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애머스트 백작 윌리엄 애머스트
1. 개요
윌리엄 애머스트는 영국 서머싯주 출신으로, 제1대 애머스트 남작 제프리 애머스트의 조카이며, 1797년 특별계승권에 따라 작위를 물려받아 제1대 애머스트 백작이 되었다. 1816년 청나라에 파견된 특명 전권 대사로 삼궤구고두 의례를 거부하여 베이징 입국에 실패했다. 1823년부터 1828년까지 인도 총독을 역임했으며,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을 겪었다. 그는 두 번 결혼했으며, 1857년 켄트의 놀 하우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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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칭 | 가장 존경하는 |
|---|---|
| 작위 | 애머스트 백작 |
| 작위 (원어) | The Earl Amherst |
| 서훈 | GCH, PC |
| 출생일 | 1773년 1월 14일 |
| 출생지 | 서머싯 주바스 |
| 사망일 | 1857년 3월 13일 |
| 사망지 | 켄트 주놀 하우스 |
| 국적 | 영국 |
| 모교 | 옥스퍼드 대학교크라이스트 처치 |
| 배우자 | 세라 아처(1800년 결혼, 1838년 사별) 레이디 메리 색빌 (1839년 결혼) |
| 자녀 | 3명 (세라와 윌리엄 포함) |
| 부모 | 윌리엄 암허스트 엘리자베스 패터슨 |
| 직위 | 벵골 총독 |
|---|---|
| 임기 시작 | 1823년 8월 1일 |
| 임기 종료 | 1828년 3월 13일 |
| 군주 | 조지 4세 |
| 총리 | 리버풀 백작 조지 캐닝 고데리치 자작 웰링턴 공작 |
| 이전 총독 | 존 애덤(총독 대리) |
| 다음 총독 | 윌리엄 버터워스 베일리(총독 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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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오크스 출신 -
제1대 애머스트 남작 제프리 애머스트
제프리 애머스트는 영국의 군인이자 귀족으로, 7년 전쟁에서 북미 지역의 영국 영향력 확대에 기여하고 영국령 북아메리카 초대 총독을 지냈으나, 원주민에게 천연두 담요를 배포하라는 지시 의혹으로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
중국 주재 영국 대사 -
맥리호스오브비오크 남작 머레이 맥리호스
맥리호스 오브비오크 남작 머레이 맥리호스는 영국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1971년부터 1982년까지 홍콩 총독을 역임하며 현대 홍콩의 기반을 닦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기여했다. -
중국 주재 영국 대사 -
에드워드 유드
영국의 외교관이자 홍콩 총독이었던 에드워드 유드는 외무부에서 중국 관련 업무를 수행하고 주중 영국 대사를 역임했으며, 홍콩 총독 재임 기간 동안 교육 시스템 확대, 경제 정책 수립, 중영 공동 선언 협상, 그리고 홍콩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 -
인도의 총독 -
라슈트라파티 바반
라슈트라파티 바반은 인도 대통령의 공식 관저로, 뉴델리에 위치한 역사적인 건물이며, 영국령 인도 제국 시절 총독 관저로 건설되어 에드윈 루티엔스가 설계하고 인도-사라센 건축 양식이 반영되었으며, 인도 독립 후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면서 인도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건축 유산으로 자리매김했다. -
인도의 총독 -
워런 헤이스팅스
워런 헤이스팅스는 1732년 영국에서 태어나 영국 동인도 회사에 입사하여 인도 총독을 역임하며 행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횡령 혐의로 탄핵 재판을 받았고, 말년에 파산하여 사망했다.
2. 집안 배경 및 교육
영국 서머싯주 바스에서 윌리엄 애머스트와 토머스 페터슨의 딸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1대 애머스트 남작 제프리 애머스트의 조카로, 1797년 특허증 내 특별계승권에 따라 그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웨스트민스터 스쿨과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에서 교육받았다. 1789년 10월 13일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입학하여 1793년에 문학사 학위를, 1797년에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3. 중국 특명 전권 대사
1816년, 윌리엄 애머스트는 청나라와 대영제국 간의 원활한 무역 관계 수립을 위해 특명 전권 대사 자격으로 청나라 조정에 파견되었다. 천진(天津)의 백하(白河)에 도착한 애머스트는 가경제(嘉慶帝)를 알현하려면 고두(叩頭) 의례를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부장(second commissioner)으로 동행한 조지 토마스 스탠튼(Sir George Thomas Staunton, 2nd Baronet)의 조언에 따라, 1793년 조지 매카트니처럼 이를 거부했다. 이는 영국 군주 또한 애머스트와 동등한 청나라 관료에게 같은 존경을 표해야 한다는 전제였다. 결국 애머스트는 북경(北京) 입성이 거부되어 임무는 실패했다.
귀국길에 오른 애머스트의 알세스트(HMS Alceste, 1806)호는 조선 해안을 거쳐 류큐(琉球)로 가던 중, 인도네시아 가스파르 해협(Gaspar Strait)에서 암초에 부딪혀 파선되었다. 애머스트 일행은 구명정을 타고 바타비아(Batavia)로 대피, 남은 선원들을 구조했다. 1817년,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편으로 세인트 헬레나 섬(St. Helena Island)에 잠시 머물며, 유배 중이던 나폴레옹(Napoleon)과 대화를 나누었다.
4. 인도 총독
애머스트는 1823년 8월부터 1828년 2월까지 인도 총독을 역임했다. 그의 임기 동안 아삼 병합이 이루어졌고, 이는 1824년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을 야기하여 대영 제국이 아라칸과 테나세림에 조계지를 확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애머스트의 임명은 프랜시스 로든-헤이스팅스 총독이 해임된 직후 이루어졌다. 헤이스팅스는 벵골 육군 장교들의 전투 비용 삭감 문제로 런던과 충돌했는데, 이는 네팔 및 마라타 연합왕국과의 전쟁을 통해 피할 수 있었던 조치였다. 그러나 1820년대 초, 평시 전비 삭감에 대한 그의 거절로 인해 애머스트가 부임하게 되었고, 런던의 삭감 요구를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애머스트는 경험이 부족한 행정관이었다. 적어도 캘커타(Calcutta) 임직 초기에는 에드워드 패짓 경과 같은 벵골 상급 군인 장교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부임 전 대리 총독이었던 존 아담으로부터 나프 강을 경계로 하는 영국-미얀마 간 국경 분쟁 문제를 전달받았고, 이는 1823년 9월 24일 폭력 사태로 비화되었다. 미얀마 영토 공격으로 인한 체면 상실을 원치 않은 애머스트는 군대 투입을 명령했다.
전쟁은 2년간 지속되었으며, 1300가 소모되어 인도에 경제 위기를 가중시켰다. 조지 캐닝과 아서 웰즐리와 같은 강력한 권력을 가진 그의 친구들 덕분에 애머스트는 전쟁 말기에도 불명예 소환 조처가 되지 않았다.
전쟁은 미얀마에 대한 애머스트의 위상을 크게 바꾸었으나, 그는 저지대 미얀마 병합을 거절하였다. 그는 완전히 자신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하였고, 1828년에 교체되었다. 1826년, 동인도 아라칸에 '애머스트 백작(Earl Amherst)' 영지, 그리고 켄트 현(County of Kent)에 '홈즈데일 자작(Viscount Holmesdale)' 영지가 신설되었다.
5. 가족 관계
애머스트는 두 번 결혼했으며, 두 아내 모두 플리머스 백작부인 미망인이었다.
첫 번째 아내는 사라 애머스트(1762–1838)로, 제2대 아처 남작 앤드류 아처의 딸이자 제5대 플리머스 백작 아더 윈저의 미망인이었다. 사라는 윌리엄보다 10살 이상 많았고 아이가 있었다. 1800년에 결혼하여 두 아들과 딸 레이디 사라 엘리자베스 피트 애머스트를 두었다. 사라는 1838년에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레이디 애머스트의 뇌조와 버마산 화목류인 애머스티아 속은 그녀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1839년, 애머스트는 첫 아내의 조카딸이자 미망인인 메리, 플리머스 백작 미망인(1792–1864)과 결혼했다. 메리는 제3대 도셋 공작 존 색빌의 큰 딸이자 제6대 플리머스 백작 아더 윈저의 미망인이었다. 이 결혼은 교회법이나 민법상 금지되지 않았다. 두 번째 아내는 두 번의 결혼에서 자녀를 두지 않았다.
1857년, 애머스트는 켄트의 놀 하우스에서 84세로 사망했다. 그의 작위는 둘째 아들이자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인 제2대 애머스트 백작 윌리엄 애머스트에게 승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