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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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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항우는 기원전 232년에 태어난 초나라의 명문가 출신으로, 진나라에 대항하여 봉기한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무예와 용맹함으로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세력을 확장했지만, 신안 대학살과 같은 잔혹한 행위로 비난을 받았다. 항우는 18국 분봉을 통해 서초 패왕으로 즉위했으나, 유방과의 초한전쟁에서 패배하여 해하 전투에서 자결하며 생을 마감했다. 그는 용맹했지만 지략이 부족하고 부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실패한 지도자로 평가받으며, 그의 이야기는 경극, 소설, 영화 등 다양한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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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유명한 남자의 초상화 - 항왕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소장된 1900년경의 "유명한 남자의 초상화" 앨범에 묘사된 모습
이름항우
한자項羽
병음Xiàng Yǔ
웨이드-자일스Hsiang⁴ Yü³
광동어 병음Hong⁶ Jyu⁵
예일Hohng Yúh
민난어Hāng Ú
별칭서초패왕
한자 (별칭)西楚霸王
병음 (별칭)Xīchǔ bà wáng
웨이드-자일스 (별칭)Hsi¹-ch'u³ pa⁴ wang²
광동어 병음 (별칭)Sai1-co2 baa3 wong4
통치
통치자초나라
통치 기간기원전 206년–기원전 202년
전임자초 의제
배우자우미인
배우자 유형아내
개인 정보
출생기원전 232년
출생지샤샹(현재의 쑤첸 시, 장쑤 성)
사망기원전 202년 (29–30세)
사망 장소허 현, 안후이 성
전체 이름성: 항 ()
이름: 적 ()
자: 우 ()
아버지항초
기타 정보
통칭서초의 패왕
자 (항우)우 (또는 자우)
서초패왕묘

2. 생애

항우(項羽)는 기원전 232년 초나라 하상(下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문은 대대로 초나라 장군을 배출한 명문가였다.[57] 어릴 적 숙부 항량에게 병법을 배웠으나, 깊이 익히지 않았다.[2][3] 항우는 키가 1.86m가 넘고 다핵증이 있는 특별한 외모를 가졌는데, 이는 왕이나 성인의 표식으로 여겨졌다.[2]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을 계기로 항우는 항량과 함께 회계군에서 봉기했다.[29] 항량은 회계군수 은통을 살해하고 군사를 장악했고, 항우는 양성을 함락시키는 등 공을 세웠다.[29] 기원전 208년, 항량은 범증의 건의로 미심초 회왕으로 옹립했다. 항우는 유방과 함께 성양 성을 함락시키고, 복양에서 진군을 격파하는 등 활약했으나, 같은 해 항량은 정도 전투에서 전사했다.[30]

회왕은 송의를 상장군, 항우를 차장으로 임명하여 조나라 구원군을 지휘하게 했으나, 항우는 송의를 살해하고 군권을 장악, 초 회왕에게 상장군으로 인정받았다.[57] 기원전 208년 음력 12월, 항우는 거록 대전에서 솥과 천막, 배를 모두 부수고 필사즉생의 각오로 진나라 군대와 9번 싸워 모두 승리하고 왕리를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기원전 207년에는 영포종리말에게 선봉대를 이끌게 하여 장한의 군대를 격파하고, 다른 반군들의 합류를 이끌어냈다.

거록 대전 이후, 항우는 장함의 항복을 받았으나, 신안에서 진나라 군사 20만 명을 생매장했다.[57] 유방이 함양에 먼저 입성하자 홍문연에서 유방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함양에 입성하여 진왕 자영을 죽이고 아방궁을 불태워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기원전 206년, 항우는 중국을 18개 나라로 나누고 '''서초 패왕'''(西楚霸王)으로 즉위했으나, 자의적인 분봉으로 반발을 샀다. 의제를 암살한 것은 유방이 거병하는 명분이 되었다.[37]

유방삼진(관중)을 격파하고 함양을 점령하자, 항우는 제나라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즉시 공격하지 못했다.[39] 기원전 205년 4월, 팽성 전투에서 유방의 대군을 격파하고 20만 명 이상을 살륙했다.[39] 기원전 204년 12월, 항백을 파견하여 회남왕 영포가 한나라에 붙어 반란을 일으킨 회남을 점령했다.[38]

같은 해 4월, 항우는 형양 일대에 유방을 몰아넣었지만, 이간책에 의해 범증을 의심하고 진언을 듣지 않게 되었고[41], 범증은 병사했다. 7월, 유방은 형양을 탈출했고, 항우는 성고를 함락시켰지만, 팽월의 후방 교란으로 서진을 저지당했다. 이후 광무에서 유방과 대치하며, 유방의 아버지를 인질로 삼았으나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다. 항우는 유방과 일기토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고, 쇠뇌로 유방을 쏘아 부상을 입혔다.

기원전 203년 11월, 항우는 한신에게 패배한 용저를 지원하고 팽월을 토벌했으나, 조구가 성고에서 패배하고 자살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기원전 202년, 유방, 한신, 팽월의 연합군에 의해 해하에 포위된 항우는 해하가를 읊고, 아내 우희는 자결했다.[46] 항우는 오강에서 남은 병사들과 최후의 전투를 벌이다 자결했다.[5]

2. 1. 초기 생애 및 배경

항우(項羽)는 기원전 232년 초나라 하상(下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초나라 장군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할아버지 항연은 초나라의 유명한 장군이었으나, 기원전 224년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57] 항우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숙부 항량의 손에서 자랐다.

항우는 학문과 검술을 배웠으나 깊이 익히지 않았다. 그는 "글은 이름을 쓸 줄 알면 충분하고, 검술은 한 사람을 상대할 뿐이니, 만 명을 상대하는 병법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2] 항량은 항우에게 병법을 가르쳤으나, 항우는 병법의 개략만 이해하고 더 배우려 하지 않았다.[2][3]

항우는 키가 8척(약 1.86m)이 넘는 거구였으며, 다핵증을 가지고 있었다.[2] 다핵증은 중국 전통에서 왕이나 성인의 표식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항우는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2. 2. 진나라에 대한 봉기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나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항우는 숙부 항량과 함께 회계군에서 봉기했다.[29] 항량은 회계군수 은통을 살해하고 군사를 장악했으며, 항우는 부장이 되어 항량을 보좌했다. 항량은 스스로 회계군수를 자처하고 8,000명의 병사를 모았으며, 이후 세력을 확장하여 6만에서 7만에 이르렀다. 항우는 별동대를 이끌고 양성을 함락시키고, 성 병사들을 모두 생매장했다.[29]

기원전 208년, 항량은 범증의 건의를 받아들여 옛 초나라 왕족의 후예인 미심초 회왕으로 옹립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항우는 유방과 함께 성양 성을 함락시키고, 복양에서 진군을 격파했으며, 옹구에서 진나라 삼천 군수 이유를 죽였다.[29] 그러나 같은 해 9월, 항량은 정도 전투에서 진나라 장수 장한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30]

회왕은 팽성으로 옮겨 총대장이 되었고, 송의를 상장군, 항우를 차장으로 임명하여 조나라 구원군을 지휘하게 했다. 그러나 노장들은 항우의 잔인함을 이유로 유방을 관중에 파견할 것을 건의했다.[31]

2. 3. 거록 대전

기원전 208년 음력 9월, 초 회왕은 송의를 상장군으로 임명해 조나라 구원군을 지휘하게 했고, 항우는 송의의 부하인 차장으로 임명했다. 송의가 이끄는 조나라 구원군은 안양에서 46일간 머무르며 진군하지 않았다. 항우는 송의에게 진군을 재촉했으나 거절당했고, 보급품 부족과 송의의 사치스러운 연회에 불만을 품고 음력 11월 송의를 살해하고 군권을 장악했다. 초 회왕은 항우를 상장군으로 인정했다.[57]

음력 12월, 상장군이 된 항우는 군대를 이끌고 장하를 건넜다. 이때 사흘치 식량만 남기고 솥과 천막, 배를 모두 부숴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싸우도록 했다. 항우는 진나라 군대와 9번 싸워 모두 승리하고 왕리를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거록 대전). 이 승리로 다른 제후군도 항우를 섬기게 되었다.

기원전 207년, 항우는 영포종리말에게 2만 명의 선봉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게 했다. 수적으로 열세에도 불구하고 초나라 군대는 9번의 교전 끝에 대승을 거두었고, 다른 반군들도 항우에게 합류했다.

2. 4. 진나라 멸망과 신안 대학살

거록 대전 이후, 항우는 장함의 군대를 추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기원전 207년, 항우는 은허에서 장함의 항복 의식을 받고, 진나라 항복군 20만 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항우는 항복한 진나라 군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신안에서 진나라 군사 20만 명을 생매장하는 대학살을 자행했다.[57] 한편, 유방이 함양에 먼저 입성하여 한중왕이 되려 하자, 항우는 함곡관을 격파하고 진군했다. 홍문연에서 항우는 유방을 죽이려 했으나, 장량의 계책으로 유방은 목숨을 건졌다. 이후 항우는 함양에 입성하여 진왕 자영을 죽이고, 아방궁을 불태우며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2. 5. 18국 분봉과 초한전쟁의 시작

기원전 206년, 항우는 중국을 18개 나라로 나누어 제후왕들을 임명하고, 자신은 '''서초 패왕'''(西楚霸王)으로 즉위했다. 항우는 초 회왕을 명목상 의제로 높이고, 침현으로 추방했다. 항우의 분봉은 불공평하고 자의적이었으며, 특히 항우 자신을 따라 관중 점령에 도움을 주었는지 여부에 따라 차별을 두어 반진 연합 세력들의 불만을 초래했다. 주요 문제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의제: 항우는 초 회왕의 지시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분봉을 했다. 또한, 수도 팽성을 차지하기 위해 초 회왕을 명목상 의제로 칭호를 올린 뒤, 외딴 지역인 침현으로 사실상 추방했다.
  • 한왕 유방: 초 회왕이 약속했던 관중의 왕이 아닌, 관중의 극히 일부 지역, 그 중에서도 당시 정치범들을 유배 보내던 파촉 지역을 한왕으로 임명하고 병사도 10만 명 중 3만 명만 데려가게 했다. 남은 관중 땅에는 장함, 사마흔, 동예를 각각 옹, 새, 적왕으로 임명해 유방을 감시, 견제하도록 했다. 그러나 숙부 항백의 설득에 파촉과 관중을 이어주는 요충지 한중을 유방에게 주었다.
  • 제나라의 전영: 항우는 구 제나라 지역을 3개로 나누어 원래 제나라 왕 전불은 교동왕으로 격하시켰고, 자신과 싸우던 전안을 제북왕으로, 관중 점령에 참여했던 전도는 제나라의 중심부 땅을 주고 제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반면 실권자 전영에게는 아무런 영지도 주지 않았다.


항우는 금의환향(錦衣還鄕)을 명분으로 팽성을 수도로 정했다. 기원전 206년에 의제를 암살했고, 이는 유방이 거병하는 명분이 되었다.[37]

2. 6. 초한전쟁

유방한신을 대장으로 삼아 삼진(관중)을 격파하고 함양을 점령했다. 항우는 제나라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유방을 즉시 공격하지 못했다.[39] 기원전 205년 4월, 유방은 위, 조 등과 연합하여 56만 대군을 이끌고 초의 팽성을 점령했지만, 3만 명의 정예병만을 이끌고 급히 달려온 항우는 이 대군을 일축하고, 20만 명 이상을 살륙했다(팽성 전투). 유방은 패주하고, 유태공이나 아내 여치는 항우의 포로가 되었다.[39]

회남왕 영포가 한나라에 붙어 초에 반했기 때문에, 항성용저에게 토벌을 명령했다. 기원전 204년 12월, 용저는 회남을 공격하여 영포를 격파하고, 영포는 도망쳤다. 항백을 파견하여 회남을 점령했다.[38]

같은 해 4월, 항우는 형양 일대에 유방을 몰아넣었지만(형양 전투), 그 사이에, 전횡이 전거를 왕으로 옹립하여 제를 장악했다. 제후들은 항우에게 붙었고, 항우는 형양을 공격했지만, 유방 측의 이간책에 의해, 참모이자 아부(아버지 다음으로 존경하는 사람)라고까지 불렀던 범증과, 지금까지 함께 싸워온 종리말, 주은, 용저 장군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항우는 범증의 진언을 듣지 않게 되었고[41], 차츰 범증의 권한을 빼앗았기 때문에, 범증은 사임을 원했고, 항우는 이를 인정했다. 범증은 병사했다.

같은 해 7월, 유방은 형양을 탈출했고, 항우는 겨우 형양을 함락했다. 이어 성고도 포위하고, 유방의 탈출 후에 함락시켰지만, 팽월의 후방 교란 행동으로 서진을 저지당했다. 항우는 팽월을 격파하지만, 유방은 성고를 탈환하고, 광무에 진지를 구축했다. 항우도 또한, 광무로 가서, 유방과 대치한다.

항우는 유방의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유방에게 항복을 권했지만, 유방은 "항우와 형제가 되기로 약속했다. 나의 아버지는 너의 아버지다"라고 말하며, 항복을 거부한다. 항우는 유방의 아버지를 죽이려 했지만, 항백에게 제지당하여 단념한다.

항우와 유방의 대치는 계속되었고, 항우의 군대는 차츰 병역과 보급에 지쳐갔다. 항우는 유방과 일기토로 난세의 결착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항우는 초군 용사에게 도전하게 했지만, 한군의 누번에게 세 번이나 사살당했다. 항우가 스스로 누번에게 도전하자, 누번은 눈을 마주치자 도망쳤고, 다시 나오지 않았다.

항우는 유방과 광무산 사이에 있는 간수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했다. 유방은 항우의 죄를 열거했다.[42] 항우는 일기토로 결착을 유방에게 요구했지만, 유방은 듣지 않았다. 항우는 숨겨둔 쇠뇌로 유방을 쏘았다. 유방은 부상을 입고, 성고로 도망쳤다.

기원전 203년 11월, 항우는 한에게 공격받은 제의 원군으로 용저를 파견하지만, 용저는 한신과 싸워 전사한다. 또한 팽월이 초에 반하여, 양의 토지점령하고, 항우의 군세의 식량을 끊는다. 항우는 그 때문에, 대사마 조구에게 섣불리 나서지 않도록 주의한 뒤, 성고를 맡기고, 팽월 토벌에 나선다.

항우는 동쪽으로 향하고, 외황현이 며칠 동안 저항하여 항복하지 않자, 15세 이상의 남자를 모두 생매장하려고 했다. 이때, 외황현령의 사인의 아들인 13세 소년이 진언하여 항우는 외황의 사람들을 용서했다.

그러나, 성고에 있던 조구는 항우의 명령에 반하여 성을 나와 한군을 공격했고, 패배한 조구는 자살했고, 초군의 재화는 모두 빼앗겼다. 항우는 되돌아와 형양의 동쪽에서 포위된 종리말을 구원하고, 한군과 대치한다.

항우의 군세는 지쳐있고, 병량도 결핍되어 있는 데 반해, 한군은 군세가 성하고 병량이 많았다.

2. 7. 해하 전투와 최후

기원전 202년, 유방, 한신, 팽월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가 세 방향에서 서초를 공격하여 군수품이 부족한 항우의 군대를 해하에 포위했다. 유방은 자신의 군대에 초나라 지역의 민요를 부르게 하여 항우의 고향이 한나라 군대에 의해 정복되었다는 그릇된 인상을 심어주도록 명령했다. 초나라 군대의 사기는 떨어졌고, 항우의 군대 중 많은 수가 절망하여 탈영했다. 항우는 우울한 상태에 빠졌고, 해하가를 지었다. 그의 아내 우희는 자결했다.[46] 다음 날 아침, 항우는 남은 정예 기병 약 800명을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필사적인 시도를 했고, 5,000명의 적군이 그들을 추격했다.

회수를 건넌 후, 항우에게는 수백 명의 병사만 남았다. 그들은 음릉현에서 길을 잃었고, 항우는 농부에게 길을 물었지만, 그 농부는 그를 늪으로 잘못 안내했다. 항우가 동성현에 도착했을 때, 28명의 병사만이 남았고, 한나라 군대는 여전히 그를 쫓고 있었다. 항우는 부하들에게 자신의 몰락은 하늘의 뜻이지 개인적인 실패 때문이 아니라고 연설했다. 그 후, 그는 포위망을 돌파하여 공격을 이끌었고, 전투에서 한나라 장군 한 명을 죽였다. 항우는 적을 혼란시키고 흩어지도록 유도하기 위해 부하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공격하게 했다. 항우는 다시 한나라 군대를 기습하여 적 지휘관을 또 한 명 죽였고, 적에게 약 100명의 사상자를 입혔지만, 자신은 두 명의 병사만 잃었다.

항우는 오강(오늘날의 허현, 마안산, 안후이성 근처) 강둑으로 후퇴했고, 나루터의 사공은 그가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배를 준비했으며, 항우가 남쪽 고향 사람들로부터 여전히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그렇게 하도록 강력히 권유했다. 항우는 고향으로 돌아가 백성들을 마주하기에는 너무 부끄럽다며, 그를 정복에 따라 나선 강동 출신 8,000명의 병사 중 살아남은 자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건너가는 것을 거부하고 남은 병사들에게 하마하라고 명령한 후, 사공에게 그의 애마 추를 고향으로 데려가라고 부탁했다.

항우와 그의 부하들은 한나라 군대의 파도에 맞서 마지막으로 버텼고, 마침내 항우 자신만 살아남았다. 항우는 계속 싸워 100명 이상의 적군을 죽였지만, 온몸에 여러 부상을 입었다. 바로 그때, 항우는 한나라 군인들 틈에서 옛 친구 여마통을 발견했고, 여마통에게 말했다. "듣자니 한나라 왕(유방)이 내 머리에 금 1,000근과 '만호후'(萬戶侯, 문자 그대로 '1만 호의 영주')의 칭호를 걸었다고 한다. 우리의 우정을 생각해서 가져가라." 항우는 칼로 목을 그어 자결했고, 유방이 내건 보상 때문에 현장에서 한나라 군인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으며, 항우의 시신은 토막 나고 훼손되었다고 한다. 보상은 결국 여마통과 다른 네 명이 차지했다.[5]

3. 평가

항우는 평소 학문을 싫어했으며, 숙부 항량이 학문과 무술을 가르치려 했으나 모두 얼마 못 가 그만두었다.[2] 그는 자신의 힘을 믿고 측근의 전략보다는 용맹에 의존했으며, 신하들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특히 범증의 계책을 무시한 것이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1]

사마천은 『사기』에서 항우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고 자만하며, 다른 사람에게 배우기보다 개인적인 능력에 의존했다고 묘사했다. 또한 항우가 자신의 단점을 간과하고 죽을 때까지 실수를 바로잡지 않았다고 비판했다.[2]

한신은 항우가 강한 적에게는 맹렬하지만 약한 사람에게는 동정심이 많고, 유능한 장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으며, 의제를 죽이고 백성들의 호의를 잃었다고 비판했다.[9]

두목은 시 "제오강정"에서 "치욕을 참는 자가 진짜 대장부"라고 읊었지만, 왕안석은 "전사는 이미 지쳐있고, 중원에서 그의 패배는 되돌리기 어렵다"라며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이청조는 "살아서는 영웅, 죽어서는 귀신"이라며 항우를 기렸다.[10][11][12]

일반적으로 항우는 용기는 뛰어나지만 지혜가 부족한 지도자로 여겨지며, "용기는 있으나 전략이 부족하다"라는 속담으로 요약된다.[13] 그의 전투 전술은 연구 대상이 되었고, 정치적 실책은 후대 통치자들에게 경고의 교훈이 되었다. 해하 전투에서 유래된 "사면초가"라는 고사성어는 곤경에 처한 상황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마오쩌둥은 항우 몰락의 세 가지 이유로 홍문연에서 유방을 죽이지 않은 것, 평화 조약 조건을 지킨 것, 팽성에 도읍을 세운 것을 지적했다.

3. 1. 학살자로서의 악명

항우는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학살자로 악명이 높았다. 역사서에 기록된 항우의 주요 학살 사건은 다음과 같다.

사건내용
양성 학살양성을 함락시키고 나서 주민들을 생매장했다.[29]
성양 학살유방과 별동대로 움직일 때 성양을 함락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31]
신안 학살기원전 207년 음력 11월 장한을 따라 항복한 진나라 군 포로 20만을 생매장했다.(신안대학살)[33]
함양 학살기원전 207년 음력 12월 진왕 자영을 죽이면서 진나라의 수도 함양성의 진나라 주민들도 같이 학살했다.
제나라 학살기원전 205년 항우가 임명한 왕들을 제거하고 스스로 왕이 된 전영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항복한 포로들을 생매장한 것을 시작으로 북진하면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항우의 학살은 각 지역 주민들의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유방에게는 '학살자 항우에게 대항하는 구원자'라는 명분을 주었다.

3. 2. 부하 불신

항우는 자신의 부하들을 믿지 못하고 의심을 많이 했다. 특히 중요한 장수였던 구강왕(九江王) 영포를 믿지 못해 영포에게 불만을 품게 만들고 끝내 유방에게 빼앗겼다. 또, 중요한 신하 종리말과 참모였던 범증마저 진평의 반간계에 빠져 의심하고 결국엔 자기 손으로 범증을 내쳐 죽게 만들었다.[1]

진평은 진수성찬을 차린 뒤 항우의 사신을 맞이하면서 계속 범증의 안부만 물었다. 사신이 자신은 항우의 사신이라 범증의 사사로운 것에 대해선 모른다고 하자, 진평은 진수성찬을 치우고 항우의 사신이라는 이유로 면박을 주고 내쫓았다. 이를 항우에게 보고하자 항우는 범증에 대한 질투심이 극에 달해 범증을 꾸짖고 내쫓았다. 결국 범증은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고, 범증이 없어진 항우는 빠르게 멸망했다.[1]

또한 항우는 대체로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참모 범증의 말을 듣지 않고 유방을 홍문에서 죽이지 않았고, 함양을 떠나 금의환향을 한다면서 팽성으로 도읍하여 한신에게 손쉽게 천하의 중심 관중을 차지하게 했다. 의제를 시해하고, 한신을 얕보아 무작정 돌격하여 범증이 보낸 포장군이 아니었다면 한신의 계책에 죽을 뻔했다. 참모 범증의 말을 듣지 않았으니 다른 부하들의 말을 안 듣는 것은 당연했다. 항우는 해하에서 부하들이 강남으로 후퇴하자는 권유를 무시하고 결국 사면초가의 계책으로 인해 싸움 한번 하지 않고 군사를 전부 잃었다.[1]

항우는 비록 자신의 부하들은 끔찍이 사랑하고 아꼈지만, 적군에겐 잔혹했다. 한번은 반란의 조짐을 보인 자신에게 항복한 진나라 군사 20만 명을 모조리 생매장시키기도 했다.[1]

3. 3. 유교적 관점에서의 평가

도쿄도립대 중국사학자 사타케 야스히코 명예교수는 《사기》에서 유방과 항우를 모두 인의에 밝은 인물로 보고 있지만, 항우가 유방보다 를 더 지켰다고 평가한다.[59] 그러나 항우는 엄청난 학살과 전쟁 관련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4. 가계

항우의 가계에 대한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항우가 주나라 시대 초나라의 왕족인 미씨()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의 조상은 초나라 왕으로부터 항() 땅을 받았고, 이후 "항"을 성씨로 사용했다. 다른 설명은 항우가 노나라의 귀족 가문 출신이며, 그의 가문은 대대로 초나라 군에서 복무했다는 것이다. 항우의 할아버지인 항연은 왕전이 이끄는 진나라 침략군에 대항하여 초나라 군대를 이끌었던 유명한 장군이었으며, 기원전 223년 진나라가 초나라를 정복할 때 전사했다.[2]

숙천의 항씨 가문의 후손들에 따르면, 항우의 아버지는 항연의 장남인 항초()였다. 항우는 아버지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큰아버지인 항량에게 길러졌다.

항우 사후, 항백(사양후)·항상(도후)·항타(평고후)·현무후(이름 불명) 등 항씨 일족은 유방에 의해 열후에 봉해졌으며, 유(劉)씨 성을 하사받았다.

5. 항우가 등장한 작품

항우의 용맹함과 전투 기량은 중국 민담, 시, 소설에서 찬양되었으며,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연극, 중국 경극, 비디오 게임, 만화의 주제가 되었다. 그의 고전적인 이미지는 영웅적이고 용감하지만 오만하고 피에 굶주린 무인왕이다. 우미인과의 로맨스와 그의 자살은 비극적 영웅의 면모를 더해주었다.[17]

항우의 전통적인 경극 가면

  • (경극): 해하 전투에서 유방의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 항우가 지은 노래인 "해하가(垓下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2]
  • 켄 리우의 서사 판타지 소설 《왕들의 은총》에 등장하는 마타 진두는 항우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 유명한 경극인 ''패왕별희''는 항우가 해하 전투에서 패배하는 사건을 묘사한다. 이 연극의 제목은 천카이거의 수상작 영화인 ''패왕별희''의 중국어 제목으로 차용되었다.[23]


; 영화

연도제목배우비고
1994년초한지/그 사랑과 흥망레이 로이중국·홍콩 합작
2011년초한지/White Vengeance펑샤오펑중국
2012년초한지: 홍문연다니엘 우중국



; 텔레비전 드라마

연도제목배우비고
1985년전장사석홍콩
1991년항우와 유방·배수의 진한재봉중국
1997년유방과 항우장린중국
2003년한무대제호군중국
2004년항우와 유방장화홍콩
2004년대한풍 - 항우와 유방 -후준중국
2007년항우와 유방 아득한 대지중국 텔레비전 인형극
2009년신화탄 카이중국
2012년항우와 유방 King's War[56]허런중국
2012년초한전기하윤동중국
2012년후궁견환전명도중국
2015년진시명월친쥔제중국



; 소설


  • 『서한통속연의(西漢通俗演義)』: 중국 명나라연의 소설, 작가 견위
  • 『통속한초군담(通俗漢楚軍談)』: 겐로쿠 8년(1695년)에 간행된 『서한통속연의』의 한문 번역. 역자는 몽매헌장봉(夢梅軒章峯)과 칭호헌휘암(称好軒徽庵). Amazon Kindle의 전자책도 존재.
  • 『항우와 유방』: 작가 나가요시로 (1917년)
  • 『항우와 유방』: 작가 시바 료타로, 연재 당시 제목은 "한의 바람, 초의 비"(1977년~1979년)
  • 『소설 항우와 유방』: 작가 도몬 후유지
  • 『사면초가 - 한초전기(四面楚歌―漢楚戦記)』: 작가 코지마 신지, 『통속한초군담』의 현대어 번역


; 무대

  • 『항우와 유방』: 나가요시로의 희곡 (1917년).
  • 『우미인』: 다카라즈카 가극단 작의 뮤지컬. 위의 나가요시로의 『항우와 유방』이 원작.
  • 『항우와 유방』: 오사카 신가부키좌 기획·구성, 스기 료타로 주연 (1986년).


; 만화

  • 『사기 항우와 유방』: 작가 히사마츠 후미오, 구보타 센타로
  • 『적룡왕』: 작가 모토미야 히로시
  • 『항우와 유방 - 만화 중국의 역사 〈1〉』: 감수 진순신, 테즈카 오사무
  • 『사기』, 『항우와 유방』: 작가 요코야마 미쓰테루
  • 『레드 드래곤』: 작가 이케노 마사히로
  • 『바운더 최강의 소년 항우』: 작가 오야마 타쿠미
  • 『린카네이션의 꽃잎』: 작가 코니시 미키히사


; 게임

  • 『항우와 유방』: 소프트플랜 사가 발매한 PC-88용 게임 소프트 (1988년). PC-98로 속편도 출시.
  • 『항유기』(코에이)
  • 『신사기』[https://web.archive.org/web/20201101061132/http://www.vesta.dti.ne.jp/~egux/sokantop.htm](프리 게임)
  • 『진・삼국무쌍 MULTI RAID 2』(코에이, 성우: 다나카 잇세이)
  • 『초한여자』(주식회사 Viola)
  • 『Fate/Grand Order』(애니플렉스, 성우: 야마데라 코이치)

참조

[1] 문서 12th month of the 5th year of Liu Bang's reign (including his tenure as King of Han), per vol.11 of ''Zizhi Tongjian''. The month correpsonds to 29 Dec 203 BC to 27 Jan 202 BC in the proleptic Julian calendar.
[2] Shiji
[3] 웹사이트 Xiang Yu - Famous Leader of Uprising in Ancient China http://history.cultu[...] Cultural China 2014-11-20
[4] 문서 Liu Bang and Xiang Yu became sworn brothers in a ceremony with King Huai II of Chu as their witness in 208.
[5] 서적 The Road to the Throne: How Liu Bang Founded China's Han Dynasty https://books.google[...] Algora Publishing
[6] 웹사이트 http://qkzz.net/maga[...]
[7] 웹사이트 http://cul.cnwest.co[...] 陕西新闻网 2009-06-21
[8] Shiji
[9] 문서 (遇強則霸的匹夫之勇,和遇弱則憐的婦人之仁。既不能任用賢能將帥,又曾遷逐楚義帝,用兵趕盡殺絕。雖名為霸王,其實民心盡失。)
[10] 문서 (勝敗兵家事不期,包羞忍恥是男兒。江東弟子多才俊,捲土重來未可知。)
[11] 문서 (百戰疲勞壯士衰,中原一敗勢難回。江東子弟今雖在,肯與君王捲土來。)
[12] 문서 (生當作人傑,死亦為鬼雄,至今思項羽,不肯過江東。)
[13] 웹사이트 http://news.bandao.c[...] 半岛网 2010-01-27
[14] 간행물 A comparative study of Xiang Yu and hannibal's strategic thinking with that of Shaka the Zulu of South Africa Samar Habib
[15] 문서 (宜將剩勇追窮寇,不可沽名學霸王。)
[16] 서적 An Anthology of Translations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Volume I: From Antiquity To The Tang Dynasty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17] 간행물 Effects of Chinese opera on the reproductions of Ibsen's plays https://septentrio.u[...] 2015
[18] 백과사전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2008
[19] 간행물 The City-God Cults of T'ang and Sung China 1985-12
[20] 서적 Sanguo Yanyi Zhiyang Publishing House 1998
[21] 서적 Jiangbiao zhuan "300"
[22] 웹사이트 Text of Jin Ping Mei http://ctext.org/wik[...] 2014-12-06
[23] 간행물 Nationalism and Identity Crisis: Analyzing "Farewell to My Concubine" Through Historical Contexts https://www.deanfran[...] Dean & Francis 2024-06
[24] 문서 『史記』項羽本紀などによる。『[[史記索隠]]』では「字は子羽」とする。
[25] 문서 以下、特に注釈がない部分は、{{ws|[[:s:zh:史記/卷007|『史記』項羽本紀]]}}による。
[26] 문서 年号は『史記』秦楚之際月表第四による。西暦でも表しているが、この時の暦は10月を年の初めにしているため、注意を要する。また、秦代では正月を端月とする。
[27] 문서 "[[佐竹靖彦]]は著書『項羽』でこの称号を疑問視する。本来は「楚王」あるいは「大楚王」と名乗ったところを、劉邦陣営が楚を「西楚」と領土を狭め、王を「覇王」と暴力的な意味をわざと付けて呼んだのが記録に残ったとする。"
[28] 문서 司馬遷は[[舜]]も瞳が二つあったと伝えられることから、項羽は舜の子孫ではなかったかと疑っている。
[29] 문서 この時の暦は10月を年の初めにしているため、注意を要する。以下、同じ。
[30] 문서 "後9月は、[[顓頊暦]]における[[閏月]]。"
[31] 문서 『史記』高祖本紀
[32] 문서 "[[中国国際放送局]]の『『史記・項羽本紀』②~頭角を現す項羽~』によれば、この時の楚の兵力を10万、秦の兵力を30万だったとする。"
[33] 문서 "『史記』「黥布列伝」によれば、「項氏に生き埋めにされて殺された人は、数千数万人にのぼる」とされる。"
[34] 문서 『史記』高祖本紀
[35] 문서 史記によれば、この時の項羽の兵力は40万、劉邦の兵力を10万だったとする。
[36] 서적 『始皇』項羽本紀
[37] 서적 漢書
[38] 서적 『史記』黥布列伝
[39] 서적 『史記』高祖本紀
[40] 서적 『史記』高祖本紀
[41] 서적 『史記』陳丞相世家
[42] 서적 『史記』高祖本紀
[43] 서적 『史記』樊酈滕灌列伝
[44] 서적 『史記』高祖本紀
[45] 서적 『史記』高祖本紀
[46] 뉴스 『專家駁於正:虞姬確有其人但不是正妻』(中国紙『北京新浪網』の記事) http://dailynews.sin[...]
[47] 서적 『史記』高祖本紀
[48] 서적 『史記』高祖本紀
[49] 서적 『史記』絳侯周勃世家
[50] 서적 『史記』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51] 간행물 『史記』「項羽本紀」⑤~英雄の末路~ 中国国際放送局
[52] 서적 『史記』淮陰侯列伝
[53] 서적 十七史商榷
[54] 서적 新釈漢文大系
[55] 서적 項羽
[56] 웹사이트 作品について|項羽と劉邦 https://web.archive.[...]
[57] 서적 사기 항우본기
[58] 서적 사기 고조본기
[59] 뉴스 역사가 포장함 유방의 진실 https://www.hani.co.[...] 한겨레신문 2007-06-22
[60] 뉴스 무오사화와 ‘사초 실종 사건’의 공통점? https://www.hani.co.[...] 한겨레신문 201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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