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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매카트니 백작 조지 매카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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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 매카트니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제1대 매카트니 백작이다.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학업을 마친 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7년 전쟁 강화 회담에 참여하고, 러시아 주재 공사를 역임했다. 아일랜드 의회 의원, 아일랜드 서기장, 서인도 제도 총독, 마드라스 총독을 거쳐 1792년 청나라에 파견된 특사로 활동했다. 청나라와의 무역 확대를 목표로 했으나, 예법 문제로 건륭제와 갈등을 겪으며 임무에 실패했다. 이후 이탈리아 특사, 케이프 식민지 총독을 역임했으며, 1798년 은퇴 후 1806년에 사망했다. 그는 외교, 식민지 행정, 저술 활동을 통해 당시 사회에 기여했으며, 매카트니 사절단의 실패는 아편 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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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매카트니 백작 조지 매카트니 - [인물]에 관한 문서

2. 생애

조지 매카트니는 스코틀랜드 출신 귀족 가문의 아들로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1763년 7년 전쟁 강화 회의에 참여하여 파리 조약 협상 기록을 맡았고, 1764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공사로 임명되었다.[1] 1768년에는 아일랜드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1776년까지 활동했고, 1769년에는 아일랜드 서기장이 되었다가 1772년 사임과 함께 조지 3세에게 기사 작위를 받아 매카트니 경으로 불렸다.[20]

1775년 영국령 서인도 제도(그레나다) 총독에 임명되었고, 1780년에는 마드라스 도독으로 부임하여 1785년까지 재직했다. 1786년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1792년 매카트니 백작 (아일랜드 귀족) 작위를 받았다.[44]

같은 해 1792년, 영국 정부는 청나라와의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고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매카트니를 특사로 임명했다. 조지 3세건륭제의 82번째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매카트니를 특사, 제1대 준남작 조지 스톤턴을 부사로 하는 사절단을 청나라에 파견했다. 1793년 톈진에 도착하여 건륭제를 알현했으나, 접견 의례 문제와 무역 확대 요구 등으로 인해 결국 임무는 실패로 끝났다.[43]

1794년 영국으로 귀국한 매카트니는 이탈리아 특사와 케이프 식민지 총독을 역임했다.[44] 1795년에는 그레이트 브리튼 귀족으로서 매카트니 남작에 서임되었고,[16] 1798년 은퇴, 1806년 치즈윅에서 69세로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조지 매카트니는 1737년 5월 3일 아일랜드 앤트림주 리서누어(Lissanoure)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1] 매카트니 가문은 에드워드 브루스를 섬긴 공로로 스코틀랜드에서 토지를 받았던 가문으로, 커큐브리셔의 오클렉에서 아일랜드 앤트림주 리사누어로 이주해 정착했다.[2]

매카트니는 1745년 7월 18일 킬데어주 Leixlip|리슬립영어의 기숙 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더블린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진학을 위한 학교였으며, 고전학과 프랑스어를 중심으로 교육했다. 1750년 6월 10일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1754년 또는 1759년에 졸업했다.[3] 1757년 가을 런던으로 이주하여 링컨 법학원 대신 미들 템플에 입학했다.

매카트니는 조부와 숙부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변호사 대신 유럽 대륙 여행(그랜드 투어)을 떠났다. 1760년 이탈리아 (밀라노, 토리노, 루카, 피사, 피렌체, 볼로냐, 로마)를 6개월간 여행하고 제네바에서 겨울을 보냈다. 제네바에서 헨리 폭스 (훗날 초대 홀랜드 남작)의 장남 스티븐 폭스를 만나 이후 홀랜드 남작 가문과 친분을 쌓았다.[4]

1761년 7월 스티븐과 함께 잠시 귀국한 후, 12월 다시 제네바로 가서 장 자크 루소, 볼테르, 장 르 롱 달랑베르, 클로드 아드리앙 엘베시우스 등 철학자들과 교류했다. 1763년에는 파리에서 홀랜드 남작 부부를 만난 후, 프랑스네덜란드를 여행하고, 찰스 제임스 폭스와 함께 독일을 여행했다.[4]

2. 2. 외교관 경력

1764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1][2] 예카테리나 2세와 함께 영국-러시아 동맹 협상에 성공했다.[23] 같은 해 10월 19일, 출발하기 전 매카트니는 기사작위를 받았다.[20][22]

베를린, 단치히를 거쳐[25] 12월 27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후,[26] 주 러시아 공사로서 영국과 러시아의 통상 조약 협상에 착수하려 했지만, 병에 걸려 협상이 연기되었다.[23] 1765년 8월에 전권을 부여받지 못한 채 러시아와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이 러시아에서 최혜국 대우를 유지했지만, 러시아를 경유한 아프샤르 왕조 페르시아와의 통상은 허가받지 못했고, 조약은 본국에서 거부되었다.[23] 재협상을 요구받은 러시아는 분노했지만, 최종적으로 재협상에 응했고, 통상 조약은 1766년에 체결되었으며,[23] 매카트니는 같은 해 6월에 폴란드의 백수리 훈장을 수여받았다.[20]

찰스 제임스 폭스는 매카트니의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에 대한 연설을 칭찬했으며, 에드먼드 버크도 훌륭하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22] 매카트니는 러시아에서의 견문에 대해 ''Account of the Russian Empire''영어를 저술하여, 1767년에 사적으로 출판했다.[23]

1768년 아일랜드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20][21] 1768년 영국 총선에서 코커머스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27]

1769년 아일랜드 수석장관에 임명되어[23] 아일랜드 의회에서 활동했다. 1768년 7월에 아마에서 아일랜드 하원 의원에 선출되었는데, 이는 수석 정무관의 직무상 필요했기 때문이었다.[28] 1769년 3월 30일에 아일랜드 추밀원의 추밀 고문관으로 임명되었다.[20]

2. 3. 식민지 행정관

매카트니는 1776년부터 1779년까지 그레나다 총독을 역임했다.[7] 1775년 11월에 임명되었고[21][24], 12월 12일에 『런던 가제트』에서 발표되었다[31]。 1776년 7월 19일, 아일랜드 귀족인 앤트림 주 리사누아의 '''매카트니 남작'''에 서임되었다[20][32]

그의 통치 기간 동안, 1779년 7월 콩트 데스탱의 프랑스 왕립 함대에 의해 섬이 공격받았다. 매카트니는 전열함 25척, 프리깃 12척, 육군 6,500명이라는 프랑스 대군에 맞서 정규군 보병 101명, 포병 24명, 해원 수 명과 민병 300~400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싸워야 했다.[20] 그는 세인트조지스를 조망하는 언덕에 위치한 호스피탈 힐의 요새를 상실한 후, 무조건 항복하고 프랑스로 포로로 잡혀갔다.[20][24][23] 그러나 곧 포로 교환으로 석방되어 11월에 귀국했다.[20][24][23]

매카트니는 1781년부터 1785년까지 마드라스 (현재의 첸나이) 총독이었다. 그는 영국 동인도 회사 사원이 아닌 최초의 마드라스 총독이었다.[23] 취임과 함께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개전 소식을 인도에 전했으며, 제2차 마이소르 전쟁에서 하이데르 알리가 카르나틱 지방을 침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22] 매카트니는 즉시 네덜란드령 침공을 명령하여, 나가파티남 포위전과 트린코말리 점령에서 승리했다.[22]

총독 재임 기간 동안 토머스 랠리의 포위 공격 이후 세인트 조지 요새의 벽을 개조하고 강화하는 작업이 시작되어 1783년에 완료되었다. 요새 서쪽 부분의 대부분의 건물과 병영, 팰리스 스트리트, 아스널, 하노버 광장, 웨스턴 병영이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요새 동쪽의 거리도 변경되었다.

마드라스에 경찰력의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도 이 시기였다. 포팜스 브로드웨이 개발자인 스티븐 포팜은 매카트니에게 마드라스의 정규 경찰력 창설과 모든 거리에 직·교차 하수구를 건설하는 계획을 제출했다. 이후 코트왈이 지원하는 경찰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코트왈은 경찰청장 산하의 시장 관리자였다.[8]

그는 1784년 제2차 마이소르 전쟁을 종식시킨 망갈로르 조약을 협상했다.[9] 이 조약에서 티푸 술탄은 카르나타카에 대한 모든 청구를 철회했다.[23] 그러나, 매카트니는 인도 총독 워렌 헤이스팅스와 영국 동인도 회사와의 갈등을 겪었고, 결국 1785년 6월에 마드라스 총독직을 사임하고 1786년 영국으로 돌아갔다.[20][22]

2. 4. 청나라 파견 사절단 (매카트니 사절단)

1792년, 영국 정부는 청나라와의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고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매카트니를 특사로 임명했다.[21] 조지 3세의 영국 정부는 특별 사절단을 편성, 건륭제의 82번째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지 매카트니를 특사로, 제1대 준남작 조지 스톤턴을 부사로 명하여 청나라에 파견하였다. 1792년(건륭 57년) 9월 26일, 매카트니 일행은 64문의 대포를 갖춘 HMS 라이언을 타고 스피트헤드에서 출항하였다. 본래 매카트니는 청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가서 쇼군을 만나 일본이 청나라에게 주로 수출하는 상품인 차를 직접 거래할 수 있도록 요청을 하려 하였다.[43]

1793년(건륭 58년) 5월, 아오먼(澳門, 마카오)에 도착하여 이를 알리는 서신을 건륭제에게 보내 알현 허락을 받고, 그해 7월에 북경의 항구인 톈진에 닻을 내렸다.

매카트니의 영국 사절단을 접견하는 건륭제


매카트니 일행은 영국에서 온 최초의 사절이라 환영받았다. 당시 건륭제는 막 완공된 여름 별장인 열하 피서산장에서 지내고 있었다. 천진에서 북경으로 이동하여 여독을 풀고 만리장성을 넘어 1793년(건륭 58년) 음력 8월에야 피서산장에 도착해 건륭제를 알현하였다. 건륭제는 화신에게 사절단을 대접하는데 소홀하지 않도록 명을 내렸으나, 접견 의례 문제로 난항을 빚었다. 화이질서에 기반한 중화세계에서 주변 제국으로부터 온 외교사절은 "황제의 덕"을 연모하는 조공사절로 인식되었고, 매카트니는 조공사절이 황제를 접견할 때 행하는 중국식 의례인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즉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를 취해 줄 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매카트니는 자신은 청나라의 속국의 신하가 아니라며 단호히 거절하였고, 결국 합의 끝에 건륭제 뒤에 영국 국왕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한쪽 무릎만을 굽히고 손에 입맞춤하는 영국식 의례를 취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36]

건륭제는 탄신 만찬에서 매카트니가 가져온 조지 3세의 친서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무역을 늘리고 공사를 상주시키겠다는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친서에 영국에게 주산 근처의 작은 섬을 할양해 영국인들이 사용하게 해달라는 내용도 쓰여있자 건륭제는 이를 거부하고 영국 사절단의 일체의 행동을 금하였다. 건륭제는 그 다음 달인 9월에 영국 사절단의 귀국을 강제 조처하였다.[44]

매카트니는 청나라가 베이징 주재 공사를 인정하지 않아 무역 확장의 시도가 좌절되었다고 결론 내렸다.[23] 그는 일본과의 직접 무역을 추진하고자 했으나, 프랑스 혁명 전쟁 발발 소식과 프랑스 함대의 공격 위험으로 인해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14][15]

2. 5. 말년

1794년 영국으로 귀국한 후 이탈리아 특사와 케이프 식민지 총독을 역임하는 등 외교 분야에서 활약하였다.[44] 1795년에는 그레이트 브리튼 귀족으로서 매카트니 남작에 서임되었다.[16] 1798년 은퇴하고 치즈윅에서 1806년 6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의 대(代)에서 모든 작위가 단절되었다.

1795년 7월 10일, 비밀 임무를 받고 베로나로 망명 중이던 프로방스 백작 루이 스타니슬라스를 방문했다.[20][23] 11월에 휴가를 내어 이탈리아(파도바, 베네치아, 볼로냐, 피렌체, 나폴리, 로마)를 여행했고, 1796년 4월에 이탈리아를 떠나 귀국했다.[21] 귀국 후인 1796년 6월 8일, 그레이트브리튼 귀족인 커크브리에의 오킨레크 및 서리주의 파크허스트의 '''매카트니 남작'''으로 서임되었으며, 9월 27일에 그레이트브리튼 귀족원 의원에 취임했다.[20][39]

1796년, 던다스는 귀국한 매카트니에게 연봉 10000GBP의 케이프 식민지 총독 취임을 제안했고, 건강이 악화되면 귀국해도 좋다는 조건을 붙여 수락하여 1796년 12월 30일에 정식 임명되었다.[23][21][40] 1797년 5월 4일에 케이프타운에 도착했다.[23][21] 케이프 식민지에서는 양보와 개혁의 형태로 보어인(네덜란드계 이주민)과의 융화를 꾀한 외에 고문을 폐지하고 노예 무역을 추진하지 않았다.[23] 또한 케이프 식민지에 있는 자원을 감안하여 그 영유가 인도를 지키는 데 유리하다는 점에 한해서 유용하다고 단정하고, 영국 동인도 회사가 케이프 식민지를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3] 이 무렵 통풍, 신장 결석, 치질을 앓았고 시력도 저하되었기 때문에 1798년 12월에 퇴직했다.[20][22][21]

최만년에는 주로 리사누아에 거주했으며, 가끔 메이페어의 저택에 들르는 정도였다.[21] 1800년대에는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리사누아를 방문한 것은 1804년 여름이 마지막이었다.[21] 1806년 3월 31일, 커즌 스트리트의 저택에서 사망[21], 4월 9일에 치즈윅에 매장되었다.[20]

3. 유산과 평가

매카트니 사절단의 주요 목표는 청나라와의 무역 개설이었으나, 건륭제는 이를 거부했다. 이는 삼궤구고두 거부 문제보다는 중국과 서양 국가 간의 외교 관점 차이 때문으로 보인다.[10] 건륭제는 사절단의 요청을 거부하는 서한을 조지 3세에게 보냈으며,[11] 이러한 실패는 19세기에 중국이 서구 열강의 압력에 직면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매카트니 사절단은 비록 무역 개방에는 실패했지만, 조지 레너드 스톤턴이 작성한 공식 보고서를 통해 중국에 대한 상세한 관찰 기록을 남겼다.[12] 이 보고서는 매카트니 백작과 에라스무스 고어 경의 문서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12] 조지프 뱅크스가 삽화 선정 및 배열을 담당했다.[13] 매카트니는 청나라 파견 당시의 일기를 남겼으며, 이는 1962년에 출판되었다.[41]

매카트니는 청나라 사절단 시절 일본 방문도 계획했으나, 프랑스와의 전쟁 발발 소식으로 인해 포기했다.[14] 그는 일기에 일본 방문이 "우리 산업의 활용과 우리 제조업의 구매를 위한 새로운 광산의 개방 가능성"을 가져다줄 "가장 좋아하는 모험"이었다고 기록했다.[15]

매카트니는 온화한 성품의 "호감이 가는 인물"로 평가받았으며,[22] 서적 수집가이자 리터러리 클럽 회원이었다.[21] 왕립 학회 회원과 런던 고고학 협회 회원으로도 선출되었다.[42][20] 그는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빚을 모두 갚고 상당한 수입을 올렸으며,[21] "운과 능력만 있으면 18세기 대영 제국에서 출세할 수 있다"는 사례로 평가받는다.[21]

4. 서훈

참조

[1] 간행물 1764-12-11
[2] 간행물 1765-01-29
[3] 간행물 1772-06-06
[4] 간행물 1772-06-30
[5] 간행물 1775-12-12
[6] 간행물 1776-06-29
[7] 간행물 1776-12-12
[8] 웹사이트 Reforms of George MaCartney http://www.chennaico[...] 2010-01-19
[9] 문서 Turnbull p. 180.
[10] Youtube "#36 – David C. Kang on international relations in historic East Asia"
[11] 웹사이트 Ch'ien Lung, (Qianlong) Letter to George III http://www.history.u[...]
[12] 서적 Champion of the Quarterdeck: Admiral Sir Erasmus Gower (1742–1814) Sage Old Books 2017
[13] 문서 Papers of Sir Joseph Banks; Section 12: Lord Macartney's embassy to China http://www2.sl.nsw.g[...] 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14] 논문 "'A regular and reciprocal System of Commerce' — Botany Bay, Nootka Sound, and the isles of Japan" http://www.cnrs-scrn[...] 1997
[15] 논문 "Russian and British Interests in the Far East, 1791–1793" 1968
[16] 간행물 1796-05-31
[17] 뉴스 At the Court at St. James's, Dec 28. 1796 https://www.thegazet[...] 2021-08-21
[18] 문서 Correspondence of George Macartney, 1st Earl Macartney, whilst Governor of the Cape of Good Hope Bodleian Library 1797-01-21
[19] 서적 The general armory of England, Scotland, Ireland, and Wales; comprising a registry of armorial bearings from the earliest to the present time https://archive.org/[...] Harrison & sons 1884
[20] 서적 The Complete Peerage, or a history of the House of Lords and all its members from the earliest times (Lindley to Moate) https://www.familyse[...] The St. Catherine Press 1932
[21] 백과사전 Macartney, George https://www.dib.ie/b[...]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10
[22] 문서 Macartney, George
[23] 문서 Macartney, George, Earl Macartney 2009-05-21
[24] 웹사이트 MACARTNEY, Sir George (1737-1806), of Lissanoure Castle, co. Antrim. https://www.historyo[...] 202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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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간행물 1765-01-29
[27] 웹사이트 Cockermouth https://www.historyo[...] 202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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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웹사이트 Origin and Growth https://chennaicorpo[...] 2024-03-02
[35] 백과사전 マカートニー 2024-03-02
[36] 간행물 2024-03-02
[37] 백과사전 George Macartney, Earl Macartney, Viscount Macartney of Dervock, baron of Lissanoure, Baron Macartney of Parkhurst and of Auchinleck, Lord Macartney https://www.britanni[...] 2024-03-02
[38] 간행물 2024-03-02
[39] 간행물 London Gazette 1796-05-31
[40] 간행물 London Gazette 1797-01-03
[41] 서적 An embassy to China: being the journal kept by Lord Macartney during his embassy to the Emperor Ch'ien-lung, 1793-1794 Longmans 1962
[42] 간행물 Macartney; George (1737 - 1806); Earl Macartney and Viscount Macartney FRS 2024-03-02
[43] 서적
[44] 웹인용 http://books.google.[...] 2012-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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