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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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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이(張耳)는 위나라 대량 출신으로, 위나라 신릉군의 식객을 거쳐 진나라 멸망 후 조나라를 부흥시키는 과정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진승·오광의 난 이후 진승에게 발탁되어 조나라를 공격하고, 무신을 조왕으로 추대하여 우승상에 올랐다. 이후 진여와 갈등을 겪으며 항산왕으로 봉해졌으나 진여에게 패하여 한나라에 귀순했다. 한신과 함께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조왕에 봉해졌으며, 기원전 202년에 사망하여 경왕으로 시호되었다. 그의 아들 장오가 조나라 왕위를 이었으며, 후손들은 전한 시대에 번성하여 명문가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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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
기본 정보
장이
전한 시대의 부조에 묘사된 장이
장(張)
이(耳)
이(耳)
시호무(武)
출생
출생지위(魏) 나라 대량(大梁)
사망기원전 202년
국적
국가한(漢)
직업
직업정치가, 군인
가족 관계
아버지이름 미상
배우자진여의 누나
자녀장오
관직
작위조왕
활동
활동 시기진나라 말기 ~ 초한전쟁기
주요 활동진나라 타도
초한전쟁

2. 생애

장이는 위나라 대량 출신으로, 젊은 시절 신릉군의 식객이었다. 외황에서 망명 생활 중 지역 부자의 빈객과 친분을 쌓고, 그의 추천으로 부잣집 딸과 결혼하여 위나라에서 벼슬을 얻어 외황령이 되었다. 진여와는 처음에는 부자처럼 지내다가 나중에는 문경지교를 맺었다.[4]

기원전 225년,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키자 진여와 함께 명사로 지목되어 현상금이 걸렸다. 장이는 1천 금, 진여는 5백 금이었다. 이들은 진현으로 도망쳐 마을 문지기로 생계를 유지했다. 한번은 마을 관리에게 진여가 매를 맞자, 분노하는 진여를 진정시키며 작은 치욕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는 없다고 설득했다.[4]

기원전 209년, 진승이 봉기하자 장이와 진여는 즉시 달려갔다. 진여는 를 공격하고 싶다고 진승에게 요청했고, 진승은 무신을 총대장으로, 소소를 부장, 장이·진여를 보좌로 임명하여 조나라를 토벌하러 보냈다.[1]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이 일어나자 장이는 진여와 함께 진승을 알현했다. 진여의 진언으로 진승은 조나라 공격을 위한 별동대를 일으켰고, 장이는 좌우 교위를 맡아 무신을 따라 조나라 정벌에 나섰다. 무신이 황하를 건너자 장이는 하북의 현들에 권고하여 10여 성을 얻었다.[4]

기원전 208년 9월, 장이는 조왕 헐과 함께 거록으로 달아났고, 거록성은 왕리에게 포위되었다. 장이는 진여에게 구원군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장염(張黶)과 진석(陳澤)[5]을 보내 재촉하자 진여는 군사 5천을 주어 싸우게 했으나, 모두 죽었다.[4]

기원전 207년 12월, 항우가 거록을 포위한 진나라 군대를 격파했다.[4][6] 장이는 조왕 헐과 함께 제후들에게 사례했는데, 진여를 만나자 분노하며 장염과 진석의 행방을 물었다. 진여가 장군의 인수를 장이에게 던졌고, 장이는 식객의 권유로 진여의 휘하를 모두 거두었다. 진여는 다른 곳으로 떠났고, 둘 사이는 깨졌다.[4]

기원전 206년, 항우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제후왕들을 봉하면서 장이는 항산국(恒山國)[7] 왕이 되었다. 기원전 205년 10월, 장이는 한왕 유방을 만나 후대를 받았다.[4][6] 한왕은 서초패왕과 싸우고자 진여에게 지원을 요청했는데, 진여는 장이의 목숨을 요구했다. 한왕은 장이를 죽이지 않고 진여를 속여 지원을 받았다. 기원전 205년 4월, 팽성 전투에서 패배하자 진여 등은 한왕을 배신했다.

기원전 204년 10월, 정형 전투에서 한신과 함께 대장으로 참전해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기원전 202년에 장이는 죽었고, 아들 장오가 조나라 왕이 됐다.[4][6]

2. 1. 위나라 시기 ( ~ 기원전 225년)

위나라 대량 출신으로, 젊은 시절 신릉군의 식객으로 지냈다. 외황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그 지역 부자의 빈객과 친분을 쌓았고, 빈객의 추천으로 부자의 딸과 결혼했다. 부인의 도움으로 위나라에서 벼슬을 얻어 외황령이 되었고, 진여와는 처음에는 부자처럼 지내다가 나중에는 문경지교를 맺었다.[4]

진나라가 대량을 멸망시킬 때 외황에 있었으며, 한 고조도 장이를 따라 여러 달 동안 빈객으로 지냈다. 기원전 225년,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키자 진여와 함께 위나라의 명사로 지목되어 진나라에서 현상금을 걸었다. 장이는 1천 금, 진여는 5백 금이었다. 이들은 함께 진현으로 도망쳐 마을 문지기로 생계를 유지했다. 한번은 마을 관리에게 진여가 매를 맞자, 분노하는 진여를 진정시키며 작은 치욕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는 없다고 설득했다. 진여도 이에 동의했다. 이후 진나라에서 이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오히려 이 내용을 전달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4]

같은 고향 출신인 진여는 장이를 아버지처럼 섬겼으나, 이후 린상여와 렴파처럼 서로 목을 베어도 좋을 문경지교를 맺었다.

이 시기에 유방이 장이를 찾아와 식객이 되기를 청했고, 장이는 이를 받아들였다.

2. 2. 진나라 시기 (기원전 225년 ~ 기원전 209년)

기원전 225년, 위나라진나라에 의해 멸망하자, 장이와 진여는 이름을 바꾸고 진에 있는 마을의 문지기가 되었다. 이미 두 사람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져 있었고, 진나라에 의해 쫓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관리에게 진여가 시비를 걸려, 집단 구타를 당하는 재난을 겪었지만, 장이가 "장래를 위해 사소한 일로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라고 위로하며 도왔다고 한다.[1]

기원전 209년, 진승이 봉기하자, 두 사람은 즉시 달려갔다. 진승은 두 사람이 명사라는 것을 알고 기뻐하며 맞이했다. 이때, 진승에게 왕위에 오르도록 권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장이 등은 "진나라에 멸망한 각국의 왕족을 후계자로 세우지 않고, 스스로 왕이 된다면 사사로운 욕심으로 봉기한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라고 반대했지만, 진승은 이를 무시하고 장초의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진여는, 진나라의 지배하에 있는 를 공격하고 싶다고 진승에게 요청했고, 진승도 이를 승낙하여 무신을 총대장으로, 소소를 부장, 장이·진여를 그 보좌로 임명하여 조나라를 토벌하러 보냈다.[1]

그 도중에 범양(현재의 허베이성바오딩시딩싱 현)을 공략했을 때, 현지 변사인 괴통이 진영에 찾아와 "범양의 군수는 자신의 옛 지인이다. 저에게 설득을 맡겨주십시오"라고 말했기에, 무신 등은 괴통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설득은 성공하여 조나라 공략이 쉬워졌고, 그 기세로 를 제압했다. 그 후, 장이·진여 등은 무신에게 "진승 왕은 의심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대로 돌아가면 공적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장군의 신변도 위험해집니다. 이를 막기 위해, 당신이 조나라 왕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조왕 즉위를 속삭였고, 무신은 진승에게 이를 아뢰었다. 이를 들은 진승은 격노했지만, 상주국(재상) 방군 채사에게 "각지로 군대를 보내고 있는 지금, 이탈되면 큰일이 됩니다"라고 설득당하여, 마지못해 즉위를 인정했다. 이로 인해, 장이는 우승상, 소소는 좌승상, 진여는 상장군으로 출세했다.[1]

2. 3. 조나라 복구 (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7년)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진승 · 오광을 일으키자, 장이는 진여와 함께 진승을 알현했다. 진승은 장이와 진여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매우 기뻐했다. 진중에서 진승을 왕으로 모시려는 움직임이 있자 진승은 자문을 구했고, 장이와 진여는 진나라에 망한 다른 옛 전국7웅들을 복국시켜 진나라의 적을 늘리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진승은 이를 듣지 않고 왕이 되었다.[4]

진여의 진언으로 진승은 조나라 공격을 위한 별동대를 일으켰고, 장이는 좌우 교위를 맡아 대장 무신을 따라 조나라 정벌에 나섰다. 무신이 황하를 건너자 장이는 하북의 현들에 권고하여 조나라의 10여 성을 얻고 수만 병사를 얻었다. 무신은 무신군의 군호를 칭했으나, 다른 옛 조나라의 성들은 항복을 거부했다. 괴철의 조언 등으로 저항하던 옛 조나라의 영역마저도 손에 넣었다. 마침내 옛 조나라의 서울 한단에 이르렀을 때, 장이는 진여와 함께 진왕 진승이 자신들의 계책을 써 주지 않고 교위로 삼은 데에 불만을 품어 무신을 조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우승상에 임명되었다. 진왕은 분노하여 무신, 장이, 진여 등을 공격하려 했으나, 상국의 만류로 오히려 무신을 회유하여 함께 진나라를 치기로 하면서 장이의 아들 장오가 성도군에 봉해졌다.[4]

장이는 진여와 함께 장초의 명령을 무시하고 옛 연나라와 대나라 지역을 손에 넣도록 조왕 무신을 권했다. 조나라 장수 한광은 연나라를 평정했으나 오히려 연왕으로 추대되었고, 장이는 조왕, 진여와 함께 연나라를 공격하러 갔는데 조왕이 연나라 군사에 사로잡혔다. 장이는 진여와 함께 근심했는데, 한 시양졸이 기지를 발휘해 겨우 조왕을 구출했다. 한편 항산을 공격하러 간 이량이 반란을 일으켜 무신을 죽이자, 장이는 진여와 함께 조나라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해 군사를 모았다. 이후 빈객의 권유로 조나라 왕족 출신인 조헐을 조왕에 옹립하고, 신도(지금의 허베이성 싱타이 시)에 임시 수도를 정해 이량의 추격군을 격파했다.[4]

2. 4. 거록 전투 (기원전 208년 ~ 기원전 207년)

진 이세황제 3년(207년) 10월, 장한이 이량의 투항을 받아 한단성을 접수하고 한단의 주민들을 하내로 이주시켰으며 성을 파괴했다. 이세황제 2년(기원전 208년) 9월(진나라 달력에 따른 것으로 한단성이 파괴되기 한 달 전)에 이미 장이는 조왕 헐과 함께 거록으로 달아났고, 거록성은 장한의 부장 왕리에게 포위되었다. 한편 진여가 항산에서 병사 수만을 모아 거록의 북쪽에 주둔하고, 장한은 극원에 있으면서 용도를 쌓아 왕리에게 군자를 공급했다. 왕리는 식량이 넉넉해 급히 공격했고, 거록성 안에는 식량이 부족했다. 그래서 장이는 진여에게 여러 차례 거록으로 오라고 했으나 진여는 군사가 적어서 감히 진나라에 도전하지 못했다. 여러 달이 지나자, 장이는 진여를 원망해 수하 장염(張黶)과 진석(陳澤)[5]을 보내 비록 헛되이 죽을 뿐이라도 구원군을 내라고 재촉했다. 진여는 거절했으나, 장염과 진석이 한사코 청하자 군사 5천을 주어 싸우게 했고, 이들은 모두 죽었다.[4]

연나라에서는 조나라의 위급을 듣고 이세황제 3년 10월에 장도가 이끄는 구원군을 보냈고, 제나라의 실권자 전영은 사실 조나라와 사이가 나빠 구원군을 보낼 생각이 없었으나 전영의 장수 전도가 전영의 뜻에 반기를 들고 조나라를 구원하러 출진했으며, 장이의 아들 장오도 대군에서 1만여 군사를 모았으나, 이들은 진나라에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 초나라에서는 이미 이세황제 2년 9월에 송의를 대장으로 삼아 구원군을 보냈으나, 송의는 사실 조나라를 힘써 구원할 생각이 없었고 진나라와 조나라가 싸우다 양측이 다 피곤해질 때 한 번에 무찌를 생각이었는데, 군권을 빼앗긴 항우가 이에 불만을 품고 송의를 쳐죽이고 적극적으로 조나라를 구원하러 움직였다. 먼저 영포 등의 선발대로 용도를 여러 차례 공격해 왕리 군의 식량을 핍절케 하고, 마침내 자신도 강을 건너 거록을 포위한 진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이를 본 제후군도 가담해 진나라 군대를 무찌르니, 12월에 거록의 포위가 그제야 풀렸다.[4][6]

장이는 거록성에서 조왕 헐과 함께 나와 제후들에게 사례하고 다녔는데, 진여를 만나자 분노를 터뜨리며 장염과 진석의 행방을 물었다. 진여는 화를 내며 진나라와 싸우다 죽었다고 말했으나 장이는 진여가 죽여버린 게 아닌가 의심해 여러 번 물었다. 진여가 분김에 장군의 인수를 장이에게 던지고 장이가 놀란 틈에 측간으로 가자, 장이의 식객이 장이에게 진여의 인수를 아주 가지라고 권했고, 장이는 이를 따라 진여의 휘하를 모두 거두었다. 진여가 돌아와서는 장이가 인수를 돌려주지 않자 다른 곳으로 떠났고, 둘 사이는 이렇게 깨졌다. 이세황제 3년 1월의 일이었다.[4][6]

2. 5. 항산왕 시기 (기원전 206년)

기원전 206년, 항우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각지에 제후왕들을 봉하면서 장이는 항산국(恒山國)[7] 왕이 되었다. 항우는 원래 육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각 나라를 쪼개고 자신을 따라온 장수들을 중용해 각각 본국을 주었으며, 원래 왕들은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에 따라 조나라에서 대나라가 갈라져 나왔고, 원래 조왕 헐은 대왕이 되었으며, 장이는 나머지 조나라 영역을 가지고 항산국 왕이 되어 서울을 양국에 두었다. 한편 진여는 진나라 멸망에 공이 없다 하여 남피의 세 현만을 받았다.[4][6]

2. 6. 한나라 시기 (기원전 205년 ~ 기원전 202년)

기원전 205년 10월, 장이는 옹왕 장한을 폐구에서 포위하고 새나라와 적나라를 평정한 한왕 유방을 만나 후대를 받았다.[4][6] 한왕은 서초패왕과 싸우고자 조나라를 아우른 실권자가 된 진여에게 지원을 요청했는데, 진여가 요구한 대가는 장이의 목숨이었다. 한왕은 장이를 죽이지 않고 진여를 속여 지원을 받아냈다. 기원전 205년 4월, 한왕이 이끄는 제후연합군이 팽성 전투에서 패배하자 진여를 포함한 뭇 제후들이 한왕을 배신했다.

그 후, 유방은 자신이 항우와 대치하는 동안 한신의 별동대가 여러 나라를 평정하는 작전을 채택했다. 장이는 부장으로 종군하여 위나라와 대나라를 멸망시켰다. 정형 전투에서 한신과 함께 대장으로 참전해 기원전 204년 10월에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기원전 202년에 장이는 죽어 시호를 경(景)이라 했고, 아들 장오가 뒤를 이어 조나라 왕이 됐다.[4][6]

3. 후세의 평가 및 영향

기원전 202년 장이는 사망하고 경왕으로 시호되었다. 장이에 대한 평가는 전해지지 않으나, 그의 가문은 후한 시대까지 번성하며 영향을 미쳤다.[2]

장이의 차남 장오가 뒤를 이었으나, 기원전 198년 조나라 정위 관고 등의 쿠데타로 왕위를 박탈당하고 선평후로 강등되었다. 장오의 적자 장언은 기원전 180년 여치 세력 제거 과정에서 숙청될 뻔했으나, 노원공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작위 박탈로 끝났다.

장언의 이복형 장수는 낙창후[1], 장치는 신도후로 봉해졌다. 문제 즉위 후 장언은 남궁후로 작위를 회복했고, 이후 가문은 번성하여 전한 중기 여남군 세양현의 명가가 되었다.

후한의 원훈 장충, 광록훈 장부, 영제 시기 사공 장제, 헌제 시기 사공 장희 등이 장이의 후손이다.[2]

전량을 건국한 장궤는 장이의 17세 손이라고 전해진다.[3]

참조

[1] 서적 後漢書
[2] 서적 後漢書
[3] 서적 晋書
[4] 서적 사기 (역사서)
[5] 서적 사기정의
[6] 서적 사기 권16 진초지제월표
[7] 서적 사기
[8] 서적 사기 권8 고조본기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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