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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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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잔 다르크는 15세기 백년 전쟁 시기 프랑스를 구원한 인물이다. 프랑스 동레미에서 태어나 13세에 신의 계시를 받아 잉글랜드군을 몰아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샤를 7세를 알현하여 군대를 이끌고 오를레앙을 탈환하는 등 프랑스군의 사기를 높였으나, 콩피에뉴에서 부르고뉴군에게 생포되어 잉글랜드 측에 넘겨졌다.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했으나, 사후 복권되었고 1920년 가톨릭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 국가의 상징으로,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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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은색 갑옷을 입고 칼과 깃발을 든 여성의 이미지
"잔 다르크"를 묘사한 역사적 삽화 (15세기 후반).국립 기록 보관소 소장.
이름잔 다르크
프랑스어 이름fr
옛 프랑스어 이름frm
별칭(오를레앙의 처녀)
영어 별칭(오를레앙의 하녀)
출생1412년경
출생지돈레미, 바 공국, 프랑스 왕국
사망일1431년 5월 30일 (약 19세)
사망지루앙, 잉글랜드령 노르망디
직책동정녀
잔 다르크 서명
종교 정보
존경받는 종파로마 가톨릭교회
성공회 공동체
시복일1909년 4월 18일
시복 주관자비오 10세
시성일1920년 5월 16일
시성 주관자베네딕토 15세
기념일5월 30일
수호 대상프랑스, 순교자, 포로, 군인, 여성 군인 등
군사 정보
소속프랑스군
참전백년 전쟁
최종 계급없음
기타 정보
IMDb 타이틀Joan of Arc

2. 이름

잔 다르크의 이름은 16세기 이전에는 표준적인 철자가 없어 "Darc"가 일반적이었고, "Tarc", "Dart", "Day"와 같은 변형도 존재한다.[72] 잔 다르크는 자신을 Jeanne la Pucelle프랑스어 (잔 라 퓌셀, 잔느 처녀) 또는 la Pucelle프랑스어 (라 퓌셀, 처녀)이라고 칭하며, "Jehanne"라고 서명했다.[72] 16세기에는 "오를레앙의 처녀(Maid of Orleans)"로 알려졌다. 잔 다르크는 어린 시절 읽고 쓰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편지를 받아쓰게 했다. 나중에 서명을 할 수 있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읽는 법까지 익혔을 수도 있다.

잔 다르크는 문맹이었기 때문에, 서신은 모두 구술 필사한 것이었다. 현존하는 3통의 서신에는 잔 다르크의 서명이 들어 있다.

3. 생애

잔 다르크는 1412년경 프랑스 북동부 므즈 계곡의 작은 마을 돔레미에서 자크 다르크와 이자벨 롬의 딸로 태어났다. 잔 다르크는 세 명의 형제와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약 50acre의 토지를 소유한 소작농이었고, 세금 징수와 지역 밤 근무 책임자로서 마을 관리로 가계 수입을 보충했다.[23]

잔 다르크는 백년 전쟁 중에 태어났다. 백년 전쟁은 프랑스 내 영토의 지위와 잉글랜드의 프랑스 왕위 계승 주장을 둘러싸고 시작되었다. 잔 다르크가 태어났을 당시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반복적인 정신 질환을 앓고 있어 통치할 수 없었고, 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 사촌 부르고뉴 공작 장은 프랑스 섭정권을 놓고 다투었다. 1407년, 부르고뉴 공작은 오를레앙 공작 암살을 명령했고, 이는 내전을 초래했다. 미래의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네 명의 형제가 사망한 후 도팽(왕위 계승자) 칭호를 받았다.

잉글랜드의 헨리 5세는 1415년 침공 당시 프랑스 내부 분열을 이용했다. 부르고뉴파는 1418년 파리를 점령했다. 1419년, 도팽은 부르고뉴 공작과 평화 협상을 위한 휴전을 제안했지만, 협상 중 공작은 샤를의 아르마냐크파 당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새로운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다. 샤를 6세는 도팽이 부르고뉴 공작을 살해했다고 비난하고 그를 프랑스 왕위 계승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다. 샤를의 아내 바이에른의 이자보가 트루아 조약에 서명했는데, 이 조약은 그들의 딸 발루아의 카트린을 헨리 5세와 결혼시키고,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그들의 상속자에게 부여하며, 도팽을 효과적으로 상속에서 제외시켰다. 1422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는 두 달 사이에 사망했고, 9개월 된 잉글랜드의 헨리 6세는 조약에 따라 영국-프랑스 이중 군주국의 명목상 상속자가 되었지만, 도팽 또한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다.

왼쪽을 향하고 있는 잔 다르크의 옆모습, 오른손에 깃발을, 왼손에 칼집에 든 칼을 들고 있다.
잔 다르크를 묘사한 가장 오래된 기록; 클레망 드 포켐베르그(1429년 5월, 프랑스 국립문서보관소)가 그린 그림


젊은 시절 잔 다르크는 집안일을 하고, 양털을 잣고, 아버지가 밭일을 하는 것을 도왔으며, 가축을 돌보았다. 어머니는 잔 다르크의 종교 교육을 담당했다. 돔레미는 바 공국에 속해 있었고, 부르고뉴파 지역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주민들은 아르마냐크파에 충성했다. 1425년에는 돔레미가 공격받고 가축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잔 다르크는 이 습격 이후 첫 환상을 보았다.

잔 다르크는 13살 때 성 미카엘이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정원에 나타났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이 환상 이후 그들과 함께 가고 싶어서 울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평생 동안 성 미카엘의 환상을 보았는데, 돔레미 지역과 프랑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이러한 환상을 자주 보았고, 종종 교회 종이 울릴 때 보았다고 진술했다. 그녀의 환상에는 안티오크의 마가레트와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로 추정되는 성 마가레트와 성 카타리나도 포함되었다. 잔 다르크는 이 목소리들에게 순결 서약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녀의 마을의 한 젊은이가 그녀가 결혼 약속을 어겼다고 주장했을 때, 잔 다르크는 그에게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그의 주장은 교회 법정에서 기각되었다.

젊은 시절 잔 다르크는 프랑스 시골에서 유포되던, 무장한 처녀가 나타나 프랑스를 구원할 것이라는 마리 로빈프랑스어의 환상에 기반한 예언을 접했다. 잔 다르크는 자신이 이 약속된 처녀라고 암시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프랑스는 여자 때문에 멸망하지만 처녀에 의해 회복될 것이라는 말을 상기시켰다. 1428년 5월, 그녀는 삼촌에게 인근 도시 보쿠뢰르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고, 거기서 보드리쿠르에게 아르마냐크파 궁정이 있는 시농으로의 무장 호위를 요청했다. 보드리쿠르는 거칠게 거절하고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7월에 돔레미는 부르고뉴군에게 습격받아 마을에 불이 붙고 농작물이 파괴되었으며, 잔 다르크와 가족, 다른 마을 사람들은 도망쳐야 했다. 1429년 1월, 잔 다르크는 보쿠뢰르로 돌아왔으나 다시 청원이 거절되었다. 하지만 이때 그녀는 보드리쿠르의 두 병사 장 드 메츠와 베르트랑 드 풀랭지의 지지를 얻었다. 한편, 그녀는 보쿠뢰르에 머무는 동안 잔 다르크에 대해 들었던 로렌 공작 샤를 2세에 의해 안전 통행증을 받아 낭시로 소환되었다. 공작은 병들었고 그녀에게 치료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치료를 제공하지 않고 그의 정부와 함께 사는 그를 질책했다.

헨리 5세의 형제들인 베드퍼드 공작 존과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는 프랑스 정복을 계속했다. 프랑스 북부 대부분, 파리, 그리고 남서부 일부 지역은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 통제하에 있었다. 부르고뉴파는 전통적인 프랑스 국왕 대관식 장소인 랭스를 장악하고 있었고, 샤를은 아직 대관식을 치르지 않아 랭스에서의 대관식은 그의 왕위 계승권을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1428년 7월, 영국군은 오를레앙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루아르 강의 많은 작은 다리 마을들을 점령하여 샤를의 영토를 거의 고립시켰다. 오를레앙은 샤를의 남은 영토를 공격하는 마지막 장애물로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잔 다르크의 후일 증언에 따르면, 이 무렵 그녀의 환상은 그녀에게 돔레미를 떠나 도팽 샤를을 도우라고 말했다.

보드리쿠르는 1429년 2월, 오를레앙 공방전 중 청어 전투에서 아르마냐크파 구원대가 격파된 시점에 잔 다르크와 세 번째 만남에 동의했다. 그들의 대화는 메츠와 풀랭지의 지지와 함께 보드리쿠르를 설득하여 도팽과의 면담을 위해 시농으로 가도록 허락했다. 잔 다르크는 6명의 병사 호위를 받으며 여행했다. 출발 전에 잔 다르크는 호위병들과 보쿠뢰르 주민들이 제공한 남장을 했고, 생애 남은 기간 동안 계속해서 남장을 했다.

3. 1. 배경

1435년 백년 전쟁 상황 지도. 붉은색이 잉글랜드 영역이고, 푸른색이 프랑스 영토이다.


백년 전쟁은 1337년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랭커스터 왕가)와 프랑스 발루아 왕가 간에 분쟁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발발하였다. 백년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중간중간에 여러 이유들로 인하여 휴전 기간이 있었다. 모든 전투는 프랑스 영토 내에서 일어났으며, 잉글랜드군의 공격과 횡포로 인하여 프랑스 경제는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96] 프랑스 인구수는 이전 세기에 휩쓸었던 흑사병의 피해 이후 아직 회복 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으며, 상인들은 외국 시장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었다. 잔 다르크가 등장할 무렵에 잉글랜드는 이미 프랑스 영토를 거의 점령하였으며, 프랑스는 약 30년 동안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실정이었다. 역사학자 켈리 드브라이스는 “13세기 프랑스 왕국에는 그림자만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라고 표현하였다.[97]

잔 다르크가 태어난 당시 프랑스 국왕은 샤를 6세였는데, 종종 발작을 일으키곤 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제대로 통치하기 어려워하였다.[98] 그리하여 샤를 6세의 남동생인 오를레앙 공 루이와 샤를 6세의 사촌인 부르고뉴 공작 장 간에 프랑스 섭정 및 샤를 6세의 자녀들에 대한 법정 후견인 자리를 놓고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들 간의 다툼은 샤를 6세의 왕비인 바이에른의 이자보와의 간통 및 왕손들의 납치 혐의 고소로까지 격화되었다. 결국 1407년 부르고뉴 공작의 지시로 오를레앙 공작은 암살당하기에 이르렀다.[99]

오를레앙 공을 따르던 세력과 부르고뉴 공작을 따르던 세력은 각각 아르마냐크파부르고뉴파라는 이름의 파당을 결성하였다. 프랑스 내에서 이처럼 권력 다툼이 심화되자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는 이를 프랑스를 침공할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1415년 잉글랜드군은 아쟁쿠르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프랑스 북부의 여러 도시를 병합하였다.[100] 샤를 6세의 아들이었던 샤를 7세는 형들이 잇달아 사망함으로써 14세의 나이에 프랑스의 제1왕위계승자인 도팽의 자리에 올랐다.[101] 그의 첫 번째 정치적 행보는 1419년 부르고뉴 공작과 평화조약을 맺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아르마냐크파 사람들이 도팽 샤를이 안전을 직접 보증하고 열린 회담장에서 부르고뉴 공작 장을 암살함으로써 재앙으로 끝났다. 새 부르고뉴 공작이 된 필리프는 부친이자 전직 부르고뉴 공작의 암살 문제로 도팽 샤를을 배척하고 잉글랜드와 손을 잡았다. 그리하여 프랑스 영토의 상당 부분이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 측에 넘어가게 되었다.[102]

1420년 프랑스 왕비 이자보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아들인 도팽 샤를 대신에 잉글랜드의 헨리 5세 국왕과 그의 후계자에게 넘긴다는 내용의 트루아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자 이자보 왕비와 사망한 오를레앙 공작 사이에 일어났던 스캔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으며, 도팽 샤를이 샤를 6세의 친자가 아니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103] 헨리 5세와 샤를 6세는 1422년에 각자 후사를 남긴 채 2개월 간격을 두고 사망하였으며, 헨리 5세의 아들인 헨리 6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왕국의 군주가 되었다. 헨리 6세는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헨리 5세의 동생인 베드포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이 섭정의 자리에 올랐다.[104]

1429년 초에는 프랑스 북부의 거의 모든 지역과 남서부의 일부 지역이 모두 잉글랜드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부르고뉴파가 랭스를, 잉글랜드는 파리를 거점으로 통치하였는데, 랭스는 전통적으로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이 열리는 장소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왜냐하면 아직 어느 쪽 프랑스 왕위 주장자도 공식적으로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왕실을 지지하는 얼마 안 남은 도시 가운데 한 곳이자 루아르 강을 따라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오를레앙을 공성전으로 공략하였는데, 오를레앙은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남은 지역을 공략하는데 있어서 마지막으로 거쳐야 하는 장애물이었다. 어떤 현대 역사학자는 당시 상황을 가리켜 “프랑스 왕국 전체의 운명이 오를레앙에 달려 있었다.”라고 표현하였다.[105] 오를레앙이 잉글랜드의 파죽지세 같은 공격을 오래 버틸 수 있다고 판단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106]

1429년 프랑스

3. 2. 신의 계시

잔 다르크는 1412년경 프랑스 동부 바 공작령의 작은 마을 동레미(오늘날의 동레미라퓌셀)에서 태어났다. 1425년, 13세 때 처음으로 환시를 체험했다고 진술했다. 잔 다르크의 증언에 따르면, 들판에 혼자 있을 때 성 미카엘, 성녀 가타리나, 성녀 마르가리타가 나타나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고 도팽 샤를을 랭스로 데려가 대관식을 치르게 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들이 떠난 후, 잔 다르크는 그들의 아름다움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109]

성 미카엘과 성녀 가타리나, 성녀 마르가리타로부터 하느님의 계시를 받는 잔 다르크. 1911년 그림.


잔 다르크는 자신이 들은 "하느님의 목소리"가 성당이 있는 오른쪽에서 굉장한 광휘에 휩싸여 왔으며,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곧 천사의 목소리임을 깨달았다고 진술했다. 또한 성 미카엘, 성녀 가타리나, 성녀 마르가리타의 모습을 보았고, 그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훈계하며 행동 지침을 주었다고 했다. 잔 다르크는 그들의 목소리가 친절하고 다정했으며,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덧붙였다.

16세 때, 잔 다르크는 친척을 통해 보쿨뢰르의 프랑스군 경비대 대장 로베르 드 보드리코르에게 시농에 있는 프랑스 궁정을 방문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로베르는 처음에는 잔 다르크를 무시했지만, 잔 다르크는 계속해서 요청했고, 로베르 휘하의 장 드 메츠와 베르트랑 드 폴뤼니의 지지를 얻어 로베르에게 오를레앙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묘책이 있다고 설득했다.[110][111]

잔 다르크는 돔레미 지역이 부르고뉴파 지역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주민들은 아르마냐크파에 충성했으며, 1425년에는 돔레미가 공격받고 가축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군을 몰아내야 한다는 여론을 접했고, 첫 환상을 보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잔 다르크는 13살 때 성 미카엘이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정원에 나타났고, 그 후 그들과 함께 가고 싶어 울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평생 동안 성 미카엘의 환상을 보았으며, 돔레미 지역의 수호성인이자 프랑스의 수호자로 여겨지는 성 미카엘의 환상을 자주 보았다고 진술했다. 또한 성 마가레트와 성 카타리나의 환상도 보았는데, 이들은 그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성녀들이었다. 잔 다르크는 이 목소리들에게 순결 서약을 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프랑스 시골에서는 무장한 처녀가 나타나 프랑스를 구원할 것이라는 예언이 유포되고 있었고, 잔 다르크는 자신이 이 약속된 처녀라고 암시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프랑스는 여자 때문에 멸망하지만 처녀에 의해 회복될 것이라는 말을 상기시켰다.

3. 3. 도팽 알현

로베르 드 보드리코르는 잔 다르크의 계속되는 열정에 감명을 받아, 결국 그녀에게 호위를 붙여 시농으로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잔 다르크는 남장을 하고 적대 세력인 부르고뉴 영토를 가로질러 시농 성으로 갔다.[112] 시농에 있는 프랑스 궁정에 도착한 잔 다르크는 도팽 샤를을 알현하였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직접 만나본 후, 그녀의 도덕심과 의지에 감탄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도팽은 잔 다르크가 정말 하느님이 보낸 사자인지를 시험하기 위해 자신의 옷을 시종에게 입혀 옥좌에 앉혀놓고 자신은 변장한 채 가신들 속에 섞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초라한 차림의 도팽 앞으로 다가가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한편, 도팽 샤를의 장모인 아라곤의 욜란다는 오를레앙을 구원하기 위한 원정대를 편성하기 위한 자금을 대주고 있었다.

프랑스 샤를 7세의 초상화
샤를 7세 (, 루브르 박물관, 파리)


잔 다르크는 도팽 샤를에게 자신에게 기사가 착용하는 갑옷과 무기는 물론 군대를 이끌 수 있는 지휘권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잔 다르크는 자신의 갑옷과 말, 칼, 깃발 등의 군사 원정 시 필요한 물품들을 모두 기증을 통해 어렵게 받았다. 역사학자 스티븐 W. 리키는 프랑스 왕실이 잔 다르크의 주장에 동조하여 그녀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이유에 대해서 당시 거의 붕괴하기 일보 직전에 있었던 프랑스 왕실에 있어서 잔 다르크가 이러한 난국을 타개해줄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잔 다르크는 도착하자마자 장기간에 걸친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분쟁을 종교전쟁으로 효과적으로 전환시켰다.[113]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행보에는 위험이 따랐다. 샤를의 신하들은 잔 다르크가 이단자마녀가 아니라는 확증 없이 섣불리 그녀를 지지하며 도와주었다가는, 적들에게 악마 숭배자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그리하여 샤를은 잔 다르크에 대한 신원을 조사하는 한편 그녀의 신앙심과 도덕성 등을 알아보기 위해 푸아티에에서 종교적 심사를 할 것을 지시하였다. 1429년 4월 조사단은 잔 다르크가 ‘흠잡을 구석이 없는 인생을 살아왔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겸손함과 정직함 그리고 소박함의 덕목을 갖추었다’고 보고하였다.[113] 푸아티에의 신학자들은 잔 다르크가 받았다고 주장한 하느님의 계시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주장에서 이단이나 미신적인 요소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녀가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히 거룩한 임무를 받았다고 봐도 무리는 없다는 의견을 샤를에게 전달하였다.

이것만으로도 샤를에게는 충분하였지만, 신하들은 여전히 잔 다르크를 의심하며 신뢰하지 말라고 조언하였다. 결국 잔 다르크의 주장의 진실성은 오를레앙에 대한 잉글랜드군의 포위 공격을 푸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샤를 7세는 1429년 2월 말이나 3월 초, 시농의 왕궁에서 잔 다르크를 처음 만났다. 당시 잔 다르크는 열일곱 살이었고 샤를 7세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공방전을 해제하고 샤를 7세를 랭스로 데려가 즉위식을 치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사적인 대화를 나누었고, 이는 샤를 7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잔 다르크의 고해사제였던 장 파스케렐은 나중에 잔 다르크가 샤를 7세에게 자신이 샤를 6세의 아들이며 합법적인 왕이라고 확신시켜 주었다고 증언했다.

샤를 7세와 그의 측근들은 더 확신이 필요했다. 그들은 잔 다르크를 푸아티에로 보내 신학자 위원회의 심문을 받도록 했다. 신학자들은 그녀가 훌륭한 사람이자 좋은 가톨릭 신자라고 선언했다. 그들은 잔 다르크의 영감의 근원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오를레앙으로 보내는 것이 왕에게 유용할 수 있으며 그녀의 영감이 신성한 기원인지 여부를 시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동의했다. 그 후 잔 다르크는 투르로 보내져 샤를 7세의 장모인 아라곤의 요란다가 지휘하는 여성들에 의해 신체 검사를 받았고, 그녀의 순결이 확인되었다. 이것은 그녀가 프랑스의 예언된 순결한 구세주가 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녀의 헌신의 순수성을 보여주고, 악마와 관계를 맺지 않았음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검사 결과에 안심한 도핀은 그녀를 위해 판금 갑옷을 주문했다. 그녀는 자신의 깃발을 디자인했고, 생트카트린드피에르부아 교회 제단 아래에서 검을 가져오게 했다. 이 무렵 그녀는 자신을 "잔느 마리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자신의 임무의 표시로 순결을 강조했다.

보드리쿠르는 닝겐 전투에 관한 잔 다르크의 예언이 적중했다는 전선 보고를 듣고, 협력자들과 함께 잔 다르크의 시농 방문을 허락했다.

3. 4. 전투 중 활약

1429년 4월 29일,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군에게 포위된 오를레앙에 도착했다. 그러나 오를레앙을 지키던 프랑스군 지휘관 장 드 오를레앙은 잔 다르크를 전투 회의에서 배제하고, 전투 사실도 알리지 않는 등 무시했다.[114] 하지만 잔 다르크는 굴하지 않고 회의와 전투에 참여하려 노력했다. 잔 다르크의 실제 군사적 지도력에 대해서는 역사학계 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전통적인 역사학자들은 잔 다르크가 깃발을 휘두르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본다.[114] 반면, 최근에는 잔 다르크가 뛰어난 통솔력과 전략을 가진 지휘관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112] 그러나 잔 다르크가 백년전쟁에서 프랑스에게 불리하던 전세를 뒤엎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한다.[115]

잔 다르크는 프랑스군 지휘관들의 신중한 전략을 거부했다. 잔 다르크가 오기 전 5개월 동안 오를레앙을 방어하던 프랑스군은 단 한 번 공격적으로 나섰지만 실패했다. 1429년 5월 4일, 프랑스군은 생 루 요새를 공격하여 탈환했고, 5월 5일에는 생장르블랑 요새로 진격했다. 다음날 잔 다르크는 참모회의에서 장 드 오를레앙의 의견에 반대하며 적군을 재차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장 드 오를레앙은 전투를 피하기 위해 성문을 걸어 잠그라고 지시했지만, 잔 다르크는 성내 주민과 병사들을 이끌고 성주에게 가서 문을 열라고 요구했다. 잔 다르크는 군대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생 아구스탱 요새를 탈환했다. 그날 밤, 오를레앙의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잔 다르크를 배제한 채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5월 7일에 잉글랜드군의 주요 요새인 르 투렐르 요새를 공격하자고 주장했다.[116] 당시 사람들은 잔 다르크가 전투 중 목에 화살을 맞고도 살아남아 전투를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를 영웅으로 여겼다.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프랑스군은 오를레앙에서 크게 승리했다.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이 파리나 노르망디를 재탈환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샤를 7세대관식을 위해 랭스를 탈환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루아르 강 인근의 교량을 확보하고자 했다. 잔 다르크는 알랑송 공작 장 2세와 함께 프랑스군의 지휘권을 자신에게 줄 것을 요청했다. 랭스는 파리보다 약 두 배나 멀리 떨어져 있었고, 적군의 영역 깊숙한 곳에 있었기 때문에 잔 다르크의 주장은 대담한 것이었다.[117]

1429년 잔 다르크의 랭스 입성. 얀 마테이코의 작품.


랭스 대성당. 전통적으로 이곳은 역대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이 열렸던 곳이다. 샤를 7세의 대관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샤를 7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잔 다르크. 팡테옹의 벽화.


샤를 7세의 허락을 받은 잔 다르크는 군대를 이끌고 6월 12일에 자르조를, 6월 15일에 묑쉬르루아르를, 6월 17일에는 보장시를 탈환했다. 장 드 오를레앙을 비롯한 다른 지휘관들도 잔 다르크의 활약에 감명받아 그녀를 지지하게 되었다. 알랑송 공작은 잔 다르크가 대포가 곧 날아와 덮칠 것이라고 경고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며 감사했다.[118] 잔 다르크는 성곽 공격용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다가 적군이 쏜 돌멩이를 머리에 맞고도 버텨냈다. 6월 18일, 존 패스톨프 장군이 이끈 구원군이 도착하여 잉글랜드 방어군에 합류했다. 파테 전투는 아쟁쿠르 전투와 비슷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잉글랜드 궁수들이 수비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프랑스 선발대가 공격하여 잉글랜드군의 주요 전력이 분쇄되고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존 패스톨프는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달아났다. 반면 프랑스군은 거의 손실을 입지 않았다.[119]

프랑스군은 6월 29일에 지앙쉬르루아르에서 랭스로 진격했으며, 7월 3일 부르고뉴파가 장악하던 오세르에게 조건부 항복을 받아냈다. 프랑스군의 행로에 있던 다른 도시들도 저항 없이 프랑스 동맹에 복귀했다. 샤를 7세의 왕위계승권을 박탈하려 했던 조약 장소였던 트루아는 4일간 공격 없는 포위 끝에 항복했다.[120]

7월 16일, 랭스는 프랑스군에게 성문을 열었다. 샤를 7세의 대관식은 다음날 아침인 1429년 7월 17일 랭스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이로써 5년 동안 공석이었던 프랑스 국왕이 탄생했으며, 샤를 7세는 프랑스의 국왕으로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대관식이 끝나자 잔 다르크는 샤를 7세 앞에 무릎을 꿇고 “폐하, 이제 프랑스를 다스리는 진정한 국왕이 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잔 다르크와 알랑송 공작은 파리로 진군하자고 촉구했지만, 프랑스 왕실은 부르고뉴 공국과의 협상을 통해 휴전을 맺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하지만 부르고뉴 공국은 이를 역이용하여 파리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한 지연 술책으로 프랑스 왕실과 평화 협상을 했다.[122] 잔 다르크가 이끈 프랑스군은 파리 인근의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평화로운 방식으로 항복을 받아냈다. 8월 15일, 베드퍼드 공작이 이끈 잉글랜드군이 프랑스군과 대치했다. 9월 8일, 프랑스군은 파리를 공격했다. 잔 다르크는 적진의 석궁에서 날아온 화살을 다리에 맞고도 끝까지 군대를 지휘했다. 다음날 아침, 잔 다르크는 회군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았다. 10월에 잔 다르크는 생피에르르무티에를 탈환하고 귀족 작위를 받았다.

3. 5. 생포와 투옥

1430년 5월 23일, 잔 다르크는 콩피에뉴 포위전에서 콩피에뉴가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러 달려갔으나, 마리니에 있는 부르고뉴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포로로 사로잡혔다.[123] 부르고뉴파에서 6천 명을 추가로 병력을 보내오자,[123] 잔은 병사들에게 콩피에뉴 성으로 피신하라고 지시했고 자신은 전장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 후퇴하는 병사들의 뒤를 지켰다. 부르고뉴군은 후방에서 지원군이 오지 못하게 막는 한편 잔 다르크를 철저하게 고립시킨 다음, 활을 쏴서 말에서 떨어뜨려 사로잡았다. 처음에 잔은 항복을 거부하였다.[124]

잔 다르크가 부르고뉴군에 생포되자 잉글랜드와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녀의 신병 인수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125] 잉글랜드는 몸값을 지불하면 포로를 석방하는 관례가 있었기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또한 잉글랜드는 종교재판을 통해 잔을 마녀로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되면 샤를 7세는 악마와 동맹을 맺고 마녀의 도움으로 즉위한 왕이 되므로 권위와 정통성에 흠집을 낼 수 있었다. 교회가 관심을 보인 이유는 잔 다르크가 신과 직접 소통한다며 교회의 위계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126][127][128] 그러나 정작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석방 혹은 구출에 대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129]

잔은 억류되어 있는 동안 여러 번 탈출을 시도하였다.[130] 베르망두아에 있을 때는 높이가 21미터나 되는 탑에서 해자로 뛰어내린 적도 있었는데, 결국 도로 붙잡혀 부르고뉴파에 속한 아라스로 끌려갔다. 이후 잉글랜드는 10000리브르를 지불하고[131] 부르고뉴로부터 잔 다르크의 신병을 넘겨받았고 1430년 12월에 그녀는 당시 잉글랜드가 지배하고있던 루앙으로 이감되었다.[132]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간의 잔에 대한 거래에서 보베의 교구장이자 친잉글랜드파인 피에르 코숑 주교가 큰 역할을 하였으며, 나중에 잔을 상대로 한 종교재판에서도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133]

콩피에뉴에서 부르고뉴 공국군에 붙잡힌 잔 다르크. 파리 판테온의 벽화.

3. 6. 종교재판

루앙 성의 감옥은 잔 다르크가 재판 중에 수감되었던 곳으로, 이후 잔 다르크 탑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잔 다르크에 대한 재판은 명목상으로는 그녀의 이단성 시비 여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로 열렸다. 베드포드 공작은 조카인 헨리 6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잔의 활약으로 맞수인 샤를 7세가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잔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 잔을 이단 혐의로 공격하는 것은 곧 그녀가 옹립한 샤를 7세의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잔 다르크에 대한 종교재판은 1431년 1월 9일 잉글랜드의 점령 지역인 루앙에서 열렸다.[134] 하지만 이 재판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많았다.

잉글랜드의 헨리 보퍼트 추기경에게 심문을 받고 있는 잔 다르크. 이폴리트 들라로슈의 그림.


몇 가지 주요 문제점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교회법상 코숑 주교는 종교재판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135] 그가 종교재판관이 된 것은 잔에 대한 종교재판에 자금을 대준 잉글랜드 정부의 지지를 등에 업은 덕분이었다. 잔에게 불리한 증언을 모으는 일을 위탁받은 성직 공증인 니콜라스 바이는 잔에게 불리한 증언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찾지 못하였다.[136] 이렇게 잔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재판이 강행되었다. 나중에 법정 서기들은 상부의 강압에 못 이겨 재판 기록을 잔 다르크에게 불리하도록 일부 날조했다고 고백했다. 심지어 잔에게는 자문관이나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교회법을 또 한 번 위반하였다. 법정에는 그녀를 도울 증인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1차 공개 심리 때, 잔은 법정에 출석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반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프랑스 측 성직자들도 마땅히 이 법정에 초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37]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잔 다르크는 홀로 자신을 변호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농가 출신의 18살 소녀가 연륜 있는 주교들과 신학자들로 구성된 심판관들과 그들의 끈질긴 유도 심문에 맞서 펼친 변론은 놀라울 정도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었다. 심판관들은 읽고 쓸 줄도 모르는 그녀의 유려한 변론에 여러 번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한 예로, 재판관들이 잔에게 “그대는 자신이 지금 은총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고 묻자 잔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만약 제가 은총의 상태에 있지 않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제가 은총의 상태에 있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계속해서 은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138] 이 질문은 잔에게 놓은 덫이었다. 은총의 상태란 모든 죄악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질문은 대단히 어려운 신학적 문제를 담고 있었다. 교회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신을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다고 함부로 단언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데, 만약 잔이 그렇다고 답변했다면 그녀는 이단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만약 잔이 아니라고 대답했다면 그것은 그녀 스스로 자신이 죄악의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법정 공증인의 증언에 의하면, 잔을 심문한 자들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대답에 어찌할 바를 몰라 무척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139] 20세기에 조지 버나드 쇼는 이 공방에 매우 감탄하여 자신의 희극 《성녀 잔 다르크》에서 재판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였다.[140]

훗날, 당시 법정에 참석했던 관리들은 잔 다르크의 재판에 사용된 증거들 중 많은 부분이 그녀에게 불리하도록 조작된 것이라고 실토하였다. 종교재판관 장 레메트르를 포함한 많은 성직자가 잉글랜드 측의 갖은 회유와 압력을 받아 재판을 진행하였으며, 심지어 개중에는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 또한 종교재판의 규정상 여성 죄수는 수녀가 관리 감독하는 특별 시설에 수감되는 것이 통례였는데, 잔은 잉글랜드인 병사들이 지키는 일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썩은 음식을 먹다가 식중독에 걸리거나 병사들의 구타와 폭행에 시달렸다. 심지어 코숑 주교는 잔이 교황에게 항소할 기회마저 막아버렸다. 이에 비해 잉글랜드 측은 70명에 달하는 법률 자문관을 구성했다.

코숑 주교는 마지막에 잔 다르크에게 남장 혐의를 추궁했다. 당시 여성이 남장을 하거나 남성이 여장을 하는 일은 종교적인 죄였다. 잔 다르크는 남장은 남성들이 많은 군대에서 제대로 근무할 수 있기 위해, 또한 유사시에는 정조를 지키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다며 반박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후에 그녀는 법정의 명령에 따라 여자 옷을 입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감옥을 찾아온 한 잉글랜드 영주가 그녀를 강간하려고 시도하자 다시 남자 차림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로 잔 다르크는 사형을 당할 때까지 머리를 자르고 남자 복장을 했다.

오랜 재판 끝에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잔 다르크는 곧바로 처형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교회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녀는 문맹이었으므로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3. 7. 화형

화형당하는 잔 다르크. 쥘 외젠 르느뵈의 그림.


이단은 초범인 경우에는 경범죄에 해당하지만, 재범인 경우에는 중죄로 다루어졌다. 잔은 각서에 서명할 때 여성의 옷을 입는 것에 동의하였다. 며칠 뒤 법정에 선 그녀는 재판관에게 '고귀한 혈통을 지닌 잉글랜드의 귀족이 감옥에 들어와서 자신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했다.'라고 말했다.[141] 결국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더군다나 여성의 옷을 빼앗겨 달리 입을 옷이 없었기 때문에 잔은 다시 남성의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142]

1431년 5월 29일 법정은 잔 다르크에게 화형을 선고했다. 1431년 5월 30일 잔 다르크는 루앙의 비외 마르셰 광장에서 군중이 보는 앞에서 장대에 밧줄로 묶였다. 잔 다르크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수사들에게 자신이 보는 앞에서 십자고상을 높이 들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수사들은 잔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었다. 한 소작농 역시 잔을 애석하게 여겨 그녀 앞에 작은 십자가를 놓았다. 잔이 숨을 거둔 후에 잉글랜드군은 불을 끄고 새까맣게 그을린 그녀의 시신을 공개 전시하여 아무도 그녀가 살아서 빠져 나갔다는 말을 내뱉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군중이 그 유해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다시 시체를 세 번이나 불에 태워서 잿더미로 만든 후에 센강에 내다버렸다. 당시 처형간수였던 조프리는 잔 다르크가 화형에 처해진 이후 자신이 언제 천벌을 받을지 몰라 매우 두려운 나날을 보냈다고 고백했다.[143]

4. 사후 복권

잔 다르크는 처형되었지만, 샤를 7세는 그녀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 때문에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8] 샤를 7세는 이단으로 몰린 잔 다르크의 복권을 통해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1450년, 루앙을 되찾은 샤를 7세는 신학자 기욤 부이예에게 잔 다르크 사건 조사를 명했다. 부이예는 잔 다르크 재판이 부당했으며, 그녀가 정치적 희생양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8]

1452년, 추기경 기욤 데스투트빌(Guillaume d'Estouteville)과 심문관 장 브레알(Jean Bréhal)은 재조사에 착수, 재판 과정의 편향성을 지적하는 27개 항목을 제시하고 약 20명의 증인을 인터뷰했다.[8] 데스투트빌은 오를레앙에서 잔 다르크를 기리는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사면을 허락했다.[8]

1454년, 브레알은 잔 다르크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청원을 교황 니콜라오 5세에게 전달하고, 빈 대학교 등 여러 신학자와 변호사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대부분 잔 다르크에게 유리한 의견을 제시했다.[8]

1455년, 교황 갈리스토 3세는 복권 재판을 승인하고, 장 주베날 데 뤼르생(Jean Juvénal des Ursins) 등을 포함한 세 명의 위원을 임명하여 재판을 감독하게 했다. 브레알은 심문관으로 활동했다.[8]

복권 재판은 1455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시작되어 1456년 루앙 대성당에서 마무리되었다. 약 115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법원은 이전 재판이 불공정하고 기만적이었다고 판결, 잔 다르크의 유죄 판결과 처형을 무효화했다.[8] 브레알은 코숑과 그의 지지자들이 악의와 이단 혐의로 유죄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8] 법원은 기소장 사본을 찢고, 잔 다르크가 처형된 장소에 십자가를 세우도록 명령했다.[8]

잔 다르크 복권 기념비 (에밀 팽숑 제작). 잔 다르크는 전면에 서서 복권 재판(1909년, 누와용 대성당) 관계자들을 마주하고 있다.

4. 1. 백년전쟁의 종결



백년 전쟁1337년 프랑스 왕위 계승 분쟁을 계기로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랭커스터 왕가)와 프랑스 발루아 왕가 사이에 발발했다. 백년 전쟁이라는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여러 차례 휴전 기간이 있었다. 모든 전투는 프랑스 영토 내에서 벌어졌으며, 잉글랜드군의 공격과 약탈로 프랑스 경제는 거의 마비되었다.[96] 프랑스 인구는 흑사병 피해에서 회복되지 못했고, 상인들은 외국 시장에서 고립되었다. 잔 다르크 등장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고, 프랑스는 약 30년간 승리하지 못했다. 역사학자 켈리 드브라이스는 "13세기 프랑스 왕국에는 그림자만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고 표현했다.[97]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잔 다르크 조각상.


백년 전쟁은 잔 다르크 사후에도 22년간 계속되었다. 트루아 조약에 따라 프랑스 왕위를 주장한 잉글랜드 왕 헨리 6세는 1431년 12월 파리에서 프랑스 왕 즉위식을 거행했지만, 프랑스 왕 샤를 7세는 프랑스 왕위 정당성을 유지했다.

1429년 파테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군사적 주도권과 장궁 부대를 잃은 후, 1435년 아라스에서 프랑스, 잉글랜드, 부르고뉴 3국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동맹이 해소되고 프랑스와 부르고뉴 관계가 가까워져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샤를 7세의 백년전쟁을 주도하고 헨리 6세의 섭정으로 잉글랜드 국정을 담당했던 베드퍼드 공 존이 1435년 9월 사망했다. 10대 중반의 헨리 6세는 섭정을 두지 않고 잉글랜드 역사상 최연소 국왕 친정을 시작했다. 헨리 6세의 부족한 지도력은 백년전쟁 종결의 큰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역사학자 켈리 드브리스는 잔 다르크의 적극적인 포화 집중과 정면 돌파 작전이 이후 프랑스군 전술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한다.[68]

잔 다르크 사후 프랑스군을 이끈 것은 리슈몽이었다. 파테 전투 이후 샤를 7세에게 미움을 받았으나, 1432년 요란드의 요청으로 복귀, 1433년 정적 라 트레무이유를 축출하고 궁정 실권을 장악했다. 리슈몽은 군사·외교 능력을 발휘해 각지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퇴하고, 부르고뉴와 프랑스 화해에 힘써 1435년 양국 화해를 이루고, 1436년 4월 13일 파리를 탈환했다.

파리 해방 후에도 리슈몽은 군사 활동을 계속했고, 라 이르와 잔트라이유 등 잔 다르크의 전우들도 리슈몽 휘하에서 프랑스 탈환에 참여했다. 1439년 리슈몽은 샤를 7세와 귀족 과세 및 정규군 창설을 추진, 반대 귀족들을 1440년 프라글리의 난에서 평정하고, 잉글랜드군 소탕을 계속하여 1445년 정규군 제도를 발족, 대포 부대도 강화해 프랑스군을 정예화했다. 이 군대로 리슈몽은 1449년 노르망디 대부분을 평정하고, 1450년 포르미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 노르망디를 제압했다. 1453년 프랑스군은 카스티용 전투에서 탈보트를 사살하고, 보르도를 평정해 백년전쟁을 종결지었다.

4. 2. 재심과 명예회복

교황 갈리스토 3세는 대심문관 장 브레알과 잔 다르크의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여 잔 다르크의 혐의에 대한 재조사 및 종교재판을 실시한다고 포고하였다. 재심의 목적은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판결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조사였다. 조사는 1452년 시작되었으며, 기욤 부유 신부가 조사관을 맡았다. 공식적인 항소는 1455년 11월에 제출되었다.

항소에는 유럽 전역의 성직자가 대거 참여하였으며, 교회법에 따른 표준 법정 절차가 준수되었다. 신학자로 전원 구성된 배심원들은 115명의 증인들의 증언 및 증거자료들을 비교 분석하였다. 대심문관 브레알은 1456년 6월 마지막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에 그는 잔 다르크를 순교자로 선언하고, 피에르 코숑 주교에 대해서는 세속적인 이유 때문에 무죄한 여인을 죄인으로 몰아간 이유를 들어 이단자라고 선언하였다. 1456년 7월 7일 항소심에서 잔 다르크의 모든 혐의에 대해서 무죄라는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146]

4. 3. 재심의 정치적 의도

잔 다르크 사후 복권은 순수한 의도가 아닌 정치적 행위였다. 잔 다르크의 도움으로 프랑스 왕위에 오른 샤를 7세는 그녀를 복권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마녀로 남아 있으면 샤를 7세의 정통성에 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잔 다르크에 대한 종교재판은 교황청의 공식 승인하에 진행되었기에, 샤를 7세는 교회가 마녀로 규정한 악마와 동맹을 맺고 즉위한 왕이 될 수밖에 없었다.[147] 따라서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복권하여 자신의 왕위 정통성과 명분을 다시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교황청은 샤를 7세의 재심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잉글랜드가 십자군 전쟁에 적극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웠고, 과거 교회의 결정을 뒤집어야 했기에 교황청은 난처했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어머니로 하여금 교황에게 편지를 쓰도록 하여 사안을 비정치화하는 외교적 해결책을 강구했다. 또한 과거의 종교재판 자체가 아니라 재판장 코숑 주교, 종교 재판소 대표 장 르메트르, 종교 전문가 장 에스티베 등 잔 다르크를 재판했던 판사들을 고발하는 형식을 취하여 재심 진행을 관철시켰다.[148]

5. 시복과 시성

19세기 초, 나폴레옹은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잔 다르크를 프랑스의 국가 상징으로 선언했다.[149][150] 1849년 오를레앙 교구장 펠릭스 뒤팡루 주교는 잔 다르크를 열렬히 찬양했으며, 그의 강론은 프랑스뿐 아니라 잉글랜드에서도 주목받았다. 펠릭스 뒤팡루 주교의 노력으로 1909년 잔 다르크는 로마 교황청에 의해 시복되었다.[151]

잔 다르크 시성(1920년 5월 16일).


1920년 5월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잔 다르크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152] 이로써 잔 다르크는 마녀에서 성인으로 변신한 전무후무한 인물이 되었다.[153] 잔 다르크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인 중 한 명이 되었으며,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라틴어식 명칭인 아르크의 요안나 또는 요안나 아르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비오 10세는 1909년 4월 18일 잔 다르크를 복자 선언하였고, 베네딕토 15세는 1920년 5월 16일 잔 다르크를 시성하였다.[71]

6. 작품


  • 방송
  • *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 문학
  • * 《헨리 6세》 셰익스피어 - 극중 잔 다르크는 철저히 악인으로 묘사된다.
  • * 《오를레앙의 처녀》 볼테르 - 시.
  • * 《오를레앙의 처녀》 프리드리히 실러 - 낭만주의 시.
  • * 《Saint Joan》 버나드 쇼 - 희곡으로 쇼의 작품들 중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 《애국부인전》 장지연 - 한일 병합 이전에 나온 민족주의 성격의 애국소설. 애국소녀이자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잔 다르크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데, 삼위일체 하느님을 세 천신으로 묘사하는 등, 기독교 교리에 대한 작가의 이해가 담겨 있다.
  • * 《잔 다르크》 마크 트웨인 - 마크 트웨인의 인물소설. 잔 다르크를 신심이 깊고 영리한 여성으로 묘사한다.
  • * 《자히르》 파울루 코엘류 - 소설의 등장인물인 동아시아 몽골계 카자흐스탄 청년이 간질병 증세를 보인다. 이 청년의 간질병과 계시 능력에 관해 설명하면서 잔 다르크의 계시도 사실은 간질병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 음악
  • * 《오를레앙의 처녀》 - 차이콥스키 (오페라)
  • * 《조반나 다르코》 - 베르디 (오페라)
  • * 《화형대 위의 잔 다르크》 - 오네게르 (오라토리오)
  • * 《Jeanne D'Arc 》- 탠저린 드림 (전자음악)
  • 영화
  • * 《잔 다르크의 수난》 (1928년) - 흑백 무성영화.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 마리아 팔코네티 주연.
  • * 《Jeanne La Pucelle》 (1994년) - 프랑스에서 방영된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 * 《잔 다르크》 (1999년) - 뤼크 베송 감독, 밀라 요보비치 주연.
  • * 《The Messenger: The Story of Joan of Arc》 (1999년) - 텔레비전 미니 시리즈. 리리 소비에스키 주연.
  • 만화
  • * 《쟌느》 (1995년-1996년) 야스히코 요시카즈 - 백년전쟁을 무대로 잔 다르크와 비슷한 운명을 지닌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다.
  • * 《신풍괴도 쟌느》 (1998년~2000년) 다네무라 아리나
  • 게임
  •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에이지 오브 킹스》 - 잔 다르크의 행적을 다룬 캠페인이 등장한다.
  • * 《JEANNE D'ARC》 (2006년) - 잔 다르크의 생애를 모티브로 한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용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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