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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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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석주는 일제강점기 및 광복 이후 언론, 예술, 영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한성부 출신으로, 삽화가, 영화감독, 작사가, 친일 행위자로 활동했다.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계열에서 활동하며 문예 운동에 참여했고, 영화 《심청전》을 연출했으며, 친일 영화 《지원병》을 제작했다. 광복 후에는 우익 영화인들을 규합하여 영화감독구락부를 조직했으며, 아들 안병원이 작곡한 〈우리의 소원〉을 작사했다. 친일 행적이 드러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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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석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안석영
원어명安夕影
본명안석주
安碩柱
출생일1901년 04월 10일
출생지대한제국 한성부
종교개신교 (예장합동)
사망일1950년 02월 24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직업삽화가
만화가
연극연출가
연극무대장치감독
영화감독
영화 각본가
영화 미술감독
영화 각색가
소설가
시인
수필가
작사가
문학평론가
영화평론가
미술평론가
학력경성 교동보통학교 졸업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활동 기간1921년 ~ 1950년
친척안종화(7촌 숙부)
자녀안병원(장남)

2. 생애

안석주는 한성부 출신으로 다재다능한 예술가였다. 교동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미술, 영화, 문학,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이념적으로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계열에 속해 있었으며, 박영희, 김기진 등과 함께 파스큘라를 결성하고 카프로 발전시키는 등 문예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

나도향, 이무영, 박종화, 백철 등의 글에 삽화를 그렸고, 한국 최초의 아동 만화로 알려진 〈씨동이의 말타기〉를 발표했다. 《개벽》, 《백조》, 《학생》, 《어린이》, 《별건곤》 등 유명 잡지의 표지화를 그렸으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연재한 시사만화로 명성을 얻었다.[1]

1937년심청전》을 연출하며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1941년에는 친일 영화 《지원병》의 각본을 쓰고 연출했으며, 이 영화에는 최운봉문예봉이 출연했다. 《지원병》, 《흙에 산다》 외에도 황도학회 결성식 참가, 조선임전보국단 가담, 《신시대》 표지화 제작 등 친일 행적이 뚜렷하다.[1] 광복 후에는 조선 영화인 동맹에 참여했다가 좌익 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탈퇴하여 우익 영화인 단체인 영화감독구락부를 조직했다.[2]

1947년 아들 안병원이 작곡한 〈우리의 소원〉을 작사했다. 이 노래는 원래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라는 가사였으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바뀌어 널리 불렸다.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당시 김대중김정일이 함께 부르기도 했다.

안석주는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과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한성부 출신으로 교동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 및 미술 수업 후 언론사 삽화 작가로 일했다.[1] 안석영은 예술 다방면에 다양한 재주를 지닌 팔방미인형 인물이었다.[1] 그는 일본 유학 후 미술, 영화, 문학, 연극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이념적으로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계열에 속해 있었다.[1]

2. 2. 언론 및 예술 활동

한성부 출신으로 교동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 및 미술 수업 후 언론사 삽화 작가로 일했다. 안석영은 예술 다방면에 재주를 지닌 인물이었다. 일본 유학 후 미술, 영화, 문학, 연극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이념적으로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계열에 속해 있었다. 박영희, 김기진 등과 함께 파스큘라에 참가하여 카프로 발전시키는 등 문예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삽화가로는 나도향, 이무영, 박종화, 백철 등의 글에 그림을 그렸고, 한국 최초의 아동 만화로 알려진 〈씨동이의 말타기〉를 발표했다. 《개벽》, 《백조》, 《학생》, 《어린이》, 《별건곤》 등 유명 잡지의 표지화도 그렸다.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연재한 시사만화로 이름을 알렸다.[1]

2. 3. 영화계 활동

안석주는 미술감독으로 영화계에 참여하다가, 1937년심청전》을 연출하여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년, 조선인이 지원병으로 갈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던 청년이 지원병 제도가 허용되자 참전한다는 내용의 친일 영화 《지원병》의 영화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1] 이 영화에는 최운봉문예봉이 출연했다.

안석주는 《지원병》, 《흙에 산다》와 같은 친일 영화 제작 외에도 황도학회 결성식에 참가하고 조선임전보국단에 가담했으며, 《신시대》의 표지화를 그리는 등[1] 친일 행적이 뚜렷하다. 광복 후에는 조선 영화인 동맹에 참가했다가 좌익 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탈퇴하여 우익 영화인 단체인 영화감독구락부를 조직했다.[2]

2. 4. 광복 이후 활동

광복 후 조선 영화인 동맹에 참가했다가 좌익 계열이 주도권을 잡아가자 탈퇴하여 우익 영화인들을 규합, 영화감독구락부를 조직[2]하고 우익 계열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47년 아들 안병원이 곡을 붙인 〈우리의 소원〉을 작사하였다. 이 노래는 본래 "우리의 소원은 독립 / 꿈에도 소원은 독립"이라는 가사였으나, 이듬해 교과서에 실리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 꿈에도 소원은 통일"로 바뀌었고, 이후 오랫동안 널리 불리고 있다.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때 김대중김정일이 손을 잡고 함께 부른 노래이기도 하다.

2. 5. 친일 행적 논란

안석주는 황도학회 결성식에 참가하고 조선임전보국단에 가담했으며 《신시대》의 표지화를 그리는 등[1] 친일 행적이 뚜렷하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년에는 조선인은 지원병으로 갈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던 조선 청년이 지원병 제도의 문호 개방에 힘입어 지원병으로 참전한다는 내용의 어용 영화 《지원병》의 영화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이 영화에는 최운봉문예봉이 남녀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3. 가족 및 친척 관계

관계이름비고
장남안병원테너 성악가, 지휘자, 작곡가
7촌 재종숙부안종화영화감독, 극작가, 안석주보다 1살 어림


3. 1. 안병원

테너 성악가 겸 지휘자 및 작곡가 안병원은 안석주의 장남이다.

3. 2. 안종화

영화감독 겸 극작가 안종화는 안석주보다 1살 어린 7촌 재종숙부이다.

참조

[1] 뉴스 미술이 대중 황국 신민화의 도구 - 1940년대 초반 친일 미술의 군국주의적 경향성② 컬처뉴스 2005-04-15
[2] 서적 한국 현대 예술사대계 1 (해방과 분단 고착 시기) 시공사 199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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