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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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혁련발발은 흉노 철불부의 후예로, 오호십육국 시대에 대하(夏)나라를 건국한 인물이다. 407년 후진으로부터 독립하여 대선우, 대하천왕을 칭하고 용승으로 건원하며 대하를 건국했다. 그는 흉노의 성씨인 유(劉)를 버리고 혁련으로 개명하고 통만성을 축조하여 세력을 키웠다. 417년 동진의 유유가 후진을 멸망시키자 장안을 점령하고 황제에 즉위했으나, 잔혹한 통치로 인해 425년 사망 후 하나라는 급속히 쇠퇴했다. 혁련발발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가를 건설하고 주변 세력에 맞섰으나, 폭정과 살육을 즐기는 잔혹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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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은 동진 시대의 관료이자 사학자로서, 《진기》 편찬, 차복의주 제정 참여, 유유의 유송 건국 지지, 유교적 가치관에 따른 국가 충성 및 사회 질서 중시 등의 활동을 했으며 그의 사상은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 하의 황제 - 혁련창
혁련창은 오호십육국 시대 하나라의 2대 황제로, 즉위 후 서진을 공격했으나 북위의 침공으로 세력이 쇠퇴하여 북위의 포로가 되었다가 반란을 시도하다 살해당했다. - 하의 황제 - 혁련정 (하)
혁련정은 428년 하나라의 대선우로 즉위하여 관중과 오르도스 지역을 탈환했으나, 북위의 공격으로 멸망 직전 상으로 도주하고, 남안과 북량을 공격하다가 토욕혼에게 패배하여 사로잡혀 432년 북위에 의해 처형되었다.
혁련발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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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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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대선우, 대하천왕 (407년 ~ 417년) |
칭호 | 황제 (417년부터) |
추존 시호 | 무열황제(武烈皇帝) |
묘호 | 세조(世祖) |
씨족 | 염제 강(炎帝 姜)씨의 후예 |
성 | 류(劉) (413년 이전) |
성 | 혁련(赫連) (413년 이후) |
휘 | 발발(勃勃) |
출생 | 381년 |
사망 | 425년 |
재위 정보 | |
즉위 | 407년 |
퇴위 | 425년 |
이전 | 없음 |
이후 | 혁련창 |
연호 | 용승(龍昇): 407년 ~ 413년 봉상(鳳翔): 413년 ~ 418년 창무(昌武): 418년 ~ 419년 진흥(真興): 419년 ~ 425년 |
가계 | |
부친 | 유위진 |
모친 | 부씨(苻氏) |
배우자 | 양황후(梁皇后) |
기타 | |
능묘 | 가평릉(嘉平陵) |
2. 생애
거비의 후예이자 옛 철불부의 지도자인 유발발은 아버지 유위진(劉衛辰)이 죽자 오르도스 서남쪽 고평(高平)까지 도망쳤으나, 그 후에도 북위의 토벌군이 여러차례 공격해 와 유랑끝에 후진에 몸을 의탁했다. 후진은 북위의 침입을 막기 위해 유발발을 오르도스에 배치했다.
407년 유발발은 옛 철불부 및 선비 여러부족을 규합한 뒤 후진에게서 독립하여 대선우(大単于), 대하천왕(大夏天王)이라 칭하고 용승(龍昇)으로 건원(建元)하였다. 이것이 대하국의 건국이다. 그 해 하나라는 오르도스 전역을 평정하였으며, 유발발도 본래 흉노의 성씨인 혁련씨로 개명하였다. 또한 견고한 통만성(統萬城)을 축성하여 세력을 키웠다. 당시 중원의 지배적 세력이었던 북위에 대항하기 위해 414년 북연과 동맹을 맺어 견제케 하고, 그해부터 다음해까지 산서 일대를 공략하였다.
417년 관중의 후진이 동진의 유유에 의해 멸망당하자, 418년 하나라 군은 남하하여 동진의 후방 수비대를 격파하고 장안 등 관중 여러성을 점령했다. 그해 혁련발발은 제위에 올라 419년 진흥(眞興)이라 개원하고 통만성을 수도로 정한 뒤 귀환했다. 하나라의 영역은 관중, 오르도스, 산서 남부에 이르렀고, 토번, 북량을 복속시켜, 화북 서쪽에서 대세력을 쌓았다.
424년 장안에서 반란이 일어나 내란상태가 되고, 425년 혁련발발이 죽자 하나라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혁련발발의 아들 혁련창이 2대 대선우가 되었다.
2. 1. 초기 생애
혁련발발은 381년 흉노 철불부의 수장이자 전진(前秦)의 제후였던 유위진(劉衛辰)의 아들로 태어났다.[2] 유위진은 현재 내몽골 자치구의 황하 남쪽과 섬서성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후진(後秦)과 서연에 복종했지만, 실제로는 독립적인 통치자였다.[2] 391년, 유위진은 아들 유직력제(劉直力鞮)를 보내 북위의 탁발규를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유위진은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유직력제는 북위에 포로로 잡혔고, 철불부는 멸망했다.[14][15]혁련발발은 가까스로 탈출하여 설간 부족으로 피신했으나, 북위와의 대립을 우려한 수장 태십복(太悉伏)은 그를 후진의 제후 모역간(沒奕干)에게 보냈다.[2] 모역간은 혁련발발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자신의 딸과 혼인시켰다.[2] 393년 태실복은 탁발규에게 발발을 넘겨주지 않아 북위에게 공격받아 후진에 항복했다. 402년 북위의 탁발준이 고평을 공격하자 모역간은 발발과 함께 후진으로 도망쳤다.[16] 이후 후진이 고평을 되찾아 모역간에게 돌려주었다.
이후 혁련발발은 뛰어난 외모와 재능으로 후진 황제 요흥의 눈에 띄었다.[13] 요흥은 그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북방을 방어하게 했다.[4] 요흥은 혁련발발을 효기장군, 봉차도위, 안원장군, 양천후에 봉했다. 또한 안북장군으로 승진시켜 오원공으로 개봉하고 삼교오부의 선비 및 잡로 2만여 락을 통괄하여 삭방군에 진수시켰다.[17] 407년, 요흥이 북위와 화친을 맺자, 북위에 아버지를 잃은 혁련발발은 이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켰다.[14] 그는 장인 모역간을 기습하여 살해하고 그의 군대를 빼앗은 뒤, 하나라의 후손이라 칭하며 대하를 건국했다.[14]
2. 2. 하 나라 건국
407년, 혁련발발은 후진에 반기를 들고 독립하여 대하천왕(大夏天王), 대선우(大単于)를 칭하며 하(夏)나라를 건국했다. 그는 흉노의 전통적인 성씨인 유(劉)씨를 버리고 "혁혁한 위세가 하늘과 닿는다"는 의미를 담은 혁련(赫連)씨로 개명했다.[7][13] 혁련발발은 견고한 도성인 통만성을 축조하여 방어력을 강화하고, 주변 세력을 복속시키며 세력을 확장했다.혁련발발은 후진을 약화시키는 데 집중하여 끊임없이 후진의 북부 영토를 괴롭히고 자원을 고갈시켰다.[7] 408년, 후진의 장군 기난(齊難)이 공격해 오자, 혁련발발은 처음에는 두려워하는 척하며 물러났지만, 기난을 안심시킨 후 기습적인 반격을 가해 사로잡았다. 이후 후진의 북부 영토 대부분이 하(夏)의 손에 떨어졌다. 409년, 후진의 요흥이 직접 공격했지만, 혁련발발에게 대패했다.
413년, 혁련발발은 난공불락의 수도를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잔인한 장군 질간알리(叱干阿利)에게 수도 건설을 맡겼다.[5] 수도의 이름은 통만(統萬)으로 정했는데, 이는 중국을 통일하고 만 개의 국가의 군주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5] 질간알리는 성벽을 건설하는 데 사용된 흙을 찌도록 명령하여 흙을 단단하게 만들어 공격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건설 과정에서 종종 성벽을 시험했다. 쇠쐐기를 벽에 1인치라도 박을 수 있으면 해당 구역을 담당한 인부들을 처형했다.[5]
417년, 동진의 유유가 후진을 멸망시키고 장안을 점령하자, 혁련발발은 장안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2. 3. 후진과의 전쟁
혁련발발은 후진을 약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북부 영토를 침공하여 괴롭혔다.[7] 408년에는 후진의 장군 제난(齊難)을 기습하여 사로잡았고(청석원 전투)[18], 409년에는 요흥이 직접 이끄는 군대를 대파하는 등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13] 이러한 군사적 성공을 통해 하 나라는 오르도스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18] 후진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14]407년, 혁련발발은 남량의 탁발녹단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하자 남량을 공격, 양무 하협에 가두어 크게 격파했다(양무 전투).[18] 409년, 혁련발발이 자주 변경을 침략하여 약탈하자 요흥은 친정했으나, 대패했다. 그 후에도 잦은 남하를 통해 후진을 공격했지만, 오르도스 남쪽에 있는 행성, 안정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417년까지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때, 후진의 진북장군 왕매덕이 혁련발발에게 항복했다.[18]
2. 4. 동진과의 대립
혁련발발은 417년, 동진의 유유가 후진을 멸망시키고 장안을 점령하자, 이 기회를 틈타 관중(關中)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동진 군대를 격파하고 장안을 점령하여 황제(皇帝)에 즉위했다.혁련발발의 신하들은 수도를 장안으로 옮길 것을 건의했지만, 그는 통만성(統萬城)이 북위를 방어하기에 더 유리하다고 믿고 이를 거부했다. 대신 통만성을 수도로 유지하면서, 혁련귀(赫連歸)를 총독으로 삼아 장안을 관리하게 했다.
진(晉)에 대한 원정은 혁련발발의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이 시기에 그는 점점 더 잔혹해졌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백성을 들풀과 겨자 잎처럼 취급하였고, 활과 화살을 들고 누각에 올라가 있다가 불신, 혐오, 분노가 드는 사람을 직접 죽였다고 한다. 그의 신하 중 누구라도 그를 빤히 쳐다보면 눈을 도려냈고, 함부로 웃는 자는 칼로 입술을 베었으며,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자는 먼저 혀를 자르고 머리를 베었다고 한다.
2. 5. 통치와 최후
혁련발발은 대부분의 신하들이 수도를 장안으로 옮길 것을 건의했으나, 북위를 방어하기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통만성을 수도로 유지하였다.[20] 그는 혁련귀(赫連歸)를 총독으로 삼아 장안을 관리하게 했다.[20]혁련발발은 잔혹한 통치 방식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활과 화살을 들고 누각에 올라가 있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직접 죽였으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신하의 눈을 도려내거나 함부로 웃는 자의 입술을 베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20] 감히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자는 혀를 자르고 머리를 베었다.[20] 그는 백성을 들풀과 겨자 잎처럼 취급하며 억압했다.
424년, 혁련발발은 태자 귀를 폐하고 혁련륜(赫連倫)을 새 태자로 삼았다. 이에 혁련귀는 군대를 이끌고 혁련륜을 공격했으나, 혁련륜의 형제인 혁련창이 혁련귀를 기습하여 죽였다. 혁련발발은 이를 기뻐하며 혁련창을 태자로 삼았다.[20]
425년 여름, 혁련발발은 사망했고, 혁련창이 뒤를 이었다.[20] 혁련발발 사후 하나라는 급속히 쇠퇴했다. 혁련발발은 비한인으로서 중국에 군림하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14] 이는 통만성의 명명 이유와 성문의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14] 그는 오호 십육국 시대에서도 가장 한화되지 않은 정권을 세우고 정복 왕조적 의식을 유지했다.[14] 역사상 두 번째로 연호를 새긴 화폐 "태하진흥"을 주조하고, 성곽 건축법에 영향을 미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22]
3. 평가
혁련발발은 "천하를 통일하고 만방을 임한다"라는 통만성의 명명 이유와, 통만성 성문에 조송문(남조 송에 조공을 받음), 초위문(북위를 복종시킴), 복량문(북량을 복속시킴), 평삭문(유연을 평정함)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비한인으로서 중국에 군림하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다만, 실현된 것은 북량을 일시적으로 복속시킨 것뿐이다).[14] 장안을 평정하기 전까지 유목이나 반농반목 지역에서 활동했으며[21], 오호 십육국 시대에서도 가장 한화되지 않은 정권을 세우고 정복 왕조적 의식을 유지했다.[14] 업적으로는, 역사상 두 번째로 연호를 새긴 화폐 "태하진흥"의 주조와 성곽 건축법 등이 있다. 발발이 건설한 통만성의 성벽은 오대 십국 시대에 이르러서도 영향을 미쳤다.[22]
3. 1. 긍정적 평가
혁련발발은 혼란한 시기에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가를 건설하고, 주변 강대국들에 맞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14] 특히 "천하를 통일하고 만방을 임한다"는 의미를 담은 통만성을 축조하고, 각 성문에 조송문, 초위문, 복량문, 평삭문 등의 이름을 붙여 남조 송, 북위, 북량, 유연 등을 복속시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14] 비록 이러한 목표가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오호 십육국 시대에서 가장 한화되지 않은 정권을 세우고 정복 왕조적 의식을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4] 또한, 역사상 두 번째로 연호를 새긴 화폐인 "태하진흥"을 주조하고, 성곽 건축 기술을 발전시키는 등 업적을 남겼다.[22] 그가 건설한 통만성은 오대 십국 시대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견고하고 웅장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22]3. 2. 부정적 평가
혁련발발은 흉폭하고 잔인하며 살육을 즐겼다고 전해지며, 불교 설화에도 발발이 관중을 점령했을 때 불승을 대량 학살했다는 기록이 있다.[10] 그의 폭정은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고, 국가의 장기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진서』 권130의 「혁련발발재기」에는 그의 잔혹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성 위에 있을 때는 항상 활과 칼을 곁에 두고,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그 자를 죽였다. 군신 중 자신을 정면으로 보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훼손하고, 웃는 자가 있으면 그 입술을 찢고, 간언하는 자가 있으면 비방이라고 하여 그 혀를 잘라내고, 그런 다음 참살했다고 한다.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한 것은 지도자로서의 자질 부족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비판받는다.
다만, 『진서』는 "그 채택한 바는, 정전을 소홀히 하고 소설을 취한다" "이는 곧 바로 소설가의 체로, 어찌 '사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사고전서총목제요』진서 조에서 혹평하고 있으며, 위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24]
4. 가족 관계
혁련발발의 아버지는 철불부 추장 유위진(유위신)이며, 환황제로 추존되었다. 어머니는 부씨 부인으로, 환문황후로 추존되었다. 부인으로는 선비족 추장 몰이간(沒奕干)의 딸인 파다라 부인(破多罗夫人)과 하 양황후(414년 책봉)가 있었다.
자녀로는 태자 혁련규(414년 책봉, 424년 혁련창과의 전투에서 사망), 양평 공 혁련연(414년 책봉), 태원 공(414년 책봉)에서 이후 태자(424년 책봉)와 황제가 된 혁련창, 주천 공 혁련륜(414년 책봉, 424년 혁련규와의 전투에서 사망), 평원 공(414년 책봉)에서 이후 평원왕, 황제가 된 혁련정, 하남 공 혁련만(414년 책봉, 427년 북위군에 의해 사망), 중산 공 혁련안(414년 책봉), 혁련조흥, 혁련위이대, 상곡 공 혁련사간, 광양 공 혁련도락고, 단양 공 혁련오시발, 무릉 공 혁련독골, 혁련나물려, 북위 태무제의 태무황후와 태무제의 후궁들인 공주 2명이 있었다. 또한 탁발소의 처 등이 있었다.
5. 기타
5. 1. 화폐 주조
5. 2. 성격
5. 3. 한화 정책
5. 4. 逸話(일화)
혁련발발은 흉폭하고 잔인하며 살육을 즐겼다고 전해지며, 불교 설화에도 발발이 관중을 점령했을 때 불승을 대량 학살했다는 기록이 있다.[10] 한편, 기마 민족에게서는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23]진서 권130 「혁련발발재기」에는 그의 잔혹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419년 2월, 발발은 은사인 위조사를 국사로 장안에 불렀으나, 위조사가 발발 앞에서 두려워하며 과도한 예를 갖추자, 발발은 위조사가 요흥에게는 예를 갖추지 않았지만 자신에게는 엎드려 절한 것을 자신을 제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여 분노하여 위조사를 죽였다. 또한 성 위에 있을 때는 항상 활과 칼을 곁에 두고,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그 자를 죽였다. 군신 중 자신을 정면으로 보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훼손하고, 웃는 자가 있으면 그 입술을 찢고, 간언하는 자가 있으면 비방이라고 하여 그 혀를 잘라내고, 그런 다음 참살했다고 한다.
다만, 사고전서총목제요진서 조에서는 『진서』에 대해 "그 채택한 바는, 정전을 소홀히 하고 소설을 취한다", "이는 곧 바로 소설가의 체로, 어찌 '사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혹평하고 있어, 위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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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zhi Tongj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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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Sino-Tokharico-Altaica — Two Linguistic Notes
https://www.jsto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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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五胡十六国時代遊牧民研究
hdl:10959/3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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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庫全書総目提要 史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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