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 (촉한)
1. 개요
정기(程畿)는 촉한 시기의 인물로, 유장과 유비를 섬겼다. 그는 익주 파서군 낭중현 출신으로, 유장을 섬기며 한창 현령을 지냈다. 조위의 반란 당시 방희가 종족 병사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하고, 이후 강양 태수로 발탁되었다. 유비가 익주를 장악한 후 종사좨주가 되었으며, 222년 이릉 전투에서 오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양희는 그의 강직한 인품을 칭찬했고, 아들 정욱 역시 명성을 얻었으나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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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충시 출신 -
쉬이양
쉬이양은 2016년 에스엠루키즈로 처음 알려진 후, 2018년 SM엔터테인먼트를 퇴사,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창조영 2020》을 거쳐 솔로 가수 및 드라마 출연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중국 가수이다. -
난충시 출신 -
즈안
즈안은 1928년 중화민국에서 태어나 2016년 입적한 타이완의 불교 승려로, 중태불교학원 창설, 영천사 건립과 중태선사 창건 계획, 간화선 수행을 통한 깨달음 강조 등 불교 교육과 발전에 헌신하여 "타이완의 보리달마"로 불린다. -
촉한의 관료 -
진수 (서진)
촉한과 서진에서 벼슬을 지낸 진수는 환관의 핍박을 받기도 했으나 장화의 추천으로 등용되어 《삼국지》를 편찬, 위나라를 정통으로 하는 역사관을 확립한 역사가이다. -
촉한의 관료 -
제갈균
제갈균은 삼국시대 촉한의 관료이자 제갈량의 동생으로, 형이 유비에게 등용될 때 촉한에 출사하여 장수교위를 지냈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그를 제갈량으로 착각하는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
전사한 사람 -
정지용
정지용은 충청북도 옥천 출생으로 모더니즘 문학을 선도했으며, 시문학 동인과 구인회 활동을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으나 한국 전쟁 중 행방불명되었다. -
전사한 사람 -
정기원 (1559년)
정기원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1585년 문과 급제 후 임진왜란 때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여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렬사에 배향, 시호는 충의이며 저서로 《현산집》, 《현산실기》가 있다.
2. 생애
익주 파서군 낭중현(閬中縣) 출신이다. 처음에는 후한 말 익주 군벌 유장 휘하에서 한창현령(漢昌縣令)으로 일했다. 당시 파서태수 방희가 유장의 의심을 사자 정기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정기는 아들 정욱(程郁)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유장에 대한 충절을 지키며 이를 거부했다. 이 일로 정기의 충성심을 높이 산 유장은 그를 강양태수(江陽太守)로 임명했다.
이후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자 유비를 섬겨 종사좨주(從事祭酒)가 되었다. 222년 유비의 동오 정벌전인 이릉 대전에 참전했다가 촉한군이 대패하자 후퇴하게 되었다. 퇴각 중 오군의 추격을 받자 배를 버리고 달아나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나는 군대에 있으면서 적에게서 도망친 적이 없다"고 말하며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촉한의 관리였던 양희는 『계한보신찬』에서 정기의 강직함과 절의를 높이 평가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이릉 대전에서 전사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2.1. 유장 섬기던 시절
익주 파서군 낭중현(閬中縣) 사람으로, 처음에는 후한 말 익주를 다스리던 군벌 유장을 섬겼다. 그는 유장 휘하에서 한창현(漢昌縣, 현재의 쓰촨성 바중(巴中))의 현령으로 복무했다. 당시 한창현에는 용맹하기로 이름난 소수민족인 종(賨)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정기의 직속 상관은 파서군 태수 방희였다.
당시 유장은 중랑장(中郞將) 방희에게 한중의 장로를 막도록 지시했다. 방희는 장로에 대항하고 파서군의 치안을 강화하기 위해 사병을 모집했는데, 이 과정에서 누군가 유장에게 방희를 모함하자 유장은 방희가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조위가 방희를 변호했으나 유장이 듣지 않자, 200년 조위는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성도(成都)를 포위하기도 했다.
유장의 의심을 받게 된 방희는 두려움을 느껴 실제로 군사력 증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군청에서 일하던 정기의 아들 정욱(程郁)을 정기에게 보내, 자신을 도와 병력을 내어달라고 요구했다. 이는 사실상 유장에 대한 반란에 동참하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정기는 "만약 다른 뜻을 품은 것이라면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며 병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는 방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군사들을 더 모집한 당신의 원래 의도는 반역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해가 있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당신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두려움 때문에 반역을 생각한다면, 저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또한 아들 정욱에게도 "나는 유장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충절을 다해야 한다. 너는 군의 관리이니 태수 방희를 위해 힘쓰는 것이 당연하다. 나를 핑계로 다른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라고 타일렀다.
방희가 재차 정욱을 보내 "만약 태수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네 아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협박했지만, 정기는 "악양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아들의 살로 만든 국을 마신 것이 아니라, 의(義)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만약 당신이 나에게 똑같은 일을 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리 할 것이다."라고 답하며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의롭지 않은 일은 죽는 한이 있어도 할 수 없다"며 끝내 방희의 요구를 따르지 않았다.
정기의 도움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은 방희는 결국 반란을 포기하고 유장에게 사죄했으며, 유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장은 정기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강양(江陽郡, 현재의 쓰촨성 루저우(瀘州) 인근) 태수로 승진시켰다.
2.2. 유비 섬기던 시절
유비가 유장으로부터 익주를 장악한 후(유비의 익주 점령, 215년경), 정기는 유비를 섬기게 되었다. 유비는 그를 종사좨주(從事祭酒)로 임명했다.
221년, 유비는 스스로 황제에 올라 촉한을 건국하고, 같은 해 이전 동맹이었던 손권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개시하여 이릉 대전이 발발했다. 222년 초부터 약 6개월간의 교전 후, 육손이 지휘하는 손권 군대의 화공 기습으로 촉한 군영 다수가 불탔고, 촉한군은 퇴각해야 했다.
정기는 이 전투에 참전했으며, 퇴각 작전을 엄호하기 위해 후방에 남았다. 장강을 거슬러 후퇴하던 중 오나라 추격군에게 따라잡히자, 주변 사람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가벼운 차림으로 달아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정기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며 "나는 평생 전투에서 도망친 적이 없다. 게다가 황제(유비)께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계신데 어찌 도망갈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거나, 다른 기록에 따르면 "나는 군대에 있으면서 적에게서 도망친 적이 한 번도 없다. 하물며, 폐하를 따라 위기에 임하면서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정기는 배 위에서 직접 극을 휘두르며 맹렬히 싸워 오나라 군선 몇 척을 침몰시키는 분전을 펼쳤으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전사했다.
후일 양희는 그의 저서 『계한보신찬』에서 정기의 강직함과 충절을 높이 평가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정기는 역사적 사실과 같이 이릉 대전에서 용감히 싸우다 전사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3. 가족
정욱(程郁)에게는 자(字)가 공홍(公弘)인 형제 정기(程祁)가 있었다. 정기(程祁)는 총명함으로 명성이 높았으나, 19세에 요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