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 기간의 포르투갈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포르투갈은 처음에는 중립을 유지했으나, 1916년 독일의 선전포고로 참전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독일과 소규모 교전을 벌였으며, 1916년에는 영국 요청에 따라 독일 선박을 나포했다. 1916년 독일이 포르투갈에 전쟁을 선포한 후 포르투갈은 프랑스 전선에 병력을 파견했으며, 1917년과 1918년에는 유럽 전선에서 전투를 치렀다. 1918년 릴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키옹가 삼각지를 획득했다. 전쟁으로 인해 포르투갈은 상당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겪었으며,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시기를 겪었다.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날짜 | 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 |
|---|---|
| 장소 | 유럽, 아프리카 식민지, 대서양 |
| 결과 | 연합국 승리 |
| 연합국 |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
|---|---|
| 추축국 | 독일 |
| 연합국 | 마누엘 데 아리아가 테오필루 브라가 베르나르디누 마샤두 시드니우 파이스 주앙 두 칸투 이 카스트루 안토니우 주제 드 알메이다 알프레두 사 카르발류 조제 노르통 데 마투스 |
|---|---|
| 추축국 | 빌헬름 2세 (독일) |
| 포르투갈 | 100,000+ |
|---|
| 포르투갈 | 전투 사망: 7,222명 기타 사망: 5,000+명 총 사망: 12,318명+ |
|---|
| 배경 | 1890년 영국 최후 통첩 포르투갈 제1공화국 수립 (1910년) 독일의 식민지 야망 |
|---|---|
| 포르투갈의 참전 | 연합국과의 조약 의무 아프리카 식민지 방어 |
| 주요 사건 | 1916년 독일 선박 압류 라스투에스 해전 아프리카 전역 (제1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7년 포르투갈의 전투 |
| 영향 |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 어려움 시드니우 파이스의 쿠데타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포르투갈 |
| 관련 전투 | 라스투에스 해전 리카만 전투 샹파뉴 전투 (1917) 리스 강 전투 |
|---|
-
제1차 세계 대전 중 포르투갈 -
서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역으로, 독일군과 연합군이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에서 참호전을 벌이며 격돌했고, 독가스, 전차 등 신무기가 사용되었으며, 독일의 항복으로 종결되어 전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중립 (국제 관계) -
스웨덴의 중립
스웨덴의 중립은 19세기 초부터 확립되어 제1, 2차 세계 대전과 냉전 시대에도 유지되었던 무력 분쟁 불개입 외교 정책이었으나, 2024년 NATO 가입으로 안보 협력 강화로 전환되었다. -
중립 (국제 관계) -
중립국
중립국은 전쟁 시 교전국에 공평한 관계를 유지하며 어느 편에도 지원하지 않는 국제법적 지위이며, 약소국의 생존 전략으로 시작되어 평화 조성에 기여하고,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이 대표적인 영세 중립국이다.
2. 1914년 이전
3. 1914년
1914년 7월, 독일 제국과 대영 제국은 포르투갈령 앙골라 분할에 대한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이 협상에서 대부분의 영토는 독일의 지배하에 놓일 예정이었다. 1912년에는 독일의 앙골라 지배를 목표로 하는 "앙골라 동맹"(Angola-Bund)이 결성되었다.
8월부터 9월 사이, 아프리카에서는 독일군과 포르투갈 식민지군 사이에 소규모 교전이 발생했고, 독일군은 부족 반란을 조장했다. 8월 24일, 마지우아 습격으로 독일 소규모 부대가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의 마지우아에 있는 포르투갈 전초 기지를 공격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포르투갈 측의 첫 사상자가 발생했다. 독일 중앙 정부는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를 했다.
9월, 포르투갈 정부는 앙골라 남부 국경에 증원군을 파견했다. 전쟁 발발 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와 앙골라 사이의 국경은 개방된 상태였다. 독일은 이 경로를 통해 식량과 무기를 공급하려 했으나, 포르투갈 식민지 정부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무역을 중단시키려 했다. 앙골라에 있던 일부 독일 국적자들은 억류되었다.
10월에는 1,600명의 병력이 포르투갈령 앙골라에 도착했고, 1,527명의 병력이 영국 선박을 통해 포르투갈에서 모잠비크에 도착했다.
3.1. 아프리카 전선
1914년 7월, 독일 제국과 대영 제국은 포르투갈령 앙골라 분할에 대한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이 협상에서 대부분의 영토는 독일의 지배하에 놓일 예정이었다. 1912년에는 독일의 앙골라 지배를 목표로 하는 "앙골라 동맹"(Angola-Bund)이 결성되었다.
8월부터 9월 사이, 아프리카에서는 독일군과 포르투갈 식민지군 사이에 소규모 교전이 발생했고, 독일군은 부족 반란을 조장했다. 8월 24일, 마지우아 습격으로 독일 소규모 부대가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의 마지우아에 있는 포르투갈 전초 기지를 공격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포르투갈 측의 첫 사상자가 발생했다. 독일 중앙 정부는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를 했다.
9월, 포르투갈 정부는 앙골라 남부 국경에 증원군을 파견했다. 전쟁 발발 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와 앙골라 사이의 국경은 개방된 상태였다. 독일은 이 경로를 통해 식량과 무기를 공급하려 했으나, 포르투갈 식민지 정부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무역을 중단시키려 했다. 앙골라에 있던 일부 독일 국적자들은 억류되었다.
10월에는 1,600명의 병력이 포르투갈령 앙골라에 도착했고, 1,527명의 병력이 영국 선박을 통해 포르투갈에서 모잠비크에 도착했다.
4. 1915년
1914년 11월, 무라 멘데스 지휘 하에 1,527명의 병력이 모잠비크에 도착했다. 이들은 독일군으로부터 키온가 삼각지대를 탈환하는 임무를 맡았다.
4.1. 아프리카 전선 증원
1914년 11월, 무라 멘데스 지휘 하에 1,527명의 병력이 모잠비크에 도착했다. 이들은 독일군으로부터 키온가 삼각지대를 탈환하는 임무를 맡았다.
5. 1916년
1916년 3월 독일이 포르투갈에 전쟁을 선포한 이후, 포르투갈은 참전의 대가를 확실히 하는 한편, 파견할 군대를 편성하고 식민지를 지킬 수 있도록 준비했다.
* 2월 23일 - 영국의 요구에 따라, 포르투갈이 포르투갈 항구에 정박 중이던 독일 배들을 나포하였다.
* 3월 9일 - 독일이 포르투갈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였다.
* 6월 9일 - 재무장관 알폰소 코스타(Afonso Costa)와 아우구스토 소아레스(Augusto Soares])가 연합국 경제 회담에 참석했다. 이 회담에서는 평화 조건으로 1871년에 독일이 자국 영토로 합병한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할 것과, 1894년부터 점령하고 있던 모잠비크의 키옹가(Kionga)를 포르투갈에 반환할 것을 결정했다.
* 7월 15일 - 영국 정부가 포르투갈에 연합군의 군사 작전에 직접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 7월 22일 - 포르투갈 원정군단(Corpo Expedicionário Português, CEP)이 3만의 병력으로 포르투갈의 타코스에서 창설되었다. 지휘관은 노르톤 드 마토스(Norton de Matos) 장군이 임명되었다.
* 8월 7일 - 포르투갈 의회는 영국 정부의 요청에 따른 포르투갈의 참전을 승인했다. 포르투갈의 전쟁 준비는 12킬로미터의 전선에 배치하기 위해 매달 4천 명씩 프랑스로 보냈고, 모두 보병 55,000명과 포병 1,000명에 이르렀다. 동시에 포르투갈 정부는 모잠비크에서 독일 식민지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앙골라 남쪽에서 독일이 사주한 원주민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배치시켰다.
* 12월 26일 - 프랑스 정부는 포르투갈에 20~30개 중포 대대를 구성하기 위한 포병 인력을 프랑스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5.1. 참전 배경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포르투갈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독일군과 국지전을 벌였다. 1916년 2월 23일, 영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포르투갈은 리스본 항구에 정박 중이던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선박 36척을 나포했다. 아폰수 코스타 포르투갈 총리는 이를 전쟁 행위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포르투갈은 "국익"과 "국가의 경제적 상황의 필요성"을 위해 선박을 징발했다고 밝혔다. 노르트도이체르 로이드(Norddeutscher Lloyd) 선박 Bülow의 보일러실에서는 선박 이동시 폭발하도록 설계된 폭발 장치가 발견되었으나, 포르투갈은 이를 폭발시키지 못하게 했다.
포르투갈은 카보베르데의 상비센테에서 독일 선박 8척을 나포하는 등 자국 및 식민지 항구에 있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선박을 추가로 징발할 의향을 밝혔다. 2월 28일, 독일은 외교 서한을 통해 선박 압수가 독일 조약상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항의했다. 3월 3일, 포르투갈은 고아의 모르무가오에 있는 모든 독일 선박을 나포했다.
결국 1916년 3월 9일, 독일이 포르투갈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포르투갈은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3월 15일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포르투갈에 선전포고했다. 6월 9일, 알폰소 코스타 재무장관은 연합국 경제 회담에 참석하여 독일에게 알자스-로렌을 프랑스 제3 공화국에, 모잠비크의 키옹가를 포르투갈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7월 15일, 영국은 포르투갈에 연합군의 군사 작전에 직접 참여를 요청했고, 7월 22일 포르투갈 원정군단(Corpo Expedicionário Português, CEP)이 창설되었다. 8월 7일, 포르투갈 의회는 영국 정부의 요청에 따른 포르투갈의 참전을 승인했다.
5.2. 연합국 회담
1916년 6월 9일, 재무장관 알폰소 코스타(Afonso Costa)와 아우구스토 소아레스(Augusto Soares])는 연합국 경제 회담에 참석했다. 이 회담에서 연합국은 평화 조건으로 1871년에 독일이 자국 영토로 합병한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할 것과, 1894년부터 점령하고 있던 모잠비크의 키옹가(Kionga)를 포르투갈에 반환할 것을 결정했다.
5.3. 군사적 준비
1916년 3월 9일 독일이 포르투갈에 전쟁을 선포한 이후, 포르투갈은 참전의 대가를 확실히 하는 한편, 파견할 군대를 편성하고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준비했다. 영국은 포르투갈에 군사 작전 참여를 요청했고, 7월 22일, 노르톤 드 마토스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여 3만 명 규모의 포르투갈 원정군단(CEP)이 타코스에서 창설되었다.
1916년 2월 23일, 영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리스본 항구에 있던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선박 36척이 나포되었다. 각 선박에는 포르투갈 선원이 배치되었고, 포르투갈 국기가 게양되었다. 포르투갈 총리 아폰수 코스타는 이를 전쟁 행위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독일은 3월 9일 포르투갈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포르투갈은 서부 전선에 병력을 투입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8월 7일, 포르투갈 의회는 영국 정부의 요청에 따른 포르투갈의 참전을 승인했다. 포르투갈은 55,000명의 보병과 1,000명의 포병을 포함, 매달 4,000명의 병력을 프랑스로 파견하여 12킬로미터의 전선을 담당하게 했다. 이와 동시에 모잠비크와 앙골라 등 아프리카 식민지에도 군대를 배치했다. 12월 26일, 프랑스 정부는 포르투갈에게 20~30개 중포 대대를 구성하기 위한 포병 인력을 프랑스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6. 1917년
1917년 1월 3일, 유럽 전선의 포르투갈군 지휘권 문제에 관한 협정이 영국과 맺어졌다. 이 협정에 따라 포르투갈 원정군(CEP)은 영국 원정군(BEF)에 배속되었다. 1월 7일에는 프랑스 포병대의 요청에 따라 포르투갈 독립 중포병 군단(CAPI)이 창설되었다. 포르투갈 상부 지휘를 받은 이 부대는 25개 중포병 포대를 운용했다.
2월 2일, 첫 번째 포르투갈군이 프랑스 브르타뉴의 브레스트 항구에 도착했고,
5월 30일, CEP 1사단 1 보병 여단이 전선의 한 구역을 담당하게 되었고,6월 4일 독일군이 이 구역을 공격하였다. 6월 16일에는 2 보병 여단이 전선의 다른 구역을 맡게 되었다. 7월 10일, CEP 1사단은 포르투갈군 담당 구역을 책임지게 되었으며, 리처드 해킹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 11군단에 배속되었다. 같은 날 CEP 3 보병 여단이 전선에 투입되었다.
9월 23일, 미뉴 여단(Brigada do Minho)으로 알려진 4 여단이 2 사단 예하 부대로서 전선에 도착했다. 10월 17일에는 프랑스 전쟁 수행을 직접 돕기 위한 첫 번째 포르투갈인 포병들이 프랑스에 도착하여 포르투갈 포병단(CALP)으로 편성되었다. 11월 5일, 포르투갈군 사령관이 전선에서 자신들의 담당 구역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는데, 이전까지는 헨리 호른 장군의 영국 제1군이 담당하던 구역이었다.
소수의 포르투갈 군대가 캐나다 임업 군단과 협력하여 목재 부족을 돕기 위해 영국 뉴 포레스트로 보내졌다. 그들의 취사반의 돌 굴뚝은 포르투갈 난로로 알려진 기념물로 보존되어 있다.
7월 4일에는 가 아조레스 제도 폰타델가다를 폭격하여 4명이 사망했다. 미국 해군 콜리어 가 3인치 포격으로 대응하여 U-155가 철수했다.
1917년 말에는 파울 폰 레토브-포르베크 장군의 독일 식민지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영국군과의 일련의 장기적인 전투 끝에 인근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모잠비크로 진입했다.
12월 12일에는 두 척의 독일 잠수함 와 (막스 발렌티너 선장)가 다시 푼샬을 폭격했다. 공격은 약 30분 동안 지속되었으며, 4.7인치 및 5.9인치 포탄 40발이 발사되었다. 3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여러 채의 집과 산타 클라라 교회가 피해를 입었다.
12월 17일에는 U-156은 아조레스 제도 남동쪽에서 포르투갈 선박 Açoriano(나무로 된 삼돛대 스쿠너)를 멈추고 침몰시켰다.
12월 26일에는 U-157(막스 발렌티너 선장)이 아조레스 제도에서 포르투갈 선박 Lidia를 침몰시켰다.
6.1. 유럽 전선 참전
1917년 1월 3일, 유럽 전선의 포르투갈군 지휘권 문제에 관한 협정이 영국과 맺어졌다. 이 협정에 따라 포르투갈 원정군(CEP)은 영국 원정군(BEF)에 배속되었다. 1월 7일에는 프랑스 포병대의 요청에 따라 포르투갈 독립 중포병 군단(CAPI)이 창설되었다. 포르투갈 상부 지휘를 받은 이 부대는 25개 중포병 포대를 운용했다.
2월 2일, 첫 번째 포르투갈군이 프랑스 브르타뉴의 브레스트 항구에 도착했고,
5월 30일, CEP 1사단 1 보병 여단이 전선의 한 구역을 담당하게 되었고,6월 4일 독일군이 이 구역을 공격하였다. 6월 16일에는 2 보병 여단이 전선의 다른 구역을 맡게 되었다. 7월 10일, CEP 1사단은 포르투갈군 담당 구역을 책임지게 되었으며, 리처드 해킹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 11군단에 배속되었다. 같은 날 CEP 3 보병 여단이 전선에 투입되었다.
9월 23일, 미뉴 여단(Brigada do Minho)으로 알려진 4 여단이 2 사단 예하 부대로서 전선에 도착했다. 10월 17일에는 프랑스 전쟁 수행을 직접 돕기 위한 첫 번째 포르투갈인 포병들이 프랑스에 도착하여 포르투갈 포병단(CALP)으로 편성되었다. 11월 5일, 포르투갈군 사령관이 전선에서 자신들의 담당 구역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는데, 이전까지는 헨리 호른 장군의 영국 제1군이 담당하던 구역이었다.
6.2. 전투 경과
유럽 전선의 포르투갈군(CEP)은 영국 원정군(BEF)에 배속되어 단계적으로 임무 수준을 높여가며 전투에 투입되었다. 1917년 1월 3일, 영국과 포르투갈 사이에 포르투갈군의 지휘권 문제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1917년 2월 2일, 첫 번째 포르투갈군이 프랑스 브르타뉴의 브레스트 항에 도착했고, 2월 23일에는 CEP의 잔여 부대가 프랑스로 출발했다. 4월 4일, 포르투갈군이 전선에 도착했으며, 이날 첫 전사자인 안토니우 곤칼베스 쿠라도 일병이 발생했다.
5월 30일, CEP 1사단 1 보병 여단이 전선의 한 구역을 담당하게 되었고, 6월 4일에는 독일군이 CEP 1 보병 여단을 공격하였다. 6월 16일, 2 보병 여단이 전선의 다른 구역을 맡게 되었다. 7월 10일, CEP 1사단은 리처드 해킹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 11군단에 배속되어 포르투갈군 담당 구역을 책임지게 되었으며, CEP 3 보병 여단이 전선에 투입되었다.
9월 23일, 미뇨 여단(Brigada do Minho)으로 알려진 4 여단이 2 사단 예하 부대로서 전선에 도착했다. 10월 17일, 프랑스의 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포르투갈 포병단(CALP)으로 편성된 첫 번째 포르투갈 포병대가 프랑스에 도착했다. 11월 5일, 포르투갈군 사령관은 전선에서 자신들의 담당 구역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는데, 이전까지는 헨리 호른(Henry Horne, 1st Baron Horne) 장군의 영국 1군이 담당하던 구역이었다.
7. 1918년
3월 16일, 포르투갈 포병대가 작전에 투입되었다. 3월 27일, 독일의 공세로 인해 포르투갈 군인들은 전투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세 번째 포르투갈 사단이 프랑스로 파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포르투갈군은 전혀 증원을 받지 못했다. 포르투갈 군인들은 오랫동안 전선에서 복무해야 했고, 따라서 최전선에서 가장 지쳐있는 병사들 중 하나였다.
4월 6일, 포르투갈 군인들의 상황이 너무 어려워지자 영국군은 마침내 그들을 해방시키기로 결정했다. 포르투갈 원정군(CEP)를 재편성하여 제1사단은 예비대로 후방으로 보내고 제2사단은 영국군 제11군단의 일부가 되어 해킹(Haking) 장군의 지휘를 받기로 했다. 해킹은 포르투갈 군대를 방문하여 제2사단을 4월 9일부터 후방으로 보낼 것을 결정했지만,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독일군은 영국군 전선을 공격하여 약 60km 후퇴하게 만들었다. 포르투갈군은 해방되는 대신, 독일군의 공세를 자신들의 구역에서 막아야 했다.
4월 9일, 포르투갈에서 릴 전투, 영국에서는 조르제트 작전 또는 에스테르 전투로 알려진 이 전투는 독일군의 맹렬한 포격으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독일군의 독가스 집중 사용과 함께 공세가 이어졌다. 독일 제6군은 8개 사단(약 10만 명)을 투입하여 집중 포병 지원을 받았다. 이에 맞서 포르투갈군은 2만 명의 병력과 88문의 대포를 보유했다. 그 결과, 제2사단은 전투에서 거의 전멸했다. CEP는 장교 327명과 병사 7,098명을 잃었으며, 이는 실질적인 전투 능력의 약 35%에 해당했다. 생존자들은 후방으로 보내졌고, 일부 부대는 나중에 영국군에 통합되었다.
이 전투 동안 포르투갈 군사 역사상 가장 용감한 행위 중 하나가 자행되었는데, 바로 사병 아니발 밀라이스(지휘관의 말에 따르면 "백만 명만큼 훌륭한 병사"라는 뜻의 "솔다도 밀리오스Soldado Milhões"로도 알려짐)가 자신의 기관총만으로 후퇴하는 연합군을 방어하여 그들이 후퇴하고 재집결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두 개의 독일 연대를 격파하고 남은 독일군을 우회하도록 강요했다. 그들은 그가 강력하게 무장한 진지라고 믿었기에 격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탄약이 떨어지자 그는 전장에서 탈출했다. 그는 길을 잃었고 가족이 포르투갈에서 보내준 달콤한 아몬드 외에는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길을 잃고 지친 그는 늪에 빠진 영국 육군 소령을 구출했다. 소령은 그를 연합군 야영지로 데려가 밀라이스의 행적을 이야기했다.
7월, 토마스 안토니오 가르시아 로사도 장군이 남은 CEP의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7월 4일, CEP 제1사단은 윌리엄 버드우드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 제5군에 배속되었다. 8월 25일, 가르시아 로사도 장군은 프랑스에서 CEP의 지휘권을 인수했다.
11월 11일, 독일은 연합군이 제안한 휴전을 수락했다. 전쟁이 끝났다.
7.1. 라뤼 전투 (4월 9일)
독일군이 격렬한 독가스 공격 후 중포 포격을 개시하면서 라뤼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포르투갈에는 “Operation Georgette”로, 영국에는 “Battle of Estaires” 등으로 알려졌으며, 4차 이프르 전투라고도 부른다. 공격을 담당한 독일 6군은 8개 사단 10만여 명의 병력으로 집중 포격의 지원을 받으며 포르투갈군을 공격했다. 독일군을 저지해야 할 포르투갈군은 2만의 병력과 88문의 대포였다. 전투 결과, 2사단이 전멸했다. 포르투갈 CEP는 327명의 장교와 7,098명의 병사를 잃었는데, 유효 전투력의 35%에 해당했다. 생존자는 나중에 영국군에 배속될 후방 부대로 보내졌다.
이 전투에서 포르투갈 병사 아니발 밀라이스는 자신의 기관총만으로 후퇴하는 연합군을 방어하여 그들이 후퇴하고 재집결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두 개의 독일 연대를 격파하고 남은 독일군을 우회하도록 강요했다. 탄약이 떨어지자 그는 전장에서 탈출했고, 3일 후 늪에 빠진 영국 육군 소령을 구출하여 연합군 야영지로 돌아갔다.
7.2. 전후 상황
1918년 7월, 가르시아 호사도 장군이 포르투갈 원정군(CEP)의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4일, CEP 1사단은 윌리엄 버드우드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 5 군에 배속되었다. 8월 25일, 가르시아 호사도가 프랑스 주둔 CEP를 책임지게 되었다.
독일의 공세로 인해 포르투갈 군인들은 전투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전선에서 복무해야 했고, 그 결과 가장 지쳐있는 병사들 중 하나였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영국군은 1918년 4월 6일, 포르투갈군을 해방시키기로 결정했다. CEP(포르투갈 원정군)를 재편성하여 제1사단은 예비대로 후방으로 보내고 제2사단은 영국군 제11군단의 일부가 되어 해킹Haking 장군의 지휘를 받기로 했다. 해킹은 포르투갈 군대를 방문하여 제2사단을 4월 9일부터 후방으로 보낼 것을 결정했지만, 독일군의 공세로 인해 포르투갈군은 해방되지 못하고 자신들의 구역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야 했다.
1918년 4월 9일, 포르투갈에서 릴 전투로 알려진 전투는 독일군의 맹렬한 포격과 독가스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독일 제6군은 8개 사단(약 10만 명)을 투입하여 집중 포병 지원을 받았고, 이에 맞서 포르투갈군은 2만 명의 병력과 88문의 대포를 보유했다. 그 결과, 제2사단은 전투에서 거의 전멸했다. CEP는 장교 327명과 병사 7,098명을 잃었으며, 이는 실질적인 전투 능력의 약 35%에 해당했다.
이 전투에서 포르투갈 군사 역사상 가장 용감한 행위 중 하나가 사병 아니발 밀라이스에 의해 자행되었다. 그는 기관총만으로 후퇴하는 연합군을 방어하여 그들이 후퇴하고 재집결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은 연합군이 제안한 휴전을 수락했고, 전쟁이 끝났다. 전쟁으로 인해 포르투갈은 8,145명의 사망자, 13,751명의 부상자, 12,318명의 포로 또는 실종자를 냈다. 해상에서는 96척의 포르투갈 선박(100,193톤)이 침몰하고 5척의 포르투갈 선박(7,485톤)이 독일 잠수함에 의해 손상되었다.
8. 전쟁의 영향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포르투갈군은 사망, 부상, 포로, 실종 등 상당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해상에서는 선박 침몰 및 손상으로 인한 손실도 발생했다.
1919년 1월 18일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열린 평화 회의에 에가스 모니즈가 이끄는 포르투갈 대표단이 참석했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키옹가 삼각지를 포르투갈 식민지인 모잠비크에 양도했다. 이는 포르투갈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으로 참전하여 얻은 유일한 영토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는 1919년 11월 19일 포르투갈령 마데이라 섬으로 망명하여 1922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는 1917년에 프랑스와의 비밀 평화 협상을 시도했으나, 1918년 4월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가 카를 1세의 편지를 공개하면서 실패했다. 연합국은 그의 복위 시도를 막기 위해 마데이라를 망명지로 결정했다.
8.1. 인명 피해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포르투갈군은 사망, 부상, 포로, 실종 등 상당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해상에서는 선박 침몰 및 손상으로 인한 손실도 발생했다.
8.2. 전후 처리
1919년 1월 18일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열린 평화 회의에 에가스 모니즈가 이끄는 포르투갈 대표단이 참석했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키옹가 삼각지를 포르투갈 식민지인 모잠비크에 양도했다. 이는 포르투갈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으로 참전하여 얻은 유일한 영토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는 1919년 11월 19일 포르투갈령 마데이라 섬으로 망명하여 1922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는 1917년에 프랑스와의 비밀 평화 협상을 시도했으나, 1918년 4월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가 카를 1세의 편지를 공개하면서 실패했다. 연합국은 그의 복위 시도를 막기 위해 마데이라를 망명지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