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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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곽익은 유비를 섬기고 제갈량의 인정을 받은 촉한의 관료였다. 유선 시대에 알자, 황문시랑, 태자중서자를 역임하며 유현을 보좌했고, 영창태수를 지내며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안남장군으로 익주 남부의 군정을 통괄했으며, 촉한 멸망 후 위나라에 항복하여 남중 도독이 되었다. 교주자사로 임명되어 오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여흥을 도왔고, 교지, 일남, 구진 3군을 평정하여 열후에 봉해졌다. 곽익은 100일 내에 구원군이 오지 않으면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을 남겼으며, 그의 가르침은 후대 지방 관리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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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한의 도독 - 등지
등지는 삼국 시대 촉한의 외교 및 군사 인물로, 유비의 신임을 받아 요직을 두루 거치며 오나라와의 동맹을 재건하여 촉한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했으며, 검소하고 청렴한 삶을 살다가 251년에 사망했다. - 촉한의 도독 - 이풍 (촉한)
이풍은 촉한의 인물로, 아버지 이엄의 실각 후 종사중랑을 거쳐 주제태수를 지냈으며, 제갈량은 그에게 반성과 직무 전념 시 복직 가능성을 시사했고,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맹달의 귀순 정보를 제갈량에게 전달하는 역할로 나온다. - 271년 사망 - 배수 (서진)
배수는 위나라와 서진 시대의 관료이자 지리학자로, 사마소의 신임을 얻어 서진 건국에 기여했으며, 지도 제작의 기본 원칙인 제도육체를 정립하고 《우공지역도》를 제작하여 중국 지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 271년 사망 - 유선 (촉한)
유선은 삼국시대 촉한의 제2대 황제로, 유비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제갈량 등의 보좌를 받았으나, 말년에는 국력이 쇠퇴하여 위나라에 항복하고 안락공에 봉해졌다. - 진나라 (위진)의 정치인 - 진수 (서진)
촉한과 서진에서 벼슬을 지낸 진수는 환관의 핍박을 받기도 했으나 장화의 추천으로 등용되어 《삼국지》를 편찬, 위나라를 정통으로 하는 역사관을 확립한 역사가이다. - 진나라 (위진)의 정치인 - 반악
반악은 서진 시대의 문인으로, 빼어난 문학적 재능과 외모로 명성을 얻었지만 사마륜의 쿠데타로 처형되었으며, 슬픔과 비애를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태강문학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곽익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곽익 |
본관 | 형주남군지강현 |
자 | 소선 (紹先) |
생몰 | 생년 미상 ~ 태시 7년 (271년) |
국적 | 촉한 / 서진 |
가문 | 곽씨 |
아버지 | 곽준 |
친척 | 곽독 (숙부) |
자녀 | 곽재 |
관직 | |
초기 관직 | 황문시랑 (黃門侍郎) |
촉한 관직 | 감군장군 (監軍將軍) 건녕태수 (建寧太守) 안남장군 (安南將軍) |
서진 관직 | 남중도독 (南中都督) 교주자사 (交州刺史) (명목상) |
생애 | |
234년 | 황문시랑 임명 |
건녕태수 | 임명 (시기 미상) |
감군장군 | 임명 (시기 미상) |
263년 | 안남장군 임명 남중도독 임명 교주자사 (명목상) 임명 |
271년 | 사망 |
가계 | |
부친 | 곽준 |
숙부 | 곽독 |
아들 | 곽재 |
2. 생애
곽익은 유비를 섬겼다. 유비가 죽기 직전 곽익을 태자 사인으로 임명했고, 유선이 뒤를 이었을 때 알자로 등용했다. 제갈량은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젊은 시절에는 제갈량의 양자인 제갈교와 함께 견문을 넓혔다.
제갈량 사후 황문시랑이 되었고, 황태자였던 유현의 태자중서자(보좌역)도 맡았다. 유선은 기마술과 사격술을 좋아하고 정무를 돌보지 않았으므로, 곽익은 간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영창군의 요족이 요새를 근거로 반란을 일으키자, 곽익은 영창 태수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수괴를 참수하고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감군, 익군장군, 건녕 태수가 되었고, 래강도독으로서 익주 남부의 군정을 통괄했다.
염흥 원년(263년), 안남장군이 되었다.[22] 이 해, 위가 촉 정벌을 위해 대규모 군대를 일으키자, 곽익은 성도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유선은 대비가 충분하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촉한이 멸망한 것을 알게 되자, 곽익은 상복을 입고 곡례를 행하고 3일간 상을 치렀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빨리 위나라에 귀순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곽익은 유선의 안부를 알 때까지 결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유선의 항복이 받아들여져 동쪽으로 옮겨갔다는 소식을 듣자, 남중 6군의 태수와 대장들을 이끌고 위나라에 항복했다.
항복 후, 사마소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신임했다. 나헌과 함께 오와의 국경을 지켰고, 남중 도독, 호군[23]에 임명되어 남만의 평정에 힘썼다. 이 무렵, 곽익은 강한 병사들을 이끌고 야랑을 평정했다.[24]
함희 원년(264년), 교지군에서 군리인 여흥이 오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곽익은 여흥을 구원해야 한다고 낙양에 상표문을 보냈고, 여흥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했지만, 여흥은 도착하기 전에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조정은 곽익에게 절을 내려 교주자사로서 관리 임명을 편리하게 처리하도록 했다. 곽익은 찬곡을 교지태수로 추천했다. 그가 죽자 마충의 아들 마융을,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에는 양직에게 후임을 맡기도록 상표했다.
곽익은 스스로 영주로 들어가 양직 등을 파견하여 교주와 광주를 빼앗는 계략을 펼쳤다. 양직에게 모경, 동원, 맹간, 맹통 등을 붙여 수륙 양로로 진군하게 했다. 그들은 고성에서 오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대도독 수칙과 교주자사 유준의 목을 베었다. 이에 오나라는 우사를 감군, 설珝을 위남장군 겸 대도독, 도황을 창오 태수로 임명하여 양직을 막게 하고, 분수에서 싸웠다. 도황은 패주하여 합포에 웅거했고, 휘하의 장군 두 명을 잃었다. 이렇게 하여 교주(교지, 구진, 일남의 세 군)가 평정되었고, 곽익은 열후에 봉해졌다.
곽익 사후 태시 7년(271년), 오나라는 교주 탈환을 위해 도황 등을 파견했고, 양직, 모경 등은 성에 포위되었다. 곽익은 생전에 "적군에 포위되어 백일 이내에 항복한 자는 가족을 처형한다. 백일 이상이 되어도 원군이 도착하지 않으면 내가 죄를 받겠다"고 말해두었다. 양직 등은 기일이 되자 식량이 바닥나고, 원군도 도착하지 않아 오나라에 항복했다.
손자인 곽표는 후에 월수 태수가 되었다.
동진 시대에도 남중은 관리와 이민족이 융화되었고, 형벌은 적절하게 행해졌다. 이는 모두 곽익의 고사에 따른 것이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촉의 멸망에 즈음하여 등장하며, 역사적 사실과 마찬가지로 망국의 상을 치른 후 유선의 안위를 확인한 뒤 위나라에 항복하고 있다.
2. 1. 중앙 관료 시절
유비 말년에 태자사인이 되었고, 유선이 즉위하자 알자가 되었다.[2] 제갈량이 북벌을 시작하면서 한중군에 주둔했을 때, 곽익을 자신의 관저로 전출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곽익은 이 기간 동안 제갈량의 양자 제갈교와 함께 일했다. 그들은 같은 수레를 타고 다니며 같은 숙소에서 잤다.[3]제갈량 사후 황문시랑이 되었고, 황태자였던 유현의 태자중서자(보좌역)도 되었다.[4] 유현은 말타기와 궁술을 즐겼고, 종종 경솔하게 행동했지만, 곽익은 고전의 가르침을 이용하여 유현을 설득하여 그의 행동을 개선하도록 했고, 따라서 그에게 적절한 지도를 제공하는 데 성공했다.[4] 유선은 기마술과 사격술을 좋아하고 정무를 돌보지 않았으므로, 곽익은 간언을 아끼지 않았다.
2. 2. 남방 통치
경요 6년(263년), 곽익은 안남장군이 되었다.[5]마침 촉한이 조위에 병탄되자, 곽익은 남방을 보전하다 귀순하여 전임을 그대로 맡았다. 《한진춘추》에는 이 무렵의 일이 더 기록되어 있다. 곽익은 조위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도로 가고자 했으나, 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침내 성도가 무너지자, 소복을 입고 곡했다. 여러 장수들이 속히 조위에 귀순하기를 청했으나, 황제(유선)의 안위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항복하지 않고 있다가 황제가 동쪽으로 갔음을 듣고 남방 6군을 거느리고 항복했다.[11][12][13] 사마소는 이를 좋게 여기고 곽익을 남중도독으로 임명하여 이전의 직무를 그대로 행하게 했다.[14]
나중에 곽익은 오나라의 교지태수 손서를 죽이고 위나라에 귀부한 여흥(呂興)을 도와 교지, 일남, 구진 3군을 평정하고, 열후에 봉해졌다.[16] 여흥이 공조 이통에게 죽임을 당하자 서진 무제는 여흥의 후임으로 건녕 사람 찬곡(爨穀)을 태수로 삼았으나 죽었고, 다시 파서 사람 마융(馬融)으로 태수를 삼았으나 또 병사했다. 태시 4년(268년), 곽익은 건위 사람 양직(楊稷)으로 마융을 대신케 하고, 장군 모경(毛炅), 구진태수 동원(董元) 등을 보내, 교지를 치러 온 오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오나라의 교주자사 유준(劉俊)과 전부독 수칙(脩則)을 죽였다. 곽익은 이들을 파견하면서 “성이 포위된 지 100일 내에 항복하면 너희의 가속이 주살될 것이다. 그러나 100일을 넘겼는데도 구원하지 않으면, 내가 죄를 받겠다.”라고 약속했다.[17][18]
태시 7년(271년), 우사와 도황이 교지를 무너뜨릴 때에는 곽익이 이미 죽고 없어 구원할 수 없었다. 곽익은 남쪽의 래상 지역의 군사 업무를 돕기 위해 전임되었고, 도독(都督)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전과 마찬가지로 군사 업무를 관리하면서 호군(護軍)으로 임명되었다. 영창군의 부족들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자신들을 보호하고 인근 정착지를 약탈하고 불태우며 문제를 일으키자, 곽익은 영창태수(永昌太守)로 임명되어 군대를 이끌고 부족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곽익은 부족장들을 죽이고 그들의 기지를 파괴하고 영창의 국경에 평화를 되찾아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공로로 그는 감군장군(監軍將軍)으로 승진하고 건녕군(建寧郡)의 태수로 임명되어 남중의 업무를 효과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5]
염흥 원년(263년), 곽익은 안남장군이 되었고,[22] 이 해, 위가 촉 정벌을 위해 대규모 군대를 일으키자, 성도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유선은 대비가 충분하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촉한이 멸망한 것을 알게 되자, 곽익은 상복을 입고 곡례를 행하고 3일간 상을 치렀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빨리 위나라에 귀순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곽익은 유선의 안부를 알 때까지 결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유선의 항복이 받아들여져 동쪽으로 옮겨갔다는 소식을 듣자, 남중 6군의 태수와 대장들을 이끌고 위나라에 항복했다.
항복 후, 사마소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신임했다. 나헌과 함께 오와의 국경을 지켰고, 남중 도독, 호군[23]에 임명되어 남만의 평정에 힘썼다. 이 무렵, 곽익은 강한 병사들을 이끌고 야랑을 평정했다.[24]
함희 원년(264년), 교지군에서 군리인 여흥이 오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곽익은 여흥을 구원해야 한다고 낙양에 상표문을 보냈고, 여흥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했지만, 여흥은 도착하기 전에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조정은 곽익에게 절을 내려 교주자사로서 관리 임명을 편리하게 처리하도록 했다. 곽익은 찬곡을 교지태수로 추천했다. 그가 죽자 마충의 아들 마융을,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에는 양직에게 후임을 맡기도록 상표했다.
곽익은 스스로 영주로 들어가 양직 등을 파견하여 교주와 광주를 빼앗는 계략을 펼쳤다. 양직에게 모경, 동원, 맹간, 맹통 등을 붙여 수륙 양로로 진군하게 했다. 그들은 고성에서 오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대도독 수칙과 교주자사 유준의 목을 베었다. 이에 오나라는 우사를 감군, 설珝을 위남장군 겸 대도독, 도황을 창오태수로 임명하여 양직을 막게 하고, 분수에서 싸웠다. 도황은 패주하여 합포에 웅거했고, 휘하의 장군 두 명을 잃었다. 이렇게 하여 교주(교지, 구진, 일남의 세 군)가 평정되었고, 곽익은 열후에 봉해졌다.
곽익 사후 태시 7년(271년), 오나라는 교주 탈환을 위해 도황 등을 파견했고, 양직, 모경 등은 성에 포위되었다. 곽익은 생전에 "적군에 포위되어 백일 이내에 항복한 자는 가족을 처형한다. 백일 이상이 되어도 원군이 도착하지 않으면 내가 죄를 받겠다"고 말해두었다. 양직 등은 기일이 되자 식량이 바닥나고, 원군도 도착하지 않아 오나라에 항복했다.
2. 3. 촉한 멸망 이후
경요 6년(263년), 조위가 촉한을 병합하자 곽익은 남방을 보전하다 귀순하여 이전 직무를 그대로 맡았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곽익은 조위의 침공 소식을 듣고 성도로 가려 했으나 조정에서 거부했다. 성도가 함락되자 소복을 입고 곡했으며, 황제 유선의 안위가 확인될 때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유선이 동쪽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남방 6군을 거느리고 항복했다.[5] 사마소는 이를 높이 평가하여 곽익을 남중도독으로 임명하고 이전 직무를 계속 수행하게 했다.[14]나중에 곽익은 오나라의 교지태수 손서를 죽이고 위나라에 귀부한 여흥(呂興)을 도와 교지, 일남, 구진 3군을 평정하고 열후에 봉해졌다.[16]
여흥이 부하에게 살해당하자 서진 무제는 건녕 사람 찬곡(爨穀)을 태수로 삼았으나 사망했고, 다시 파서 사람 마융(馬融)을 태수로 삼았으나 병사했다. 태시 4년(268년), 곽익은 건위 사람 양직(楊稷)으로 마융을 대신하게 하고, 장군 모경(毛炅), 구진태수 동원(董元) 등을 보내 오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오나라의 교주자사 유준(劉俊)과 전부독 수칙(脩則)을 죽였다.[5] 곽익은 이들을 파견하며 “성이 포위된 지 100일 안에 항복하면 너희 가족을 주살할 것이다. 그러나 100일을 넘겼는데도 구원하지 않으면 내가 죄를 받겠다.”라고 약속했다.[5]
태시 7년(271년), 우사와 도황이 교지를 함락시킬 때 곽익은 이미 사망하여 구원할 수 없었다.[5]
3. 평가
장거는 ''화양국지''에서 사천 지역의 역사에 관해 방대하게 저술하면서, 자신이 글을 쓰던 시기(348년에서 354년 사이)에 지방 관리들이 외래 부족들과 교류할 때 그들의 전통을 존중하고 그들을 재판할 때 자비를 베풀었는데, 이는 모두 곽익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라고 기록했다.[19] 곽익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곽재(霍在)는 병사들의 지휘권을 물려받아 그들을 이끌고 남부의 주요 부족들과 평화를 구축했다.[20] 곽익의 손자 곽표(霍彪)는 진나라 시대에 월수군(越嶲郡)의 태수를 역임했다.[21]
참조
[1]
서적
Huayang Guo Zhi vol. 4
[2]
서적
Sanguozhi vol. 41
[3]
서적
Sanguozhi vol. 41
[4]
서적
Sanguozhi vol. 41
[5]
서적
Sanguozhi vol. 41
[6]
서적
Huayang Guo Zhi vol. 4
[7]
서적
Sanguozhi vol. 56
[8]
서적
Huayang Guo Zhi vol. 4
[9]
서적
Huayang Guo Zhi vol. 4
[10]
서적
Sanguozhi vol. 41
[11]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1
[12]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1
[13]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1
[14]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1
[15]
서적
Huayang Guo Zhi vol. 4
[16]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1
[17]
서적
Han Jin Chunqiu vol. 03
[18]
서적
Jin Shu vol. 57
[19]
서적
Huayang Guo Zhi vol. 4
[20]
서적
Huayang Guo Zhi vol. 4
[21]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1
[22]
서적
三国志』蜀書 霍峻伝
[23]
서적
三国志』魏書4陳留王紀
[24]
서적
三国志』蜀書 譙周伝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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