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프레스콧 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임스 프레스콧 줄은 1818년 잉글랜드 샐퍼드에서 태어난 영국의 물리학자이다. 그는 존 돌턴에게 개인 교습을 받았으며, 전자기학과 열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줄은 전류의 발열 작용에 대한 줄의 법칙을 발견했고, 열의 일당량을 실험적으로 측정하여 에너지 보존 법칙 확립에 기여했다. 또한 윌리엄 톰슨과 함께 줄-톰슨 효과를 발견했다. 줄의 연구는 당시 과학계에서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윌리엄 톰슨의 지지를 얻으며 점차 인정받았고, 에너지와 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89년 사망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맨체스터 시청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그레이터맨체스터주의 역사 - 존 돌턴
영국의 과학자 존 돌턴은 원자설을 제창하여 근대 화학의 기초를 다지고, 기체 연구, 색각 이상 연구에도 기여했다. - 그레이터맨체스터주의 역사 - 조지프 휘트워스
조지프 휘트워스는 1803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기계 기술자이자 발명가로, 정밀 가공 기술 혁신과 나사 규격 표준화에 기여하고, 공작 기계, 정밀 측정 기기, 휘트워스 소총 등을 개발했으며, 기술 교육을 지원했다. - 열역학자 - 길버트 뉴턴 루이스
길버트 뉴턴 루이스는 열역학, 화학 결합, 산-염기 반응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미국의 물리화학자이다. - 열역학자 - 루돌프 클라우지우스
루돌프 클라우지우스는 열역학 제2법칙을 명확히 하고 엔트로피 개념을 도입한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로, 열역학 기초 확립, 기체 운동론 기여,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참전 등의 업적을 남겼다. - 잉글랜드의 물리학자 - 스티븐 호킹
스티븐 호킹은 루게릭병을 앓으면서도 특이점 정리, 호킹 복사 등의 획기적인 개념을 제시하고 《시간의 역사》와 같은 대중 과학 서적을 통해 과학 대중화에 기여한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우주론자이다. - 잉글랜드의 물리학자 - 로저 펜로즈
로저 펜로즈는 수학, 물리학 분야에서 일반 상대성이론, 우주론, 양자 중력 이론 연구에 기여하고 펜로즈 타일링을 발견했으며, 등각순환우주론을 제안하고 의식의 양자적 해석을 제시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 활동을 펼치며 다수의 상을 수상한 학자이다.
제임스 프레스콧 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제임스 프레스콧 줄 |
로마자 표기 | James Prescott Joule |
출생일 | 1818년 12월 24일 |
출생지 | 영국 솔퍼드 |
사망일 | 1889년 10월 11일 |
사망지 | 영국 세일 |
국적 | 영국 |
학문적 배경 | |
분야 | 물리학 |
영향 | 존 돌턴 존 데이비스 윌리엄 톰슨 제임스 클라크 맥스웰 |
업적 | |
주요 업적 | 칼로릭 이론 반증 줄 팽창 줄 열 고우-줄 효과 줄-톰슨 효과 열역학 제1법칙 자기변형 열의 기계적 당량 줄 |
수상 | |
수상 내역 | 로열 메달 (1852년) 코플리 메달 (1870년) 앨버트 메달 (1880년) |
가족 | |
배우자 | 아멜리아 그림스 (1847년 결혼, 1854년 사망) |
자녀 | 3명 |
기타 | |
![]() |
2. 성장기 (유년 및 청년기)
제임스 프레스콧 줄의 이름을 딴 줄의 법칙은 도체에 전류가 흐를 때, 이상 기체에서의 압력, 부피, 온도에 의존하는 에너지와 전류에 의해 생성된 열에 관한 법칙이다. 줄 효과라고 알려진 줄의 제 1법칙은 도체에 전류가 흐를 때 생성되는 열에 대해 표현한 물리적인 법칙이다. 줄은 이 법칙을 1840년에 발견하였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1]
줄은 전자기에 관한 연구로부터 시작하여, 전류의 발열 작용에 대한 줄의 법칙을 발견했다. 그는 1파운드의 석탄을 태우는 증기기관이 그로브 전지의 아연 1파운드보다 효율이 좋다는 것을 알고, 주어진 자원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연구하면서 에너지 변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1]
'''제임스 프레스콧 줄'''은 1818년 12월 24일 잉글랜드 샐퍼드에서 부유한 양조업자인 벤자민 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형과 함께 존 돌턴에게 개인 교습을 받았다. 줄은 2년 동안 당시 68세였던 돌턴에게서 산술과 기하학을 배웠고, 돌턴이 병에 들자 개인 교습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줄은 돌턴이 사망하기 전까지 가끔 그를 만났으며, 돌턴의 영향으로 화학자 윌리엄 헨리와 공학자 피터 이어트, 이튼 호킹스를 만났다. 돌턴 이후에는 존 데이비스에게 개인 교습을 받았다.
줄은 전자기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양조장을 팔기 전 양조장 매니저로 일했던 그는 양조장의 증기 기관을 새로 발명된 전동기로 교체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조사하고 연구했다. 그는 증기 기관보다 효율이 좋은 전기 모터를 만들고 싶어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838년, 그의 전기에 관한 첫 논문은 존 데이비스의 동료인 윌리엄 스터전이 만든 전기 연보 학술지에 기고되었다. 1840년에는 실험적으로 전류의 발열 작용에 대한 줄의 법칙을 발견하였다.[1] 그는 1파운드의 석탄을 태우는 증기 기관이 그로브 전지에서 사용되는 1파운드의 아연보다 5배의 효율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줄의 관심은 재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주어진 자원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가로 바뀌었으며, 그 과정에서 그는 에너지의 변환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1843년, 줄은 1841년에 실험하여 얻은 결과, 즉 열의 발생이 장치의 다른 부분이 아닌 도체로부터 발생된 열이라는 것을 측정한 열의 효과에 대한 결과를 발표하였다. 이것은 열은 생성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열소설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소개한 열소설은 당시 과학계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라부아지에의 명성에 지배되던 이 주장은 공학계에서 일하던 어린 줄에게 힘든 길을 걷게 한 요소였다.
3. 줄의 법칙
: (Q: 열량[J], I: 전류의 세기[A], R: 도체의 전기저항[Ω], t: 전류가 흐르는 시간[s])
줄의 제 1법칙은 줄-렌츠 법칙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후에 하인리히 렌츠가 독립적으로 발견했기 때문이다. 도체에 전류가 흐를 때의 열 효과는 줄 열이라고도 불린다.[1]
줄의 제 2법칙은 이상기체에서 내부 에너지는 그 기체의 부피와 압력과는 관계가 없고, 온도에만 의존한다는 것이다.[1]
줄이 처음으로 연구한 것은 볼타전지를 이용한 전동기(모터) 실험이었다. 줄은 전동기에 사용하는 전자석의 흡인력이 전류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편, 볼타전지에 필요한 에너지는 전류에 비례하므로, 볼타전지를 사용하여 큰 전류를 흘리면 효율적인 동력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볼타전지로 전류를 발생시키려면 아연 등의 물질이 소모되기 때문에, 동력의 효율은 당시 존재했던 증기기관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이렇게 실패로 끝났지만, 이 실험 이후 줄의 관심은 전류 그 자체로 향하게 되었다. 특히 전기 에너지가 열에너지로 변하는 것에 주목했다.
그래서 줄은 물속에 넣은 도선에 볼타전지를 사용하여 전류를 흘리고, 그때 물의 온도 상승을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 전류에 의해 발생하는 열량 Q는 흘린 전류 I의 제곱과 도체의 저항 R에 비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줄은 1840년, 이 결과를 영국 왕립학회에 발표하고, 더 자세한 논문을 『철학잡지』지에 발표했다.
4. 열의 일당량
1843년 줄은 열이 도체에서 발생한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열은 생성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열소설에 대한 도전이었다. 당시 과학계는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주장한 열소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줄의 주장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1]
줄은 1845년 논문에서 "전자기 기계를 돌리면서 방출된 역학적 힘은 유도 전류가 코일을 따라 흐르면서 '''''열로 전환된다.''''' 또한, 기계의 동력은 배터리 내에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에 의해 생기는 '''''열에 의해서 생겨난다.'''''"라고 말했다.[1]
줄은 추가 연구와 측정을 통해 1파운드의 물을 1화씨온도 올리는 데 필요한 열의 일당량을 838 ft·lbf로 근사했다. 1843년 영국 과학진흥협회 화학분야에서 이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일이 열로 전환되는 과정을 증명하기 위해 구멍 난 실린더를 통해 물에 힘을 가하여 점성가열을 측정했고, 770ftlbf/BTU의 열의 일당량을 얻었다. 줄은 순수하게 전기적, 역학적으로 얻어진 이 값들이 일이 열로 변환되는 현상의 근거라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줄은 기체를 압축시키는 일에 따라 생기는 열을 측정하여 798ftlbf/BTU의 열의 일당량을 얻었다. 이 실험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줄은 이 실험으로 이전 연구들의 결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논문은 ''왕립 학회''에서 거절되었고, ''필로소피컬 매거진''에 출판되었다.
줄은 논문에서 카르노와 에밀 클라페롱의 열량에 대한 추론을 거절하며, "창조주의 소유물들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이 어느 이론에 적용되거나 대입이 될 때 힘이 소멸되는 것을 믿는 것은 필연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1843년, 줄은 추의 힘으로 물속에서 코일을 회전시켜 유도전류를 발생시키고, 이로 인한 물의 온도 상승을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이 실험으로 J=838ft-lb (4.51J)의 열의 일당량을 측정했다.[7]
줄은 그 후에도 열의 일당량 측정을 계속했다. 1844년에는 기체를 팽창, 압축시켜 일당량을 구하고, 일이 열로 바뀔 때와 열이 일로 바뀔 때 그 값이 같음을 보였다. 당시에는 열이 고온에서 저온으로 이동할 때 일이 발생하고 열의 소실은 없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줄은 열 자체가 일로 전환된다고 주장했다.[7]
4. 1. 회전익(외륜) 실험
1845년 줄은 케임브리지에서 열렸던 ''British Association meeting''에서 ''열의 역학적 평형''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발표된 실험은 무게를 가진 물체가 떨어지면서 발생한 일로 절연된 물통 안의 외륜이 돌면서 물의 온도를 증가시키는 실험이었다. 즉, 일이 열로 변환될 수 있음을 보인 것이다.[8] 이 실험으로 819 ft·lbf/Btu (4.41 J/cal)의 열의 일당량을 측정하였다. 이후 1850년에는 더욱 정밀한 실험으로 20세기의 근삿값과 가까운 72.692 ft·lbf/Btu (4.159 J/cal)의 값을 측정하였다.
1845년 줄은 추의 무게로 물속의 회전익을 돌리고, 그 운동에 의한 물의 온도 상승을 측정하는 방법으로 일당량을 측정했다. 이 장치는 당시 다른 누구도 달성할 수 없었던 정확도로, 온도 변화를 화씨 0.005도 단위로 측정할 수 있었다.
이 실험은 처음에는 무시되었고, 두 번째 발표(1847년) 때에는 사회자로부터 간단하게 끝낼 것을 주의받았다. 발표는 간단했지만, 발표가 끝났을 때 참석자 중 한 명인 윌리엄 톰슨이 내용에 흥미를 느꼈다는 발언을 했다.
줄은 톰슨과 친분을 쌓게 되었고[8], 1847년 발표회 직후 아멜리아 그라임스와 결혼하여 스위스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그때 여행 중인 톰슨을 우연히 만났다. 톰슨의 말에 따르면, 그때 줄은 온도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줄은 폭포가 떨어질 때 낙하 에너지가 열로 변하기 때문에 폭포 위와 아래에서는 아래쪽이 온도가 더 높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온도 차이는 매우 작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온도계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톰슨에게 인정받은 것을 기점으로, 처음에는 줄의 이론에 동의하는 사람은 이단자 취급을 받았지만, 점차 조지 스톡스가 톰슨에게 "줄을 믿게 되었다"고 말하는 등 지지가 늘어갔다. 1848년에는 토리노의 왕립과학아카데미 통신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49년에 실시한 회전익 실험은 마이클 패러데이의 소개로 왕립학회에서 발표되었고, 이듬해 줄은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다.[9]
5. 에너지 보존 법칙
줄의 실험은 열이 에너지의 한 형태이며, 다른 형태의 에너지와 서로 변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843년, 줄은 1841년에 정량화했던 열 효과가 도체 내에서 열이 발생한 결과이며 장비의 다른 부분에서 전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1] 이는 열은 생성되거나 파괴될 수 없다는 열소설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1845년 줄은 케임브리지에서 열렸던 영국 과학 협회 회의에서 ''열의 역학적 평형''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무게를 가진 물체가 떨어지면서 발생한 일로 절연된 물통 안의 외륜이 돌면서 물의 온도를 증가시키는 실험을 발표했다. 즉, 일이 열로 변환될 수 있음을 보인 것이다.[1] 그는 이 실험으로 819 ft·lbf/Btu의 열의 일당량을 측정했다. 이후 1850년에는 더욱 정밀한 실험으로 20세기의 근삿값과 가까운 772.692 ft·lbf/Btu의 값을 측정하였다.[1]
이러한 줄의 연구 결과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열소설(칼로릭설)을 반박하고, 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했다. 또한 에너지 보존 법칙, 즉 열역학 제1법칙의 확립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6. 톰슨과의 공동 연구 및 줄-톰슨 효과
1852년, 윌리엄 톰슨(켈빈 경)은 제임스 프레스콧 줄에게 기체를 자유 팽창시키면 온도가 약간 낮아질 것이라고 알렸다. 줄은 이전에 외부에 일을 하지 않는 기체의 팽창에서는 온도 변화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당시 실험은 장치 자체를 물속에 넣고 물의 온도 변화를 측정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온도 변화가 적은 경우에는 변화를 감지할 수 없었다. 따라서 톰슨의 생각을 확인하려면 더욱 정밀한 측정이 필요했다.[1]
이렇게 줄과 톰슨의 공동 연구가 시작되었다. 실험 장치는 3마력의 일을 할 수 있는 큰 것이었고, 처음에는 줄의 양조장을 실험 장소로 사용했지만, 1854년에 양조장을 매각한 후에는 자택에서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 결과, 팽창시키면 확실히 온도가 내려가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결과는 1852년-1854년에 발표되었고, 현재는 줄-톰슨 효과라고 불린다.
줄-톰슨 효과는 압축한 기체를 단열된 좁은 통로를 통해 빠져나가게 하면 빠져나가기 전후의 기체의 엔탈피는 같게 되지만, 실제 기체의 경우는 분자 간 상호작용이 있기 때문에 온도 변화가 생기는 현상이다. 이 효과는 헬륨 등의 기체 냉각이나 액화, 에어컨이나 냉장고 등 냉매의 냉각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소형 줄-톰슨 냉각 장치들이 개발되어 고압 실린더의 기체를 직접 사용하고 유리판에 구멍을 내거나 가는 관을 통해 공기 중으로 기체를 배출시키는 방법으로 80K 정도의 저온을 쉽게 얻고 있다.
논문 발표 후에도 이 실험은 계속되었고, 1861년에 줄이 이사를 했을 때에도 이사 간 곳에서 실험을 진행했지만, 컴프레서 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웃집의 항의로 중단되었다.[2]
이 실험을 진행하던 시기는 줄에게 불행한 일들이 계속되었다. 부유했던 줄 가문도 몰락하기 시작했고, 1854년에는 아내 아멜리아를 잃었으며, 원래부터 적극적이지 않았던 줄은 더욱 은둔하게 되었다.[3] 그리고 1858년에는 아버지를 잃었다. 또한 1858년, 줄은 기차 사고를 당한 이후로 기차 여행을 피하게 되었다. 정신적으로도 피로가 보이기 시작했고, 1860년, 맨체스터의 오언스 칼리지에 물리학 교수직이 생겼을 때, "사실, 너무 많이 두뇌를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약간의 지적인 노동에도 벅차다고 느껴, 가능한 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점차 나아지고 있지만, 무리는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이유로 이 직책에 지원하지 않았다.[4]
1860년대에 들어서도 줄-톰슨 효과를 확인하는 실험에서 발생한 소음과 연기[4]와 관련된 이웃과의 논쟁("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받았다.[2])이나, 열의 일당량에 대한 선취권 논쟁 등에 휘말리는 등, 우여곡절은 계속되었다.
7. 수용과 우선권
줄의 초기 연구는 극도로 정밀한 측정에 의존했기 때문에 당시 과학계에서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줄은 화씨 1/200도(3mK)까지 온도를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당시 실험 물리학에서는 매우 드문 정밀도였다. 이 때문에 그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양조 기술에 대한 그의 경험과 실용적 기술에 대한 접근성을 간과하기도 했다.[3]
그러나 줄은 과학 기구 제작자인 존 벤자민 댄서의 지원을 받았고, 루돌프 클라우지우스의 이론적 연구를 보완했다. 독일의 헤르만 폰 헬름홀츠는 줄의 연구와 율리우스 로베르트 마이어의 1842년 연구가 유사함을 알아챘다. 두 사람의 출판물은 모두 무시되었으나, 1847년 헬름홀츠가 에너지 보존 법칙을 최종적으로 선언하면서 두 사람 모두에게 공을 돌렸다.[3][4]
1847년, 옥스퍼드에서 열린 영국 협회에서 줄의 발표에 조지 가브리엘 스토크스, 마이클 패러데이, 윌리엄 톰슨이 참석했다. 스토크스는 줄을 지지했고, 패러데이는 의심을 품었지만 매우 감명을 받았다. 톰슨은 흥미를 느꼈지만 회의적이었다.[8]
예상치 못하게 톰슨과 줄은 같은 해 샤모니에서 만났다. 줄은 8월 18일에 아멜리아 그라임스와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며칠 후 살랑슈 폭포의 상단과 하단 사이의 온도 차이를 측정하는 실험을 시도했지만 실용적이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톰슨은 줄의 결과가 이론적 설명을 필요로 한다고 느꼈고, 1848년 절대 온도에 대한 설명에서 "열(또는 칼로리)을 기계적 효과로 변환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하고, 확실히 발견되지 않았다"고 썼다.[5] 그러나 각주에서 줄의 "매우 주목할 만한 발견"을 언급하며 칼로릭 이론에 대한 첫 의구심을 나타냈다. 줄은 톰슨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연구가 열을 일로 변환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더 많은 실험을 계획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톰슨은 답장을 보내 자신의 실험을 계획하고 있으며 두 가지 견해를 조정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톰슨은 새로운 실험을 수행하지 않았지만, 그 후 2년 동안 카르노의 이론에 점점 불만을 느끼고 줄의 이론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1851년 논문에서 톰슨은 "열의 동력 이론 전체는 각각 줄과 카르노 및 클라우지우스에게 기인하는 두 가지 명제에 기초한다"고 선언했다.
줄은 논문을 읽자마자 톰슨에게 자신의 의견과 질문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주로 서신으로 이루어진 협력이 시작되었고, 줄은 실험을 수행하고, 톰슨은 결과를 분석하고 추가 실험을 제안했다. 이 협력은 1852년부터 1856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줄-톰슨 효과를 포함한 발견을 하였고, 발표된 결과는 줄의 연구와 기체 운동론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8. 운동론
줄은 존 돌턴의 제자였으며, 원자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기체 분자 운동론에 관한 존 헤라파스의 연구에 주목한 소수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발견과 열의 운동 이론 사이의 관계를 인지했다. 그의 실험실 노트는 그가 열을 병진 운동이 아닌 회전 운동의 형태라고 믿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9. 사후
줄은 세일 자택에서 사망하여 브룩랜즈 묘지에 매장되었다.[5] 그의 묘비에는 "772.55"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그가 열의 일당량을 측정한 1878년의 결정적인 측정값으로, 해수면에서 1파운드의 물의 온도를 약 15.6°C에서 약 16.1°C로 올리는 데 필요한 일의 양을 나타낸다. 또한 요한복음 9장 4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여야 하리라. 낮이 있는 동안에는 나의 일을 하여야 하리니 밤이 오면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가 새겨져 있다.[5]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북쪽 합창단 통로에는 줄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알프레드 길버트가 만든 줄의 동상은 달톤의 동상 맞은편 맨체스터 시청에 있다.
그의 사망 도시인 세일에 있는 위더스푼스 펍은 그의 이름을 따서 "더 J. P. 줄"이라고 명명되었다.
줄의 영예와 칭호는 다음과 같다:
연도 | 내용 |
---|---|
1850 | 왕립학회 회원 |
1852 | 왕립 메달 수상 (1850년 철학적 논문집에 실린 열의 역학적 등가에 관한 그의 논문에 대해) |
1870 | 코플리 메달 수상 (열의 역학적 이론에 대한 그의 실험적 연구에 대해) |
1860 | 맨체스터 문학철학협회 회장 |
1872, 1887 | 영국과학진흥협회 회장 |
1857 | 스코틀랜드 공학자 및 조선업자 협회 명예 회원 |
1857 |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LL.D. |
1860 | 옥스퍼드 대학교 DCL |
1871 | 에든버러 대학교 LL.D. |
1878 | 과학에 대한 공로로 연금 200GBP 받음 |
1880 | 왕립예술협회의 알버트 메달 수상 (가장 힘든 연구 끝에 열, 전기 및 역학적 일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확립하여 엔지니어에게 과학을 산업 활동에 적용하는 데 확실한 지침을 제공했기 때문) |
10. 수상 및 영예
- 왕립학회 회원 (1850)[5]
- 왕립 메달 (1852), '1850년 철학적 논문집에 실린 열의 역학적 등가에 관한 그의 논문에 대해'[5]
- 코플리 메달 (1870), '열의 역학적 이론에 대한 그의 실험적 연구에 대해'[5]
- 맨체스터 문학철학협회 회장 (1860)[5]
- 영국과학진흥협회 회장 (1872, 1887)[5]
- 스코틀랜드 공학자 및 조선업자 협회 명예 회원 (1857)
- 명예 학위:[5]
- * LL.D.,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1857)
- * DCL, 옥스퍼드 대학교 (1860)
- * LL.D., 에든버러 대학교 (1871)
- 과학에 대한 공로로 1878년 연금 200GBP를 받았다.[5]
- 왕립예술협회의 알버트 메달 (1880), '가장 힘든 연구 끝에 열, 전기 및 역학적 일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확립하여 엔지니어에게 과학을 산업 활동에 적용하는 데 확실한 지침을 제공했기 때문'[5]
참조
[1]
웹사이트
This Month Physics History: December 1840: Joule's abstract on converting mechanical power into heat
https://www.aps.org/[...]
[2]
서적
Foundations of the Atomic Theory
https://books.google[...]
William F. Clay
2024-12-13
[3]
서적
Scientific Memoirs, Selected from the Transactions of Foreign Academies of Science, and from Foreign Journals, Natural Philosophy
https://books.google[...]
1853
[4]
백과사전
Hermann von Helmholtz, 4.1 Conservation of energy: 1842–1854
https://plato.stanfo[...]
2008
[5]
성경
[6]
간행물
数学と理科の法則・定理集
アントレックス
[7]
일반
[8]
일반
[9]
웹사이트
Joule; James Prescott (1818 - 1889)
2011-12-11
[10]
일반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