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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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는 2, 3세기 로마 제국의 법학자이다. 페니키아의 티루스 출신으로, 파피니아누스의 제자였으며,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 치하에서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를 역임했으나 근위병의 반란으로 살해되었다. 그의 저작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로마법 대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학설휘찬의 3분의 1이 울피아누스의 저서에서 인용되었다. 그는 공법과 사법을 구분하고, "프린켑스는 법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법 해석을 통해 주권 개념의 원형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426년 인용법에 의해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은 5명의 법학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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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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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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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안니우스 울피아누스 |
출생 | 기원후 170년경 |
출생지 | 티레, 로마 시리아 |
사망 | 기원후 228년 (57–58세) |
사망지 | 로마 |
국적 | 로마 |
직업 | 법학자 |
주요 업적 | 법학원론 |
2. 생애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의 정확한 출생 시기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문학 활동을 한 시기는 서기 211년에서 222년 사이였다. 그는 파피니아누스의 강단에서 보좌관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의회 의원으로 공직에 처음 등장했다. 카라칼라 치하에서는 탄원 담당관(magister libellorum)이었다. 엘라가발루스는 그를 로마에서 추방했지만,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222)가 즉위하면서 복귀했고, 결국 황제의 수석 고문이자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가 되었다.[4]
울피아누스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법전 편찬 작업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학설휘찬(學說彙纂, Digesta)의 2/5가 울피아누스의 저서에서 인용되었을 정도이다.[4] 학설휘찬은 6세기에 편찬되었고, 울피아누스는 3세기 법학자이므로 동시대 인물은 아니다. 루돌프 폰 예링은 저서 로마법의 정신에서 "로마는 정치제도, 법률, 기독교로 세계를 세 번 정복하였다."고 언급했다. 로마법은 로마법 대전을 의미하며, 로마법 대전은 모든 불문법을 학설휘찬에 모았고, 학설휘찬의 내용만 재판에서 불문법으로 인용할 수 있도록 강제했다. 이러한 학설휘찬 내용의 2/5가 울피아누스의 저서에서 인용되었기에, '로마법=울피아누스'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의미를 가진다.[4]
울피아누스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법전 편찬 작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학설휘찬(學說彙纂, Digesta)의 2/5가 울피아누스의 저서에서 인용되었다. 루돌프 폰 예링은 저서 로마법의 정신에서 "로마는 정치제도, 법률, 기독교로 세계를 세 번 정복하였다."고 말했는데, 로마법은 로마법 대전을 의미하며, 로마법 대전은 모든 불문법을 학설휘찬에 모았고, 학설휘찬의 내용만 재판에서 불문법으로 인용할 수 있게 강제했다. 이러한 학설휘찬 내용의 2/5가 울피아누스의 저서에서 인용되었기에 '로마법=울피아누스'라고 할 수 있다.
세베루스 왕조 시대에 이탈리아의 프라이토리아니 직책은 점차 일반 행정직과 유사해졌고, 203년부터 카라칼라의 즉위로 제거되고 처형될 때까지 이 직책을 맡았던 파피니아누스와 같은 법학자를 임명하는 경향이 있었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치하에서 프라이토리아니는 울피아누스가 맡았는데, 그는 황제 앞에서 근위병에게 암살당했다.[4]
그는 엘라가발루스가 프라이토리아니에게 부여한 특권을 축소하여 그들의 적대감을 샀고, 그들의 복수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결국 그는 군인들과 폭도들 사이의 소요 사태 중에 근위병에 의해 궁궐에서 살해되었다.[4]
그는 로마 북쪽 해안의 산타 마리넬라에 호화로운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페니키아의 티루스 출신으로, 아에밀리우스 파피니아누스의 제자가 되었다. 율리우스 파울루스와는 형제 제자 관계이다.
그의 학설은 독창성은 적었지만, 선인의 업적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데 뛰어났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저작은 37권이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칙령 주석』(''Ad edictum'') 83권이나 『시민법 주석』(''Ad musurium Sabinum'') 51권 등이 있으며, 많은 논문을 남겼다. 『법학 요강』에서 처음으로 공법과 사법을 구분했다고 여겨진다. 또한, "주권" 개념의 원형은 울피아누스의 "프린켑스는 법에 구속되지 않는다"(princeps legibus solutus est), "원수의 의사는 법률로서의 효력을 가진다"(Quod principi placuit, legis habet vigorem)는 법 해석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로마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에게 발탁되어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 (근위대장관)가 되었으나, 반대파의 책동에 의한 프라에토리아니 (근위군단)의 반란으로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4]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로마법 대전』을 편찬했을 때, "학설휘찬"에 채록된 학설의 3분의 1이 울피아누스의 학설이었으며, 426년의 인용법에 의해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은 5명의 법학자 (울피아누스 외에 가이우스, 파피니아누스, 파울루스, 모데스티누스)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후세에 그에게 귀속되어 쓰여진 저작도 많다.
3. 업적 및 영향
그의 저작은 유스티니아누스의 ''디게스타'' 내용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며, 그의 ''칙령''에 대한 주석만으로도 약 5분의 1을 차지한다.[4] 그의 학설은 독창성은 적었지만, 선인의 업적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데 뛰어났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저작은 37권이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칙령 주석』(''Ad edictum'') 83권, 『시민법 주석』(''Ad musurium Sabinum'') 51권 등이 있다. 『법학 요강』에서 처음으로 공법과 사법을 구분했다고 여겨진다. 또한, "주권" 개념의 원형은 울피아누스의 "프린켑스는 법에 구속되지 않는다"(princeps legibus solutus est), "원수의 의사는 법률로서의 효력을 가진다"(Quod principi placuit, legis habet vigorem)는 법 해석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4]
426년의 인용법에 의해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은 5명의 법학자 (울피아누스 외에 가이우스, 파피니아누스, 파울루스, 모데스티누스)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법학 연구에서 울피아누스는 "''법의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정직하게 살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Juris praecepta sunt haec: honeste vivere, alterum non laedere, suum cuique tribuere)"라는 문구로 가장 잘 기억될 것이다.[6]
현재 유럽 상당수 국가들의 대법원에는 울피아누스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또한 최초의 생명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4. 사상
그의 학설은 독창성은 적었지만, 선인의 업적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데 뛰어났다고 평가받는다.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칙령 주석』(''Ad edictum'') 83권, 『시민법 주석』(''Ad musurium Sabinum'') 51권 등이 있다.
울피아누스는 법학 연구에서 "''법의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정직하게 살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Juris praecepta sunt haec: honeste vivere, alterum non laedere, suum cuique tribuerela)[6]라는 문구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악법도 법이다"라는 격언의 원형으로 알려진 "이것은 진실로 지나치게 심하다. 그러나 그게 바로 기록된 법이다."(quod quidem perquam durum est, sed ita lex scripta est.la)[9]라는 말을 남겼다.
황제는 법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주권개념, 주권면제와 로마 자신을 위한 법은 공법이고, 각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존재하는 법은 사법이라는 공법개념을 주장했다.
426년 인용법에 의해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은 5명의 법학자 (가이우스, 파피니아누스, 파울루스, 모데스티누스, 울피아누스) 중 한 명으로 꼽힌다.
4. 1. 최초의 생명표 작성
울피아누스는 최초로 생명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5. 평가
루돌프 폰 예링은 저서 로마법의 정신에서 "로마는 정치제도, 법률, 기독교로 세계를 세 번 정복하였다."고 말했다. 여기서 로마법은 로마법 대전을 의미하며, 로마법 대전은 모든 불문법을 학설휘찬(學說彙纂, Digesta)에 모아 재판에서 불문법으로 인용할 수 있게 강제했는데, 학설휘찬 내용의 2/5가 울피아누스의 저서에서 인용되었다.[4] 이는 '로마법=울피아누스'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한다.
울피아누스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법전 편찬 작업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학설휘찬은 6세기에 편찬되었고 울피아누스는 3세기 법학자이므로 동시대 인물은 아니다.[4]
426년 인용법에 의해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은 5명의 법학자 (가이우스, 파피니아누스, 파울루스, 모데스티누스, 울피아누스) 중 한 명으로 꼽힌다.[4]
그의 학설은 독창성은 부족했지만, 선인의 업적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데 뛰어났다고 평가받는다.[4] 울피아누스는 "법의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정직하게 살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Juris praecepta sunt haec: honeste vivere, alterum non laedere, suum cuique tribuerela)"라는 문구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6] 그는 『법학 요강』에서 처음으로 공법과 사법을 구분했으며, "프린켑스는 법에 구속되지 않는다(princeps legibus solutus est)", "원수의 의사는 법률로서의 효력을 가진다(Quod principi placuit, legis habet vigorem)"라는 법 해석을 통해 "주권" 개념의 원형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4]
현재 유럽 상당수 국가들의 대법원에는 울피아누스 동상이 세워져 있다.[4]
6. 기타
파피니아누스의 강단에서 보좌관으로 있었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의회 의원으로 공직에 처음 등장했다.[4] 카라칼라 치하에서는 탄원 담당관이었다. 엘라가발루스는 그를 로마에서 추방했지만,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즉위하면서 복귀했고, 황제의 수석 고문이자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가 되었다.[4] 그는 엘라가발루스가 프라이토리아니에게 부여한 특권을 축소하여 그들의 적대감을 샀고, 그들의 복수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결국 그는 군인들과 폭도들 사이의 소요 사태 중에 근위병에 의해 궁궐에서 살해되었다.[4]
그는 로마 북쪽 해안의 산타 마리넬라에 호화로운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법학 연구에서 울피아누스는 "''법의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정직하게 살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라는 문구로 가장 잘 기억될 것이다.[6]
오랫동안 티레의 울피아누스가 아테나이오스의 저서인 ''향연'' — 또는 ''학자들의 연회''에 등장하는 울피아누스의 모델이라고 추정되었다. 아테나이오스는 '울피아누스'를 문법학자이자 문헌학자로 묘사하며, 그의 특징적인 감탄사인 "이 단어는 어디에 쓰였는가?"를 사용한다. 그는 심포시알크로 묘사되며 혼자 소파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죽음은 제15권 686c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오늘날 학자들은 아테나이오스의 울피아누스가 역사적인 울피아누스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실제 울피아누스의 사망 가능 연도인 서기 228년은 ''향연''의 완성 시기를 추정하는 데 잘못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망 연도는 확실하게 결정될 수 없다. 로버트 리 클리브는 1966년에 발견된 파피루스를 인용하며 울피아누스가 223년에 사망했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제기한다.[7]
페니키아의 티루스 출신이며, 아에밀리우스 파피니아누스의 제자가 되었다. 율리우스 파울루스와는 형제 제자 관계이다.
그의 학설은 독창성은 적었지만, 선인의 업적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데 뛰어났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저작은 37권이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칙령 주석』(''Ad edictum'') 83권이나 『시민법 주석』(''Ad musurium Sabinum'') 51권 등이 있으며, 많은 논문을 남겼다. 『법학 요강』에서 처음으로 공법과 사법을 구분했다고 여겨진다. 또한, "주권" 개념의 원형은 울피아누스의 "프린켑스는 법에 구속되지 않는다", "원수의 의사는 법률로서의 효력을 가진다"는 법 해석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로마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에게 발탁되어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 (근위대장관)가 되었으나, 반대파의 책동에 의한 프라에토리아니 (근위군단)의 반란으로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로마법 대전』을 편찬했을 때, "학설휘찬"에 채록된 학설의 3분의 1이 울피아누스의 학설이었으며, 426년의 인용법에 의해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은 5명의 법학자 (울피아누스 외에 가이우스, 파피니아누스, 파울루스, 모데스티누스)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후세에 그에게 귀속되어 쓰여진 저작도 많다.
7. 저작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법전 편찬 작업에 영향을 끼쳤으며, 학설휘찬(學說彙纂, Digesta)의 2/5가 울피아누스 저서의 인용문이다.[4] 학설휘찬은 6세기에 편찬되었고, 울피아누스는 3세기 법학자이므로 동시대 인물은 아니다.
루돌프 폰 예링은 로마법의 정신에서 "로마는 정치제도, 법률, 기독교로 세계를 세 번 정복하였다."고 말했다. 로마법은 로마법 대전을 말하고, 로마법 대전은 모든 불문법을 학설휘찬에 모았으며, 학설휘찬의 내용만 재판에서 불문법으로 인용할 수 있게 강제했는데, 학설휘찬의 2/5가 울피아누스 저서의 인용문이다. 그만큼 '로마법=울피아누스'라는 의미가 있다.
그의 저서로는 50권이 넘는 분량의 ''사비누스에 대한 주석''(Ad Sabinum), 83권에 달하는 ''칙령에 대한 주석''(Ad edictum), 의견, 답변 및 논쟁 모음집, 규칙 및 제도에 관한 책, 다양한 치안 판사의 직무에 관한 논문 등이 있다.[4] 그중 하나인 ''총독의 직무에 관하여 10권''(De officio proconsulis libri x.)은 형법에 대한 포괄적인 해설서이며, 다양한 법률, 유언 신탁, 그리고 기타 여러 저서가 있다. 그의 저술은 전체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의 ''디게스타'' 내용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며, 그의 ''칙령''에 대한 주석만으로도 약 5분의 1을 차지한다.[4] 저술가로서 그는 뛰어난 수준의 교리적 해설, 신중한 비판, 명료한 구성, 문체 및 언어를 특징으로 한다. 그는 또한 최초의 생명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도미티우스 울피아니 단편''(Domitii Ulpiani fragmenta)은 29개의 제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틸리우스(파리, 1549)에 의해 처음 편집되었다. 다른 판본으로는 후고 (베를린, 1834), 부킹(본, 1836)이 있으며, 1835년 엔들리히가 비엔나에서 발견한 ''제도'' 제1권의 단편을 포함하고 있으며, 지라드의 ''로마법 텍스트''(파리, 1890)가 있다.[4]
그의 학설은 독창성은 적었지만, 선인의 업적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데 뛰어났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저작은 37권이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칙령 주석』(Ad edictum) 83권이나 『시민법 주석』(Ad musurium Sabinum) 51권 등이 있으며, 많은 논문을 남겼다. 『법학 요강』에서 처음으로 공법과 사법을 구분했다고 여겨진다. 또한, "주권" 개념의 원형은 울피아누스의 "프린켑스는 법에 구속되지 않는다"(princeps legibus solutus est), "원수의 의사는 법률로서의 효력을 가진다"(Quod principi placuit, legis habet vigorem)는 법 해석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로마법 대전』을 편찬했을 때, "학설휘찬"에 채록된 학설의 3분의 1이 울피아누스의 학설이었다. 426년의 인용법에 의해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은 5명의 법학자 (울피아누스 외에 가이우스, 파피니아누스, 파울루스, 모데스티누스)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참조
[1]
웹사이트
Ulpian Roman jurist
https://www.britanni[...]
2019-05-10
[2]
서적
Summoned to the Roman Courts: Famous Trials from Antiquity
https://books.google[...]
Univ of California Press
2012-05-10
[3]
서적
The Cambridge Companion to Roman Law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
[4]
백과사전
Ulpian
[5]
학술지
Roman Life Expectancy: Ulpian's Evidence
http://dx.doi.org/10[...]
1982
[6]
서적
The Digest of Justinian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85
[7]
논문
Severus Alexander and the Severan Women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1982
[8]
문서
Digesta 1.1.1pr.
[9]
문서
Digesta 40.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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