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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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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갈교는 오나라에서 태어나 촉한의 재상 제갈량의 양자가 된 인물이다. 제갈근의 아들이자 제갈각의 동생으로, 촉한의 부마도위가 되었으나 25세의 젊은 나이에 한중에서 사망했다. 제갈량은 제갈교를 부마도위로 임명하고 군대를 지휘하게 했지만, 형 제갈각에 비해 재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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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제갈교
원어 이름諸葛喬
출생204년경
사망228년 (24세)
직업관료
관직
주요 직책부마도위
임기 시작알 수 없음
임기 종료알 수 없음
개인 정보
중신 (仲愼)
백송 (伯松)
가족제갈각 (형)
제갈융 (형)
장승의 아내 (누이)
제갈량 (숙부)
아버지제갈근
자녀제갈반

2. 생애

제갈교는 젊은 시절 곽준의 아들 곽익과 함께 견문을 넓히기 위해 여행을 했다. 그러나 한중에서 228년에 25세(만 나이)로 병사했다.[4] 제갈량에게는 친아들 제갈첨이 227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제갈교의 아들 제갈반은 제갈근의 후손 신분을 회복했다. 253년, 오나라에서 제갈각과 그 가족이 쿠데타로 몰살된 후, 제갈반은 오나라로 가서 생물학적 할아버지인 제갈근의 혈통을 잇게 되었다.[6]

2. 1. 출생과 입양

제갈교는 제갈근(諸葛瑾)의 차남으로 오(吳)에서 태어났지만, 촉한(蜀漢)·오(吳)가 수교한 후(224년경)에 아버지의 명으로 당시 아이가 없었던 숙부 제갈량(諸葛亮)의 양자가 되어 촉한에서 섬겼다. 제갈교와 그의 형 제갈각은 동오에서 매우 유명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제갈교가 그의 형만큼 재능이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했다.[3]

제갈량은 제갈교를 양자로 삼을 것을 요청했고, 제갈근은 오나라 황제 손권의 허락을 받아 제갈교를 촉으로 보냈다. 제갈량은 제갈교의 원래 인 "충신"을 "백송"으로 바꾸었다. 제갈교는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임명되었으며, 제갈량을 따라 한중군으로 갔다.[4]

훗날 제갈량은 유선의 누이를 제갈교의 아내로 맞이하게 하여 제갈교는 촉한의 부마도위가 되었다. 제갈량은 제갈근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제갈)교는 성도 (촉나라 수도)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촉 장군들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함께 영광과 수치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제갈)교에게 500~600명의 병사를 지휘하게 하고, 다른 장군들의 아들들과 함께 계곡에 배치했다."[5]

제갈교는 장형 제갈각보다는 재능이 부족했지만, 성격은 아버지를 닮아 훨씬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2. 2. 촉한에서의 활동

제갈교와 그의 형 제갈각은 동오에서 매우 유명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제갈교가 그의 형만큼 재능이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했다.[3]

제갈량은 처음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제갈교를 양자로 삼을 것을 요청했다. 제갈근은 오나라 황제 손권의 허락을 받아 제갈교를 촉으로 보냈다. 제갈교는 제갈량의 양자가 되었다. 제갈량은 제갈교의 원래 인 "충신"을 "백송"으로 바꾸었다. 제갈교는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임명되었으며, 제갈량을 따라 한중군으로 갔다.[4] 제갈량은 제갈근에게 편지를 써서, "(제갈)교는 성도 (촉나라 수도)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촉 장군들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함께 영광과 수치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제갈)교에게 500~600명의 병사를 지휘하게 하고, 다른 장군들의 아들들과 함께 계곡에 배치했다."라고 하였다.[5]

제갈교는 228년에 25세(만 나이)로 사망했다. 제갈교의 아들인 제갈반(諸葛攀) 또한 촉에서 복무했으며, 그의 최고 임명은 행호군익무장군(行護軍翊武將軍)이었지만, 그 역시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253년, 오나라에서 쿠데타로 제갈각과 그의 가족이 몰살된 후, 제갈반은 그의 원래 가계로 돌아가 오나라로 가서 그의 생물학적 할아버지의 혈통을 잇게 되었다.[6]

제갈근(諸葛瑾)의 차남으로 오(吳)에서 태어났지만, 촉한(蜀漢)·오(吳)가 수교한 후(224년경)에 아버지의 명으로 당시 아이가 없었던 숙부 제갈량(諸葛亮)의 양자가 되어 촉한에 섬겼다. 장래를 기대받아, 후에 유선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여 촉한의 '''부마도위'''에 임명되었다.

장형 제갈각보다는 재능이 부족했지만, 성격은 아버지를 닮아 훨씬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젊은 시절에는 곽준의 아들 곽익과 함께 견문을 넓히기 위해 여행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한중에서 병사했다. 향년 25세.

제갈량에게 친아들 제갈첨이 탄생(227년)했기 때문에, 아들 제갈반은 제갈근의 후손 신분을 회복하고, 제갈각의 주살 후에 백부 제갈각의 뒤를 이었다.

2. 3. 요절과 가문의 운명

제갈교와 그의 형 제갈각은 동오에서 매우 유명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제갈교가 그의 형만큼 재능이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했다.[3]

제갈량은 처음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제갈교를 양자로 삼을 것을 요청했다. 제갈근은 오나라 황제 손권의 허락을 받아 제갈교를 촉으로 보냈다. 제갈교는 제갈량의 양자가 되었다. 제갈량은 제갈교의 원래 인 "충신"을 "백송"으로 바꾸었다. 제갈교는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임명되었으며, 제갈량을 따라 한중군으로 갔다.[4] 제갈량은 한때 제갈근에게 편지를 써서, "(제갈)교는 성도(촉나라 수도)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촉 장군들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함께 영광과 수치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제갈)교에게 500~600명의 병사를 지휘하게 하고, 다른 장군들의 아들들과 함께 계곡에 배치했다."라고 하였다.[5]

제갈교는 228년에 25세(만 나이)로 사망했다. 제갈교의 아들인 제갈반(諸葛攀) 또한 촉에서 복무했으며, 그의 최고 임명은 행호군익무장군(行護軍翊武將軍)이었지만, 그 역시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253년, 오나라에서 쿠데타로 제갈각과 그의 가족이 몰살된 후, 제갈반은 그의 원래 가계로 돌아가 오나라로 가서 그의 생물학적 할아버지의 혈통을 잇게 되었다.[6]

3. 친족 관계

제갈교는 제갈근의 차남이며, 제갈각의 동생이다. 제갈량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제갈교를 양자로 삼았다.[3] 제갈근은 손권의 허락을 받아 제갈교를 촉으로 보냈고, 제갈교는 제갈량의 양자가 되어, 원래 인 "충신" 대신 "백송"이라는 자를 받았다.[4] 유선의 누이를 아내로 맞아 부마도위(駙馬都尉)에 임명되었다.[4]

제갈교는 형 제갈각만큼 재능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성격은 아버지를 닮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3]

3. 1. 가계도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35
[2] 서적
[3] 서적 Sanguozhi vol. 35
[4] 서적 Sanguozhi vol. 35
[5] 서적 Sanguozhi vol. 35
[6] 서적 Sanguozhi vol.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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