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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드 뒤누아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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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 드 뒤누아 백작은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아들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사생아로, 백년 전쟁 시기에 활약한 프랑스의 귀족이다. 그는 아르마냐크파로 프랑스 내전에 참여했으며, 오를레앙 공방전에서 잔 다르크와 함께 영국군의 포위를 풀었다. 이후 샤를 7세에 대항한 프라게리 반란과 루이 11세에 대항한 공익 동맹에 참여했지만, 다시 궁정의 총애를 받았다. 뒤누아 백작, 롱그빌 백작 등의 작위를 가졌으며, 1468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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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드 뒤누아 백작
기본 정보
뒤누아 백작 장의 초상화, 15세기
기타 이름오를레앙의 사생아
신상 정보
출생일1402년 11월 23일
출생지프랑스
사망일1468년 11월 24일 (향년 66세)
사망지프랑스
작위
뒤누아 백작1439년 - 1468년
롱그빌 백작1443년 - 1468년
기타 작위발보네 영주, 클레 영주
가족 관계
아버지루이 1세 드 발루아
어머니마리에트 당갱
배우자마리 루베 (1422년 결혼, 1426년 사망)
마리 다르쿠르 (1439년 결혼, 1464년 사망)
자녀프랑수아 1세 드 오를레앙-롱그빌 외
가문오를레앙-롱그빌 가문
군사 경력
소속 군대프랑스군
참전 전투백년 전쟁
몽타르지 공성전
청어 전투
루아르 계곡 전역
오를레앙 공성전
자르조 전투
공익 동맹 전쟁
관직
프랑스 대시종장1403년 - 1468년

2. 생애

프랑스 샤를 5세의 아들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와 그의 정부 마리에트 드 앙기앵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1407년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암살당하고, 8년 후 이복 형제인 오를레앙 공작 샤를은 아쟁쿠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25년 동안 영국군의 포로로 있었다. 이로 인해 장은 오를레앙 가문을 대표하는 유일한 성인 남성이 되었다. 그는 고슴도치 훈장의 기사였다.

장은 프랑스 샤를 6세 치세 동안 프랑스 내전에 아르마냐크파로 참여했으며, 1418년 부르고뉴파에게 포로로 잡혔다. 1420년 석방된 후 도팽 샤를 7세의 휘하에 들어가 백년 전쟁에서 영국군과 싸웠다. 1421년의 보제 전투에서 라 이르와 함께 잉글랜드군을 격파하여 기사 서훈을 받았다. 1427년,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3세 및 에티엔 드 비뇰과 함께 워릭 백작 리처드 보샴에게 몽타르지 공방전의 포위를 풀도록 강요했다. 이듬해 루브레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1428년 10월부터 오를레앙 공략의 총사령관이 되어 라 이르와 장 포통 드 상트라이유 등과 함께 오를레앙으로 입성, 잉글랜드군과 대치했다(오를레앙 포위전). 1429년 잔 다르크와 함께 포위를 풀었다. 4월 29일에 오를레앙에 입성한 잔 다르크와 함께 잉글랜드 측의 요새를 함락시키고, 5월에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었다. 그는 1429년의 작전에 합류했으며 그녀의 사후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잔의 처형 후에는 리슈몽 대원수를 따라, 1432년샤르트르를 탈환했다.

1436년에는 파리를 탈환하는 데 기여했다. 1439년 그는 뒤누아 백작이 되었다. 그는 백년 전쟁의 마지막 해에 기옌노르망디 정복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장은 샤를 7세에 대항한 프라게리 반란에 참여했으며, 1465년에는 프랑스 루이 11세에 대항한 공익 동맹의 지도자였지만, 매번 궁정에서 다시 총애를 받았다. 1468년에 사망, 장남 프랑수아가 뒤누아 백작위를 상속했다.[4]

2. 1. 초기 생애

프랑스 샤를 5세의 아들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와 그의 정부 마리에트 드 앙기앵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1407년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암살당하고, 8년 후 이복 형제인 오를레앙 공작 샤를은 아쟁쿠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25년 동안 영국군의 포로로 있었다. 이로 인해 장은 오를레앙 가문을 대표하는 유일한 성인 남성이 되었다.

장은 프랑스 샤를 6세 치세 동안 프랑스 내전에 아르마냐크파로 참여했으며, 1418년 부르고뉴파에게 포로로 잡혔다. 1420년 석방된 후 도팽 샤를 7세의 휘하에 들어가 백년 전쟁에서 영국군과 싸웠다. 1421년의 보제 전투에서 라 이르와 함께 잉글랜드군을 격파하여 기사 서훈을 받았다. 1427년,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3세 및 에티엔 드 비뇰과 함께 워릭 백작 리처드 보샴에게 몽타르지 공방전의 포위를 풀도록 강요했다. 이듬해 루브레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1428년 10월부터 오를레앙 공략의 총사령관이 되어 라 이르와 장 포통 드 상트라이유 등과 함께 오를레앙으로 입성, 잉글랜드군과 대치했다(오를레앙 포위전). 1429년 잔 다르크와 함께 포위를 풀었다. 4월 29일에 오를레앙에 입성한 잔 다르크와 함께 잉글랜드 측의 요새를 함락시키고, 5월에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었다. 그는 1429년의 작전에 합류했으며 그녀의 사후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잔의 처형 후에는 리슈몽 대원수를 따라, 1432년샤르트르를 탈환했다.

1436년에는 파리를 탈환하는 데 기여했다. 1439년 그는 뒤누아 백작이 되었다.

2. 2. 백년전쟁 활약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아들이자, 오를레앙 공작 샤를의 이복 동생인 장은 아르마냐크파 소속으로 1418년 부르고뉴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1420년 석방된 후 도팽 샤를의 휘하에 들어가 백년 전쟁에서 영국군과 싸웠다.[1] 1427년 아르튀르 드 리슈몽 및 에티엔 드 비뇰과 함께 몽타르지 공방전에서 리처드 보샴이 이끄는 영국군의 포위를 풀도록 강요했다. 1428년부터 시작된 오를레앙 공방전에서는 프랑스군 방어를 이끌었고, 1429년 잔 다르크와 함께 영국군의 포위를 푸는데 성공했다.[2] 청어 전투에서는 패배하기도 했지만, 잔 다르크와 함께 파테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는 등, 잔 다르크가 죽을 때까지 그녀와 함께 했다.

1428년 10월부터 오를레앙 공략의 총사령관이 되어 라 이르와 장 포통 드 상트라이유 등과 함께 오를레앙으로 입성, 포위한 잉글랜드군과 대치했다(오를레앙 포위전). 전투는 장기화되었고, 1429년2월 12일에 잉글랜드 보급 부대를 치려다 오히려 패배하는 상황도 있었지만(청어 전투), 4월 29일에 오를레앙에 입성한 잔 다르크와 함께 잉글랜드 측의 요새를 함락시키고, 5월에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었다.[1] 뒤누아 백작은 이 전투 이후 잔과 함께 행동하여, 알랑송 공장 2세와 앙드레 드 라발, 질 드 레, 아르튀르 드 리슈몽 대원수와 합류, 6월 18일의 파테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 잔이 죽을 때까지 그 곁에서 계속 싸웠다.[2]

잔의 처형 후에는 리슈몽 대원수를 따라, 1432년샤르트르를 탈환, 1436년파리를 잉글랜드로부터 해방했다. 1439년에 샤를 7세가 군제 개혁과 귀족에 대한 과세 등 중앙 집권화 정책을 발표하자 돌연 반항, 다음 해인 1440년에 알랑송 공, 부르봉 공샤를 1세 등과 함께 왕세자 루이(후의 루이 11세)를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프라그리 반란), 리슈몽 대원수에게 진압당하자 원래대로 샤를 7세를 섬겼다.[3] 이후에도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아 대립 교황펠릭스 5세의 퇴위 교섭을 맡았고, 1449년에 한 군대를 이끌고 노르망디의 대부분을 정복하여 루앙을 함락, 1450년에 반격한 잉글랜드군을 리슈몽 대원수가 포르미니 전투에서 격퇴하자 합류하여 노르망디를 완전 평정했다. 1451년보르도를 포함한 기옌 점령도 달성했고, 잉글랜드의 기옌 탈환도 1453년의 카스티용 전투에서 좌절되면서 백년 전쟁은 종결을 맞이했다.

1439년 샤를 7세가 군제 개혁과 귀족에 대한 과세 등 중앙 집권화 정책을 발표하자 이에 반발하여, 1440년 알랑송 공 장 2세, 부르봉 공샤를 1세 등과 함께 왕세자 루이(후의 루이 11세)를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켰다(프라그리 반란).[3] 그러나 이 반란은 아르튀르 드 리슈몽 대원수에게 진압되었고, 장 드 뒤누아는 다시 샤를 7세를 섬겼다.[3]

이후에도 대립 교황 펠릭스 5세의 퇴위 교섭을 맡는 등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3] 1465년에는 공익 동맹에 참가했지만, 루이 11세와 화해하여 오를레앙-롱게빌 가문의 지위를 인정받았다.[4]

1449년 장은 군대를 이끌고 노르망디 대부분을 정복하여 루앙을 함락시켰다.[4] 1450년 포르미니 전투에서 아르튀르 드 리슈몽 대원수가 반격해온 잉글랜드군을 격파하자, 이에 합류하여 노르망디를 완전히 평정했다. 1451년에는 보르도를 포함한 기옌 점령도 달성했고,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기옌 탈환 시도도 좌절되면서 백년 전쟁은 종결을 맞이했다.[4]

백년 전쟁 종결 후에는 과거의 전우인 알랑송 공을 체포(죄상은 불명), 주군 샤를 7세의 사후 루이 11세로 즉위한 왕세자에게 불만을 품고, 1465년공익 동맹에 참가했지만, 루이 11세와 화해하여 오를레앙-롱게빌 가문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1468년에 66세로 사망, 장남 프랑수아가 뒤누아 백작위를 상속했다.[4]

2. 2. 1. 오를레앙 공방전과 잔 다르크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아들이자, 오를레앙 공작 샤를의 이복 동생인 장은 아르마냐크파 소속으로 1418년 부르고뉴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1420년 석방된 후 도팽 샤를의 휘하에 들어가 백년 전쟁에서 영국군과 싸웠다.[1] 1427년 아르튀르 드 리슈몽 및 에티엔 드 비뇰과 함께 몽타르지 공방전에서 리처드 보샴이 이끄는 영국군의 포위를 풀도록 강요했다. 1428년부터 시작된 오를레앙 공방전에서는 프랑스군 방어를 이끌었고, 1429년 잔 다르크와 함께 영국군의 포위를 푸는데 성공했다.[2] 청어 전투에서는 패배하기도 했지만, 잔 다르크와 함께 파테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는 등, 잔 다르크가 죽을 때까지 그녀와 함께 했다.

2. 2. 2. 잔 다르크 사후

1428년 10월부터 오를레앙 공략의 총사령관이 되어 라 이르와 장 포통 드 상트라이유 등과 함께 오를레앙으로 입성, 포위한 잉글랜드군과 대치했다(오를레앙 포위전). 전투는 장기화되었고, 1429년2월 12일에 잉글랜드 보급 부대를 치려다 오히려 패배하는 상황도 있었지만(청어 전투), 4월 29일에 오를레앙에 입성한 잔 다르크와 함께 잉글랜드 측의 요새를 함락시키고, 5월에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었다.[1] 뒤누아 백작은 이 전투 이후 잔과 함께 행동하여, 알랑송 공장 2세와 앙드레 드 라발, 질 드 레, 아르튀르 드 리슈몽 대원수와 합류, 6월 18일의 파테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 잔이 죽을 때까지 그 곁에서 계속 싸웠다.[2]

잔의 처형 후에는 리슈몽 대원수를 따라, 1432년샤르트르를 탈환, 1436년파리를 잉글랜드로부터 해방했다. 1439년에 샤를 7세가 군제 개혁과 귀족에 대한 과세 등 중앙 집권화 정책을 발표하자 돌연 반항, 다음 해인 1440년에 알랑송 공, 부르봉 공샤를 1세 등과 함께 왕세자 루이(후의 루이 11세)를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프라그리 반란), 리슈몽 대원수에게 진압당하자 원래대로 샤를 7세를 섬겼다.[3] 이후에도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아 대립 교황펠릭스 5세의 퇴위 교섭을 맡았고, 1449년에 한 군대를 이끌고 노르망디의 대부분을 정복하여 루앙을 함락, 1450년에 반격한 잉글랜드군을 리슈몽 대원수가 포르미니 전투에서 격퇴하자 합류하여 노르망디를 완전 평정했다. 1451년보르도를 포함한 기옌 점령도 달성했고, 잉글랜드의 기옌 탈환도 1453년의 카스티용 전투에서 좌절되면서 백년 전쟁은 종결을 맞이했다.

백년 전쟁 종결 후에는 과거의 전우인 알랑송 공을 체포(죄상은 불명), 주군 샤를 7세의 사후 루이 11세로 즉위한 왕세자에게 불만을 품고, 1465년공익 동맹에 참가했지만, 루이 11세와 화해하여 오를레앙-롱게빌 가문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1468년에 66세로 사망, 장남 프랑수아가 뒤누아 백작위를 상속했다.[4]

2. 2. 3. 프라그리 반란과 공익 동맹

1439년 샤를 7세가 군제 개혁과 귀족에 대한 과세 등 중앙 집권화 정책을 발표하자 이에 반발하여, 1440년 알랑송 공 장 2세, 부르봉 공샤를 1세 등과 함께 왕세자 루이(후의 루이 11세)를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켰다(프라그리 반란).[3] 그러나 이 반란은 아르튀르 드 리슈몽 대원수에게 진압되었고, 장 드 뒤누아는 다시 샤를 7세를 섬겼다.[3]

이후에도 대립 교황 펠릭스 5세의 퇴위 교섭을 맡는 등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3] 1465년에는 에 참가했지만, 루이 11세와 화해하여 오를레앙-롱게빌 가문의 지위를 인정받았다.[4]

2. 2. 4. 노르망디와 기옌 정복

1449년 장은 군대를 이끌고 노르망디 대부분을 정복하여 루앙을 함락시켰다.[4] 1450년 포르미니 전투에서 아르튀르 드 리슈몽 대원수가 반격해온 잉글랜드군을 격파하자, 이에 합류하여 노르망디를 완전히 평정했다. 1451년에는 보르도를 포함한 기옌 점령도 달성했고,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기옌 탈환 시도도 좌절되면서 백년 전쟁은 종결을 맞이했다.[4]

2. 3. 말년

1440년 샤를 7세에 대항한 프라게리 반란에 참여했고, 1465년에는 프랑스 루이 11세에 대항한 공익 동맹의 지도자였지만, 매번 궁정에서 다시 총애를 받았다. 백년 전쟁 종결 후에는 과거의 전우인 알랑송 공을 체포(죄상은 불명)하였고, 주군 샤를 7세 사후 루이 11세로 즉위한 왕세자에게 불만을 품고, 1465년공익 동맹에 참가했지만, 루이 11세와 화해하여 오를레앙-롱게빌 가문의 지위를 인정받았다.[4] 1468년 66세로 사망했으며, 장남 프랑수아가 뒤누아 백작위를 상속했다.[4]

3. 결혼과 자손

장 드 뒤누아는 1422년 4월 부르주에서 마리 르베(Marie Louvet ;1426년 사망)와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1439년 10월 26일 하르쿠르의 마리(Marie of Harcourt ;1464년 사망)와 2번째 결혼을 올렸고, 그녀는 파르트네의 영주권을 갖고 있었다. 슬하에 2명의 아이를 두었다. 그중 프랑수아는 뒤누아 백작, 탕카르빌 백작, 롱그빌 백작, 몽고메리 백작, 물랭 부백작 등의 작위를 가졌다. 카트린은 루시 백작 장 7세(요한 폰 자르브뤼켄)와 결혼했다.

4. 작위 및 칭호

장은 140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 대시종이었다. 1421년부터 1468년까지 바르보네 영주였다. 모르탱 백작 작위는 1421년부터 1425년까지, 페리고르 백작 작위는 1430년부터 1439년까지 보유했다. 1439년부터 1468년까지 뒤누아 백작이었고, 1443년부터 1468년까지 롱그빌 백작이었다. 그 외에도 생소뵈르 자작, 클레 영주 등의 칭호를 가졌다.

5. 평가

6.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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