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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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산군은 조선 성종의 장자이자 폐비 윤씨의 아들로, 1494년 성종 사후 18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즉위 초에는 국방 강화, 빈민 구제 등 긍정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생모 폐비 윤씨의 복권 문제와 사림 세력과의 갈등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 연이은 사화를 일으켜 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이후 사치와 향락에 빠져 폭정을 일삼았으며,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된 후 교동도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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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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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연산군 (燕山君) |
휘 | 이융 (李㦕) |
로마자 표기 | I Yung |
재위 기간 | 1495년 1월 20일 – 1506년 9월 18일 |
즉위식 | 1495년 1월 25일, 창덕궁 인정전 |
출생일 | 1476년 11월 23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 |
사망일 | 1506년 11월 20일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 |
묘소 | 연산군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종교 | 한국 유교 (성리학) |
가족 관계 | |
부친 | 성종 (조선) |
모친 | 폐비 윤씨 (생모) 정현왕후 (양모) |
배우자 | 폐비 신씨 (1488년 결혼, 1506년 폐위) |
자녀 | 11남 6녀 (상세 내용은 하위 섹션 참고) |
왕세자 시절 | |
왕세자 책봉 | 1483년 9월 6일 |
왕세자 폐위 | 1495년 1월 20일 |
선대 왕세자 | 왕세자 이황 |
후대 왕세자 | 폐세자 이황 |
추가 정보 | |
연산군 휘 | 이융 (李漋) |
존호 |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 (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 |
왕자 | |
왕자 정보 | 11명 |
공주 | |
공주 정보 | 6명 |
2. 생애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는 본래 성종의 후궁이었으나, 성종의 첫 왕비인 공혜왕후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를 이을 후계자를 얻기 위해 새로운 왕비로 간택되었다. 미모가 뛰어났던 윤씨는 1476년 정식으로 왕비가 되었고, 몇 달 후 이융(훗날 연산군)을 낳았다.
그러나 성격이 변덕스럽고 질투심이 강하여 다른 후궁들을 괴롭혔으며, 심지어 1477년에는 한 후궁을 독살하려 했다는 기록도 있다. 1479년에는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는 사건을 일으켰다. 성종은 이를 숨기려 했으나 그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알게 되었고, 결국 윤씨는 폐위되어 궁궐에서 쫓겨났다. 복위를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결국 1482년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2. 1. 출생과 세자 시절
1476년 11월 23일 (음력 11월 7일), 조선 성종과 그의 계비였던 폐비 윤씨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무작금'''(無作金)이었다.어머니 폐비 윤씨는 1474년 성종의 첫 왕비 공혜왕후 한씨가 사망한 후 1476년 왕비가 되었으나, 후궁이 많았던 성종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결국 1479년 왕비에서 빈으로 강등되었고,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을 계기로 후궁들과 인수대비의 개입 속에 궁궐에서 쫓겨났다. 이후 1482년에는 왕명에 따라 사약을 받고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폐위된 이듬해인 1483년, 연산군은 7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후 허침, 조지서, 서거정, 정여창 등 당대의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웠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생모인 폐비 윤씨가 아닌 계모 정현왕후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으며, 훗날 성종의 묘비명과 행장을 쓰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사사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것이 갑자사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35]
연산군은 유학 공부를 즐기지 않았으며, 스승들이 학문을 권하면 "이제 그런 것은 잡기(雜技)이다"라고 말하며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추구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유교적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 국가를 지향했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36] 스승 중 허침은 연산군에게 너그러웠으나, 조지서는 원칙대로 가르치려 하여 연산군과 갈등을 빚었다. 연산군이 벽에 '허침은 성인이고, 조지서는 소인배'라는 낙서를 남겼다는 일화가 있으며, 훗날 갑자사화 때 조지서를 처형하기도 했다.
성종에게는 연산군 외에도 제2계비 정현왕후 소생의 진성대군(훗날 중종)이 있었지만, 1494년 성종이 훙거할 당시 세자였던 연산군의 나이가 이미 18세였으므로 그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2. 2. 즉위와 초기 치세
아버지인 성종이 승하하자 왕세자의 자격으로 1494년 12월 29일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거창 신씨이다.즉위 초반에는 성종 시대의 안정된 기조를 이어받아 국방을 강화하고 민생 안정과 학문 진흥에 힘썼다. 국방 면에서는 비융사(備戎司, 비변사의 전신)를 설치하여 병기를 개발하고, 녹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건주 야인을 회유하거나 토벌하는 등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다.[37] 또한 평안도와 함경도의 성곽을 개보수하고, 변경 지역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는 사민(徙民) 정책을 장려하며 면세 및 부역 면제 혜택을 부여했다.[37]
민생 안정을 위해 사창, 상평창, 진제창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고자 했으며,[37] 학문과 문화 분야에서는 사가독서 제도를 부활시키고, 《국조보감》, 《경상우도지도》, 《동국명가집》, 《역대제왕시문잡저》, 《속국조보감》, 《여지승람》 등 다수의 서적 편찬 및 간행 사업을 이어가거나 완성시켰다.[37] 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정여창, 허침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즉위 초에는 경연에 비교적 자주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즉위 직후에는 전남 장흥도호부에 유배 중이던 외할머니 장흥부부인 신씨와 외숙 윤구를 석방하였다. 이듬해부터는 생모인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권시키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사림 세력은 '사후 백 년간 폐비 문제를 논하지 말라'는 성종의 유지를 근거로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이 일은 연산군과 사림파의 관계를 악화시켜 훗날 사림파 숙청의 빌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즉위 초기의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과 달리, 점차 연산군의 통치는 폭압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국립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원각사 사찰을 폐쇄하고 개인적인 유흥을 위한 사냥터로 개조하였으며, 이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어린 여성을 선발해 궁궐로 들였다.[3] 또한 수도의 대규모 주택지를 철거하고 2만 명의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켜 사냥터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공사에는 백성들이 징용되었고, 이에 대한 불만이 커져 한글로 연산군을 비판하는 글이 나붙자 한글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3] 더욱이 연산군은 조선 왕조에서 불교를 공적으로 탄압하려 했던 유일한 군주로, 재위 기간 중 조선의 총림 제도와 승과 시험 제도를 폐지하려 하였다.[4]
자신의 정책과 행위에 대한 신하들의 비판이 이어지자, 왕에게 간언하는 역할을 하던 사헌부와 학문 연구 및 자문 기관인 홍문관을 폐지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억눌렀다.[5] 심지어 신하들에게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고, 혀는 목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다물고 혀를 감추면 몸이 편안할 것이다" (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牢)라는 글귀가 적힌 팻말을 차도록 강요하며 언로를 차단했다.[6] 이러한 공포 정치 속에서 세 명의 왕을 섬겼던 대내시 김처선이 연산군에게 변화를 촉구하다가 활에 맞고 사지가 잘리는 등 잔혹하게 살해당했으며, 뿐만 아니라 김처선의 친족을 7촌까지 처벌하는 연좌제를 시행했다.[7] 이러한 처벌의 적절성에 대해 묻는 왕의 질문에 서기관들은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7]
2. 3. 무오사화 (1498년)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실록》 편찬을 명하였다.[38]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실록 편찬 과정에서 김종직이 과거에 쓴 조의제문이 문제되었다. 이극돈, 유자광 등은 이 글이 세조의 계유정난을 비난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참소하였다. 이를 계기로 훈구파는 성종 대에 중앙 정계로 진출한 사림파를 제거하고자 했고, 연산군은 김일손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다수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특히 김일손이 사초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내용을 기록한 것이 직접적인 빌미가 되었다.[1]연산군은 이미 사망한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형을 명했다. 또한 김일손·권오복·권경유·이목·허반 등은 선왕(성종)을 무고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고, 강겸·표연말·홍한·정여창·강경서·이수공·정승조 등은 난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이종준·최부·이원·이주·김굉필·박한주·임희재·강백진·이계맹·강혼·남곤 등 김종직의 제자들 역시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성희안과 유순정도 이 사건에 연좌되어 한직으로 좌천되었는데, 이는 훗날 이들이 박원종의 쿠데타에 가담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수사관이었던 어세겸·이극돈·유순·윤효손·김전 등은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종직, 김일손 등으로 대표되는 영남 사림파는 큰 타격을 입고 몰락했으며, 견제 세력이 약화된 조정은 다시 훈구파 중심으로 운영되었다.[39] 이 사건을 무오사화(戊午士禍)라고 부른다.
2. 4. 생모 추숭 시도와 좌절
즉위 초부터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권과 추숭(追崇)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성균관과 양사(사헌부, 사간원) 등에 있던 사림파 인사들은 성종이 사후 백 년간 폐비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고 남긴 유명(遺命)을 내세우며 연산군의 시도에 강하게 반대했다. 사림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 연산군은 이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는 연산군과 조정 내 사림 세력 간의 감정적 갈등으로 이어졌다.연산군은 사림파 관료들의 직언(直諫)을 귀찮게 여겨 왕과 신하가 학문을 논하는 경연을 축소하고, 관리 감찰 기구인 사헌부의 기능도 약화시켰다. 나아가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 등 언론 및 학술 기능을 담당하던 기관들을 폐지했으며, 정언과 같은 언관직도 없애거나 인원을 줄였다. 또한 상소, 상언, 격고(擊鼓,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북을 치는 행위) 등 여론 수렴과 관련된 제도들을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했다. 심지어 학문 기관인 성균관과 원각사 등을 유흥 장소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 등 한성부 내 일부 사찰을 연회장이나 마굿간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본래 사림파에 비판적이던 연산군의 성향을 간파한 이극돈, 임사홍 등 훈구파 대신들은 이를 자신들의 정치적 세력을 확장하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
연산군은 즉위 후 한동안 자신이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인 정현왕후의 아들이라고 믿고 자랐다. 1495년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국방을 강화하고 빈민을 구제하는 등 현명한 통치자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으나, 즉위 직후 스승 중 한 명인 조사서를 죽이는 등 폭력적인 성향도 드러냈다.
결국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가 폐비 윤씨라는 사실과 그 죽음의 전말을 알게 되었고, 사후에라도 어머니의 지위와 명예를 회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사림 세력은 성종의 유지를 이유로 이를 반대했고, 연산군은 이들을 제거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두 차례의 큰 사화로 폭발했다.
- 무오사화 (1498년):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일손이 왕실 기록인 사초(史草)에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계유정난을 비판적으로 기술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훈구파는 이를 반역으로 몰아갔고, 연산군은 이를 기회로 삼아 김일손을 비롯한 많은 사림 관료들을 처형하거나 유배 보냈다[1]. 또한 이미 사망한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剖棺斬屍) 형벌을 가했다.
- 갑자사화 (1504년):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의 죽음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를 전하며, 윤씨가 사약을 받고 피를 토하며 죽을 때 남긴 피 묻은 옷을 증거로 내놓았다[2]. 이에 격분한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여긴 성종의 후궁 정씨와 엄씨를 궁궐 뜰에서 직접 때려죽였다. 할머니인 인수대비 역시 이 일로 연산군과 크게 다툰 후 충격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연산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과거 어머니의 폐위와 사사에 동조했거나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관리들을 사형에 처했으며, 이미 죽은 한명회 등의 무덤까지 파헤쳐 부관참시를 명했다[2]. 이 사건으로 임사홍과 그의 측근들은 높은 관직에 오르고 많은 상을 받았다[2]. 연산군은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존했다.
2. 5. 갑자사화 (1504년)
연산군은 재위 10년인 1504년 음력 10월, 훈구파 내부에서 궁중파와 부중파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자 이를 기회로 삼아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실행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폐비 윤씨 사사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는데, 이것이 바로 갑자사화이다.[12]연산군은 먼저 폐비 윤씨 사건을 주도했던 성종의 후궁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를 처형했다. 또한 당시 사건에 연루되었던 훈구파와 사림파 대신들 중 살아있는 자는 처형하고, 이미 죽은 자는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베는 부관참시 형벌을 내렸다. 측근인 임사홍과 환관 김자원(金子猿)을 동원하여 생모 윤씨를 죽이는 데 관련된 자들을 찾아내 처형하기도 했다.
당시 사림파 일부는 성종의 유지를 내세워 폐비 복위를 반대했는데, 임사홍을 비롯한 궁중파는 갑자사화를 통해 이들 사림파를 포함한 반대 세력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연산군은 이들을 이용하여 사림파를 숙청한 후, 폐비 문제와 직접 관련이 있던 이극균, 윤필상, 성준, 김굉필 등 부중파 세력 역시 제거했다. 이미 사망한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등은 부관참시를 당했다.
연산군의 복수는 잔혹했다. 폐비 사태를 주도했던 두 후궁 엄씨와 정씨는 그들의 아들인 안양군과 봉안군에게 직접 매질하여 죽이도록 명했다. 이후 그 시신으로 젓갈을 담가 산야에 버리고 아무도 매장하지 못하게 했다. 두 왕자 역시 유배 보냈다가 이듬해 사사했으며, 정씨 소생의 정혜옹주와 엄씨 소생의 공신옹주는 신분을 박탈당하고 유배되었다. 이들은 훗날 중종이 즉위한 후에야 복권될 수 있었다.
갑자사화 과정에서 연산군은 할머니인 인수대비와도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폐비 윤씨의 복위 문제를 놓고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와 크게 다투었고, 이 갈등 끝에 인수대비는 사망했다.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장례마저 삼년상 대신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25일 만에 상을 마치는 이일역월제(역월지제)라는 단상제(短喪制)를 시행하여 큰 비판을 받았다.
2. 6. 폭정
중종실록에는 연산군이 자신의 유흥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사냥터를 만들기 위해 민가를 부수고 주민들을 멀리 쫓아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연산군일기 제위 9년(1503년) 11월 2일자 기록에 따르면, 궁궐 100척 이내의 민가 철거는 조선의 국법에 따른 조치였으며, 철거 대상 백성들에게는 집터와 함께 집 크기에 따라 무명 50필, 30필, 15필을 지급하고 겨울철임을 감안하여 봄까지 기다렸다가 철거하라고 명했다. 불법 민가를 철거하며 보상과 이주 대책을 마련한 것을 폭정의 증거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존재한다.그러나 연산군은 서총대(瑞蔥臺)라는 유흥장을 만들면서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많은 베를 바치게 하는 등 노동력과 재산을 수탈하여 민심을 잃었다. 1505년(연산군 11년) 음력 6월 9일, 신료들이 '헌천홍도경문위무(憲天弘道經文緯武)'라는 존호를 올렸으나 처음에는 과분하다며 사양했다.[40] 하지만 결국 마지못해 받는 듯하며 존호를 수락했다.
신하들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여,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고,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라는 글귀가 적힌 신언패(愼言牌)를 차게 했고,[58] 총애하는 흥청의 나들이나 왕의 가마를 메는 일에 신하들을 동원했다.[59] 신하들이 그의 행위에 대해 항의하자, 왕에게 직언하는 역할을 하던 사헌부와 홍문관을 폐지하였다.[5] 폐위되기 몇 달 전부터는 사모 앞뒤에 '충(忠)'과 '성(成)' 글자를 수놓게 하기도 했다.
왕의 음란함이 날로 심해져 족친 및 선왕의 후궁들과 자주 연회를 열었으며,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으면 장녹수를 시켜 누구의 아내인지 비밀리에 알아내 밤낮으로 궁에 머물게 하며 간음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에게 아내를 바친 신하들의 명단까지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색정증은 생모 폐비 윤씨가 사사된 충격과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심리적 문제와 연관되어 나타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왕비나 후궁, 궁녀, 기생 등 합법적인 관계 외에 멀쩡히 사는 신하의 아내까지 불러들여 겁탈한 것은 명백히 선을 넘은 행위였다.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범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연산군일기 12년(1506년) 6월 6일 자 기록에는 연산군이 세자 시절 자신을 돌봐준 박씨를 입궁시켜 간통하고 '승평부대부인'이라는 도장을 만들어 주었다고 나온다. 또한 박씨와 잠자리를 하던 중 꿈에 월산대군이 나타나자 그의 묘에 쇠막대기를 꽂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사람들은 박씨가 연산군의 아이를 임신하여 자결했거나 연산군에게 성병을 옮아 자결했다고 수군거렸다고 실록은 전한다. 그러나 당시 박씨의 나이가 50세가 넘었으므로 임신은 불가능하다는 반론이 있으며, 중종반정의 핵심 인물인 박원종이 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누이인 박씨와 관련된 추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렸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연산군은 압반(押班)과 사헌부 감찰 등을 동원하여 사치와 나태에 빠진 성균관과 사부학당 유생들을 감시하게 했다. 또한 의정부 정4품직인 사인, 검상과 이조, 병조의 낭관직에 문관과 무관을 번갈아 임명하게 함으로써 문신 우대 정책을 폐지하고 문무 관료 간의 경쟁을 유도했다.
1506년(연산군 12년) 8월에는 정무를 보좌하는 영의정 등 삼정승이라 할지라도 직함 뒤에 존칭을 생략하게 했으며, 문묘에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낼 때 공자의 생전 직분이 신하였다는 이유로 절만 하게 했다. 각 도에 채홍사(採紅使)와 채청사(採靑使)를 파견하여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해오게 했으며, 국립대학인 성균관과 세조가 세운 원각사(현재 탑골공원 자리)를 폐쇄하고 학생들을 몰아내어 자신의 유흥 장소나 사냥터로 삼았다.[3] 한성부 내 여러 사찰 역시 연회장이나 유흥장으로 만들었다. 이때 선발된 기생인 흥청들과 그들을 위한 비용으로 인해 나라 재정이 어려워지자 '흥청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뜻의 '흥청망국(興淸亡國)'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이는 오늘날 '흥청망청'의 어원이 되었다.[52]
연산군은 고문 전례를 찾아 가혹한 형벌을 가한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대표적인 형벌로는 압슬(무릎 뼈를 부수는 형벌), 포락(炮烙, 불에 달군 쇠로 지지는 형벌), 물구나무 세워 물고문하기, 착흉(斮胸, 가슴을 치는 형벌), 주리 틀기, 뜨거운 불판 위를 걷게 하기, 능지처사, 촌참(寸斬, 신체를 토막 내는 형벌) 등이 있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의 뼈를 갈아 바람에 날려버리는 쇄골표풍(碎骨瓢風)이라는 형벌까지 시행되었다. 특히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등 두 차례의 큰 사화[12]를 일으켜 수많은 사림 세력을 희생시켰기 때문에, 훗날 사림이 집권한 이후 폭군의 대명사로 기록되었다.
1504년에는 할머니 인수대비의 상(喪)을 '역월지제(以日易月制)'라는 방식으로 치러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는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3년상을 25일 만에 끝내는 단상제(短喪制)였다.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전부터 생모 폐비 윤씨의 폐위 및 사사 문제로 자신에게 강경했던 인수대비와 갈등을 겪었으며, 언쟁 중 할머니를 머리나 상으로 들이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 충격으로 병을 앓던 인수대비는 결국 사망했는데, 연산군은 이러한 방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는 능양군이 소현세자의 장례를 7일장으로 치른 것과 함께 조선시대 내내 성리학자들과 선비들에게 큰 비판을 받았다.
배가 뒤집히는 것을 염려하여[53]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부교(浮橋)를 설치하기도 했다.[54] 여러 척의 배를 이어 만든 이 배다리는 훗날 정조의 원행(園幸) 때 다시 등장하며 입구에 홍살문까지 세워질 정도로 발전했다.[55] 하지만 연산군 시대에는 배다리를 만들기 위해 수백 척의 배를 동원해야 했고, 설치 기간 동안 한강의 물길을 막아 물품 유통에 큰 차질을 빚었다는 비판도 있다.[56]
군포로 세금을 걷는 대신 직접 칼과 갑옷을 갖추라고 명하기도 했으며,[57] 철갑주(鐵甲胄)를 생산하는 관청인 비융사(備戎司)를 설치하기도 했다.[61] 문묘를 폐쇄하려 시도했고,[58] 문묘 제례악에는 목검과 목창이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59] 군복을 입고 개성에 있는 문묘에서 제사를 지내려고도 했다.[60]
연산군은 비구니들을 강제로 환속(還俗, 속세로 돌려보냄)시켰다.[62] 이는 세종 25년(1443년) 5월, 결혼하지 않은 비구니에게 형벌을 내렸던 전례와 유사하다.[63] 단종의 명복을 빌던 정업원의 비구니들과, 아버지 성종의 후궁 출신 비구니들이 있다는 이유로[64] 해당 사찰의 모든 비구니들을 노비로 삼았다.[65] 이는 고려 시대와 달리 사찰에 노비가 없었던 조선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조치였다.[66] 조선 왕실의 비보 사찰(왕실의 복을 비는 사찰)이었던 흥천사, 태조가 창건한 흥덕사,[67] 세조가 흥복사(興福寺) 터에 지은 대원각사 등이 연산군 대에 폐사되었다.[68] 이러한 종교 탄압과는 대조적으로, 풍류를 담당하던 기생인 운평(運平)이 임신하면 형벌을 내렸다.[69] 연산군은 조선 왕조에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탄압하려 했던 군주로 평가받으며, 재위 기간 중 조선의 총림(叢林, 승려 집단) 제도와 승과(僧科, 승려 선발 시험) 제도를 폐지하려 했다.[4]
또한 연산군은 재위 기간에 자신의 사초(史草)를 열람했다.[70] 이는 조선왕조실록 편찬의 공정성을 위해 왕의 사후에 실록을 편찬하며, 왕은 생전에 자신의 실록을 볼 수 없다는 원칙을 어긴 행위였다.[71] 객관적인 기록을 남겨야 할 사관들에게 술과 풍악을 내리는 등 회유하기도 했다.[72] 수도의 대규모 주택지를 철거하고 2만 명의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사냥터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징용되었으며, 이에 반발한 많은 백성들이 한글로 연산군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글을 쓰자, 연산군은 한글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세 명의 왕을 섬겼던 대내시 김처선이 연산군에게 변화를 촉구하자, 연산군은 그에게 직접 활을 쏘고 사지를 자르는 등 잔혹하게 살해하였다. 또한 그의 7촌까지 처벌하였는데, 이러한 처벌의 적절성에 대해 묻자 신하들은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7]
2. 7. 한글 탄압
1504년(연산군 10년) 7월,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었다.[41][42][43][44] 이 투서에는 연산군의 신하들에 대한 폭력과 여성 편력 등이 비판적으로 언급되어 있었다.[8] 투서 사건 이전에도 연산군은 국립대학인 성균관과 원각사 사찰을 폐쇄하고 자신의 사냥터로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징용된 많은 백성 중 일부가 한글로 연산군을 비난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3][4]투서 사건에 격분한 연산군은 한글 학습과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한글로 구결(口訣)을 단 책들을 불태우도록 명령했다. 이 조치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포함한 많은 한글 관련 서적이 소실되었다.[45] 또한 한글 사용자를 색출하기 위해 한성(서울) 주민들의 필적을 대조하고, 작성자를 신고하는 이에게는 높은 관직과 상금을 내걸었다.[8] 한글 사용자는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 임금의 문서를 훼손한 죄)'을 적용하여 곤장 100대에서 참수형에 처하고,[45][8] 사용자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으면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 임금의 명령을 어긴 죄[46])'을 적용하여 곤장 100대를 치도록 했다.[47][48][9] 신하들에게는 집에 보관 중인 한글 국역 주석이 달린 책을 모두 불태우도록 지시했으나,[9] 한자 서적을 번역한 한글 책, 즉 언해서(諺解書)는 허용되었다. 이는 종종 선대 왕들의 업적과 관련된 서적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9]
한글 사용자 색출은 1504년 8월 초까지 이어졌으나 투서 작성자를 찾지 못했고, 한글 탄압은 오래가지 못했다.[9] 같은 해 12월, 연산군은 오히려 병조 정랑 조계형에게 역서(曆書)를 한글로 번역하도록 명했으며,[49] 1505년 9월 15일에는 죽은 궁녀의 제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의녀(醫女)에게 읽게 했다. 1506년 5월에는 "한글을 아는 여자를 각원(各院)에서 두 사람씩 뽑아 들이라"고 지시했고, 같은 해 6월에는 새로 뽑힌 기생인 흥청(興淸)과 운평(運平)들이 궁중 용어를 익히도록 관련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인쇄, 배포하게 했다.[9]
2. 8. 폐위와 최후
1506년 음력 9월 2일, 성희안, 유순정, 박원종, 신윤무 등은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의 측근인 신수근, 임사홍 등을 살해하고 궁궐을 장악했다. 이들은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훗날 중종)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연산군을 폐위시켰다. 정현왕후는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곧 반정 세력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반정이 일어나자 연산군은 음력 9월 2일 새벽, 궁궐의 혼란을 틈타 일반 백성처럼 옷을 갈아입고 말을 타고 궁궐을 빠져나가 한성부 근처 민가에 숨었으나, 박원종이 보낸 군사들에게 곧 체포되었다. 체포된 연산군은 즉시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져 '연산군'으로 강등되었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별감과 상궁들의 조롱을 묵묵히 견뎌냈으나, 유배 직후 열병을 앓아 오랫동안 고생했다. 이후 유배지는 강화도 근처의 교동도로 옮겨졌다.
강화도로 유배된 연산군을 독살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당시 강화부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장녹수는 한성부 종로, 남대문 등지에서 백성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으며[50](다른 기록에는 참수되었다고도 한다), 정비 폐비 신씨도 함께 폐위되었다. 연산군의 아들들 역시 반정 세력에 의해 살해당했다.[50] 중종은 조카들이 어리고 처지가 딱하다는 이유로 처형을 반대했지만, 반정 공신들은 훗날 이들이 왕위를 노리는 세력의 중심이 될 것을 우려하여 강력히 처형을 주장했고, 결국 중종은 이를 받아들여 아들들은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10] 딸들은 노비가 되는 비극을 맞았다.
교동도에서의 유배 생활 중, 연산군은 아들인 폐세자 황이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아 단식하며 괴로워했다. 교동도로 옮겨진 지 2개월 만인 그해 음력 11월 6일, 연산군은 역질(천연두로 추정됨)과 화병 등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31세였다. 숨을 거두기 직전 부인 폐비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50]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민간에서는 독살설이 퍼지기도 했다.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폐위된 왕이기 때문에 묘호나 시호는 없다.
3. 사후
연산군이 사망한 후, 그의 신분과 제사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중종은 연산군이 비록 폐위되었으나 한때 국왕이었고 자신과 형제 관계임을 고려하여 일반 왕자군보다는 격을 높여 제사를 지내고자 했다. 그러나 후사를 세우는 문제에 대해서는 결정을 미루었다. 부인 거창군부인 신씨가 사망한 후, 결국 외손이 제사를 받드는 외손봉사로 결정되어 제사가 이어졌다.
3. 1. 장례와 제사 문제
1516년(중종 11년)부터 연산군의 제사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1] 연산군 사망 직후부터 제사는 부인인 거창군부인 신씨가 지내고 있었다.[1] 중종은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났지만 한때 국왕이었고 자신과는 형제인 지친(至親) 관계이므로, 제사를 일반 왕자군보다는 격을 높여 지내야 한다는 의견을 내비쳤다.[1] 또한 조선 왕실이 고려 국왕의 제사까지 이어온 전례를 볼 때, 명분이나 인정으로 보아 연산군의 제사가 끊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1] 중종은 연산군의 신분은 왕자군으로 하되 제사는 그보다 상향하여 지내게 하려 했으나, 관례대로 종실 가운데 후사를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후사가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을 우려하여 결정을 미루었다.[1] 이에 대해 사관은 '상(중종)이 폐주(연산군)의 후사가 없는 것을 슬퍼했으면, 동기간의 두터운 정으로 종실 사람을 선택해 후사를 이어가게 하고, 부박한 논의에 저지당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중종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비판했다.[1]1537년(중종 32년) 4월, 거창군부인 신씨가 사망하자 장례는 왕자군 부인의 예보다는 격을 높이고 왕비 부모의 예보다는 낮추어 치렀다.[1] 다시 연산군의 후사를 세우는 문제가 논의되었지만, 결국 외손봉사(外孫奉祀), 즉 외손이 제사를 받드는 것으로 결정되었다.[1] 연산군과 신씨 사이에는 외동딸 휘신공주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휘순공주(徵順公主)로 봉해졌다가 후에 휘신공주(徽愼公主)로 작호가 변경되었다.[1] 휘신공주는 1503년(연산군 9년) 부왕 생존 시 구문경에게 출가하여 아들 구엄을 낳았다.[1] 구엄은 연산군의 외손봉사자가 되면서 왕실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 그는 오랫동안 왕실의 외척으로 예우받았으며, 범죄를 저질렀을 때도 연산군의 제사를 끊기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감형되기도 했다.[1] 그러나 구엄에게도 아들이 없었고, 그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외손자인 이안눌이 연산군의 제사를 계승했다.[1] 이안눌은 구엄의 친외손자는 아니었다. 그는 이형의 아들로 태어나 아저씨뻘인 이필의 양자로 입양되었는데, 이필의 부인이 바로 구엄의 딸이었다.[1] 이처럼 연산군의 제사는 부인 신씨가 시작하여 외손자 구엄에게 이어졌고, 다시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과 그의 후예들에게로 이어졌다.[1]
4. 가족 관계
- '''부왕''' : 성종(成宗, 1457년 ~ 1494년)
- '''생모''' :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년 ~ 1482년) - 성종 10년(1479년) 폐위[81], 성종 13년(1482년) 사사됨[82]
- * 외조부 : 윤기견(尹起畎, 1416년 ~ ?)
- * 외조모 : 고령 신씨(高靈 申氏, 1426년 ~ ?)
- '''계모''' :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년 ~ 1530년)
- * 조부 : 덕종(德宗, 1438년 ~ 1457년) - 추존왕
- * 조모 :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년 ~ 1504년)
'''왕비'''
구분 | 이름 | 본관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왕비 | 폐비 신씨 (廢妃 愼氏)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 | 거창 | 1476년 ~ 1537년 | 거창부원군 신승선(居昌府院君 愼承善) 중모현주(中牟縣主) 이씨[83] | 중종반정으로 폐위 |
'''후궁'''
품계 | 이름 | 본관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숙의 (淑儀) | 숙의 이씨(淑儀 李氏) 정이(貞伊) | 양성 | 미상 | 이공(李拱) 이공의 첩 | 연산군 폐위 후 함께 폐위[18] |
숙의 (淑儀) | 숙의 윤씨(淑儀 尹氏) | 해평 | 1481년 ~ 1568년[84][20] | 윤훤(尹萱)[21] 부안 김씨 | 연산군 폐위 후 함께 폐위[18] |
숙의 (淑儀) | 숙의 곽씨(淑儀 郭氏) | 현풍 | 미상 | 곽인(郭璘)[22] 안동 권씨[85] | 중종 17년(1522년) 이후 사망, 연산군 폐위 후 함께 폐위[18] |
숙의 (淑儀) | 숙의 권씨(淑儀 權氏) | 안동 | 미상 ~ 1519년[86] | 권령(權齡)[22] 충주 박씨 | 연산군 폐위 후 함께 폐위[18] |
숙의 (淑儀) | 숙의 민씨(淑儀 閔氏) | 여흥 | 미상 ~ 1519년 이전 | 민효손(閔孝孫)[22] 파평 윤씨 | 연산군 폐위 후 함께 폐위[18] |
숙용 (淑容) | 숙용 장씨(淑容 張氏) 장녹수(張綠水) | 흥덕 | 미상 ~ 1506년 | 장한필(張漢弼) 미상 | 중종반정 때 참수됨 |
숙용 (淑容) | 숙용 전씨(淑容 田氏) 전비(田非) | 담양 | 미상 ~ 1506년 | 미상 | 중종반정 때 참수됨 |
숙용 (淑容) | 숙용 조씨(淑容 趙氏) | 한양 | 미상 | 조위(趙瑋) 조위의 첩 | |
숙원 (淑媛) | 숙원 최씨(淑媛 崔氏) 보비(寶非) | 미상 | 미상 | 미상 | 황윤헌의 첩[87][24] |
숙원 (淑媛) | 숙원 장씨(淑媛 張氏) | 미상 | 미상 | 미상 | [25] |
숙원 (淑媛) | 숙원 이씨(淑媛 李氏) | 미상 | 미상 | 미상 | [25] |
숙원 (淑媛) | 숙원 김씨(淑媛 金氏) 귀비(貴非) | 미상 | 1478년/1481년 ~ 1506년 | 미상 | 중종반정 때 참수됨 |
궁인 (內人) | 나인 최씨(內人 崔氏) 전향(田香) | 미상 | 미상 ~ 1504년 | 미상 | 연산군 10년(1504년) 처형됨[88] |
궁인 (內人) | 나인 ▨씨(內人 ▨氏) 수근비(水斤非) | 미상 | 미상 ~ 1504년 | 미상 | 연산군 10년(1504년) 처형됨[89] |
궁인 (內人) | 나인 정씨(內人 鄭氏) 금(今) | 미상 | 1484년 ~ 미상 | 미상 | |
궁인 (內人) | 나인 김씨(內人 金氏) 숙화(淑華) | 미상 | 1480년 ~ 1506년 | 김의(金依) 미상 | 나주 기생 백견(白犬), 중종반정 때 참수됨 |
여완 (麗婉) | 여완 ▨씨(麗婉 ▨氏) 월하매(月下梅) | 미상 | 미상 ~ 1505년/1506년 | 미상 | |
여원 (麗媛) | 여원 안씨(麗媛 安氏) | 미상 | 1476년 ~ 미상 | 미상 | |
기타 | 장씨(張氏) | 미상 | 미상 | 미상 | |
기타 | 의녀 강씨(醫女 姜氏) 금(今) | 미상 | 미상 | 미상 |
'''자녀'''
구분 | 작호 | 이름 | 생몰년 | 생모 | 배우자 | 비고 |
---|---|---|---|---|---|---|
왕자 | 원손(元孫)[90][91] | 불명 | 1494년 ~ 1494년 | 폐비 신씨 | 요절[13][14] | |
왕녀 | 휘신공주 (徽愼公主)[105] 휘순공주(徽順公主) | 수억(壽億) | 1491년 ~ 미상 | 폐비 신씨 | 능양위 구문경(綾陽尉 具文璟)[106] | 중종반정으로 폐서인[15], 후에 이혼[16] |
왕녀 | 공주(公主)[107] | 불명 | 미상[108] | 폐비 신씨 | 요절 추정 | |
왕녀 | 공주(公主)[109][110] | 불명 | 1495년 ~ 미상 | 폐비 신씨 | 요절 추정 | |
왕자 | 폐세자(廢世子) | 황(𩔇) | 1498년 ~ 1506년 | 폐비 신씨 | 미혼[92] | 중종반정 후 사사됨[93][17] |
왕자 | 양평군(陽平君)[94] | 인(仁) | 1498년 ~ 1506년 | 숙의 이씨 | 중종반정 후 사사됨[95][17] | |
왕녀 | 옹주(翁主)[111] | 복억(福億) | 1499년 ~ 미상 | 미상 | ||
왕자 | 창녕대군 (昌寧大君)[96] | 성(誠) | 1500년 ~ 1506년 | 폐비 신씨 | 중종반정 후 사사됨[97][17] | |
왕녀 | 옹주(翁主)[112] | 복합(福合) | 1501년 ~ 미상 | 미상 | ||
왕자 | 군(君)[98] | 돈수(敦壽) | 1501년 ~ 1506년 | 미상 | 중종반정 후 사사됨[99][17] | |
왕자 | 대군(大君)[100][102] | 인수(仁壽) | 1501년 ~ 1503년 | 폐비 신씨 | 요절 | |
왕자 | 대군(大君)[101] | 불명 | 1502년 ~ 미상 | 폐비 신씨 | 요절 추정 | |
왕녀 | 옹주(翁主)[113][114] | 영수(靈壽) | 1502년 ~ 1517년 이후 | 숙용 장씨 | 권한(權鷴)[115] | |
왕자 | 군(君)[102] | 총수(聰壽) | 미상 ~ 1503년 | 미상[103] | 요절 | |
왕자 | 군(君)[102] | 영수(榮壽) | 미상 ~ 1503년 | 미상 | 요절 | |
왕녀 | 옹주(翁主)[116] | 정수(貞壽) | 1505년 ~ 1507년 이후 | 미상 | ||
왕자 | 군(君)[104] | 태수(泰壽) | 1506년 ~ 1506년 | 미상 | 요절 | |
왕녀 | 옹주(翁主)[113][114] | 함금(咸今) | 생몰년 미상 | 숙용 장씨 | 신거홍(愼居弘) | |
왕녀 | 옹주(翁主)[117] | 불명 | 미상 | 숙용 전씨 |
5. 연산군이 등장하는 작품
- '''희곡''' : 이 - 김태은 작, 2000년 초연[28]
- '''만화''' : 대군으로 살아라 (SMARTOON, 글: Dopamine / 그림: KIM TaeHyung / 원안: Gu-sa)
5. 1. 드라마
- 《사모곡》 (TBC, 1972년 배우:김세윤)
- 《설중매》 (MBC, 1984년~1985년 배우: 임영규)[34]
- 《한명회》 (KBS, 1994년 배우:이민우, 아역:이동엽, 김푸름)[34]
- 《장녹수》 (KBS, 1995년 배우:유동근, 아역:주한울)[34]
- 《임꺽정》 (SBS, 1995년~1996년 배우:유인촌)
- 《홍길동》 (SBS, 1998년 배우:노영국)
- 《왕과 비》 (KBS, 1998년~2000년 배우:안재모, 아역:김학준)[34]
- 《여인천하》 (SBS, 2001년~2002년 배우:김양우)
- 《대장금》 (MBC, 2002년~2003년 배우:정기성, 아역:원덕현)[34]
- 《왕과 나》 (SBS, 2006년~2007년 배우:정태우, 아역:정윤석)[34]
- 《인수대비》 (JTBC, 2011년~2012년 배우:진태현, 아역:김진우, 조은찬, 방태웅)[34]
-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 (MBC, 2017년 배우:김지석, 아역: 박민수)[34]
- 《7일의 왕비》 (KBS, 2017년 배우:이동건, 아역: 안도규, 이승우)[34]
5. 2. 영화
- 1962년 《연산군》 - 신영균 [29][30] (박종화의 소설 '금삼의 혈' 영화화 작품)
- 1962년 《폭군 연산》 - 신영균
- 1987년 《연산군》 - 이대근 [31]
- 1988년 《연산일기》 - 유인촌 [32]
- 2005년 《왕의 남자》 - 정진영 [11][28] (김태은의 희곡 '이' 영화화 작품)
- 2015년 《간신》 - 김강우 [33]
5. 3. 소설
- 錦衫의 血 (금삼의 혈) - 박종화 작. 매일신보에 1936년 3월 20일부터 12월 29일까지 연재되었으며, 1938년 박문서관에서 상하권으로 출판되었다[26]. 2017년에는 세움에서 ISBN 9791187192305로 재출간되었다.
- 洪吉童 (홍길동) - 박연희 작. 동아일보에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연재되었고, 1975년 갑인출판사에서 전6권으로 출판되었다[27].
- 조선왕조 500년 사모곡, 폭군 연산 - 신봉승 작. 1985년 금성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 조선국왕 연산군 - 이수광 작. 2015년 천문에서 출판되었다 (ISBN 9788931578584).
참조
[1]
서적
Historia Korei
Dialog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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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log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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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Yi Seong-gye and the Fate of the Goryeo Buddhist System
https://accesson.kr/[...]
2024-01-17
[5]
연대기
Annals
1506-07-14
[6]
웹사이트
연산 52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3월 13일(갑술) 8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국립한국역사박물관
2015-12-09
[7]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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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04-01
[8]
웹사이트
https://blog.jmagazi[...]
[9]
웹사이트
https://www.hangeu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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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11]
뉴스
E-Annals Bring Chosun History to Everyman
http://english.chosu[...]
2012-10-16
[12]
문서
1498년의 戊午士禍・1504년의 甲子士禍・1506년의 丙寅士禍
[13]
문서
왕세자빈탄생원손
[14]
문서
戊午/國忌. 元孫卒. 傳曰, 皇天不佑, 今失元孫, 痛怛曷已, 其生未滿一月, 不可謂之殤, 其喪制限百日, 且依順淑公主例, 勿令禮曹掌之, 而地理學擇吉葬之
[15]
웹사이트
휘순공주[徽順公主]
https://terms.naver.[...]
2019-04-03
[16]
문서
且近見傳旨, 除徽愼公主之號、以具文璟妻稱之。其始文璟之父壽永、啓請離異、是不識事理也、國家亦不必使之離異也
[17]
웹사이트
폐세자이황(李𩔇)
http://people.aks.ac[...]
2019-04-03
[18]
문서
傳曰, 前王淑儀, 淑容, 淑媛等, 在昌德宮者, 其可放出. 僉啓曰, 淑儀令歸私第, 淑容, 淑媛如張, 田之類, 治罪後放出爲當
[19]
문서
卒參判李拱妻琴氏上言, 其略曰, 家翁妾女子貞伊年十一歳, 時以侍女, 入侍昭惠王后殿, 廢主東宮時移入
[20]
웹사이트
2015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개관 80주년 기념 소장품 특별전 <조선백자> 청소년 활동지 교사용 해설
http://cms.ewha.ac.k[...]
2019-04-03
[21]
문서
朔丙午/傳曰, 尹萱女子以淑儀入闕
[22]
문서
戊辰/傳曰, 郭璘, 權齢, 閔孝孫, 特陞堂上. 皆淑儀父也
[23]
문서
田淑媛之女, 避寓于夢宣家, 因縁内達, 遂有此命
[24]
문서
命生員鄭承祥爲翊衛司衛率, 承祥, 厚賂崔淑媛母, 得拜
[25]
문서
下御書曰, 以李氏, 張氏爲淑媛
[26]
웹사이트
금삼의 피
http://encykorea.aks[...]
[27]
뉴스
朴淵禧씨作「洪吉童」도
https://newslibrary.[...]
1975-03-10
[28]
뉴스
[공연가]연극‘이(爾)’
https://www.mk.co.kr[...]
2005-12-21
[29]
뉴스
‘사극’ 열기 이어 1950년대 조선왕 영화 공개
http://www.newscj.co[...]
2012-01-29
[30]
웹사이트
연산군 출연&스텝
https://movie.daum.n[...]
2019-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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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출연&스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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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일기 출연&스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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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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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강우&주지훈「背徳の王宮」5月の韓国公開を確定…強烈なポスター&予告編公開(動画あ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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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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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검색 조선왕조 500년 설중매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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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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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 Daum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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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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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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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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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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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서유위율 [制書有違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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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한글 탄압과 능이 되지 못한 연산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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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모든 백성이 사용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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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5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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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⑦ 연산군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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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교동도' .. 연산의 혼 달래는 백로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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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청망청 [興淸亡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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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대 한강 배다리⾈橋의 구조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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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를 여러 번 입혀 옷칠하여 만든 투구, 총알도 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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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판’은 조선 과거 시험장에서 유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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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융사(備戎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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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감로도에 나타난 조선의 비구니승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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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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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생각 5] 조선시대의 노총각 노처녀 구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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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들 떼지어 비구니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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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비구니 교단에 대한 여성주의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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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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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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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사(興德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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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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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컷탐험대] '조선에선 안돼!' 아귀(餓鬼)를 달래는 의식, '수륙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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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회 연산군이 어머니의 복수를 시작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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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도 두려워한 사관(史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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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사매거진
20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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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62권, 12년 5월 24일(계묘) 1번째기사 / 대비전에 진연하고 신수근 등에게 음식을 보내 술과 풍악을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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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연대기 조선 동국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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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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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식권공언해 (施食勸供諺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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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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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정운 (東國正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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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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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법보단경언해』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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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대사법보단경(언해) 권상 (六祖大師法寶壇經(諺解) 卷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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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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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정운한자음 중성 교정에 대한 고찰 : ㆁ 종성류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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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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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문서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3월 25일 (병술) 폐비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증하는 교서를 내리다
[80]
문서
중종반정후 삭탈
[81]
문서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1479년 명 성화(成化) 15년) 6월 2일 (정해) 중궁 폐출의 교서를 내리다
[82]
문서
성종실록 144권, 성종 13년(1482년 명 성화(成化) 18년) 8월 16일 (임자) 이세좌에게 명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하게 하다
[83]
문서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딸
[84]
문서
백화청자 숙의 윤씨 묘지명
[85]
문서
양녕대군의 외손녀
[86]
문서
중종실록 35권, 중종 14년(1519년 명 정덕(正德) 14년) 2월 27일 (신묘) 정원의 계를 따라 패주의 후궁 권씨의 상에 부의하게 하다
[87]
문서
연산군일기 60권, 연산 11년(1505년 명 홍치(弘治) 18년) 10월 6일 (정사) 생원 황윤헌을 밀위청에 가두라고 명하다. 황윤헌(黃允獻)의 첩 보비(寶非)에 대한 설명
[88]
문서
연산군일기 54권, 연산 10년(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6월 9일 (무진) 전향과 수근비를 능지하다
[89]
문서
연산군일기 54권, 연산 10년(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6월 9일 (무진) 전향과 수근비를 능지하다
[90]
문서
성종실록 287권, 성종 25년(1494년 명 홍치(弘治) 7년) 2월 23일 (임오) 왕세자빈이 원손을 탄생하다
[91]
문서
성종실록 288권, 성종 25년(1494년 명 홍치(弘治) 7년) 3월 29일 (무오) 원손이 졸하다
[92]
문서
1506년(연산군 12년) 2월, 정세명(丁世明)의 딸과 관련된 내용
[93]
문서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1506년 명 정덕(正德) 1년) 9월 24일 (경자) 폐세자 이황 · 창녕대군 이성 · 양평군 이인 · 이돈수 등을 사사하다
[94]
문서
왕자 강수아기씨 태지석(王子康壽阿只氏胎誌石)
[95]
문서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1506년 명 정덕(正德) 1년) 9월 24일 (경자) 폐세자 이황 · 창녕대군 이성 · 양평군 이인 · 이돈수 등을 사사하다
[96]
문서
대군 인수(麟壽)아기씨 태지석
[97]
문서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1506년 명 정덕(正德) 1년) 9월 24일 (경자) 폐세자 이황 · 창녕대군 이성 · 양평군 이인 · 이돈수 등을 사사하다
[98]
문서
왕자 돈수아기씨 태지(王子敦壽阿只氏胎誌)
[99]
문서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1506년 명 정덕(正德) 1년) 9월 24일 (경자) 폐세자 이황 · 창녕대군 이성 · 양평군 이인 · 이돈수 등을 사사하다
[100]
문서
대군 인수(仁壽)아기씨 태지
[101]
문서
연산군일기 44권, 연산 8년(1502년 명 홍치(弘治) 15년) 5월 29일 (경자) 거창 부원군의 상장에 관하여 어서를 내리다
[102]
문서
연산군일기 51권, 연산 9년(1503년 명 홍치(弘治) 16년) 10월 18일 (신해) 임사홍으로 하여금 대군의 산소 자리를 보게 하다
[103]
문서
폐비 신씨와 총수, 영수 왕자에 대한 내용
[104]
문서
왕자 태수아기씨 태지(王子泰壽阿只氏胎誌)
[105]
문서
세자빈의 딸 수억아기씨 태지(世子嬪女壽億阿只氏胎誌)
[106]
문서
세종의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의 외손자
[107]
서적
성종대왕 묘지문
[108]
문서
휘신공주(1491년 9월 22일생)와 원손(1494년 2월 23일생)의 출생연도와 생일을 감안하면 1492년 혹은 1493년생으로 1494년 12월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보임
[109]
문서
연산군부인 신씨 묘지명
[110]
서적
연산군일기
1495-02-11
[111]
서적
왕녀 복억아기씨 태지
[112]
서적
왕녀 복합 태지석
[113]
서적
중종실록
1517-09-01
[114]
서적
중종실록
1518-01-17
[115]
서적
중종실록
1529-06-01
[116]
서적
왕녀 정수아기씨 태지
1505-03-11
[117]
서적
연산군일기
1505-10-12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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