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자스-로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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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자스-로렌은 현재 프랑스 북동부에 위치한 역사적 지역으로, 14,496km²의 면적을 차지하며 주도는 스트라스부르였다. 921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에 속했으나, 베스트팔렌 조약(1648)으로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이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1)으로 독일 제국에 편입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다가 1945년 프랑스에 반환되었다. 알자스-로렌은 다양한 언어와 종교가 공존하는 지역으로, 유럽 연합의 주요 기관인 유럽 의회의 본부가 스트라스부르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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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스-로렌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지도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독일어) | Reichsland Elsaß-Lothringen |
공식 명칭 (프랑스어) | Alsace–Lorraine |
통칭 | 알자스-로렌 |
상태 | 독일 제국의 연방 영토 |
수도 | 스트라스부르 |
국가 | Elsässisches Fahnenlied(알자스 깃발의 노래) |
정치 체제 | 연방 영토 |
하위 행정 구역 | 로트링겐 현 오베르엘자스 운테르엘자스 |
![]() | |
정치 | |
원수 (Oberpräsident, 초대) | 에두아르트 폰 묄러 |
원수 재임 기간 | 1871년–1879년 |
원수 (Reichsstatthalter, 마지막) | 루돌프 슈반더 |
원수 재임 기간 | 1918년 |
입법부 | 란트탁 |
상원 | 누르토 |
역사 | |
시작 | 프랑크푸르트 조약 (1871년 5월 10일) |
종료 | 베르사유 조약 (1919년 6월 28일) |
선행 국가 | 프랑스 제3공화국 |
후행 국가 | 프랑스 제3공화국 알자스-로렌 공화국 |
사건 | 알자스-로렌의 1918년 11월 반란 |
지역 법 | 알자스-모젤 |
인구 통계 | |
1910년 면적 | 14496 km² |
1910년 인구 | 1,874,014명 |
현재 | |
현재 국가 | 프랑스 |
현재 행정 구역 | 오-랭 주 바-랭 주 모젤 주 뫼르트 주 보주 주 |
2. 지리
알자스-로렌의 면적은 14496km2이었고, 주도는 스트라스부르였다. 알자스-로렌은 다음 3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 오버알자스 (북부 알자스): 주도는 콜마르, 면적 3525km2, 현재의 오랭주
- 운터알자스 (남부 알자스): 주도는 스트라스부르, 면적 4755km2, 현재의 바랭주
- 로트링겐 지구 (로렌): 주도는 메스, 면적 6216km2, 현재의 모젤주
알자스-로렌은 철광석과 석탄을 산출하여, 종종 프랑스와 독일 간의 분쟁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52]
2. 1. 주요 도시
알자스-로렌은 921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에 속했으나,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프랑크푸르트 조약에 따라 독일 제국에 편입되었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잠시 독립했다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1940년 나치 독일에 다시 합병되었으나,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에 반환되었다.[52]
3. 역사
17세기 프랑스 왕국은 스트라스부르 등을 지배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736년 로렌 공 프란츠 3세 슈테판이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가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자, 프랑스는 로렌이 오스트리아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다. 결국 영토 교환으로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로렌 공이 되었고, 그의 사후 로렌은 완전히 프랑스령이 되었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왕국은 강화 조건으로 알자스-로렌을 독일 제국의 일부로 삼고 직할 통치했다. 다만, 알자스 일부였던 테리토리 드 벨포르는 저항하여 프랑스령으로 남았다.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자, 알자스-로렌 공화국이 잠시 독립했으나 프랑스가 영유권을 주장했다. 프랑스는 교육 제도를 개정하고, 알자스어 사용을 금지하고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지정했다.
1940년 나치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를 격파하고 파리를 점령(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 참조)한 후, 알자스-로렌을 다시 자국에 편입했다. 1944년 자유 프랑스가 파리를 탈환하고 독일군을 몰아내면서 알자스-로렌은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었고, 현재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유럽 연합은 1979년 주요 기관인 유럽 의회 본부를 스트라스부르에 두었고, 유럽 평의회(1949년), 유럽 인권 재판소(1959년)도 설치했다.
알자스-로렌은 프랑스와 독일 국경 지대에 위치하여 각 수도에서는 멀지만, 블루 바나나에 속하는 유럽의 "중심" 지역이다.
3. 1. 개요
921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에 속했으나,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 프랑스령으로 병합되었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 프랑크푸르트 조약에 따라 독일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잠시 독립국 (알자스-로렌 독립 공화국)으로 있다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1940년 나치 독일에 의해 다시 합병되었으나,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에게 되돌아갔다.[4]
알자스-로렌의 현대 역사는 프랑스 민족주의와 독일 민족주의 간의 경쟁에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는 "자연 경계"를 확보하려 했고, 독일 민족주의는 독일어 사용 인구를 단일 국가로 통일하고자 했다. 알자스와 모젤 인구의 대부분이 독일어 방언을 사용했기 때문에,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이 지역을 미래의 통일 독일의 일부로 간주했다.[5][6]
17세기에 프랑스 왕국이 세력을 확장하여 스트라스부르 등을 지배하에 두었다. 1871년 프로이센 왕국이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를 격파하고, 알자스-로렌을 국토의 일부로 삼았다.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자, 잠시 알자스-로렌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했지만, 프랑스가 영유권을 주장하여 인정받았다. 1940년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다시 프랑스를 격파하고 알자스-로렌을 자국에 편입했다. 1944년 자유 프랑스가 파리를 탈환하고, 이 지역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고 다시 알자스-로렌을 영유하여 현재의 국경이 되었다.
유럽 연합의 주요 기관인 유럽 의회의 본부를 1979년에 중심 도시 스트라스부르에 두었다. 유럽 평의회는 1949년에, 유럽 인권 재판소는 1959년에 스트라스부르에 설치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 지대에 위치하여, 블루 바나나에 속하는 유럽의 "중심" 지역이 된다.
3. 2. 신성 로마 제국 시대
알자스-로렌 지역은 921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에 속했다.[4] 그러나 17세기 프랑스 왕국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스트라스부르 등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1736년 로렌 공 프란츠 3세 슈테판이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가 (신성 로마 황제)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게 되자, 프랑스는 로렌이 오스트리아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결국 영토 교환을 통해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로렌 공이 되었고, 그의 사후 로렌은 완전히 프랑스령이 되었다.[4]
3. 3.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랑스 왕국이 세력을 확장하여 스트라스부르 등을 지배하에 두었다. 1736년에 로렌 공 프란츠 3세 슈테판이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가 (신성 로마 황제)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위로 결정되자, 프랑스 왕국은 로렌이 실질적으로 오스트리아 공령이 되는 이 결혼에 반대했다. 협의 결과, 영토 교환이 이루어져, 일대 한정의 로렌 공이 된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사망한 후에는 완전히 프랑스령에 편입되었다.[4]
3. 4. 독일 제국 시대 (1871-1918)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 프랑크푸르트 조약에 따라 알자스-로렌은 새로 만들어진 독일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독일 제국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알자스-로렌 지역에 가능한 한 많은 자치권을 부여하여 프랑스 문화 및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일 제국령으로 자연스럽게 흡수하려고 했으나, 보수파(융커 계층)의 반발로 인해 알자스-로렌 지방은 독일 제국령으로 복속되었다.[7]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는 군 사령관 헬무트 폰 몰트케를 비롯한 프로이센 장군들과 함께 서쪽으로 프랑스 국경을 이동시키는 것이 전략적, 군사적, 민족지학적 이유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언어적 관점에서, 이 양도는 대부분 알레만어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포함했다. 군사적 관점에서는 라인강에서 국경을 멀리 이동시키는 것은 독일에게 향후 예상되는 프랑스의 공격에 대한 전략적 완충 지대를 제공할 것이었다. 합병으로 인해 독일은 라인강 좌안의 메츠와 스트라스부르 요새와 로렌의 대부분의 철 자원을 장악했다.[9]
알자스-로렌에 자체 주권과 헌법을 가진 독일 제국의 구성 국가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고려되지 않았다. 프로이센은 이 지역의 인구가 먼저 독일화, 즉 새로운 독일-프로이센 정부 형태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1871년 6월 28일에 창설된 제국 영토 (Reichslandde)는 초기에는 점령된 영토로 간주되어 빌헬름 1세가 임명한 제국 총독 (Oberpräsidentde)에 의해 직접 관리되었다.[10]
병합된 지역은 로렌 북부와 알자스로 구성되었다.
이 지역은 현재 프랑스의 데파르트망프랑스어인 바랭 (전체), 오랭 (벨포르와 몽벨리아르 지역 제외)과 보주 데파르트망의 작은 북동부 지역을 포함하며, 이들은 모두 알자스를 구성했고, 모젤의 대부분(데파르트망프랑스어의 5분의 4)과 뫼르트의 북동부(뫼르트의 3분의 1)를 포함하며, 이들은 로렌의 동부였다.
독일 병합을 피한 뫼르트 데파르트망의 나머지 3분의 2와 모젤의 서쪽 5분의 1은 새로운 프랑스 데파르트망프랑스어인 뫼르트-에-모젤을 형성하기 위해 합쳐졌다.
프랑스와 독일 간의 새로운 국경은 주로 프랑스어와 독일어 방언 간의 지리-언어적 경계를 따랐지만, 보주 산맥의 알자스 쪽 몇몇 계곡, 메스 시와 그 지역, 그리고 샤토-살랭 지역(이전에는 뫼르트 데파르트망프랑스어에 속했음)에서는 예외였다. 비록 그곳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했지만 독일에게 병합되었다. 1900년, 알자스-로렌 인구의 11.6%가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했다(1905년에는 11.0%, 1910년에는 10.9%).
프랑크푸르트 조약의 조항에 따라, 프랑스에서 직접 이주해 온 사람을 제외하고는 병합된 지역의 주민들은 알자스-로렌 시민권을 받았다. 1872년 10월 1일까지 프랑스 시민권을 유지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다. 총 160,878명, 즉 전체 인구의 약 10.4%가 이 선택을 했다.[12]
1871년 이후 수십 년 동안, 메츠 요새는 독일 통치하에 세계 최대의 요새로 확장되었다.[26] 메츠는 군인 및 기타 독일 이주민의 유입으로 인해 독일어를 사용하는 도시가 되었다.[27]
독일 육군이 제국 건립 이후 창설되었을 때, 기존 병력으로 제15 프로이센 육군 군단이 창설되었다. 이 군단의 관할 구역은 새로운 "국경 지역"인 알자스-로렌이었으며, 이는 1890년에 창설된 제16 육군 군단의 관할 구역과 같았다. 제국 영토의 남부 지역은 1871년에 바덴 출신 병력으로 구성된 제14 육군 군단의 관할 구역에 속했다. 1912년부터 북동부 지역은 제21 육군 군단에 속했다.
1871년, 새로운 제국 영토를 군사적, 전략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베를린에서 메스까지의 전략 철도 노선 계획이 시작되었다. "대포 철도"는 1870년대에 완공되었다. 사기업인 프랑스 동부 철도 회사(''Compagnie des Chemins de Fer de l'Est'')의 총 740km에 달하는 철도 노선은 프랑스 정부가 매입한 후 독일로 에 매각되었다. 구매 가격은 프랑스가 지불해야 할 전쟁 배상금에서 상쇄되었다. 알자스-로렌 제국 철도는 독일 제국이 소유한 최초의 철도였다.[31]
1872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가 재설립되었고, 1877년에는 "황제 빌헬름 대학교"(빌헬름 1세)라는 이름을 받았다.
3. 5. 제1차 세계 대전과 베르사유 조약 (1919)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와 독일 양국은 알자스-로렌 주민들을 선전 도구로 이용했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은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프랑스군이 특정 마을을 점령했을 때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참전 용사들을 찾아 체포했다.[36]
독일은 알자스-로렌 주민들에 대한 가혹한 조치로 전쟁에 대응했다. 자베른 사건으로 인해 최고 사령부는 주민들이 독일 제국에 적대적이며 굴복시켜야 한다고 확신했다. 독일군은 일부 가옥을 점령하고, 프랑스 민병대가 다시 나타날 것을 우려했다.
독일 당국은 프랑스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프랑스어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을 폈다. 1915년 1월, 메츠에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표기되었던 프랑스 거리 이름이 폐지되었고, 같은 해 7월 15일에는 독일어가 이 지역의 유일한 공식 언어가 되었다.[37] 1915년 9월 2일부터는 마을 이름도 독일식으로 변경되었다.
공공장소에서 프랑스어 사용이 금지되면서, "bonjour"와 같은 간단한 단어를 사용해도 벌금을 물 수 있었다.[36] 일부 독일계 주민들은 독일 애국심을 과시하며 이러한 박해에 협력했다.
독일 당국은 프랑스 민족주의가 다시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프랑스에 있는 친척들과의 충돌을 피하고 알자스 병사들의 프랑스군 탈영을 막기 위해,[38] 알자스-로렌 출신 독일군 징집병들은 주로 동부 전선이나 해군(카이저해군|독일 제국 해군de)으로 보내졌다. 약 15,000명의 알자스인과 로렌인이 독일 해군에서 복무했다.
독일 제국이 붕괴되는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및 군인 평의회(Soldaten- und Arbeiterräte)는 1918년 11월 뮐루즈, 콜마르, 스트라스부르에서 혁명적인 러시아의 소비에트를 본떠 결성되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알자스-로렌의 주의회는 Nationalrat|국가 평의회de라는 이름으로 최고 권력을 선포했고, 스트라스부르 소비에트는 ''알자스-로렌 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자크 페이로테스, SPD 국회 콜마르 대표는 프랑스 통치 수립을 발표하며 파리에 신속한 군대 파견을 촉구했다.[39]
소비에트 평의회는 11월 11일부터 17일 사이에 독일군이 철수하면서 해산되었다.[40] 프랑스군은 이 지역을 군사 점령하에 두고 11월 5일에 스트라스부르에 진입했다. 국가 평의회(Nationalrat)는 12월 5일에 알자스의 프랑스 병합을 선포했지만, 이 조치는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3. 6.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 독일 점령 (1940-1945)
1940년 나치 독일은 프랑스 공방전에서 승리한 후 알자스-로렌 지역을 다시 합병했으나,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프랑스에 반환되었다.[43][44]
아돌프 히틀러는 1940년에 비밀리에 합병 법안을 작성했지만, 공식적으로 알자스와 모젤을 합병하지는 않았다. 휴전 조건에는 프랑스 영토의 완전성을 변경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었으나, 일련의 법률을 통해 베를린은 알자스-로렌을 사실상 통제했다. 알자스-로렌 주민들은 독일 국방군에 징집될 수 있었다. 점령 기간 동안 모젤은 Westmark라는 Reichsgau에 통합되었고, 알자스는 바덴과 합병되었다. 1942년부터 알자스와 모젤 출신 사람들은 나치 정부의 법령에 따라 독일 시민이 되었다.[46]
1942년 10월부터 젊은 알자스와 로렌 남성들은 독일군에 징집되었다. 이들은 말그레-누프랑스어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로 불렸는데,[47][48] 기 사제르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잊혀진 병사의 저자와 같이 일부는 자원하기도 했다. 10만 명의 알자스인과 3만 명의 모젤인이 입대했으며, 이들 중 다수는 독일의 동부 전선에서 소련 붉은 군대에 맞서 싸웠다. 1945년 러시아 탐보프에 억류되었다가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고,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에 맞서 2 SS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의 말그레-누프랑스어로 싸우다가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과 튈 학살 같은 전쟁 범죄에 연루된 사람들도 있었다.
독일 점령 하에서는 프랑스어 사용이 금지되었고, 표준 독일어 학습이 의무화되었다.
3. 7. 전후 시대와 유럽 통합
1940년 나치 독일에 의해 다시 합병되었으나,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에게 되돌아갔다.[5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령이 된 알자스-로렌의 중심 도시인 스트라스부르](독일어: 슈트라스부르크)]에는 유럽의 주요 국제 기구가 많이 설치되어 국가를 넘어
4. 종교
알자스-로렌의 가톨릭 신자들은 초기에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프로이센 왕국 주도의 독일과의 통일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이들은 프랑스 가톨릭에 동질감을 느끼고 프로이센의 지배 하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했다. 반면 지역의 개신교 신자들은 독일 편입을 선호했다. 복음주의 루터교회는 독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가톨릭의 "온정주의"를 줄이기를 희망했고, 특히 농촌 인구가 이러한 노력을 지지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와 뮐hausen과 같은 도시에서는 통일에 대한 상당수의 비판적인 목소리가 있었다.[33]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이 주도한 국가와 가톨릭 교회의 갈등인 ''문화 투쟁''이 1872/73년 알자스-로렌에 도달한 후, 가톨릭 교회는 독일 당국에 대한 저항의 수단이 되었다. 1874년부터 1912년까지의 모든 국회 선거에서 15명의 알자스-로렌 대표 중 3명에서 7명이 가톨릭 사제였다. 1873년 8월 3일, 낭시-툴 주교가 프랑스와의 알자스-로렌 재통합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는 사목 서한이 그의 교구에 속해 있던 알자스-로렌의 샤토-살린과 자르부르크 지역에서 낭독되면서 갈등이 절정에 달했다.[22] 독일 당국은 경찰 조치, 체포, 징계 절차와 더불어 가톨릭 언론에 대한 금지 조치로 대응했다.
20세기 초, 독일 당국에 대한 반대는 거의 없어졌다. 프랑스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주요 사회 집단은 더 이상 없었다. 개신교 신자들은 전통적으로 독일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드레퓌스 사건 이후 유대인들은 프랑스를 극도로 의심했다. 가톨릭 신자들 또한 프랑스로부터 등을 돌렸다. 사회주의의 부상은 알자스-로렌의 가톨릭 정서를 영구적으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1905년부터의 프랑스의 세속주의 정책(1905년 교회와 국가 분리법) 또한 가톨릭계에서 프랑스로부터의 소외를 초래했다. 독일은 이 지역에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부여했고, 이 지역의 경제 상황은 긍정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프랑스와의 접촉이 더 이상 없는 젊은 거주자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독일인으로 여겼다.[34]
알자스와 로렌 데파르트망이 독일에 편입되면서 종교 단체에 관한 프랑스 법률이 유지되었으며, 칼뱅주의, 유대교, 루터교, 로마 가톨릭교와 당시 인정된 종교에 대한 특별한 특권이 정교 조약으로 알려진 체제 하에 주어졌다. 메츠 로마 가톨릭 교구와 스트라스부르 교구는 면제 관할 구역이 되었다. 프랑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루터교회는 1872년 알자스-로렌 개신교회 (EPCAAL)로 재편되었고, 원래 프랑스 개혁교회의 일부였던 다섯 개의 지역 칼뱅주의 심의회는 1895년에 알자스-로렌 개신교 개혁교회 (EPRAL)라는 주 전체의 시노드를 구성했다. 콜마르 심의회Consistoire Colmar|콜마르de, 메츠 심의회Consistoire Metz|메츠de 및 스트라스부르 심의회Consistoire Straßburg|스트라스부르de의 세 개의 이스라엘 심의회는 프랑스 이스라엘 중앙 심의회의 감독에서 분리되어 별도의 법정 법인으로 계속되었으며, 공동 기구를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협력했다. 언급된 모든 종교 단체는 ''établissements publics de culte'' (공공 종교 단체)의 지위를 유지했다. 1911년 새로운 알자스-로렌 헌법에 의해 양원제 주 의회 (Landtag d'Alsace–LorraineLandtag d'Alsace–Lorraine프랑스어)가 마련되었을 때, 각 인정된 종교는 란트타크의 제1의회에 대표자를 보낼 자격이 있었다.
1911년 당시 인구 1,874,014명 중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았다.[51]
종교 | 비율 |
---|---|
가톨릭 | 76.22% |
개신교 | 21.78% (루터교 18.87%, 칼뱅교 2.91%) |
유대교 | 1.63% |
기타 기독교 | 0.21% |
무신론 | 0.12% |
5. 언어
20세기 이전 알자스-로렌에서는 게르만어와 로망스어 방언이 모두 사용되었다. 알자스어는 알자스-로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언이었다.[49][50]
게르만 방언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 중부 독일어 방언:
- 룩셈부르크 프랑코니아어
- 모젤 프랑코니아어
- 라인 프랑코니아어
- 상부 독일어 방언:
- 알자스어
- 고지 알레만어
로망스 방언 (프랑스어와 같은 오일어군에 속함)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 로렌어
- 프랑슈콩테어
알자스 방언은 여전히 이 지역의 공용어이며, 학교에서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모두 가르친다.[49][50]
5. 1. 언어 분포 (20세기 이전)
참조
[1]
웹사이트
Elsässisches Fahnenlied [Anthem of Alsace][+English translation]
https://www.youtube.[...]
2020-04-14
[2]
백과사전
Germany - Franco-German conflict and the new German Re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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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ace–Lorraine – About this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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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rary of Cong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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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ge of Louis XIV: the rise of modern diplom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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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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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ace–Lorraine since 1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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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Millan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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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aking the Map of Eur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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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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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msbury Academ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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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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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The Economic Consequences of Annexation: Alsace–Lorraine and Imperial Germany, 1871–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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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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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Bundesstaat und seine Unantastbarkeit
Duncker & Humb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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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Denfert-Rochereau 1823 – 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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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Verfassungsentwicklungen Im Reichsland Elsaß–Lothringen 1871–1918. Integration Durch Verfassungsre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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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WV Berliner Wissenschafts-Ver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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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optants, ces Alsaciens–Lorrains qui choisissent de rester français après la guerre franco-prussienne de 1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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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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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erlicher Erlaß, betreffend die Einsetzung eines Landesausschusses in Elsaß–Lothringen vom 29. Oktober 1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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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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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setz, betreffend die Verfassung und die Verwaltung Elsaß–Lothringens § 12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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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utsche Verfassungsgeschichte seit 1789. Band IV: Struktur und Krisen des Kaiserreiches
Verlag W. Kohlha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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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ts-Blatt für den Bezirk Lothri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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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thringer Zeit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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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fassungen des Reichslandes Elsaß–Lothringen [full text in G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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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Geschichte der neuesten Zeit vom Frankfurter Frieden bis zur Gegenwart
Carl Krabbe Ver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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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Verfassungsentwicklungen im Reichsland Elsaß–Lothringen 1871–1918: Integration durch Verfassungsrecht?
Berliner Wissenschafts Ver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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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députés protestataires d'Alsace–Lorra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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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Reichstagswahlen im Reichsland
Droste-Ver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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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Adelsgenossenschaft in den Reichslanden Elsaß–Lothringen: IV. 6. Vorstandsmitglieder und Protagonis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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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er Anspruch und regionale Identität im Reichsland Elsass–Lothringen im Spiegel des französischsprachigen Elsassromans (1871–1914)
Peter L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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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Symbol des elsässischen Widerstand gegen Preußen. Die offizielle Geburt unserer Fah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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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Elsass. Historische Landschaft im Wandel der Zeit
Kohlha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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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nzregionen. Ein europäischer Vergleich vom 18. bis zum 20. Jahrhundert
Camp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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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utsche Militärgeschichte in sechs Bänden 1648–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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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utsche Militärgeschichte in sechs Bänden 1648–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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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Zabern-Affä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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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Les Chemins de fer Impériaux d'Alsace–Lorraine
Éditions Drei Exen Ver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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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Revue de la Bibliothèque National et Univérsitaire de Strasbourg
University of Strasbo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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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che und Gruppenbildungsprozesse deutscher Minderheiten in Ostmittel- und Mitteleuropa 1918–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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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itätenkonflikte im 20. Jahrhundert: Ursachen von inter-ethnischer Gewalt
Harrassow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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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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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lsace pendant la Guerre''"
1915-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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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oches ou tricolores
La nuée ble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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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Guerre mondiale, 1914–1918 - Campagnes et batail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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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La chute de l'Empire»
Dernières Nouvelles d'Alsace
2008-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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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Le retour de l'Alsace–Lorraine
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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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dnungsgemäße Überführung - Die Vertreibung der Deutschen nach dem Zweiten Weltkrieg
C.H. B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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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Tabellarische Geschichte Elsaß–Lothringens / Französische Besatzung (1918–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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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Protect, Defend and inform: The Evacuation of the German-French Border Region During the Second World War
https://hal.arch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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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cuation, phony war and collapse, May-June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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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portation of people from Alsace and Mose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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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utsche Verlag-Anstalg GmbH, Stuttg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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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ditions Mille et une v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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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 passant par la Lorraine; gens et choses de chez nous 1900–1945
Éditions Le Lor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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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ace–Lorraine | Facts, Definition, & History | Britann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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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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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ace: Culturally not quite French, not quite German | British Counc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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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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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waltungsgeschichte Elsaß–Lothringen 1871–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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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ルザスロレーヌ
2022-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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