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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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갈첨은 촉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제갈량의 아들이다. 그는 16세에 유선의 딸과 결혼하여 관직에 진출했으며, 시중, 상서복야, 군사 장군 등을 역임했다. 제갈량의 명망에 힘입어 촉나라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졌으나, 실제 능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263년 위나라의 침공 당시 위장군으로 면죽 전투에서 아들 제갈상 등과 함께 전사하며 촉나라의 멸망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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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7년 출생 - 사마주
사마주는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장군으로 사마의의 아들이며 서진 건국 후 왕에 봉해지고 오나라 정벌에 공을 세워 대장군에 이르렀고 그의 증손자는 동진을 건국했다. - 촉한의 상서령 - 이엄
유비 사후 제갈량과 함께 유선을 보좌하는 고명대신가 되었으나, 군량 보급 실패를 은폐하려다 발각되어 면직당하고 유배된 후 제갈량의 사망 소식을 듣고 병사한 촉한의 관료이자 장군이다. - 촉한의 상서령 - 동궐
동궐은 삼국시대 촉한의 관료로, 제갈량의 남정과 북벌에 참여한 후 상서령, 보국대장군 등을 역임하며 촉한 조정에서 활동했고, 촉한 멸망 후에는 유선을 따라 낙양으로 이주하여 서진에서 관직을 지냈다. - 촉한의 시중 - 관흥
관흥은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로 관우의 아들이며, 아버지 사후 한수정후 작위를 계승하고 제갈량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시중·중감군에 임명되었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한 인물이다. - 촉한의 시중 - 마량
마량은 촉한의 관료이자 유비의 측근으로, 형주에서 등용되어 종사, 시중을 지냈으며 이릉 전투에서 전사했고, 뛰어난 재능을 칭송하는 '백미'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제갈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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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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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제갈첨 |
원어 이름 | 諸葛瞻 |
로마자 표기 | Zhūgě Zhān |
자 | 사원(思遠) |
작위 | 무향후(武鄉侯) |
출생 | 227년 |
출생지 | 성도(成都), 쓰촨 성(四川省) |
사망 | 기원후 263년 11월경 |
사망지 | 면죽(綿竹) |
아버지 | 제갈량 |
배우자 | 유선(劉禪)의 딸 |
자녀 | 제갈상 제갈경(諸葛京) |
직업 | 군인, 정치인 |
관직 | |
위장군 (衛將軍) | 대행 |
도호 (都護) | 대행 |
군사 장군 (軍師將軍) | 알 수 없음 |
상서복야 (尚書僕射) | 알 수 없음 |
생애 | |
활동 시기 | 227년 - 263년 |
주요 활동 | 강유의 뒤를 이어 263년에 촉한을 지키기 위해 싸웠으나 면죽에서 전사 |
기타 | |
소속 | 촉한 |
묘호 | 없음 |
시호 | 없음 |
본관 | 서주(徐州) 낭야군(琅邪郡) 양도현(陽都縣) |
2. 생애
제갈첨은 약관의 나이에 촉한에 임관하여 많은 이들의 명망을 받았다. 그러나 황호가 유선의 총애를 받으면서 황궁에 출입할 수 없게 되었다.[6]
261년, 행도호위장군이 되어 동궐과 함께 평상서사가 되었고, 번건과 더불어 국정을 움직이는 지위에 올랐으나, 유선이 신임하는 환관 황호의 횡포에는 손쓸 도리가 없었다. 결국 제갈첨과 동궐은 황호와 사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6]
262년, 촉의 군권을 쥔 강유의 실각을 황호가 바라게 되자, 동궐과 함께 이에 동조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손성의 『이동기』에 따르면, 제갈첨은 강유를 대신하여 염우를 등용하도록 상소했다고 한다. 염우는 황호와 결탁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6]
제갈첨에게는 아들 제갈상과 제갈경이 있었다. 면죽관 전투에서 제갈상은 전사했고, 제갈경은 살아남아 하동 땅으로 이주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제갈첨은 16세에 촉 황제 유선의 딸과 결혼하여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었다. 1년 후, 황실 근위대인 우림(羽林) 부대의 중랑장(中郎將)으로 승진했다. 이후 촉나라 정부에서 시중(侍中), 상서복야(尚書僕射), 군사 장군(軍師將軍)의 직책을 역임했다.[2]제갈첨은 그림과 서예에도 능했다. 234년에 사망한 제갈량을 촉나라 사람들이 깊이 그리워했기 때문에, 제갈첨이 아버지의 재능을 떠올리게 한다며 그를 특별히 아꼈다.[2] 촉나라 정부가 좋은 정책을 시행할 때마다, 사람들은 제갈첨에게 공을 돌렸다.[3] 제갈량은 촉나라 정부에 공식적인 역사 기록 기관을 설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갈첨이 어떤 정책에 관여했는지 구별하기 어려웠지만, 그의 명성은 실제 업적보다 더 컸다는 것은 분명했다.[4]
제갈량은 황승언의 딸(황부인)을 아내로 두었지만, 제갈첨의 생모인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제갈첨이 태어났을 때 제갈량의 나이가 46세로 비교적 고령이었기 때문에 측실 소생일 가능성도 있다.
234년, 제갈량이 북벌을 위해 무공에 출진할 때 오에 있는 형 제갈근에게 편지를 보내, 8살이 된 제갈첨의 영특함이 너무 조숙하여 성장해서 큰 인물이 되지 못할까 걱정하는 마음을 전했다.
아버지 제갈량이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작위인 무향후를 잇고 주위의 기대를 받았다. 17세에 황제 유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기도위를 제수받았다. 이듬해 우림중랑장이 되었고, 사성교위, 시중, 상서복야로 승진하여 군사 장군이 더해졌다.
제갈첨은 서화에 능했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제갈량을 추모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그들은 무슨 경사가 있을 때마다 제갈첨 덕분이라고 칭찬했고, 제갈첨은 실력 이상의 평판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2. 2. 정치 활동과 강유와의 관계
제갈첨은 아버지 제갈량이 228년부터 234년까지 5차례의 북벌을 통해 촉나라의 경쟁국 조위에 대해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 특히 촉나라가 군사력과 경제력 측면에서 위나라보다 훨씬 약했기 때문에 지나치게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의 내재된 위험성을 인식했다.[6] 강유가 촉나라 군대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이 된 후, 제갈첨은 강유가 위나라에 대한 전쟁을 계속하는 것을 만류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강유는 240년부터 262년까지 위나라에 대해 총 11차례의 군사 작전을 감행했다.[6] 강유가 위나라 군대에 의해 대패한 후, 제갈첨은 촉나라 황제 유선에게 강유를 군 지휘에서 해임하고 환관 황호의 친구인 엄우로 대체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제갈첨이 유선에게 올린 상소는 보존되어 서진 시대에도 남아 있었다.[6] 그러나 유선이 제갈첨의 조언을 받아들였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강유는 마지막 11차 작전의 실패 후 촉나라 수도 성도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는 아마도 촉나라 백성들이 그에게 점점 더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6] 유선은 또한 제갈첨이 위나라에 대한 공격적인 입장에서 방어적인 입장으로 전환하자는 제안에도 타협했다. 그 이유는 그가 이전에 위연의 검증된 방어 배치를 강유의 고위험 고수익 전략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6]이전에 촉나라 장군 위연은 촉나라 핵심 지역으로 가는 길목인 전략적 요충지인 한중의 외곽과 출구에 "엄폐 진지"를 설치하여 침략군을 방해하고 격퇴하는 방어 전략을 고안했다. 위연이 죽은 후에도 유선은 이 배치를 따라 위나라 침략군을 매번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강유는 위연의 설계가 "적을 격퇴할 수 있을 뿐 큰 이익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를 희망하면서 강유는 위연이 설치한 진지를 포기하고 진령산맥의 모든 관문을 비우는 것을 제안했다. 그러면 위나라 침략군이 한중으로 더 깊숙이 유인되어 지치게 된 원정군을 막고 촉나라의 반격에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7] 강유는 자신의 배치가 이전에 진령산맥을 방어할 때 상상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강유의 분석에는 타당한 논리와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제갈첨은 위연의 얽혀 있는 요새를 해체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7]
2. 3. 촉한의 멸망과 면죽 전투
263년, 위가 촉한을 공격해오자, 유선은 제갈첨을 위장군으로 발탁하여 면죽관(綿竹關)에서 이에 대항하게 했다. 위장 등애(鄧艾)는 항복하면 낭야왕의 지위를 주겠다고 권유했으나, 제갈첨은 이를 뿌리치고 전투 중 자결했다.[8]263년 초, 강유는 위나라가 장군 종회를 위-촉 국경 지역의 군사 업무 담당으로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도에 증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유선은 황호의 주술을 믿었는데, 그의 주술에 따르면 위나라가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운명이었다. 유선은 강유의 경고를 제갈첨에게 알리지 않았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선은 위나라의 침공이 시작되기 전에 증원을 보냈다.
263년 9월, 위나라 군대가 촉나라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을 때, 강유는 사천성, 검각현에 있는 요새화된 검각 산길로 후퇴해야 했다.[10] 강유의 계획이 실패하여 멸망의 씨앗을 뿌렸다는 것을 알게 된 제갈첨은 서둘러 성도에서 군대를 소집하여 최종 방어를 준비하기 위해 부현으로 이동했다.
중회의 빠른 진군은 대부분의 촉 장수들을 놀라게 했다. 제갈첨은 검각이 잘 방어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증원군을 그곳에 보내지 않고 부현에서 자리를 지켰다. 위나라 장수 등애가 위험한 산악 지형을 가로질러 지름길을 택해 그의 군대와 함께 갑자기 강유에 나타나자, 강유를 담당하는 관리는 저항도 없이 항복했다. 황권의 아들인 황숭은 여러 차례 제갈첨에게 등애보다 먼저 움직여 유리한 지형을 장악하라고 촉구했다.[11] 그러나 제갈첨은 황숭의 계획이 너무 야심적이라고 여겨 더 "신중한" 접근 방식을 택했다. 황숭이 그에게 등애를 공격하라고 반복해서 촉구하자, 제갈첨은 마지못해 선봉 부대를 보내 적을 공격하게 했고, 이들은 적을 격파했다. 제갈첨은 그 후 더욱 견고하게 방어된 면죽으로 떠나, 등애에 맞서 최후의 저항을 할 계획을 세웠다.[12]
등애가 면죽에서 제갈첨을 포위했을 때, 그는 항복할 기회를 주며, 만약 항복하면 위나라 정부에 제갈첨을 랑야왕으로 봉하도록 추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제갈첨은 거절하고 등애의 사자를 처형한 후, 그의 군대에 성 밖에서 전투를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면죽에는 제갈첨과 함께 장비의 손자인 장준, 어영대장 이구, 황숭, 그리고 제갈첨의 장남인 제갈상 등 촉의 저명인사들이 있었다. 황숭이 촉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연설을 한 후, 양측은 전투에 돌입했다. 등애는 그의 아들 등충과 다른 장교 사찬에게 제갈첨의 위치를 측면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등충과 사찬은 그 후 그들의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촉 진형을 공격하여 이를 격파했다.[13] 제갈첨, 제갈상, 장준, 이구, 황숭 및 다른 촉 장교들은 전투 중에 사망했다.
제갈첨은 부까지 군을 진군시켜 전황을 살피기만 하고 적극적으로 맞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숭(황권의 아들)에게 그 지휘를 비판받았다. 황숭은 눈물을 흘리며 출격을 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등애는 간도를 경유하여 강유의 요새를 어렵지 않게 함락시켰다.
제갈첨은 선봉대가 패하자 부에서 후퇴하여 면죽에 진영을 구축했다. 등애는 편지를 보내 항복을 권했지만 제갈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격노하여 등애의 사자를 참수했다. 제갈첨은 첫 전투에서는 위군을 물리쳤지만, 등애의 맹공 앞에 대패하여 아들 제갈상과 장준(장비의 손자이자 장포의 아들), 황숭, 이구(이회의 조카)와 함께 전사했다(촉한의 멸망).
후대에 사천성면죽시에 '''제갈쌍충묘사'''가 세워져, 면죽 방위전에서 전사한 제갈첨, 제갈상, 장준, 황숭, 이구가 제갈량과 함께 제사 지내지고 있다.[16]
3. 평가
제갈첨은 아버지 제갈량이 228년부터 234년까지 5차례의 북벌을 통해 촉나라의 경쟁국 조위에 대해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는 것을 보았고, 특히 촉나라가 군사력과 경제력 측면에서 위나라보다 훨씬 약했기 때문에 지나치게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의 내재된 위험성을 인식했다.[6] 강유가 촉나라 군대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이 된 후, 제갈첨은 강유가 위나라에 대한 전쟁을 계속하는 것을 만류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강유는 240년부터 262년까지 위나라에 대해 총 11차례의 군사 작전을 감행했다.[6]
강유가 위나라 군대에 의해 대패한 후, 제갈첨은 촉나라 황제 유선에게 강유를 군 지휘에서 해임하고 환관 황호의 친구인 엄우로 대체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6] 그러나 유선이 제갈첨의 조언을 받아들였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선은 또한 제갈첨이 위나라에 대한 공격적인 입장에서 방어적인 입장으로 전환하자는 제안에도 타협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전에 위연의 검증된 방어 배치를 강유의 고위험 고수익 전략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7]
강유는 자신의 배치가 이전에 진령산맥을 방어할 때 상상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강유의 분석에는 타당한 논리와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제갈첨은 위연의 얽혀 있는 요새를 해체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7]
『삼국지』의 편자이자 촉나라의 옛 신하인 진수는 제갈첨이 실력 이상의 명성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다만, 진수가 과거 제갈첨의 부하로 있을 때 치욕을 당했기 때문에 곡필했다는 설도 있다(손성 『이동기』).
『화양국지』에 따르면, 태시 4년(268년)에 왕부라는 전직 병사의 도망자가 "제갈도호(제갈첨의 행관은 도호, 즉 제갈첨을 뜻함)"의 이름을 사칭하여 수백 명의 동료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처형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17] 이 사건은 일반 민중에게도 제갈량이 굳건히 사랑받았고, 제갈첨의 인기 또한 높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진의 무제는 조칙을 내려, 제갈첨이 국난에 순절하고 신의를 지킨 것을 평가했다(『진태시귀거주』).
간보는 제갈첨의 능력은 그다지 평가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국가를 지키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 충효를 다하려 한 점은 평가했다.
4. 친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제갈량 | 234년 사망. 황승언의 딸(황부인)을 아내로 두었으나, 제갈첨의 생모인지는 불분명. 제갈첨 출생 당시 제갈량의 나이가 46세로 비교적 고령이었기에 측실 소생일 가능성도 있음. |
어머니 | 불명 | 제갈량의 처 황부인(황승언의 딸)이 생모인지 여부는 불분명. |
형 | 제갈근 | 오나라에 보낸 편지에서 8살 된 제갈첨의 영특함을 언급하며 너무 조숙하여 큰 인물이 되지 못할까 걱정함. |
부인 | 촉 공주 | 촉 황제 유선의 딸. 263년 17세에 혼인. |
아들 | 제갈상 | 면죽 방위전에서 아버지 제갈첨과 함께 전사. |
5. 대중문화 속 제갈첨
나관중의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는 삼국 시대 전후의 사건들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는데, 성도의 불운한 방어전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촉 황제 유선이 위나라 침략자를 격퇴할 방법에 대해 제갈첨에게 의견을 구하자, 제갈첨은 죽은 아버지(제갈량)의 모습으로 분장하여 적을 겁주려 했다. 그의 계략은 초반에 성공하여 위나라 군사들은 제갈량이 죽음에서 돌아왔다고 생각하고 당황하여 흩어졌다. 그러나 등애는 재빨리 그것이 제갈량인 척하는 자임을 간파하고, 부대에게 재집결하여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제갈첨은 제갈상을 비롯한 황숭 등과 함께 면죽 전투에서 등애의 군대에 압도당하여 사망했다.[13]
『삼국지연의』에서 제갈첨의 생모는 황부인으로 소개된다. 환관 황호의 횡포에 반발하여 병을 칭하며 문을 닫고 있었지만, 위나라의 침공이 시작되자 극정의 추천을 받은 유선에 의해 소환되어 출격하여, 면죽을 지킨다. 한 번은 아버지의 목상과 함께 출진하여 "제갈량이 살아있다"고 위나라 군을 혼란시켰고, 두 번째는 제갈상의 활약으로 위나라 군을 패퇴시킨다. 그리고 등애로부터 항복하여 위나라에 섬길 것을 강요받자, 사자를 참수함으로써 이를 거절하고 출격하지만 이번에는 패배하고, 오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사자를 보내 도착하기 전에 출격하여 전사한다.
6. 기타
진수는 『삼국지』에서 제갈첨이 실력 이상의 명성을 얻었다고 평가했다.[17] 그러나 진수가 과거 제갈첨의 부하로 있을 때 치욕을 당했기 때문에 곡필(왜곡된 기록)했다는 설도 있다. (손성 『이동기』)
『화양국지』에 따르면, 268년 왕부라는 전직 병사가 "제갈도호(제갈첨을 뜻함)"의 이름을 사칭하여 수백 명의 동료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17] 이는 일반 민중에게도 제갈량이 굳건히 사랑받았고, 제갈첨의 인기 또한 높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진 무제는 조칙을 내려 제갈첨이 국난에 순절하고 신의를 지킨 것을 평가했다(『진태시귀거주』).
간보는 제갈첨의 능력은 그다지 평가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국가를 지키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 충효를 다하려 한 점은 평가했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35
[2]
서적
Sanguozhi vol. 35
[3]
서적
Sanguozhi vol. 35
[4]
서적
Sanguozhi vol. 35
[5]
서적
Sanguozhi vol. 13
[6]
서적
Sanguozhi vol. 35
[7]
서적
Sanguozhi vol. 44
[8]
서적
Sanguozhi vol. 44
[9]
서적
Sanguozhi vol. 44
[10]
서적
Sanguozhi vol. 28
[11]
서적
Sanguozhi vol. 43
[12]
서적
Sanguozhi vol. 35
[13]
서적
Sanguozhi vol. 28
[14]
서적
諸葛忠武侯文集
[15]
문서
諸葛八卦村の家系図
1992-00-00
[16]
웹사이트
三国遺址探訪:諸葛双忠墓祠
http://sanguo.china-[...]
2024-01-15
[17]
서적
華陽国志巻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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