녹수' 오프닝 테마로 사용된 곡이 있다.[2]

참조

[1] 문서 Jang's death date in Lunar Calendar 1506-09-02
[2] 웹사이트 The Rebel http://content.mbc.c[...] MBC&iMBC 2019-09-09
[3] 웹사이트 7일의 왕비 인물관계도 http://program.kbs.c[...] 2019-09-09
[4] 웹사이트 장녹수 http://navercast.nav[...] 2016-04-16
[5]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조선왕조실록 1502-11-25
[6] 웹사이트 龍飛御天歌-朝鮮王朝の世界<34>傾城の側室 正史に戒め http://www.mindan.or[...] 재일본대한민국민단 2013-06-13
[7]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조선왕조실록 1503-12-24
[8] 웹사이트 張緑水(チャン・ノクス)欲望のままに生きた朝鮮三大悪女 https://korea.sseika[...] 2023-08-29
[9]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조선왕조실록 1503-11-13
[10]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조선왕조실록 1504-03-08
[11]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조선왕조실록 1504-08-02
[12]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조선왕조실록 1505-12-23
[13]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 중종실록 조선왕조실록 1506-09-02
[14]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조선왕조실록 1505-09-02
[15] 간행물 연산군일기 1502-12-08
[16] 간행물 연산군일기 1502-11-25
[17] 간행물 연산군일기 1502-11-25
[18] 간행물 연산군일기 1502-11-25
[19] 간행물 연산군일기 1502-11-25
[20] 간행물 연산군일기 1503-04-03
[21] 간행물 연산군일기 1502-11-25
[22] 간행물 연산군일기 1503-12-24
[23] 간행물 연산군일기 1503-11-13
[24] 간행물 연산군일기 1504-03-08
[25] 간행물 연산군일기 1504-08-02
[26] 간행물 연산군일기 1505-12-23
[27] 간행물 연산군일기 1506-01-1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