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애머스트 남작 제프리 애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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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대 애머스트 남작 제프리 애머스트는 1717년 켄트주에서 태어나, 군 경력을 시작하여 7년 전쟁과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루이스버그 포위전을 지휘하고 몬트리올을 점령하여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지배를 종식시켰으며, 1760년부터 1763년까지 캐나다 군정 장관을 역임했다. 폰티액 전쟁 당시 천연두를 이용한 생물 무기 사용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었으며, 버지니아 식민지 총독, 북아메리카 초대 총독을 거쳐 1776년 남작 작위를 받았다. 미국 독립 전쟁 중에는 종군을 거부하고, 영국 육군 최고 지휘관, 원수를 역임했으나, 고든 폭동 진압 실패로 사임했다. 은퇴 후, 1797년 사망했으며, 그의 이름은 미국과 캐나다의 여러 지명에 사용되었으나, 생물 무기 사용 제안으로 인해 유산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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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애머스트 남작 제프리 애머스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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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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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남작 |
존칭 | 각하, 육군 원수 |
출생일 | 1717년 1월 29일 |
출생지 | 잉글랜드 켄트 세브노크스 |
사망일 | 1797년 8월 3일 |
사망지 | 잉글랜드 켄트 세브노크스 |
안장 장소 | 세브노크스 교구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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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경력 | |
소속 국가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군대 | 영국 육군 |
복무 기간 | 1735년–1795년 |
계급 | 육군 원수 |
부대 | 제15 보병 연대 제62 (로열 아메리칸) 연대 제3 보병 연대 제2 기마 척탄병 근위대 여왕 기마 근위대 제2 부대 제2 생명 근위 연대 |
지휘 | 북아메리카 총사령관 병기 담당 중장 군 총사령관 |
참전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폰티액의 반란 미국 독립 전쟁 프랑스 혁명 전쟁 |
수상 | 바스 훈장 |
정치 경력 | |
직책 | 버지니아 식민지 총독 퀘벡 주 총독 |
버지니아 식민지 총독 임기 시작 | 1759년 |
버지니아 식민지 총독 임기 종료 | 1768년 |
퀘벡 주 총독 임기 시작 | 1760년 |
퀘벡 주 총독 임기 종료 | 1763년 |
군주 | 조지 2세 조지 3세 |
버지니아 식민지 총독 전임 | 라우던 백작 |
버지니아 식민지 총독 후임 | 보테토트 남작 |
퀘벡 주 총독 전임 | 프랑스의 누벨프랑스 총독 직책 대체 (신설) |
퀘벡 주 총독 후임 | 제임스 머레이 |
2. 생애
제프리 애머스트는 영국 켄트주 세븐오크스 출신으로, 어린 시절 도싯 공작의 시동을 거쳐 14세에 군에 입대하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데팅겐 전투, 폰트노이 전투, 라우펠트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의 명성은 7년 전쟁, 특히 북아메리카 전선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크게 높아졌다. 1758년 루이스버그 공방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로 북아메리카 영국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이후 타이컨더로가 요새, 퀘벡 점령 지원, 1760년 몬트리올 함락 등을 통해 캐나다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항복하는 프랑스군에게 전쟁의 명예를 인정하지 않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는 1760년부터 1763년까지 캐나다의 군정 장관을 지냈다.
전쟁 이후 1763년 폰티액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애머스트는 원주민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천연두를 생물 무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는 서신을 부하와 주고받아 큰 논란을 일으켰다. 비록 실제 포트 피트에서의 천연두균 전파 시도는 그가 직접 지시하기 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그의 이러한 제안 자체는 역사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후 애머스트는 버지니아 식민지의 명목상 총독과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초대 총독을 역임했으며, 1776년에는 남작 작위를 받았다. 미국 독립 전쟁 시기에는 과거 북미에서의 인연을 이유로 직접적인 참전을 거부했으나, 1778년 영국군 총사령관 및 육군 원수에 임명되어 전쟁 전략 수립과 영국 본토 방어에 관여했다. 1780년에는 런던에서 발생한 고든 폭동 진압을 지휘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프랑스 혁명 전쟁 발발 후 최고 사령관으로 다시 임명되었으나, 군대의 상태를 방치했다는 비판 속에 물러났다. 그는 1797년 몬트리올 파크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영국 켄트주 세븐오크스에서 변호사 제프리 애머스트(1750년 사망)와 엘리자베스 애머스트(결혼 전 성씨: 케릴)의 아들로 1717년 1월 29일 태어났다.[4] 어린 시절에는 도싯 공작의 시동으로 일했으며,[4] 14세에 군에 입대하여 1735년 근위 보병 연대의 소위가 되었다.[5]애머스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존 리고니어 장군의 보좌관으로 복무하며 1743년 6월 데팅겐 전투와 1745년 5월 폰트노이 전투에 참여했다.[6] 1745년 12월 25일 중령으로 진급하였고,[7] 1746년 10월 로쿠 전투에서도 활약했다.[7] 이후 영국군 사령관 컴벌랜드 공작의 보좌관이 되어 1747년 7월 라우펠트 전투에 참전했다.[7]
애머스트는 7년 전쟁, 특히 북아메리카 전선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1758년, 애머스트는 영국군의 루이스버그 포위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북아메리카 영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캐나다에 있던 프랑스령의 대부분을 점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59년, 그는 샹플랭 호수를 통해 침공군을 이끌며 제임스 울프 장군의 퀘벡 시 점령 작전을 지원했다. 1760년 9월 8일, 애머스트는 몬트리올을 점령함으로써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프랑스의 지배를 사실상 종식시켰다. 당시 애머스트는 프랑스군 지휘관 레비 백작이 요구한 '명예 항복'(항복 시 군기를 유지할 수 있는 의례상의 권리)을 거부했고, 이에 격분한 레비 백작은 항복 대신 군기를 불태우는 길을 택했다. 애머스트는 1760년부터 1763년까지 캐나다의 군정 장관을 역임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 이후 영국과 원주민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북아메리카 역사상 최초로 생물 무기 사용 계획이 문서화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763년 폰티액 전쟁이 발발하자, 애머스트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천연두를 무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부하인 헨리 부켓 대령과 주고받은 서신에서 천연두에 오염된 담요를 원주민들에게 전달하여 병을 퍼뜨리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애머스트나 부켓이 모르는 사이에 피트 요새의 지휘관은 이미 유사한 전술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전쟁의 총지휘관이었던 애머스트는 부켓과의 서신 교환으로 인해 이 논란과 연관되었으나, 그가 사전에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인지하고 지시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주장도 있다. 이 천연두 공격 시도가 실제로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폰티액 전쟁 참조)
2. 2. 7년 전쟁 (프렌치 인디언 전쟁)
애머스트는 7년 전쟁, 특히 북아메리카에서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으로 알려진 전쟁에서 명성을 얻었다.1756년 2월, 애머스트는 하노버를 방어하기 위해 헤센에 집결한 부대에 보급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관측군(Army of Observation)의 일환이었다. 프랑스의 영국 본토 침공이 임박한 것으로 보이자, 4월에 애머스트는 수천 명의 독일군을 영국 남부로 수송하여 방어력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8] 그는 1756년 6월 12일 제15 보병 연대의 대령이 되었다.[9] 1757년, 영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사라지자 병력은 컴벌랜드 공작 휘하의 증강된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하노버로 다시 이동했으며, 애머스트는 1757년 7월 하스텐베크 전투에서 컴벌랜드의 지휘 아래 헤센 병사들과 함께 싸웠다.[7] 이 전투에서 연합군이 패배하면서 군대는 북해 해안 근처의 슈타데로 꾸준히 북쪽으로 후퇴해야 했다.[10] 애머스트는 이 후퇴와 클로스터제벤 협약으로 인해 낙담했다. 이 협약은 하노버가 전쟁에서 철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지휘 하의 헤센 군대를 해산할 준비를 했으나, 협약이 파기되고 연합군이 재편성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11]
애머스트는 특히 북아메리카 전역에서 큰 공을 세웠다. 1758년 6월, 그는 케이프 브레턴 섬에서 벌어진 루이스부르 공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7] 이 승리 이후, 그는 1758년 9월 북아메리카 주둔 영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제60(왕립 미국) 연대의 대령 사령관직도 맡게 되었다.[7]
1759년, 애머스트는 샹플랭 호수 방면으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7월에 타이컨더로가 요새를 점령했다. 같은 시기, 윌리엄 존슨이 이끄는 또 다른 부대는 7월에 나이아가라 요새를 점령했으며, 제임스 울프 장군이 지휘하는 세 번째 군대는 9월 에이브러햄 평원 전투에서 승리하며 퀘벡을 점령했다.[7] 애머스트는 1759년 9월 12일부터 명목상 버지니아 왕립 총독으로도 재직했다.[12]
1760년 7월부터 애머스트는 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오스웨고 요새에서 출발하여 군대를 이끌었다. 그는 퀘벡에서 진군한 머레이 준장과 일오누아에서 온 헤이빌랜드 준장의 부대와 합류하여 몬트리올을 삼면에서 포위하는 작전을 펼쳤다.[14] 마침내 9월 8일, 몬트리올이 함락되면서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프랑스의 통치는 사실상 종식되었다.[7] 애머스트는 항복하는 프랑스군에게 전쟁의 명예(항복 시 군기를 유지할 수 있는 의례상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에 프랑스군 사령관 레비 기사는 격분하여 군기를 영국군에게 넘기는 대신 불태워 버렸다. 이는 당시 프랑스 내에서 보드뢰유와의 정치적 경쟁 관계에 있던 레비 기사가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행동이기도 했다.[14]
이 승리는 영국 식민지 주민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보스턴의 신문들은 퍼레이드, 페뉴엘 홀에서의 성대한 만찬, 음악 공연, 봉화, 축포 발사 등으로 승리를 기념했다고 보도했다. 보스턴 제일 교회의 토마스 폭스크로프트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14]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위대한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가 기뻐하나이다... 오랫동안 일반적인 의견은, ''델렌다 에스트 카르타고''(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한다), 즉 캐나다를 정복해야만 이 지역에서 지속적인 평화를 바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선한 손길로 인해, 우리는 그것이 이루어진 행복한 날을 봅니다. 우리는 폐하의 승리한 군대가 적의 높은 곳을 밟고, 그들의 마지막 요새가 넘겨졌으며, 온 나라가 용감하고, 침착하며, 성공적인 애머스트 장군에게 영국의 왕에게 항복하는 것을 봅니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애머스트는 1760년 9월 영국령 북아메리카 총독으로 임명되었고[7] 1760년 11월 29일 소장으로 진급했다.[15] 그는 1761년 4월 11일 바스 훈장 기사로 서임되었다.[16] 뉴욕을 거점으로 삼은 애머스트는 몽크턴과 헤이빌랜드 휘하의 병력을 서인도 제도 원정에 파견하여 영국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 이 원정을 통해 영국은 1761년 도미니카를, 1762년에는 마르티니크와 쿠바를 점령했다.[3] 애머스트는 1760년부터 1763년까지 캐나다의 군정 장관을 역임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끝난 후 영국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1763년 폰티액 전쟁이 발발했다. 이 과정에서 애머스트는 북아메리카 역사상 최초로 생물 무기 사용을 고려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그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천연두를 무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애머스트와 그의 부하 헨리 부켓 대령이 주고받은 서신에는 천연두 환자가 사용했던 담요를 선물로 위장하여 원주민들에게 전달함으로써 병을 퍼뜨릴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담겨 있었다. 실제로 애머스트나 부켓도 모르는 사이에 피트 요새의 지휘관은 이미 이 전술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애머스트는 전쟁의 총지휘를 맡고 있었고, 부켓과 주고받은 서신 때문에 그의 이름이 이 사건과 연결되지만, 애머스트가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시도가 이루어졌음을 증거가 뒷받침한다. 이 천연두 공격 시도가 실제로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2. 3. 폰티액 전쟁과 천연두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끝난 후 영국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의 적대감은 깊어졌고, 이는 북아메리카 역사상 최초로 생물 무기 사용 계획이 문서화되는 배경이 되었다. 1763년 초, 오하이오 계곡과 오대호 지역의 여러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은 영국이 앨리게니 산맥 동쪽에 머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영토 점령을 계속하자 이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지도자 중 한 명인 폰티액의 이름을 따 폰티액 전쟁이라 불리며, 델라웨어족, 쇼니족, 세네카족, 밍고족, 모히칸족, 마이애미족, 오타와족, 와이앤도트족 등이 연합하여 영국군을 몰아내려 했다.[18][19]폰티액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북미 영국군 총사령관이었던 애머스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천연두를 무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1763년 7월, 애머스트는 부하 헨리 부케 대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연두에 감염된 담요를 이용해 원주민들을 감염시킬 가능성을 논의했다. 애머스트는 포트 피트 주둔지에서 천연두가 발발했다는 소식과 인근 요새 함락 소식을 접한 후 부케 대령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30]
> 반대 부족에게 천연두를 퍼뜨릴 방법을 마련할 수 없을까요? 우리는 이 기회에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모든 책략을 사용해야 합니다.
며칠 후 부케 대령은 애머스트에게 보낸 답장의 추신에서 이 제안에 동의하며 다음과 같이 답했다.
> 추신. 인디언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 담요를 사용하여 그들에게 백신을 접종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하지만 저 스스로는 병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상대로 반대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므로, 스페인인의 방법을 사용하여 잉글리시 개로 그들을 사냥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레인저와 기병이 지원한다면, 나는 그 해충을 근절하거나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애머스트는 다시 추신으로 답했다.
> 추신. 이 끔찍한 종족을 근절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다른 모든 방법뿐만 아니라 담요를 사용하여 인디언에게 백신을 접종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개를 사용하여 그들을 사냥하는 당신의 계획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면 매우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은 현재 그것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애머스트와 부케가 이 논의를 하기 전에, 포트 피트에서는 이미 유사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763년 6월 24일, 요새를 포위하고 있던 델라웨어족 대표들과의 회담에서, 요새 지휘관 시메온 에키예 대위는 민병대 사령관 윌리엄 트렌트의 계획에 따라 천연두 병원에서 가져온 담요 두 개와 손수건 하나를 선물했다.[20][21][22][23] 트렌트는 영국 당국에 제출한 송장에 이 물품들의 목적이 "천연두를 인디언에게 전파하기 위한 것"이라고 명시했으며, 이는 당시 북미 사령관 대행이었던 토머스 게이지의 승인을 받았다.[20][21] 트렌트는 자신의 일지에도 "바라건대,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록했다.[30][24]
이러한 생물학전 시도가 실제로 성공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1763년부터 1764년까지 오하이오 지역에서 천연두가 발생하여 최대 100명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지만, 이것이 포트 피트 사건의 직접적인 결과인지, 아니면 당시 주기적으로 유행하던 천연두 바이러스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25] 또한, 담요를 받은 델라웨어족 대표들이 이후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는 기록도 존재한다.[26][27][28]
애머스트는 전쟁의 총지휘관이었고 부케와의 서신 교환은 그가 천연두를 이용한 생물학전을 고려했음을 보여준다. 비록 포트 피트에서의 실제 실행은 그가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지만[20][21][22], 생물 무기 사용을 논의하고 제안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이후 애머스트는 북미의 군사 계획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 런던으로 소환되었고, 토머스 게이지가 임시로 북미 사령관직을 맡게 되었다. 런던에서 애머스트는 폰티액 전쟁 당시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해명해야 했으며, 윌리엄 존슨과 조지 크로건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해임 요구에 직면하기도 했다.[31][32]
2. 4. 정치 경력
애머스트는 1759년부터 1768년까지 버지니아 식민지의 명목상 총독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랜시스 포키에가 총독 대행을 계속했다. 1760년부터 1763년까지는 영국의 북아메리카령 초대 총독이 되었다. 이 직무는 현대에도 캐나다 총독이라는 형태로 계승되고 있다.1776년에 귀족으로 서임되어 홈즈데일의 애머스트 남작이 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 동안, 적대 관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종군을 계속 거부했다. 1778년에 영국 육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육군 원수로 승진했다.
2. 5. 미국 독립 전쟁
1776년 5월 14일, 애머스트는 귀족 작위를 받아 켄트 주 홀스데일의 애머스트 남작이 되었다.[38]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적측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친분 관계가 있다는 이유로 종군을 거부했다.1778년 3월 24일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고,[39] 4월에는 내각의 일원이 되는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34] 같은 해 영국 육군 최고 사령관이자 육군 원수가 되었다. 그 해, 북미 주둔 영국 사령관 윌리엄 하우가 사임을 요청하자 영국 정부는 애머스트를 후임으로 고려했다. 그러나 애머스트는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75,000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이는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헨리 클린턴이 하우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40]
사라토가 전투에서 영국군이 패배한 후, 애머스트는 북미에서의 전쟁을 제한적으로 수행할 것을 성공적으로 주장했다. 그의 전략은 해안 거점을 유지하고, 캐나다, 동 플로리다, 서 플로리다, 서인도 제도를 방어하는 동시에 해상전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었다.[41] 1778년 11월 7일, 영국 국왕 조지 3세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샬롯 왕비가 그의 집인 켄트의 몬트리올 공원을 방문했다.[42] 1779년 4월 24일에는 제2 기병척탄병 부대의 대령이 되었다.[43]
한편, 프랑스는 영국 본토 침공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는 성공할 경우 전쟁을 빠르게 끝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1779년 스페인이 프랑스 편으로 참전하면서 영국 본토 병력이 고갈되자 침공 계획은 더욱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 애머스트는 이러한 위협에 맞서 영국의 육상 방어를 조직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실제 침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3]
2. 6. 고든 폭동 진압
1780년 6월, 애머스트는 영국군을 지휘하여 런던에서 발생한 반가톨릭 성향의 고든 폭동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폭동 초기, 애머스트는 런던에 주둔 중이던 소규모 기병대와 보병 근위대를 동원했으나, 민간 치안 판사들이 폭도에 대한 군대의 적극적인 개입 승인을 주저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44]이후 주변 지역에서 정규군과 민병대가 동원되어 애머스트가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은 15,0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증원된 병력 상당수는 하이드 파크에 임시로 주둔했다.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폭동 진압법이 낭독된 후에는 군대가 군중을 향해 발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결국 질서는 회복되었지만, 애머스트는 당국이 폭동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했다고 판단하며 개인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45]
고든 폭동 진압 이후, 애머스트는 1782년 2월에 사령관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고, 후임으로는 헨리 콘웨이가 임명되었다.[34] 같은 해 3월 23일, 그는 제2 기병 근위대의 대장 겸 대령으로 임명되었다.[46]
2. 7. 은퇴 이후
1788년 7월 8일, 그는 제2 근위 기병 연대의 대령이 되었다.[47] 같은 해 8월 30일에는 애머스트 남작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작위에는 '켄트주 몬트리올'이라는 지역 명칭이 붙었다. 애머스트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특별 조항을 통해 조카가 이 작위를 상속받을 수 있도록 했다.[48]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자 애머스트는 1793년 1월 군대 최고 사령관으로 다시 소환되었다. 그러나 그는 군대의 급격한 쇠퇴를 방치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이는 저지대 국가에서의 초기 작전 실패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여겨졌다. 당시 총리였던 피트 (소)는 그에 대해 "그의 나이와 아마도 그의 타고난 성격은 현재의 시점에서 요구되는 활동성과 에너지와는 거의 어울리지 않는다"고 평가했다.[49] 작가 호레이스 월폴은 더욱 강하게 비판하며 그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고 무능한 나무토막"이라고 불렀다.[50] 월폴은 또한 "그는 군대 내에서 수많은 부정을 키우도록 내버려두었다… 거의 노망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난받아 마땅할 정도로 완강하게 지휘권을 유지했다"고 덧붙였다.[51]
3. 유산 및 평가
애머스트를 기리기 위해 여러 장소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지역 | 장소명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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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타리오주 | 애머스트 섬[56] | |
온타리오주 | 애머스트버그[57] | 제너럴 애머스트 고등학교 위치 |
매사추세츠주 | 애머스트[58] | 매사추세츠 대학교 애머스트, 햄프셔 칼리지, 애머스트 칼리지 위치 |
뉴햄프셔주 | 애머스트[59] | |
노바스코샤주 | 애머스트[60] | |
뉴욕주 | 애머스트[61] | |
버지니아주 | 애머스트 군[62] |
그러나 애머스트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천연두가 묻은 담요를 배포하는 계획을 지지하는 등[63] 원주민 말살 정책을 추진하려 했던 행적은 현재 그의 유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이어지고 있다. 여러 기관, 지방 자치 단체, 교육 기관에서 "애머스트"라는 이름의 사용을 재고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2007년 캐나다 역사 잡지 ''비버''는 애머스트를 캐나다 역사상 혐오스러운 인물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63]
2008년, 미크마크 족 영적 지도자 존 조 사크는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의 포트 애머스트 국립 사적지의 이름을 "캐나다의 끔찍한 오점"이라고 비판하며, "예루살렘에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을 딴 도시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프리 애머스트 장군의 이름을 딴 장소가 있다는 것은 역겹다"고 말했다. 사크는 2016년 캐나다 정부에 다시 서한을 보내 우려를 표명했다.[64] 애머스트가 백인 우월주의 신념을 가졌다고 지적한 미크마크 족 역사학자 다니엘 N. 폴 역시 이름 변경을 지지하며 "미래에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묘사될 수 있는 행위를 저지른 사람의 이름을 따서 어떤 것도 명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65] 2016년 2월, 캐나다 공원 관리청은 공식 민원이 접수되면 캐나다 역사 유적 및 기념물 위원회와 협력하여 이름 변경 문제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66] 이에 사크는 공식 요청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온라인 청원을 시작했다.[67] 결국 2018년 2월 16일, 이 유적지는 프랑스어 및 영어 명칭과 함께 미크마크 족 단어가 추가된 스크마크–포트라조이–포트 애머스트로 공식 변경되었다.[68]
이러한 움직임은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2009년 몬트리올 시의원 니콜라스 몽모렌시는 "원주민 몰살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 사람을 이런 식으로 기리는 것은 전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며 애머스트 거리의 개명을 공식 요청했다.[69] 몬트리올 시는 2017년 9월 거리 개명을 결정했고,[70] 2019년 6월 21일, 카니에케하어로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Atateken|아타테켄moh 거리'''로 공식 개명했다.[71] 퀘벡주 가티노의 애머스트 거리 역시 2023년 백자작나무를 뜻하는 아니시나아베모윈어 단어인 '''Wiigwaas|위그와스oji 거리'''로 변경되었다.[72]
교육 기관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애머스트 칼리지는 2016년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비공식 마스코트였던 "로드 제프리"를 폐지했으며,[73] 2019년 초에는 칼리지 소유의 호텔 이름 '로드 제프리 인'을 '볼트우드 인'으로 변경했다.[74]
한편, 1760년 몬트리올 점령 후 애머스트는 고향인 세븐오크스에 몬트리올 하우스를 짓고 본거지로 삼았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이 집에서는 애머스트 가문이 설립한 리버헤드 마을 초등학교 졸업생들을 위한 여름 피크닉이 매년 열렸다. 이 초등학교는 현재도 애머스트 가문의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면서 집은 20세기 후반에 철거되었고, 부지는 주택 개발에 사용되었다. 현재는 오벨리스크 하나와 팔각형 수위소만이 기념물로 남아 있다. 오벨리스크의 비문은 희미해져 가고 있으며, 캐나다에서의 그의 역할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벨리스크 비문에는 1761년 1월 25일, 6년간의 영광스러운 전쟁에 참전했던 삼 형제가 고향 땅에서 만난 것을 기념하며, 애머스트의 지휘 아래 거둔 군사적 성공들이 나열되어 있다.
날짜 | 사건 |
---|---|
1758년 7월 26일 | 루이스버그 요새 항복 (프랑스 6개 대대 포함) |
1758년 11월 24일 | 듀케인 요새 함락 |
1759년 7월 25일 | 나이아가라 요새 항복 |
1759년 7월 26일 | 타이컨데로가 요새 함락 |
1759년 8월 4일 | 크라운 포인트 함락 |
1759년 9월 18일 | 퀘벡 점령 |
1760년 8월 25일 | 레비 요새 항복 |
1760년 8월 28일 | 일 오 노와 포기 |
1760년 9월 8일 | 몬트리올 항복 (캐나다와 프랑스 10개 대대 무장 해제) |
1762년 9월 18일 | 뉴펀들랜드의 세인트 존스 재탈환 |
4. 기타
- 애머스트, 제프리 (1931). [https://archive.org/details/journalofjeffery00amhe ''제프리 애머스트의 일지, 1758년부터 1763년까지 아메리카에서 애머스트 장군의 군 경력 기록''] (편집: 존 클래런스 웹스터). 토론토: 라이어슨 프레스; 시카고: 시카고 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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