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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근 (영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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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창근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에 걸쳐 활동한 영화 감독, 시나리오 작가, 배우이다. 함경북도 회령군 출신으로, 상하이에서 영화 경력을 시작하여 《양자강》의 각본과 주연을 맡는 등 활동했으며, 1941년 영화 《복지만리》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후 《마의태자》, 《단종애사》 등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연출했으며, 배우로도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우익 계열 영화인으로 분류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연극에 참여하여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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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근 (영화 감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전창근
한자 표기全昌根
출생일1908년 1월 18일
출생지함경북도 회령군
사망지서울특별시
활동 기간1935년 ~ 1973년
직업작가, 배우, 영화 감독
장르희곡, 시나리오

2. 생애

전창근은 함경북도 회령군 출생으로, 22살에 상하이의 대중화백합영편공사에 입사하여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초기에는 안중근의 일대기를 다룬 (정기탁)의 각본을 편집하고, 윤백남의 윤백남프로덕션에서 배우 겸 조감독으로 활동했다.[2]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로 영화 출연을 포기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1937년 말 귀국했다.

상하이사변 이후 귀국하여 고려영화협회에서 《복지만리》를 제작, 1941년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 영화는 만주 이민자들의 삶을 그린 국책 영화였으나, 배일사상(排日思想)을 담았다는 이유로 100일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3] 1940년대에는 극단 고협을 창설하여 친일 연극 활동을 한 이력으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4][5]

광복 후에는 영화감독구락부 등 우익 계열 영화 단체에서 활동했고,[6] 고려영화사에서 최인규의 《자유만세》에 참여하며 영화계에 복귀했다.[2] 1960년대 말까지 감독, 작가, 배우로 활동하며 《마의태자》(1956), 《단종애사》(1956), 《삼일독립운동》(1959),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1959), 《아 백범 김구선생》(1960) 등 주로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를 연출했다. 마지막 작품은 미국 차이나타운을 배경으로 한 《차이나타운 (아메리카의 중국인)》(1963)이다.

2. 1. 초기 활동 (상하이 시기)

함경북도 회령군 출생이다. 22살에 상하이에 있는 대중화백합영편공사에 입사해 안중근의 일대기를 담은 (정기탁)의 각본을 편집하였다.[2] 1935년 윤백남이 운영하던 윤백남프로덕션을 통해 신인으로 발탁되어 《개척자》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배우와 조감독을 겸했다가 어머니의 심한 반대로 촬영 분량을 삭제하고 영화 출연을 포기해야 했다.

이후 상하이로 떠나 1937년 말에 귀국할 때까지 조선 영화계에서는 오랜 공백 기간을 가졌다. 상하이에서는 1936년 무렵부터 영화계에 투신하여 《양자강》(1937)의 각본과 주연을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전창근과 정기탁, 김일송 등은 함께 일하며 이른바 영화계 상하이파를 형성했다.

2. 2. 감독 데뷔와 친일 논란

1935년 윤백남이 운영하던 윤백남프로덕션을 통해 신인으로 발탁되어 《개척자》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배우와 조감독을 겸했다가 어머니의 심한 반대로 촬영 분량을 삭제하고 영화 출연을 포기해야 했다.[2] 이후 상하이로 떠나 1937년 말에 귀국할 때까지 조선 영화계에서는 오랜 공백 기간을 가졌다. 상하이사변으로 귀국한 뒤 고려영화협회에 입사하여 영화 《복지만리》를 준비했다. 1938년부터 3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이었다. 전창근은 1941년 개봉한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해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전창근 자신이 주연 배우로도 출연했는데, 만주를 배경으로 조선인 이민자들의 삶을 그린 일종의 국책 영화이다. 《복지만리》 촬영 과정에서 조선 영화 최초로 콘티가 도입되었다는 유장산의 증언이 있다. 전창근은 이 영화가 상영되자마자 배일사상(排日思想)을 담은 영화라 하여 100일 동안 옥고를 치렀다.[3]

이후 1940년대에는 심영 등과 함께 극단 고협을 창설한 뒤, 친일 연극의 희곡을 쓰고 연출하기도 했다.[4] 이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5] 고협은 조선총독부가 결성한 조선연극협회에 가입하여 친일 연극을 순회 공연하였으며, 전창근은 자신과 임선규, 함세덕, 송영, 이서향 등이 쓴 친일 희곡을 연출해 무대에 올렸다.

2. 3. 광복 후 활동

1946년 영화감독구락부에 참가하는 등 우익 계열 영화인으로 분류되었고[6], 고려영화사에 가담하여 최인규의 《자유만세》에 각본과 주인공으로 참여하였다.[2] 이후 1960년대 말까지 영화 감독, 시나리오 작가, 배우로 활발히 활동했다.

《마의태자》(1956), 《단종애사》(1956), 《삼일독립운동》(1959),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1959), 《아 백범 김구선생》(1960) 등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사극이나 시대극을 주로 연출했다. 《자유만세》 이후 배우로서는 주로 독립군 역을 맡았다. 《단종애사》에서는 엄앵란을 발굴해 데뷔시키기도 했다. 마지막 연출작은 미국의 차이나타운을 소재로 한 《차이나타운 (아메리카의 중국인)》(1963)이다.

3. 작품 세계

전창근 감독은 주로 따뜻하고 인간적인 드라마를 연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갈등과 화해를 섬세하게 그려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참조

[1] 서적 재일본 및 재만주 친일문학의 논리 역락 2003-06-20
[2] 웹인용 "[한국영화박물관 전시품 기증 릴레이 66] <불사조의 언덕> 전단지 : 기사 : 씨네21" https://web.archive.[...] 2009-04-16
[3] 문서 예술·스포츠·취미/영화/영화의 기초지식/한국영화의 역사/복지만리, 《글로벌 세계 대백과》
[4] 서적 친일영화 로크미디어 2006-12-30
[5] 뉴스 한국 영화의 근간도 친일 - [친일영화편] 인민배우 문예봉, 〈자유만세〉 최인규도 포함 컬처뉴스 2005-09-02
[6] 서적 한국현대 예술사대계 1 (해방과 분단 고착 시기) 시공사 199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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