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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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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비 이씨는 강희제의 시첩으로, 옹정제의 제비(齊妃)이며, 옹정제의 세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았다. 옹정제 즉위 후 제비로 책봉되었으며, 아들 홍시가 옹정제에게 미움을 받아 옥사하면서 슬픔 속에 생을 마감했다. 건륭제 시기에 홍시의 황실 종적이 복구되었으며, 청 서릉의 태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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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이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가족 관계
배우자옹정제 (1735년 사망)
자녀화이커 공주 (和碩懷恪公主), 홍펀 (弘昐, 요절), 홍윤 (弘昀), 홍시 (弘時)
아버지원비 (文備)
어머니불명

2. 생애

강희 15년(1676년)에 태어나 내무부 수녀 선발을 통해 당시 패륵(貝勒) 윤진의 시첩(侍妾)이 되었다. 옹정제와의 사이에서 1녀 3남을 두었으나, 장녀 화석회각공주와 삼남 홍시만이 성년까지 생존하였다. 특히 삼남 홍시는 옹정제의 서장자(庶長子)였다.

옹정제가 즉위한 후, 옹정 원년(1723년) 제비(齊妃)로 책봉되어 후궁 중 비교적 높은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아들 홍시가 옹정제의 노여움을 사 황실 종적에서 삭제되고 옥사하는 비극을 겪었다.

건륭제 즉위 후인 건륭 2년(1737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건륭제가 직접 조문하였으며, 유해는 청서릉의 태릉에 안장되었다.

2. 1. 어린 시절 및 가계

강희 15년 (1676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李文熚|이문엽중국어으로, 지부(知府)를 역임했다고도 하나[1], 옥첩에는 이문벽(李文璧)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그가 아무런 직함이 없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이씨는 내무부 수녀선발을 통해 당시 패륵(貝勒) 윤진의 시첩(侍妾)으로 간택되었다.

이씨는 옹정제와의 사이에서 1녀 3남을 두었다.

자녀
구분이름출생사망비고
장녀화석회각공주강희 34년 (1695년) 7월 6일옹정 원년 (1723년)옹정제의 딸 중 유일하게 성년까지 생존
장남홍분 (弘昐)강희 36년 (1697년) 6월 2일강희 38년 (1699년) 2월 29일요절
차남홍윤 (弘昀)강희 39년 (1700년) 8월 7일강희 49년 (1710년)향년 11세
삼남홍시 (弘時)강희 43년 (1704년) 2월 13일옹정 5년 (1727년)옹정제 즉위 당시 유일한 성년 아들, 서장자



장녀 화석회각공주는 옹정제의 딸들 중 유일하게 성년까지 성장한 인물이다. 세 아들 중에서는 홍시만이 유일하게 성년까지 살아남았다. 옹정제가 즉위할 당시 홍시는 熹妃(희비)의 아들인 홍력(弘曆)보다 나이가 많은 유일한 황자였으며, 옹정제의 서장자(庶長子)였다.

이씨의 개인적인 이름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2. 2. 옹정제 시기

강희 61년(1722년) 11월, 남편 윤진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옹정 원년(1723년) 2월, 옹정제예부적복진 오랍나랍씨를 황후로 책봉하고, 측복진 이씨를 비롯한 후궁들을 비(妃)로 봉하라고 명했다. 이때 이씨는 제비(齊妃)라는 봉호를 받았다. 제비의 지위는 당시 희비 뉴호록씨(훗날 건륭제의 생모)보다 높았다. '제(齊)'라는 봉호는 만주어로 "멋있다" 또는 "염려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같은 달 17일, 내무부에서는 제비 집안의 신분을 포의에서 일반 기인(旗人)으로 승격시켜 주기를 청했으나, 옹정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주필(朱筆)로 해당 건의를 그어버렸다.

같은 해 12월, 황후 책봉과 함께 제비 책봉례가 정식으로 거행되었다. 당시 책문에는 제비 이씨가 몸가짐이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며 순종적이고 근면하여 봉호를 받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제비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옹정 2년(1724년) 겨울, 아들 홍시가 스승 왕무(王武)와 관련된 일로 옹정제의 노여움을 샀다. 결국 옹정 5년(1727년), 홍시는 여러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황실 종적에서 삭제되고 옥사하였다. 제비는 생모였음에도 아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거나 그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는 비극을 겪었다.

2. 3. 건륭제 시기

옹정 13년(1735년) 10월, 건륭제가 즉위하면서 아들 홍시의 황실 종적이 복구되었다. 건륭 2년(1737년) 4월 1일, 제비는 병이 깊어져 오룡정(五龍亭)으로 거처를 옮겼다. 같은 날 건륭제는 황태후의 명을 받들어 오룡정을 방문하여 제비의 병문안을 하였다. 4월 8일, 제비 이씨가 오룡정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건륭제는 직접 오룡정을 찾아 제비의 영전에 술을 올렸다. 제비의 유해는 청서릉의 태릉에 안장되었다.

3. 자녀

구분이름생몰년비고
1녀화석회각공주1695년 8월 15일 ~ 1717년 4월/5월옹정제의 차녀, 성년까지 생존한 유일한 딸
3남홍분(弘昐)1697년 7월 19일 ~ 1699년 3월 30일옹정제의 차남, 요절
3남홍윤(弘昀)1700년 9월 19일 ~ 1710년 12월 10일옹정제의 3남, 11세에 병사
3남홍시1704년 3월 18일 ~ 1727년 9월 20일옹정제의 4남, 성년까지 생존


3. 1. 1녀

화석회각공주(和碩懷恪公主|화석회각공주중국어, 1695년 8월 15일 ~ 1717년 4월/5월)는 옹정제의 둘째 딸이다. 1712년 9월 또는 10월에 만주족 나라 씨족의 싱더(星德|싱더중국어, 1739년 사망)와 혼인하였다.

3. 2. 3남


  • '''홍분'''(弘昐, 1697년 7월 19일 ~ 1699년 3월 30일): 강희 36년(1697년)에 태어난 옹정제의 둘째 아들이다. 강희 38년(1699년)에 요절하였다.
  • '''홍윤'''(弘昀, 1700년 9월 19일 ~ 1710년 12월 10일): 강희 39년(1700년)에 태어난 옹정제의 셋째 아들이다. 강희 49년(1710년)에 1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 '''홍시'''(弘時, 1704년 3월 18일 ~ 1727년 9월 20일): 강희 43년(1704년)에 태어난 옹정제의 넷째 아들이다. 이씨가 낳은 세 아들 중 유일하게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옹정제가 즉위했을 당시, 희비의 아들인 홍력(훗날 건륭제)보다 나이가 많은 유일한 황자였으며, 사실상 서장자(庶長子)의 위치에 있었다. 어린 시절 교육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옹정제는 그의 스승 하청(賀淸)이 교육을 소홀히 했다고 비판했다. 홍시는 결국 아버지 옹정제에 의해 황실 종적(宗籍)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1727년 옥사(獄死)하였다.

4. 미디어 매체에서의 등장

2011년 드라마 《후궁견환전》(한국 방영명: 옹정황제의 여인)에서는 배우 장아맹 張雅萌|장아맹중국어이 제비 역을 맡았다. 작중에서는 순진하고 어리숙하지만 아들 홍시를 끔찍이 아끼는 모성애를 보여주는 인물로 그려진다.

2012년 드라마 《궁쇄심옥 2》에서는 배우 이만 李曼|리만중국어이 제비 역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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