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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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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휴는 후한 말기 ~ 서진 시대의 인물로, 조조의 먼 친척이다. 조조 휘하에서 활약하며 한중 공방전에서 조홍을 보좌했고, 위나라 건국 후에는 영군장군, 정동장군 등을 역임하며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활약했다. 228년 석정 전투에서 패배한 후 사망했으며, 시호는 장후이다. 2010년 허난성 멍진현에서 조휴의 묘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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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휴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조휴
본명조휴
로마자 표기Cao Xiu
문열 (文烈)
시호장후 (壯侯)
관직 및 직책
최종 관직대사마 (大司馬)
초기 관직기도위 (騎都尉)
주요 경력영군장군 (領軍將軍)
중령군 (中領軍)
진남장군 (鎮南將軍)
양주자사 (揚州刺史)
정동장군 (征東將軍)
정동대장군 (征東大將軍)
양주목 (揚州牧)
생애
출생미상
사망일228년 11월 28일
사망 장소맹진현, 하남성
사인질병
가족 관계
자녀조조 (曹肇)
조찬 (曹纂)
기타 정보
소속조위
작위장평후 (長平侯)
신장171cm

2. 초기 생애

조휴(曹休)는 조조의 먼 친척이다.[3] 후한황건적의 난 등으로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조씨 일족은 고향인 초현(譙縣; 현재의 안후이성 보저우)을 떠나 흩어졌다.[3]

조휴는 10세 즈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장례를 치른 후, 어머니를 모시고 양쯔강을 건너 남쪽 오군(현재의 장쑤성 쑤저우 일대)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4] 그의 할아버지 조창(曹嘗)은 과거 오군 태수를 지낸 인물이었는데, 훗날 조휴는 오군 태수 관저에 걸린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보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5]

2. 1. 어린 시절과 조조와의 만남

조휴는 조조의 먼 친척이었다.[3] 후한 말기 황건적의 난과 같은 전란으로 인해 종족들이 흩어져 고향인 초현(譙縣; 현재의 안후이성 보저우)을 떠나게 되었다.[3][39] 조휴는 10여 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다.[39][4] 이후 노모를 모시고 양쯔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주하여, 일찍이 할아버지 조창(曹嘗)이 태수를 지냈던 오군(현재의 장쑤성 쑤저우 일대)에 정착했다.[39][4][5][33] 오군 태수 관저에 걸린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보고 감격하여 무릎을 꿇고 울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5]

190년 조조동탁에 맞서 반동탁 연합에 참여하기 위해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자,[6][33] 조휴는 성명을 바꾸거나 가짜 신분을 이용하여[39][6] 형주를 거쳐 북쪽으로 올라가 조조의 근거지인 진류군(오늘날의 허난성 카이펑시 일대)으로 가서 조조를 만났다.[39][6] 조조는 조휴를 보고 기뻐하며 측근들에게 “이 아이는 우리 집의 천리마(千里馬)와 같다.”라고 칭찬했다.[39][6][33]

조조는 조휴를 아들과 같이 대우했으며,[39] 자신의 아들인 조비와 함께 지내게 했다.[39][7][33] 조휴는 이후 조조의 여러 정벌에 항상 종군했고, 조조 군대의 정예 기병 부대인 호표기(虎豹騎)의 지휘를 종족 형제인 조진과 함께 맡기도 했다.[39][7][33]

2. 2.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

190년 동탁에 맞서 조조가 반동탁 연합에 참여하기 위해 거병하자, 조휴는 성명을 바꾸고[39] 가짜 신분으로 위장하여[6] 형주를 거쳐 조조의 근거지인 진류군(오늘날의 허난성 카이펑시 일대)으로 갔다.[6] 조조는 조휴를 보고 "이는 우리 가문의 천리마(千里馬)로다"[6][39]라고 칭찬하며 아들처럼 대했고,[7] 자신의 아들 조비와 함께 지내게 했다.[39][7] 조휴는 여러 전투에서 조조를 따라 종군했으며,[7] 조조 군대의 정예 부대인 호표기의 지휘관 중 한 명이 되었다.[7][39] 종족 형제인 조진과 함께 호표기를 이끌기도 했다.[33]

218년, 유비한중군을 차지하기 위해 한중 공방전을 벌일 때였다.[8] 유비의 부하 장수 오란이 하변현(下辯縣; 현재 간쑤성 청현 북서쪽)에 주둔하자,[8] 조조는 사촌 조홍에게 군대를 이끌고 오란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때 조휴는 기도위로서 조홍의 군사에 참여했는데,[9] 조조는 조휴에게 "자네는 고문이지만, 실제로는 사령관이나 다름없네."라고 말하며 사실상 지휘권을 맡겼다.[9][39] 이후 유비가 장비마초를 보내 고산(固山)[8]에 주둔시켜 조홍 군의 퇴로를 끊으려 하자,[8] 조홍과 부하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조휴는 "적이 정말로 우리의 퇴로를 끊으려 한다면 은밀히 움직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대놓고 하는 것은 우리를 유인하려는 계책입니다."라고 상황을 간파하고,[10] 장비와 마초가 오란과 합류하기 전에 먼저 하변의 오란을 급히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10][39] 조홍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오란을 공격해 격파하고 뇌동 등을 참살하자,[33] 조휴의 예상대로 장비와 마초는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10][39]

219년, 조조가 한중에서 철수한 후 장안으로 돌아와 조휴를 중령군(中領軍)에 임명했다.[39][8][11]

3. 위나라에서의 활약

조조 사후 아들 조비가 위왕(魏王)과 승상직을 계승하자,[12] 조휴는 영군장군(領軍將軍)에 임명되고 동양정후(東陽亭侯)에 봉해졌다.[13] 220년 6월 하후돈이 사망하자 조비는 조휴를 진남장군(鎮南將軍)으로 삼아 군사 작전을 총괄하게 했으며, 황제의 대리 권한을 부여하고 직접 손을 잡고 전송할 정도로 신임했다.[14]

당시 위나라를 위협하던 손권의 군대가 역양현(歷陽縣, 현재의 안후이성 허현)에 주둔하자, 조휴는 군대를 이끌고 이를 격파했다. 이후 양쯔강을 건너 우호현(蕪湖縣, 현재의 안후이성 우후시 동쪽)에 있던 오나라 군영 수천 개를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15]

220년 말, 조비가 후한 헌제로부터 제위를 받아 조위를 건국하고 황제가 되자,[12] 조휴는 정동장군(征東將軍)으로 승진하고 양주 자사(刺史)를 겸임하게 되었으며, 작위도 안양향후(安陽鄉侯)로 높아졌다.[16] 조휴의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조비는 조휴에게 상례 중에도 직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특별히 명했으나, 조휴는 슬픔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고향 초현(譙縣, 현재의 안후이성 보저우시)에서 장례를 치르기를 원했다. 조비는 이를 허락하고 사신을 보내 조문했으며, 조휴가 복귀하기 전 직접 만나 위로하는 등 각별한 관계를 보였다.[17]

226년 조비가 사망하고[19] 아들 조예가 즉위하자, 조휴는 계속해서 중용되었다. 조예는 조휴의 작위를 현후(縣侯)인 장평후(長平侯)로 높여주었다.[20] 이후 조휴는 오나라의 심덕(審悳)이 주둔하던 완(皖, 현재의 안후이성 첸산 현)을 공격하여 심덕을 죽이고, 오나라 장수 한종과 적단(翟丹)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러한 공로로 식읍이 더해져 총 2,500호가 되었고, 대사마(大司馬)로 승진하여 계속해서 양주의 군사를 지휘했다.[21]

3. 1. 조비 시대: 대오 전선 사령관

220년 조조가 사망하고 아들 조비가 위왕(魏王)과 승상의 자리를 계승했다.[12] 조비는 조휴의 공적을 인정하여 영군장군(領軍將軍)으로 임명하고 동양정후(東陽亭侯)에 봉했다.[13][39] 같은 해 6월 하후돈이 사망하자[14] 조비는 조휴를 후임으로 삼아 진남장군(鎮南將軍)·가절(假節)·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로 임명하여 동오 방면의 군사 지휘를 맡겼다.[39][14] 조비는 조휴의 손을 직접 잡고 전송할 정도로 그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14]

당시 손권은 역양현(歷陽縣, 현재의 안후이성 허현)에 군대를 주둔시켜 조위의 영토를 위협하고 있었다. 조휴는 소릉현(召陵縣, 현재의 허난성 뤄허시 동쪽)에서 군대를 이끌고 역양을 공격하여 손권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양쯔강을 건너 우호현(蕪湖縣, 현재의 안후이성 우후시 동쪽)에 있던 오나라 군영 수천 개를 불태웠다.[15][34]

220년 말, 조비는 후한 헌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조위를 건국하고 황제가 되었다.[12] 조비는 조휴를 정동장군(征東將軍)으로 승진시키고 양주자사(刺史)를 겸하게 했으며, 작위도 정후(亭侯)에서 향후(鄉侯)인 안양향후(安陽鄉侯)로 높였다.[16][39]

이 무렵 조휴는 어머니를 여의었다.[40] 조비는 조휴가 상중에도 관직을 수행하도록 특별히 명하고 상복 착용을 면제하며 음식을 평소대로 섭취하도록 허락했으나, 조휴는 슬픔으로 건강이 나빠졌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인 초현(譙縣, 현재의 안후이성 보저우시)으로 돌아가기를 청했고, 조비는 이를 허락하며 설교(薛喬)를 보내 조문하게 했다. 조휴는 장례를 마치고 즉시 임지로 복귀하려 했으나, 조비는 그를 직접 만나 위로했다. 이는 조비가 조휴를 얼마나 아꼈는지 보여주는 일화이다.[17]

황초 3년(222년) 가을 9월(음력),[12] 조비는 동오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조비의 동오 침공). 조휴는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승진하고 가황월(假黃鉞)을 하사받았으며,[39][18] 장료, 장패 등 20여 개 군을 이끌고 동구(洞口, 현재 장쑤성 남부)로 진격했다.[18][39] 조인은 유수(濡須) 방면을, 조진, 하후상, 장합, 서황은 남군(南郡) 방면을 공격했다.[39]

오나라에서는 여범서성, 전종 등을 지휘하여 동구에서 조휴를 막았고, 주환은 조인을, 제갈근, 반장, 양찬 등은 조진 등을 상대했다.[39] 겨울 11월(음력), 큰 폭풍우로 여범의 함대가 큰 피해를 입어 병사 수천 명이 익사했다.[39][35] 조휴, 장료, 장패 등은 이 기회를 틈타 오군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39][35] 남은 오군은 장강 남쪽으로 물러나 하제의 군대에 합류했는데, 하제의 군대가 매우 화려하고 강성해 보이자 조휴 등은 위압감을 느끼고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물러났다.[39][36] 이후 조휴는 장패에게 서릉(徐陵)을 습격하게 하여 수천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39][35] 그러나 서성의 군대를 공격했을 때는 이기지 못했고,[39] 윤로(尹魯)를 보내 전종을 공격하게 했으나 오히려 오군의 반격으로 패하여 윤로가 전사했다.[39][36]

이 원정은 황초 4년(223년) 조인이 유수 방면에서 패배하면서 중단되었다.[39] 조비는 조휴를 양주목(牧)으로 임명하여 계속해서 오나라 방면을 대비하게 했다.[36][18]

황초 7년(226년) 5월 16일, 조비가 위독해지자 조휴는 조진, 사마의와 함께 유조를 받아 조예를 보좌하게 되었다.[39]

3. 2. 조예 시대: 석정 전투와 죽음

226년 5월 16일, 조비가 위독해지자 조진, 사마의와 함께 유조를 받아 조예를 보좌하게 되었다.[39] 조예가 황제로 즉위한 후, 조휴는 기존의 향후(鄕侯)에서 현후(縣侯)로 승격되어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졌다.[39][20] 이후 오나라 장수 심덕(審悳)이 주둔하던 완(현재의 안후이성 첸산 현)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심덕의 목을 베었다.[39][21] 또한 오나라 장수 한종과 적단(翟丹)이 군대를 이끌고 투항해오자 이를 받아들였다.[39][21]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식읍 4백 호가 더해져 총 2,500호가 되었고, 대사마로 승진했으며 계속해서 양주의 군사를 지휘하게 되었다.[39][21]

228년, 조예는 오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두 방면으로 군사를 보냈다. 사마의에게는 형주의 군대를 이끌고 한수를 따라 순양현(현재 후베이성 황메이 현 남서쪽)으로 진격하게 했고, 조휴에게는 보기 10만 명을 이끌고 심양(尋陽)으로 나아가게 했다.[39][22] 이때 오나라의 장수 주방이 거짓으로 투항하며 조휴를 유인하는 계책을 세웠다. 조휴는 이를 믿고 조예의 윤허를 받아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 영토 깊숙한 환현(현재의 안후이성 첸산 현)까지 진격했다.[39][23][37] 오나라에서는 육손, 전종, 주환에게 각각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휴를 공격하게 했다.[39]

조휴는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퇴각하려 했으나, 속았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의 군대가 정예병이며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판단하여 교전을 벌였다.[39][41][42] 그러나 석정 전투에서 위나라 군대는 크게 패배하여 석정(현재 안후이성 첸산 현 부근)으로 후퇴했다.[39][23] 이 과정에서 밤중에 병사들이 혼란에 빠져 많은 수가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달아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23] 당시 조휴와 합류하기로 했던 가규는 조휴가 패배할 것을 예측하고 신속하게 구원에 나섰으며,[43][37] 조휴의 부하였던 왕릉이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돌파한 덕분에 조휴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44][37] 이 전투에서 위나라는 막대한 양의 군수 물자를 잃었으며, 1만 명의 병사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39] 이후 가규의 도움으로 군량과 병사를 지원받아 군세를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39]

조휴는 상주문을 올려 조예에게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과했다.[39][24] 그러나 조예는 사자 양기(楊曁)를 보내 조휴를 위로하고 이전과 다름없이 예우하며 포상을 더욱 늘렸다.[39][24] 조휴는 이 패전의 충격으로 등에 악성 종기(악성 종양)가 발병하여 결국 228년에 사망했다.[39][25] 일설에는 향년 55세였다고도 한다.[37] 사후 '''장후'''(壯侯)라는 시호를 받았다.[25][37] 아들 조조(曹肇)가 뒤를 이었다.[39][37]

원래 조휴는 가규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황초 연간에 조비가 가규에게 부절을 내리려 하자 조휴가 이를 반대한 일이 있었다.[43] 《위략》에 따르면, 석정 전투 패배 후 조휴는 가규의 구원이 늦었다고 원망하며 책망했고, 심지어 가규가 공적을 속였다고 상소하기까지 했다. 가규 역시 이에 맞서 상소를 올렸으나, 조정에서는 가규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하면서도 조휴가 황족 출신의 중신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누구에게도 벌을 내리지 않았다.[45][37]

정시 4년(243년) 가을 7월, 조방은 조서를 내려 조조의 묘정에 공신 20인을 배향했는데, 조휴도 이 명단에 포함되었다.[37]

4. 평가

조조의 신임을 받은 종실(황족)로서 조비, 조예 대에 걸쳐 대사마와 양주목 등 최고위직을 역임하며 중용되었다.[39] 이는 그가 위나라 초기 군사 및 정치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석정 전투에서의 큰 패배와 같은 군사적 실책이나 동료 장수와의 불화 등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39][43][45]

4. 1. 부정적 평가

태화 2년(228년), 위 명제 조예는 동오를 공격하기 위해 두 방면으로 군사를 보냈다. 사마의한수 방면으로, 조휴는 보기 10만 명을 이끌고 심양 방면으로 진격하도록 했다.[39][41][42] 이때 조휴는 동오의 장수 주방의 거짓 투항 계략에 속아[23] 동오 영토 깊숙한 환현까지 진격하는 큰 실책을 저질렀다.[39][41][42]

동오의 육손, 전종, 주환 등이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고 나서야 속았음을 깨달았지만, 조휴는 자신의 군대가 정예병이고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점을 믿고, 속은 것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무리하게 교전을 벌였다.[39][41][42] 결국 석정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석정으로 후퇴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병사들이 밤중에 공황 상태에 빠져 많은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흩어지는 혼란을 겪었다.[23] 이 전투로 인해 조휴는 막대한 군수 물자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병력 1만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39] 당시 가규와 왕릉의 구원이 없었다면 조휴 자신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상황이었다.[43][44]

패배 후 조휴는 위 명제에게 상주문을 올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처벌을 요청했다. 그러나 명제는 조휴가 종실(황족)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그를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사자를 보내 위로했으며, 이전과 다름없이 대우하고 포상을 늘렸다.[39][24]

또한 조휴는 동료 장수와의 관계에서도 부정적인 면모를 보였다. 특히 가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과거 위 문제가 가규에게 부절(군사 지휘권을 상징하는 신표)을 수여하려 할 때 이를 반대하기도 했다.[43] 석정 전투 패배 이후에는 자신의 실책을 반성하기는커녕, 가규가 구원을 늦게 와서 패배했다며 원망하고 책망했다. 심지어 가규가 공적을 속였다고 위 명제에게 상소까지 올렸다. 가규 역시 이에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고, 조정에서는 가규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알았지만 조휴가 종실이고 중임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누구에게도 벌을 내리지 않았다.[45] 이는 당시 위나라 조정 운영의 공정성에 의문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석정 전투에서의 참패와 이로 인한 정신적 충격은 조휴의 건강을 악화시켜 등에 악성 종기가 생기게 했고, 이는 결국 그의 사망 원인이 되었다.[39]

5. 가족 관계

조휴의 아들 조조(曹肇)는 자가 장사(長思)였으며,[26] 아버지의 작위인 장평후(長平侯)를 물려받았다.[27] 재능 있고 관대함으로 알려진 조조는 조위(曹魏)에서 산기상시(散騎常侍)와 둔기교위(屯騎校尉)를 지냈다. 238년 조예가 위독해지자 양자이자 후계자인 조방의 섭정으로 조조와 조유를 임명하려 했으나, 이후 마음을 바꿔 조조에게 은퇴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조조는 조방 재위 시기인 정시 연간(240년–249년) 중반에 사망했으며, 사후 위장군(衞將軍)으로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조흥(曹興)이 그의 뒤를 이어 장평후가 되었다.[28]

조휴에게는 조조보다 어린 조찬(曹纂)이라는 아들도 있었다. 220년에서 226년 사이에 조비는 조휴의 후작령에서 300가구를 떼어내 조찬을 위한 새로운 후작령을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와 형처럼 조찬은 조위에서 복무하며 오를 멸하는 장군(殄吳將軍) 직을 맡았다. 죽은 후에는 전장군(前將軍)으로 추증되었다.[29]

조휴의 증손자 조서(曹攄)는 자가 안원(顏遠)이며 조조의 손자였다. 조서는 어릴 때부터 덕행이 있고 야심이 컸으며, 지식과 박학다식함으로 알려졌다. 그는 266년 2월 조위가 멸망한 후 진나라에서 복무했으며, 낙양의 현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사마경이 혜제의 섭정이었을 때, 조서는 좌사와 함께 그의 밑에서 일했다. 조서는 나중에 중랑에서 양양 태수와 정남사마(征南司馬) 직위로 승진했다. 그는 308년[30] 반란을 진압하다가 전투에서 사망했다.[31]

6. 《삼국지연의》에서의 조휴

14세기 역사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는 악진능통과 싸우다 위기에 처했을 때, 조휴가 화살을 쏘아 능통이 탄 말을 맞추는 장면이 나온다. 이 화살에 맞은 능통은 말에서 떨어졌고, 감녕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악진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다.

또한 금의 등이 일으킨 반란을 왕필 등의 보고를 받고 조휴가 진압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조비를 따라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가 여범에게 크게 패하는 모습도 그려진다. 최후는 정사의 기록처럼 주방의 거짓 투항에 속아 육손에게 패배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때 가규의 도움으로 겨우 낙양으로 돌아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등창(종양)이 나 사망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7. 발굴

2010년 5월, 고고학자들은 허난성 뤄양시 멍진현에서 조휴의 묘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32][38] 3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묘는 동서 길이 50m, 남북 폭 21m, 깊이 10m 규모이다.[38] 묘 내부에서는 자기, 구리 제품, 술잔, 항아리 등의 부장품과 함께 두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32] 유골 검사 결과, 각각 약 50세 남성과 약 40세 여성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남성의 키는 약 1.71m였다.[32][38] 특히, 동전 크기의 청동 도장(동제 인장)에는 조휴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묘의 주인을 명확히 밝혀낼 수 있었다.[32][38] 이 발표는 중화인민공화국 허난성 문화재국에서 이루어졌다.[38]

참조

[1] 역사서 Sanguozhi vol. 3
[2] 역사서 Sanguozhi, vol. 47
[3] 역사서 Sanguozhi vol. 9
[4] 역사서 Sanguozhi vol. 9
[5] 역사서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6] 역사서 Sanguozhi vol. 9
[7] 역사서 Sanguozhi vol. 9
[8] 역사서 Zizhi Tongjian vol. 68
[9] 역사서 Sanguozhi vol. 9
[10] 역사서 Sanguozhi vol. 9
[11] 역사서 Sanguozhi vol. 9
[12] 역사서 Zizhi Tongjian vol. 69
[13] 역사서 Sanguozhi vol. 9
[14] 역사서 Sanguozhi vol. 9
[15] 역사서 Sanguozhi vol. 9
[16] 역사서 Sanguozhi vol. 9
[17] 역사서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18] 역사서 Sanguozhi vol. 9
[19] 역사서 Zizhi Tongjian vol. 70
[20] 역사서 Sanguozhi vol. 9
[21] 역사서 Sanguozhi vol. 9
[22] 역사서 Zizhi Tongjian vol. 71
[23] 역사서 Sanguozhi vol. 9
[24] 역사서 Sanguozhi vol. 9
[25] 역사서 Sanguozhi vol. 9
[26] 역사서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27] 역사서 Sanguozhi vol. 9
[28] 역사서 Sanguozhi vol. 9
[29] 역사서 Sanguozhi vol. 9
[30] 역사서 Book of Jin
[31] 역사서 Zhang Yin's Wenshi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32] 웹사이트 Three Kingdoms general Cao Xiu's tomb discovered; experts say it is difficult to use DNA to confirm authenticity of Cao Cao's tomb 三国名将曹休墓出土 专家称难用其DNA鉴定曹操墓 http://paper.science[...] 2017-11-03
[33] 역사서 三国志
[34] 역사서 三国志
[35] 역사서 三国志
[36] 서적 建康実録
[37] 서적 魏略 三国志「魏書」賈逵伝注引
[38] 뉴스 曹操の一族、曹休の墓を発見、副葬品で断定―中国・河南省 https://web.archive.[...] サーチナ 2010-05-17
[39] 서적 삼국지 권9 제하후조전
[40] 서적 위략 삼국지 권9 제하후조전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41] 서적 삼국지 권56 주치주연여범주환전 위와 같음
[42] 서적 삼국지 권58 육손전 위와 같음
[43] 서적 삼국지 권15 유사마양장온가전 위와 같음
[44] 서적 삼국지 권28 왕관구제갈등종전 위와 같음
[45] 서적 상게서 삼국지 권15 유사마양장온가전 중 가규전의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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