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손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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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손숭은 대나라 남부 대인의 아들로, 14세에 군대를 이끌었으며, 북위 건국에 기여한 인물이다. 부견의 대나라 병합 이후 유고인에게 귀부했다가 탁발규에게 귀순하여 남부 대인이 되었고, 유연을 격파하는 등 북위의 북벌에 참여했다. 후연 정벌에서 공을 세워 기주자사, 사도 등을 역임했고, 동진의 유유와 대치하기도 했다. 탁발도 즉위 후 북평왕에 봉해졌으며, 태무제의 하 원정에 반대하다가 부정부패 혐의로 치욕을 겪기도 했다. 437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시호는 선왕이다.
391년 유연을 상대로 한 북벌에 종군하여 대적의 남쪽 창산 기슭에서 유연을 격파하고, 장손비와 함께 유연을 추격하여 평망천에서 유연의 부수 옥격을 사로잡아 참수했다. 392년 서부문려 대인 모선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격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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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410년 유연을 상대로 한 북벌의 주장을 맡았다가 남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연의 추격을 받아 우천에서 포위되었으나, 명원제가 출격하여 구원하여 유연의 사륜은 포위를 풀고 패주했다.
태무제가 하와 유연 중 어느 쪽을 먼저 공격해야 할지 자문하자 장손한과 해근 등과 함께 유연을 먼저 공격할 것을 권했다. 425년 태위에 올랐다. 같은 해 혁련발발이 사망하고 관중이 혼란해지자 태무제는 구겸지, 두초, 최호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하에 대한 원정을 결정했다. 장손숭은 강력하게 간했지만, 태무제의 노여움을 사 부정부패의 죄를 뒤집어쓰고 치욕을 당했다. 429년 태무제가 북벌을 하자 광릉공 누복련과 함께 평성의 유수를 맡았다.
2. 1. 초기 생애와 북위 건국
376년 부견이 대나라를 병합한 후, 대나라를 둘로 나누어 동쪽을 유고인에게 통치하게 하자 유고인에게 귀부하였다. 385년 유현이 유고인의 동생 유권을 살해하자 다시 탁발규에게 귀의하였다. 386년 탁발규가 제위에 오르자 장손숭은 아버지를 이어 남부대인(南部大人)이 되었다.
2. 2. 후연 정벌과 관직 생활
376년 부견이 대나라를 병합한 후 동쪽을 유고인에게 통치하게 하자 그에게 귀부했다. 385년 유현이 유고인의 동생 유권을 살해하자 탁발규에게 귀의했다. 386년 탁발규가 즉위하자 아버지를 이어 남부대인(南部大人)이 되었다. 397년 후연 정벌에 참가, 중산(中山) 함락에 공을 세워 기주자사로 임명되었고 거록공(鉅鹿公)에 봉해졌다. 398년 윤국선(尹國先)이 기주(冀州)에서 반란을 시도하려는 계획을 입수해 진압했고, 그 공으로 사도 및 상주자사(相州刺史)에 제수되었으며 남평공(南平公)에 봉해졌다.
2. 3. 유유의 북벌과 북위 방어
397년(황시 2년), 북위가 후연을 공격할 때 중산을 함락시켜 장손숭은 기주자사에 임명되고 거록공에 봉해졌다. 398년(천흥 원년) 1월, 우군장군 윤국이 기주에서 반란을 계획하자 장손숭은 그를 체포하여 도무제에게 보냈다. 같은 해 4월, 사도에 올랐고, 이후 상주 자사로 옮겨 남평공에 봉해졌다.
417년(태상 2년), 동진의 유유가 후진의 요홍을 공격하기 위해 북벌을 감행하자, 장손숭은 명원제에게서 가절을 받고 도독 산동 제군사가 되어 평원에서 황하 북쪽 기슭을 따라 진군하여 반성에 들어갔으나 유유의 군대에 패했다. 그해 가을, 유유가 서쪽으로 진군하여 진군과 대치하자, 북위는 평성에서 숙손건 등을 파견하여 장손숭과 합류시켰다. 장손숭은 숙손건 등과 함께 성고에서 제수를 남쪽으로 건너 동진의 여러 성을 함락시켜 유유의 후방을 위협했다. 유유가 장안을 함락시키자 장손숭은 군대를 철수시켰다.
422년(태상 7년), 명원제가 병상에 눕자 장손숭은 황제에게 후사를 물었고, 황태자 태평왕 탁발도를 세자로 세울 것을 권했다. 태평왕 탁발도가 명원제를 대신하여 조정 회의에 참석하고 감국을 맡게 되자 장손숭은 그 아래에서 좌보가 되었다. 423년(태상 8년), 탁발도(태무제)가 즉위하자 장손숭은 북평왕에 봉해지고 사주 중정이 되었다.
2. 4. 태무제 즉위와 말년
386년 탁발규(도무제)가 즉위하자 아버지를 이어 남부대인(南部大人)이 되었다. 397년 후연 정벌에 참가해 중산(中山) 함락에 공을 세워 기주자사(冀州刺史)로 임명되었고 거록공(鉅鹿公)에 봉해졌다. 398년 윤국선(尹國先)이 기주에서 반란을 시도하려는 계획을 입수해 이를 진압하였고, 그 공으로 사도(司徒) 및 상주자사(相州刺史)에 제수되었으며 남평공(南平公)에 봉해졌다.
409년 명원제가 즉위하자, 장손숭은 산양후 해근, 북신후 안동, 백마후 최굉 등 8인과 함께 수레를 궁궐 문 오른쪽에 정렬시키고 백성들의 소송을 청취하여 심리했기에 당시 팔공(八公)으로 불렸다.
417년 동진의 유유(劉裕)가 후진(後秦)의 요홍(姚泓)을 정벌할 당시 탁발사(명원제)로부터 가절(仮節)을 수여받아 산동(山東)의 군대를 거느리고 유유와 대치하였으며, 422년 탁발사가 후사를 의논하자 탁발도(태평왕)를 추천하여 좌보(左輔)를 맡았다. 423년 탁발도(태무제)가 즉위하자 사주중정(司州中正)이 되었으며, 북평왕(北平王)에 봉해졌다.
425년 태위(太尉)로 임명되었으며, 431년 주국대장군(柱國大將軍)이 더해졌다. 437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선왕(宣王)이다.
3. 평가
4. 가족 관계
관계 이름 비고 후사 장손퇴 북평왕, 시중·정남대장군. 442년에 죄를 물어 후로 강봉되었으나, 후에 복작됨. 아들 장손수 자는 칙근릉, 촉군공, 좌광록대부·정동대장군·청주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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