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
1. 개요
장오는 전한 초기의 인물로, 조나라 왕 장이의 아들이자 전한 고제의 사위이다. 그는 아버지 장이가 조나라 왕이 된 후 성도군에 봉해졌으며, 이후 조나라 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조왕이 되었다. 고조의 딸 노원공주와 결혼하여 황제의 사위가 되었으며, 고조가 흉노에게 패하여 돌아올 때 비굴한 태도를 보인 일로 재상 관고 등이 고조 암살을 시도하는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관고의 변호로 사면받고 선평후로 봉해졌다. 장오는 고황후 시대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장언은 노원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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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81년 사망 -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아들로 기원전 210년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제5차 시리아 전쟁에서 패배하고 로마의 중재로 클레오파트라 1세와 결혼했으며, 로제타석 제작을 통해 치세를 칭송받았고, 이집트 원주민의 반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프톨레마이오스 6세 등을 자녀로 두었다. -
기원전 181년 사망 -
유회 (조공왕)
유회(조공왕)는 전한 초 양왕과 조왕을 역임했으며, 아내 여씨의 횡포로 인해 비극적인 삶을 살다 자결하여 조왕으로 재위한 지 반 년 만에 생을 마감하였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전한의 귀족 -
장량
장량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초한쟁패기를 거쳐 전한 초기에 활약한 한나라 귀족 출신 인물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우고 유후에 봉해진 뛰어난 지략가이자 책사이다. -
전한의 귀족 -
소하
소하는 전한 초기의 정치가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군수 보급, 내정 담당, 한신 천거, 승상으로서 국가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한 인물이다.
2. 일대기
한 고조 5년 12월, 아버지 조경왕 장이가 재위 1년 만에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조왕이 되었다. 고조의 맏딸 노원공주와 혼인하여 황제의 사위가 되었다. 같은 해, 고조가 항우를 해하에서 격파하자 다른 제후왕들과 함께 정월에 고조에게 황제의 칭호를 바쳤다.
고조 7년, 고제가 조나라를 지나갈 때 장인으로서 극진히 모셨으나, 고제는 그를 가벼이 대했다. 이를 본 재상 관고(貫高)와 조오 등은 주군이 이런 치욕을 받는 것에 분노하여 고제를 암살하려 했고, 장오는 이를 만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들은 고조 8년 고제가 조나라를 지나는 길에 박인(柏人)이라는 곳에 사람을 숨겼으나, 고제가 이곳에 머물지 않고 지나갔다.
고조 9년, 관고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이 이 사건을 고변하여 장오와 관고 등은 체포되었다. 관고가 가혹한 고문을 견디며 장오의 결백을 주장했기에 장오는 용서를 받았으며, 고제의 사위인 까닭에 왕 자리에서 쫓겨나 선평후(宣平侯)에 봉해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압송될 때 고제가 감히 따라오는 사람은 삼족을 멸하겠다고 했으나, 맹서·전숙 등 10여 명이 따라왔다. 사건이 끝난 후 장오는 이들을 모두 고제에게 부탁했고, 고제는 이들을 접견하고서는 모두 조정의 관리들보다 뛰어난 사람들이라 여겨 각지의 태수나 왕국의 승상으로 삼았다.
사기 장이진여열전에 따르면 고황후 6년에 죽었고, 한서 장이진여전에 따르면 고황후 7년(기원전 181년)에 죽었고, 사기 여태후본기에 따르면 고황후의 둘째 7년(기원전 181년)에 죽었다. 아들 장언이 노왕이었기 때문에 노원왕(魯元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1. 출생과 초기 생애
조경왕 장이의 아들로, 장이가 장초의 진왕 진승의 명령을 받고 무신을 따라 옛 조나라 영역을 공략하러 갔을 때 장초에 남아 있었다. 장이가 무신을 권해 장초에서 독립해 조나라 왕이 되게 하자 분노한 진승에게 다른 권속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마음을 바꾸고 무신 일당을 회유하려는 진승에게서 풀려나 성도군에 봉해졌다.
이후 무신이 무장 이량에게 살해당하자, 아버지 장이는 진여와 함께 조나라 왕족 출신 조헐을 옹립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장한은 조나라의 요새인 거록을 포위했고, 군세를 이끌던 장오와 진여는 상황만 지켜보고 구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항우에 의해 장한이 격퇴되었다. 그 때문에 아버지 장이와 진여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진나라가 멸망하자 항우에 의해 장이는 상산왕에 봉해졌지만, 이번에는 진여가 반기를 들었고, 장오는 아버지 장이와 함께 국외로 쫓겨났다. 장이는 한왕 유방과 구면이었기에, 한나라로 도망쳤고, 유방은 그를 후하게 대우했다. 장이는 한신과 함께 조왕 조헐과 진여를 격파하고, 대신 조왕으로 옹립되었다.
기원전 207년, 조왕 무신이 부하 이량의 배반으로 살해당했다. 아버지 장이는 동료 진여와 함께 조왕 헐을 옹립하고 조나라를 재건했으나, 진나라의 반란군 진압 대장 장한이 이량의 투항을 받아 한단성을 접수하고 수하 왕리에게 조왕 헐과 장이가 있는 거록을 포위하게 해 거록은 위급해졌다. 당시 장오는 대나라에서 병사 1만여 명을 모았으나, 제후들의 구원군과 마찬가지로 감히 거록을 포위한 진나라 군을 치지 못했다.
2.2. 조나라 재건과 위기
기원전 207년, 조왕 무신이 부하 이량의 배반으로 살해당했다. 아버지 장이는 동료 진여와 함께 조왕 헐을 옹립하고 조나라를 재건했으나, 진나라의 반란군 진압 대장 장한이 이량의 투항을 받아 한단성을 접수하고 수하 왕리에게 조왕 헐과 장이가 있는 거록을 포위하게 해 거록은 위급해졌다. 당시 장오는 대나라에서 병사 1만여 명을 모았으나, 제후들의 구원군과 마찬가지로 감히 거록을 포위한 진나라 군을 치지 못했다.
무신이 무장 이량에게 살해당하자, 아버지 장이는 진여와 함께 조나라 왕족 출신 조헐을 옹립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장한은 조나라의 요새인 거록을 포위했고, 군세를 이끌던 장오와 진여는 상황만 지켜보고 구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항우에 의해 장한이 격퇴되었다. 그 때문에 아버지 장이와 진여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진나라가 멸망하자 항우에 의해 장이는 상산왕에 봉해졌지만, 진여가 반기를 들었고, 장오는 아버지 장이와 함께 국외로 쫓겨났다.
2.3. 조왕 즉위와 한나라와의 관계
한나라 고조 5년 12월, 아버지 조경왕 장이가 재위 1년 만에 죽자 그 뒤를 이어 조왕이 되었다. 고조의 맏딸 노원공주와 혼인하여 황제의 사위가 되었다. 같은 해 고조가 항우를 해하에서 무찌르자 다른 제후왕들과 함께 정월에 고조에게 황제의 칭호를 바쳤다.
고조 7년, 고조가 조나라를 지나갈 때 장인으로서 극진히 모셨으나, 고조는 그를 가벼이 대했다. 이를 본 재상 관고(貫高)와 조오 등은 주군이 이런 치욕을 받는 것에 분노하여 고제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장오는 고제 덕분에 자신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며 만류했으나, 이들은 듣지 않았다.
고조 8년, 관고 등은 고제가 조나라를 지나는 길에 박인(柏人)이라는 곳에 사람을 숨겼으나, 고제가 이곳에 머물지 않고 지나가 실패했다.
고조 9년, 관고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이 이 사건을 고변하여 장오와 관고 등은 체포되었다. 관고는 가혹한 고문을 견디며 장오의 결백을 주장했고, 고조는 장오가 자신의 사위인 까닭에 왕 자리에서 쫓아내 선평후에 봉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압송될 때 고제가 감히 따라오는 사람은 삼족을 멸하겠다고 했으나, 맹서·전숙 등 10여 인이 따라왔다. 사건이 끝난 후 장오는 이들을 모두 고제에게 부탁했고, 고제는 이들을 접견하고서는 모두 조정의 관리들보다 뛰어난 사람들이라 여겨 각지의 태수나 왕국의 승상으로 삼았다.
2.4. 고조 암살 미수 사건 연루
기원전 200년(고제 7년), 고제가 조나라를 지나갈 때 장오가 장인으로서 극진히 모셨으나, 고제는 그를 가벼이 대했다. 이를 본 재상 관고(貫高)와 조오 등은 주군이 이런 치욕을 받자 분노하여 고제를 죽이기로 결심했고, 장오는 이를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들은 기원전 199년(고제 8년) 고제가 조나라를 지나는 길에 박인(柏人)이라는 곳에 사람을 숨겼으나, 고제가 이곳에 머물지 않고 지나가 실패했다. 기원전 198년(고제 9년), 관고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이 이 사건을 고변하여 장오와 관고 등은 체포되었으나, 관고가 가혹한 고문을 견디며 장오의 결백을 주장했기에 장오는 용서를 받았다. 고제의 사위였던 장오는 왕 자리에서 쫓겨나 선평후에 봉해지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2.5. 말년과 죽음
한왕 5년(기원전 202년) 12월, 아버지 장이가 재위 1년 만에 죽자 그 뒤를 이어 조왕이 되었다. 고조의 맏딸 노원공주와 혼인하여 황제의 사위가 되었다. 같은 해 고제가 항우를 해하에서 격파하자 다른 제후왕들과 함께 정월에 고제에게 황제의 칭호를 바쳤다.
고제 7년(기원전 200년), 고제가 조나라를 지나갈 때 장인으로서 극진히 모셨으나, 고제는 그를 가벼이 대했다. 이를 본 재상 관고(貫高)와 조오 등은 주군이 치욕을 받는 것에 분노하여 고제를 암살하려 했고, 장오는 이를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들은 고제 8년(기원전 199년) 고제가 조나라를 지나는 길에 박인(柏人)이라는 곳에 사람을 숨겼으나, 고제가 이곳에 머물지 않고 지나가 실패했다. 고제 9년(기원전 198년), 관고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이 이 사건을 고변하여 장오와 관고 등은 체포되었다. 그러나 관고가 가혹한 고문을 견디며 장오의 결백을 주장했기에 용서받았으며, 고제의 사위인 덕분에 왕 자리에서 쫓겨나 선평후(宣平侯)에 봉해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압송될 때 고제가 감히 따라오는 사람은 삼족을 멸하겠다고 했으나, 맹서·전숙 등 10여 인이 따라왔다. 사건이 끝난 후 이들을 모두 고제에게 부탁했고, 고제는 이들을 접견하고서는 모두 조정의 관리들보다 뛰어난 사람들이라 여겨 각지의 태수나 왕국의 승상으로 삼았다.
사기 장이진여열전에 따르면 고황후 6년에 죽었고, 한서 장이진여전에 따르면 고황후 7년(기원전 181년)에 죽었고, 사기 여태후본기에 따르면 고황후의 둘째 7년(기원전 181년)에 죽었다. 아들 장언이 노왕이었기 때문에 노원왕(魯元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5. 기타
사후 장오의 시호는 무후(武侯)였으며, 노원왕으로 존경받았다. 장오의 딸 장언은 삼촌인 혜제(재위: 기원전 195–188년)의 아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