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중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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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의 중립은 스웨덴이 1812년 이후 여러 차례의 전쟁과 갈등 속에서 유지해 온 외교 정책이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 당시 스웨덴은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노르웨이를 얻는 대가로 핀란드의 러시아 영유권을 인정하는 정책을 펼쳤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독일과 문화적 유대감을 유지하면서도 영국, 프랑스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중립을 지켰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무장 중립 정책을 통해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핀란드 전쟁 고아와 난민을 수용하는 등 인도주의적 역할을 수행했다. 냉전 시기에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미국과 비공식적인 군사 협력을 유지했으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NATO 가입을 결정하여 오랜 중립 정책을 종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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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중립 | |
---|---|
스웨덴의 중립 | |
유형 | 중립 정책 |
기간 | 1814년 - 2024년 |
주요 내용 | 전쟁 불참, 분쟁 국가에 대한 공평한 관계 유지, 국제법 준수 |
배경 | |
나폴레옹 전쟁 이후 | 1814년부터 중립 정책 채택 |
칼 14세 요한의 역할 | 국내 재건에 집중, 평화 유지 추구 |
제1차 세계 대전 | |
공식적 중립 유지 | 독일과의 경제적, 가족적 유대 관계 연합국에 대한 동정심 |
예거 부대 지원 | 핀란드의 독립을 위한 독일 예거 부대 훈련 지원 |
제2차 세계 대전 | |
중립 정책 유지 | 독일군의 스웨덴 통과 허용 (광물 자원 제공) 노르웨이, 덴마크 레지스탕스 지원 |
겨울 전쟁 지원 | 핀란드 지원 (자원, 의용군) |
발렌베리 가문의 역할 | 라울 발렌베리의 홀로코스트 기간 중 유대인 구출 활동 |
냉전 시대 | |
무장 중립 정책 | 강력한 군사력 유지, 서방과의 협력 강화 (비공식적) |
국내 방위 강화 | 소련의 침공 억제 |
유럽 연합 가입 이후 | |
중립 정책 변화 | 유럽 연합의 공동 안보 정책 참여 위기 관리 작전 참여 |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 |
중립 정책 포기 | NATO 가입 신청 |
NATO 가입 | |
가입 신청 | 2022년 5월 |
가입 완료 | 2024년 3월 7일 |
배경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안보 환경 변화 |
참고 | |
관련 정보 | 스웨덴의 역사 핀란드의 중립 NATO |
2. 1812년 정책
1812년 정책은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주도한 새로운 외교 정책이다. 이 정책은 숙적 러시아와의 관계를 포함한 이전의 외교 정책과는 크게 달랐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으로 동맹국이 필요해진 상황에서, 스웨덴은 핀란드를 러시아의 영토로 인정하는 대신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할양받는 조건으로 러시아와 협력했다.[4]
베르나도트가 이끄는 스웨덴군은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여 트라헨베르크 계획 작성과 연합 북부군 지휘를 맡았다. 1813년 가을, 스웨덴군은 그로스베렌 전투, 데네비츠 전투에서 승리하고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4] 이후 베르나도트는 덴마크를 침공하여 킬 조약을 통해 노르웨이를 할양받았고, 이는 빈 회의에서 연합국에 의해 인정되었다.[5] 이후 스웨덴은 평화 유지 활동을 제외하고는 무력 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2. 1. 배경
새로운 외교 정책은 흔히 '1812년 정책'이라고 불리며, 1811년부터 섭정으로 활동한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이끌었다. 1812년 정책은 스웨덴이 많은 분쟁, 특히 숙적인 러시아와 관련된 이전의 외교 정책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러시아와 황제 알렉산드르를 상대로 원정을 시작하면서 황제는 동맹국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스웨덴의 왕세자와 투르쿠에서 만났다. 회담에서 스웨덴은 핀란드가 러시아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대가로 차르가 덴마크를 압박하여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도록 돕기로 합의했다.[4]2. 2. 주요 내용
새로운 외교 정책은 흔히 '1812년 정책'이라고 불리며, 1811년부터 섭정으로 활동한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이끌었다. 1812년 정책은 스웨덴이 많은 분쟁, 특히 숙적인 러시아와 관련된 이전의 외교 정책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4] 나폴레옹이 러시아와 황제 알렉산드르를 상대로 원정을 시작하면서 황제는 동맹국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스웨덴의 왕세자와 투르쿠에서 만났다. 회담에서 스웨덴은 핀란드가 러시아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대가로 차르가 덴마크를 압박하여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도록 돕기로 합의했다.베르나도트가 이끄는 스웨덴군은 1813년과 1814년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했으며, 왕세자는 트라헨베르크 계획으로 알려진 연합군 작전 계획을 작성하고 연합 북부군을 지휘했다. 베르나도트의 군대는 1813년 가을 프랑스군과 싸워 그로스베렌 전투, 데네비츠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거대한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4] 이후 베르나도트는 덴마크 침공을 이끌었다. 스웨덴은 킬 조약을 통해 덴마크가 노르웨이를 넘겨주도록 강요했다. 이는 빈 회의에서 연합국에 의해 인정되었다.[5] 이 이후 스웨덴은 (평화 유지 활동을 제외하고) 무력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2. 3. 결과 및 영향
1812년 정책은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1811년부터 섭정으로 활동하며 이끈 새로운 외교 정책이다. 이는 스웨덴이 이전의 외교 정책, 특히 숙적인 러시아와 관련된 많은 분쟁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와 황제 알렉산드르를 상대로 원정을 시작하면서 황제는 동맹국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스웨덴의 왕세자와 투르쿠에서 만났다. 회담에서 스웨덴은 핀란드가 러시아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대가로 차르가 덴마크를 압박하여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도록 돕기로 합의했다.[4]베르나도트가 이끄는 스웨덴군은 1813년과 1814년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했으며, 왕세자는 트라헨베르크 계획으로 알려진 연합군 작전 계획을 작성하고 연합 북부군을 지휘했다. 베르나도트의 군대는 1813년 가을 프랑스군과 싸워 그로스베렌 전투, 데네비츠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베르나도트는 덴마크 침공을 이끌었다. 스웨덴은 킬 조약을 통해 덴마크가 노르웨이를 넘겨주도록 강요했다. 이는 빈 회의에서 연합국에 의해 인정되었다.[5] 이후 스웨덴은 평화 유지 활동을 제외하고는 무력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3. 슐레스비히 문제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과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스웨덴은 처음에는 덴마크를 지원하려는 입장이었으나, 실제로는 제한적인 역할만을 수행했다. 1차 전쟁에서는 유틀란트에 군대를 주둔시켰지만 실제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일부 노르웨이와 스웨덴 의용병만이 덴마크군에 합류했다. 2차 전쟁에서는 칼 15세 국왕의 군사 지원 약속에도 불구하고 신분 의회가 이를 거부하면서 엄격한 중립을 지켰다. 이러한 중립 정책은 결과적으로 스웨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는데,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건설하고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국력이 약화된 스웨덴에게는 중립이 불가피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3. 1. 1차 슐레스비히 전쟁 (1848-1851)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당시, 1848년부터 1851년까지 스웨덴군은 유틀란트에 주둔하며 프로이센의 지원을 받는 반군에 대항하는 덴마크를 지원했다. 하지만 스웨덴 정규군은 실제 전투를 겪지는 않았다. 수백 명의 노르웨이와 스웨덴 의용병이 덴마크군에 합류하여 참전했다.[1]3. 2. 2차 슐레스비히 전쟁 (1864)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당시인 1848년부터 1851년까지 스웨덴군은 유틀란트에 주둔하며 프로이센의 지원을 받는 반군에 대항하는 덴마크를 지원했다. 하지만 스웨덴 정규군은 실제 전투를 겪지는 않았다. 수백 명의 노르웨이와 스웨덴 의용병이 덴마크군에 합류하여 참전했다.[1]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신분 의회는 스웨덴의 칼 15세 국왕의 군사적 지원 약속을 이행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스웨덴은 엄격한 중립을 지켰다. 이는 후에 유리한 결과로 나타났다. 프로이센은 곧 독일 제국을 건설하고 지배하게 되었는데, 이는 30년 전쟁 당시 정점을 찍은 이후 상대적 국력이 현저히 감소한 스웨덴에게는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었다.[3]
4.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프로이센의 지배 아래 40년간 발트해 지역에 평화가 지속되면서, 중립은 많은 스웨덴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겨졌다. 스웨덴은 독일 제국과 문화적, 과학적 동질감을 강하게 느꼈지만, 영국 및 프랑스와도 상업적, 개인적 관계를 돈독히 유지했다.[1]
4. 1. 국내 정치 상황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스웨덴은 독일 제국과 문화적, 과학적 동질감을 강하게 느꼈지만, 영국 및 프랑스와도 상업적, 개인적 관계가 돈독했다. 여론은 독일에 우호적인 보수당과 혼합된 입장을 가진 자유당 사이에서 갈렸다. 사회 민주당은 반군국주의를 주장하며 전쟁에 반대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중립을 유지하면서 중립 노선은 더욱 강화되었다.[1]빅토리아 여왕과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독일 편에서 참전을 강력히 지지했고, 정부 정책은 친독일 편향을 보였지만, 중립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공론의 장을 지배했다.[1]
1916년, 친독일 정책은 굶주림, 반란, 실질적인 이점 부재로 인해 포기되었다. 엄격한 중립이 스웨덴에 가장 적합하다는 확신이 사회를 지배했다. 덜 친독일적인 보수 내각이 임명되었고, 민주적 개혁이 시작되어 스웨덴의 중립 정책을 굳건히 했으며, 이는 21세기까지 지속되는 사회 민주당의 정치적 헤게모니로 이어졌다.[1]
4. 2. 대외 관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스웨덴은 독일 제국과 문화적, 과학적 동질감을 강하게 느꼈지만, 영국 및 프랑스와도 상업적, 개인적 관계를 돈독히 유지했다.[1] 여론은 독일에 우호적인 보수당과 혼합된 입장을 가진 자유당 사이에서 갈렸다.[1] 조직적이지만 정치적 영향력이 적었던 사회 민주당은 반군국주의를 주장하며 전쟁에 반대했다.[1]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중립을 유지하면서 중립 노선은 더욱 강화되었다.[1]1916년, 친독일 정책은 굶주림, 반란, 실질적인 이점 부재로 인해 포기되었다.[1] 엄격한 중립이 스웨덴에 가장 적합하다는 확신이 사회를 지배했고, 덜 친독일적인 보수 내각이 임명되었다.[1] 민주적 개혁이 즉시 시작되어 스웨덴의 중립 정책을 굳건히 했으며, 이는 21세기까지 지속되는 사회 민주당의 정치적 헤게모니로 이어졌다.[1]
4. 3. 중립 정책의 변화
1916년, 친독일 정책은 굶주림, 반란에 가까운 여론, 그리고 실질적인 이점 부족으로 인해 포기되었다. 다시 한번, 엄격한 중립이 스웨덴에 가장 적합하다는 확신이 스웨덴 사회를 지배했다. 새로운, 덜 친독일적인 보수 내각이 임명되었고, 사회적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민주적 개혁이 즉시 시작되어 스웨덴의 중립 정책을 굳건히 했다. 이는 곧 21세기까지 지속되는 사회 민주당의 정치적 헤게모니로 이어졌다.[1]5. 올란드 제도 문제
스웨덴 정부의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는 리차드 샌들러 외무장관이었다. 샌들러는 엄격한 중립 정책에 반대하며, 정부가 이를 완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 그는 핀란드 정부와 협력하여 올란드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여 독일이나 소련으로부터 섬을 방어하고자 했다.[1]
1930년대 중반까지 스웨덴과 핀란드 간의 올란드 제도 관련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지만,[1] 독일 또는 소련이 올란드 제도를 점령할 수 있다는 우려는 여전히 컸다. 샌들러가 섬 방어를 제안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1]
그러나 스웨덴 정부는 샌들러의 제안에 반대했다. 독일, 소련, 또는 양국 모두의 침략을 유발할 수 있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1] 겨울 전쟁을 고려하여 스웨덴의 중립 정책을 대표하기 위해 새로운 연립 정부가 구성되자, 샌들러는 반중립적 견해 때문에 내각에서 제외되었다.[1]
5. 1. 역사적 배경

올란드 제도는 발트해에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다. 보트니아만 기저부에 위치한 올란드 제도는 만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해상 교통로를 따라 위치해 있으며, 스웨덴, 핀란드, 동쪽의 발트해 연안 국가의 사정권 안에 있다.
1809년 이전에는 올란드 제도가 스웨덴의 일부였으나, 1809년 9월 17일 프레데릭스함 조약에 따라 핀란드 본토 지역과 함께 러시아에 넘겨졌다. 러시아는 올란드 제도를 포함한 할양된 지역을 기반으로 핀란드 대공국을 형성했다. 크림 전쟁 종결 후 1856년 4월 18일에 체결된 파리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섬에 새로운 요새 건설을 중단해야 했다.[1]
5. 2. 1차 세계 대전 시기
올란드 제도는 발트해에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다. 보트니아만 기저부에 위치한 올란드 제도는 만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해상 교통로를 따라 위치해 있으며, 스웨덴, 핀란드, 동쪽의 발트해 연안 국가의 사정권 안에 있다.[1]
1809년 이전에는 올란드 제도가 스웨덴의 일부였으나, 1809년 9월 17일 프레데릭스함 조약에 따라 핀란드 본토 지역과 함께 러시아에 넘겨졌다. 러시아는 올란드 제도를 포함한 할양된 지역을 기반으로 핀란드 대공국을 형성했다. 크림 전쟁 종결 후 1856년 4월 18일에 체결된 파리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섬에 새로운 요새 건설을 중단해야 했으며, 1908년 섬의 지위를 변경하려는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준수했다.[1]
그러나 1914년 러시아 정부는 섬을 잠수함 기지로 전환하여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 및 러시아 잠수함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1917년 12월 핀란드 정부는 핀란드가 주권 국가임을 선포했고, 섬이 스웨덴에 속하는지 핀란드에 속하는지를 두고 분쟁이 벌어졌다. 1921년, 섬 인구의 거의 100%가 스웨덴인이었고 스웨덴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연맹은 올란드 제도가 핀란드의 일부로 남아야 한다고 결정했다.[1]
5. 3. 분쟁과 해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스웨덴과 핀란드 사이에 올란드 제도의 영유권을 두고 분쟁이 벌어졌다.[1] 국제 연맹은 1921년에 올란드 제도가 핀란드의 일부로 남아야 한다고 결정했지만, 당시 섬 인구의 거의 100%는 스웨덴인이었고 스웨덴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했다.[1]보트니아만 기저부에 위치한 올란드 제도는 스웨덴, 핀란드, 동쪽의 발트해 연안 국가들의 영향권 안에 있어 전략적 가치가 매우 컸다.[1] 1809년 이전에는 스웨덴의 일부였으나, 프레데릭스함 조약에 따라 핀란드와 함께 러시아에 할양되었다.[1] 크림 전쟁 이후 파리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섬에 요새 건설이 금지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잠수함 기지로 사용되었다.[1]
리차드 샌들러 외무 장관은 엄격한 중립 정책에 반대하며, 올란드를 독일 또는 소련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핀란드와 협력하여 섬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려 했다.[1] 그러나 스웨덴 정부는 이것이 침략을 유발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반대했다.[1] 겨울 전쟁을 고려하여 새로운 연립 정부가 구성되자, 샌들러는 반중립적 견해 때문에 내각에서 제외되었다.[1]
6. 무장 중립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스웨덴은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덴마크를 지원하기 위해 퓐 섬에 의용군을 주둔시킨 것을 제외하고는 120년간 중립 정책을 유지해 왔다. 스웨덴은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발트 3국과 함께 북유럽 중립국 블록을 형성하고자 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공격받지 않은 유일한 국가였다.
이러한 무장 중립 정책은 보수당, 농민당, 자유 인민당 등 주요 정당들의 지지를 받았다. 1936년부터 스웨덴 정부는 국제 정세 악화에 따라 군사 대비 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국방 예산을 증액했다. 1936년 3700만달러였던 군사 지출은 1939년 3.2232499999999997억달러로 크게 증가했으며, 1942년에는 5.27575억달러로 최고조에 달했다.
스웨덴 산업은 북해에 대한 독일 봉쇄로 인해 국내 제품 수요 증가와 더불어 군수품 수요도 충족해야 했다. 전쟁 전 군수품 생산량은 수천만 크로나였으나, 전쟁 중에는 10억원(2.4억달러)를 초과했다.[3]
6. 1. 중립 정책 강화
1930년대는 스웨덴의 오랜 중립 정책이 여러 차례 시험대에 오른 시기였으며, 그 대부분은 강력하게 부활한 국가 사회주의 독일로부터 비롯되었다. 1919년 국제 연맹 창설부터 1935년까지 스웨덴은 국제 연맹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국제 무대에서의 스웨덴의 노력은 대부분 국제 연맹의 보존에 쏟아졌다.아비시니아 위기로 국제 연맹의 집단 안보 시스템이 붕괴되기 시작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다가오면서, 스웨덴은 중립 정책을 강화했다.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당시 덴마크를 지원하기 위해 퓐에 주둔했던 의용군을 제외하고 120년간 성공적인 중립주의 정치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스웨덴은 북유럽의 중립국 블록을 형성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및 발트 3국이 모두 이 중립국 클럽의 구성원이었으나, 이들 중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공격을 받지 않고 살아남은 국가는 스웨덴뿐이었다.
이 새로운 무장 중립 정책에 대한 반대는 미미했는데, 보수당, 농민당, 자유 인민당과 같은 모든 주요 정당이 정부의 입장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1936년부터 스웨덴 정부는 국제 정세가 계속 악화됨에 따라 군사 대비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국방 예산 증액을 요청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의 실제 군사 예산은 여러 배로 증가했다.
연도 | 군사 지출 (미국 달러) |
---|---|
1936년 | 3700만달러 |
1937년 | 5000만달러 |
1938년 | 5857.5만달러 |
1939년 | 3.2232499999999997억달러 |
1942년 | 5.27575억달러 (최고조) |
군대 확충의 필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스웨덴 산업은 북해에 대한 독일 봉쇄로 인해 악화된 국내 제품에 대한 증가하는 수요를 충족해야 할 뿐만 아니라, 스웨덴 정부를 위한 군수품 수요 증가도 충족해야 했다. 전쟁 전에는 군수품 생산량이 수천만 크로나를 넘지 않았지만, 전쟁 중에는 생산량이 10억원 (2.4억달러)를 초과했다.[3]
6. 2. 전쟁 중 스웨덴의 상황
1930년대는 스웨덴의 오랜 중립 정책이 여러 차례 시험대에 오른 시기였으며, 그 대부분은 국가 사회주의 독일로부터 비롯되었다. 1919년 국제 연맹 창설부터 1935년까지 스웨덴은 국제 연맹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국제 무대에서의 노력은 대부분 국제 연맹 보존에 집중되었다.아비시니아 위기로 국제 연맹의 집단 안보 시스템이 붕괴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다가오면서, 스웨덴은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당시 덴마크를 지원하기 위해 퓐에 주둔했던 의용군을 제외하고 120년간 성공적인 중립주의 정치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스웨덴은 북유럽의 중립국 블록을 형성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및 발트 3국이 모두 이 중립국 클럽의 구성원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공격받지 않고 살아남은 국가는 스웨덴뿐이었다.
이러한 무장 중립 정책에 대한 반대는 미미했는데, 보수당, 농민당, 자유 인민당과 같은 모든 주요 정당이 정부의 입장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1936년부터 스웨덴 정부는 국제 정세 악화에 따라 군사 대비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국방 예산 증액을 요청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실제 군사 예산은 여러 배로 증가했다.
연도 | 군사 지출 (미국 달러) |
---|---|
1936년 | 3700만달러 |
1937년 | 5000만달러 |
1938년 | 5857.5만달러 |
1939년 | 3.2232499999999997억달러 |
1942년 | 5.27575억달러 (최고치) |
군대 확충의 필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스웨덴 산업은 북해에 대한 독일 봉쇄로 인해 악화된 국내 제품에 대한 증가하는 수요를 충족해야 할 뿐만 아니라, 스웨덴 정부를 위한 군수품 수요 증가도 충족해야 했다. 전쟁 전에는 군수품 생산량이 수천만 크로나를 넘지 않았지만, 전쟁 중에는 생산량이 10억원 (2.4억달러)를 초과했다.[1]
6. 3. 중립의 결과
스웨덴은 중립 정책을 통해 제2차 세계 대전의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중립은 스웨덴이 전쟁 피해 지역 주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약 70,000명의 핀란드 아이들이 스웨덴으로 대피하여 스웨덴 가정에 맡겨졌으며, 발트 국가와 다른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도 난민들이 스웨덴으로 피난 왔다.특히, 덴마크의 거의 모든 유대인들은 덴마크 국민과 스웨덴인의 협력으로 어선을 통해 스웨덴으로 탈출하여 피난처를 제공받았다. 스웨덴의 중립적인 입장은 스웨덴 외교관들이 독일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이는 스웨덴 정보국과 연합국에 도움이 되는 첩보 활동을 가능하게 했다.
스웨덴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와 풀케 베르나도트 백작은 10,000명 이상의 유럽 유대인을 강제 수용소에서 구출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는 스웨덴의 공식적인 정책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7. 스칸디나비아 방위 동맹 구상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는 스칸디나비아 방위 동맹 구상을 논의했다. 이들 국가는 각자의 주권은 유지하되, 외교 및 안보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의 블록처럼 행동하려 했다.[1] 1948년부터 1949년 겨울까지 스칸디나비아 공동 위원회에서 이 연합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냉전으로 인한 미국과 소련 간의 긴장과 북대서양 조약으로 이어질 서방 동맹 준비로 인해 결국 무산되었다.[1]
노르웨이는 서방 동맹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 무기를 공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무기 확보를 위해 NATO에 가입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협상에서 탈퇴했다.[1] 덴마크는 스웨덴과의 동맹에 계속 참여할 의향이 있었으나, 스웨덴은 이 동맹에서 큰 이점을 찾지 못해 결국 이 제안은 실패로 돌아갔다.[1] 결과적으로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북대서양 조약에 서명하고 NATO의 회원이 되었고, 스웨덴은 중립 노선을 유지했다.[1]
7. 1. 구상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는 스칸디나비아 방위 동맹을 고려했다. 세 국가는 주권을 유지하면서도 외교 및 안보 문제에서 단일 블록으로 행동하려 했다.[1] 이 제안은 1948년에서 1949년 겨울 동안 스칸디나비아 공동 위원회에서 논의되었으나,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 간의 긴장과 북대서양 조약으로 이어질 서방 동맹 준비로 인해 무산되었다.[1]서방 동맹이 스칸디나비아 국가에 무기를 공급할 수 없다는 것이 알려지자, 노르웨이는 무기 확보를 위해 NATO 가입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협상에서 탈퇴했다.[1] 덴마크는 스웨덴과의 동맹에 참여할 의사가 있었지만, 스웨덴은 이점이 적다고 판단하여 제안은 실패했다.[1] 이후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북대서양 조약에 서명하고 NATO의 회원국이 되었지만, 스웨덴은 중립을 유지했다.[1]
7. 2. 협상 과정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는 스칸디나비아 방위 동맹을 고려했다. 세 국가는 별개의 주권을 유지하면서도 외교 및 안보 문제에서 단일 블록으로 행동하려 했다.[1] 이 제안은 1948년에서 1949년 겨울 동안 스칸디나비아 공동 위원회에서 논의되었다.[1]그러나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북대서양 조약으로 이어질 서방 동맹 준비로 인해 스칸디나비아 협상은 무산되었다.[1]
서방 동맹이 스칸디나비아 국가에 무기를 공급할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노르웨이는 무기 확보와 NATO 가입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협상에서 탈퇴했다.[1] 덴마크는 스웨덴과의 동맹에 여전히 참여할 의사가 있었지만, 스웨덴은 큰 이점을 느끼지 못해 제안은 실패했다.[1]
7. 3. 좌절과 결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는 외교 정책 및 안보 문제에서 단일 블록으로 행동하기 위해 스칸디나비아 방위 동맹을 결성하려 했다. 그러나 1948-1949년 겨울 동안 스칸디나비아 공동 위원회에서 논의되었던 이 제안은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북대서양 조약으로 이어질 서방 동맹 준비로 인해 무산되었다.[1]서방 동맹이 스칸디나비아 국가에 무기를 공급할 수 없다는 것이 알려지자, 노르웨이는 무기 확보를 위해 NATO 가입을 선택했고 협상에서 탈퇴했다. 덴마크는 스웨덴과의 동맹에 여전히 참여할 의사가 있었지만, 스웨덴은 큰 이점을 느끼지 못해 제안은 실패했다. 결국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북대서양 조약에 서명하고 NATO의 회원국이 되었고, 스웨덴은 중립을 유지했다.[1]
8. 냉전 시기
스웨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중립 정책을 유지했다. 칼 빌트 전 스웨덴 총리는 스웨덴이 NATO에 가입할 경우 소련이 이웃 핀란드를 침공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이러한 정책을 펼쳤다고 언급했다.[6] 핀란드는 핀란드화라는 중립 정책을 채택했다. 냉전 초기 스웨덴 지도자들은 중립이 제3차 세계 대전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정책을 유지했는데, 이는 초강대국 간의 초기 핵 교환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7]
전쟁 직후, 스웨덴은 독자적인 핵무기 프로그램을 추진했지만 1960년대에 비용 문제로 포기했다. 냉전 시기 스웨덴은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미국과 비공식적인 강한 유대 관계를 맺고 미국 정보기관과 협력했다.[8]
미국은 소련이 스웨덴을 공격하면 점령된 발트 3국의 소련 거점을 공격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중립 정책으로 인해 서방과의 군사 협력을 아는 스웨덴 군 관계자는 줄어들었고, 전쟁 발발 시 협력이 어려워졌다. 스웨덴의 방어 계획은 전적으로 해외, 특히 NATO군의 지원에 의존했다.[9] 이러한 사실은 공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고, 스웨덴군은 불균형적인 전력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상륙 침공 방어는 강했지만, 내륙 공격 능력은 거의 없었다.[10]
1960년대 초, 폴라리스 A-1형 중거리 핵 미사일을 탑재한 미국 핵잠수함이 스웨덴 서해안에 배치되었다. 미국은 1960년에 스웨덴에 군사적 안보를 보장하고, 소련 침략 시 군사 지원을 약속했다. 이 사실은 1994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미국은 사브 37 비겐 개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11]
8. 1. 표면적 중립
스웨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방과의 협력에도 불구하고 중립 정책을 유지했다. 칼 빌트 전 스웨덴 총리는 이러한 정책이 NATO 가입 시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한 대응이었다고 언급했다.[6] 핀란드는 냉전 시대에 외교 문제에서 중립을 지켰는데, 이를 핀란드화라고 불렀다. 냉전 초기 스웨덴의 중립 정책은 제3차 세계 대전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지도자들이 이해했음에도 유지되었다. 이 정책의 목표는 초강대국 간의 초기 핵 교환을 피하는 것이었다.[7]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스웨덴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추진했지만, 1960년대에 비용 문제로 포기했다. 냉전 동안 스웨덴은 공개적으로는 중립 정책을 유지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미국과 강력한 유대를 맺었다. 예를 들어, 스웨덴은 미국 정보기관과 광범위하게 협력했다.[8]
미국은 스웨덴이 소련의 공격을 받을 경우 점령된 발트 3국의 소련 거점을 공격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공식적인 중립 정책으로 인해 서방과의 군사 협력을 아는 스웨덴 군 관계자는 줄어들었고, 전쟁 발생 시 협력이 어려워졌다. 스웨덴의 방어 계획은 전쟁 발생 시 해외의 도움에 의존했다. 연구에 따르면 전쟁 시뮬레이션 훈련에는 스웨덴이 NATO군에 의존한다는 시나리오가 포함되어 있었다.[9] 이러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스웨덴군은 불균형적인 상태가 되었다. 예를 들어, 상륙 침공에 대한 방어 능력은 강력했지만, 내륙 거점 공격 능력은 거의 없었다.[10]
1960년대 초, 폴라리스 A-1형 중거리 핵 미사일을 탑재한 미국의 핵 잠수함이 스웨덴 서해안 외부에 배치되었다. 1960년, 미국은 스웨덴에 군사 안보 보장을 제공했다. 미국은 소련 침략 시 스웨덴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보장은 1994년까지 스웨덴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군사 협력의 일환으로 미국은 사브 37 비겐 개발에 많은 도움을 제공했다.[11]
8. 2. 미국과의 비공식 협력
스웨덴은 서방과의 상당한 협력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중립 정책을 유지했다.[6] 그러나 냉전 시대 동안 스웨덴은 공개적으로는 엄격한 중립 정책을 유지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미국과 강력한 유대를 유지했다.[8]스웨덴은 미국 정보기관과 광범위하게 협력했다.[8] "공식적으로 중립적이었지만, 스웨덴은 실제로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에 NATO와 미국 안보 체제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냉전 첩보 작전에 깊이 관여했다."[8]
1960년대 초, 폴라리스 A-1형 중거리 핵 미사일을 탑재한 미국의 핵 잠수함이 스웨덴 서해안 외부에 배치되었다. 사거리와 안전 고려 사항 때문에 이곳은 모스크바에 대한 보복 핵 공격을 감행하기에 좋은 지역이었다.[11] 1960년에 미국은 스웨덴에 군사 안보 보장을 제공했다. 미국은 소련의 침략 시 스웨덴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력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11] 군사 협력의 일환으로 미국은 사브 37 비겐 개발에 많은 도움을 제공했다.[11]
9. 냉전 이후
냉전 종식 후, 스웨덴은 공식적인 군사적 중립 정책을 폐지했지만 비동맹 국가로서의 기조는 유지했다. 1995년 유럽 연합(EU)에 가입했으나( 유로존 가입은 거부), 1990년대 중반 이후 군사력을 감축하고 보스니아와 아프가니스탄 등 국제 임무에 더 많이 참여했다. 그러나 국방력 감축과 침략에 대한 자체 방어 능력에 대한 의문으로 비판도 제기되었다.[12][13]
2009년 스웨덴은 EU 및 북유럽 국가들과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며 200년 가까이 지속된 공식적인 군사적 중립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1] 2010년 미국 외교 전보 공개 사건을 통해 미국 정부가 스웨덴의 공식 안보 정책을 "평시 군사 동맹 불참, 전시 중립 유지"로 묘사한 것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스웨덴은 NATO 및 EU 전투단에 기여하고 여러 국제기구에 참여해왔다. 2011년 3월부터 10월까지는 리비아 전쟁에서 NATO 주도 국제 파견단에 참여하기도 했다. 2016년 5월 여론조사에서는 처음으로 NATO 가입 찬성 여론이 반대 여론보다 높게 나타났으며,[14] 중도 우파 연합 정당들은 NATO 정식 가입을 지지했다.[15]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스웨덴 내 NATO 가입 찬성 여론은 더욱 높아졌다. 2022년 5월 16일, 스웨덴 정부는 200년간의 군사적 비동맹 노선을 벗어나 NATO 가입을 신청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16] 그리고 2024년 3월 7일 스웨덴은 NATO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17]
9. 1. 군사적 비동맹 유지
냉전 종식과 소련 붕괴 이후 스웨덴은 공식적인 군사적 중립 정책을 폐지했지만, 중립적이고 비동맹 국가로 계속 행동했다. 1995년 유럽 연합(EU)에 가입했으며(하지만 유로존 가입은 거부), 1990년대 중반 이후 군사력을 계속 감축하고 보스니아와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국가에서 더 많은 국제 임무에 참여했다. 자체 국방력의 지속적인 감축과 이 나라가 침략자로부터 실제로 자국을 방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일부 비판을 낳았다.[12][13]2009년 스웨덴은 EU 및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하여 거의 200년 동안 지속된 공식적인 군사적 중립 시대를 종식시켰다.[1] 2010년 미국 외교 전보 공개 사건의 결과, 미국 정부가 스웨덴의 "공식 안보 정책"을 "평시에는 군사 동맹에 불참하고 전시에는 중립을 유지하는 것"으로 묘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스웨덴은 다양한 NATO 및 EU 전투단에 기여하고 있으며 국제기구에 참여하고 있다. 2011년 3월부터 10월까지 스웨덴은 리비아 전쟁에서 NATO가 주도하는 국제 파견단에 참여했다.
9. 2. NATO 가입
2009년 스웨덴은 유럽 연합(EU) 및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여, 거의 200년 동안 지속된 공식적인 군사적 중립 시대를 종식시켰다.[1]2022년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더 많은 스웨덴 국민이 NATO 가입을 찬성하게 되었다. 2022년 5월 16일, 스웨덴 정부는 200년 동안 군사적으로 비동맹 상태를 유지한 후 NATO 가입을 신청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16] 스웨덴은 2024년 3월 7일 NATO 회원국이 되었다.[17]
10. 글로벌 감시 폭로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는 스웨덴이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미국 및 동맹국과 정보 분야에서 긴밀하게 협력해 왔음을 보여준다. 2006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 국가안보국(NSA) 내부 문서는 스웨덴과의 정보 협력 관계가 스웨덴의 정치적 중립성 때문에 최고 기밀로 보호받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18]
10. 1. NSA와의 관계
에드워드 스노든의 세계 감시 폭로에 따르면, 스웨덴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및 동맹국과 정보 분야에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6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 국가안보국(NSA) 내부 문서에는 스웨덴과의 "관계"가 "그 국가의 정치적 중립성 때문에 최고 기밀 수준으로 보호받고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18]스웨덴이 UKUSA 협정 회원국과 협력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스웨덴 국방무선통신소(FRA)는 미국 NSA의 분석 데이터베이스인 XKeyscore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19]
- 스웨덴은 FRA와 스웨덴 보안청 간의 정보 공유를 위한 법적 기반을 제공하는 국내 스웨덴 법률 변경 사항에 대해 NSA에 정보를 제공했다.[19]
- 2013년 1월부터 NSA의 대테러 분석가가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 배치되었다.[19]
릭스다그가 FRA의 법률 변경을 제안하는 논란 많은 법안을 통과시키기 수년 전인 2004년, 영국의 정부통신본부(GCHQ), NSA, FRA는 FRA가 GCHQ와 상의 없이 NSA와 직접 협력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을 체결했다.[19] 1954년, 스웨덴은 UKUSA 협정의 일환으로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협력 및 정보 공유에 관한 비밀 조약을 체결했다.[20]
10. 2. UKUSA 협정
에드워드 스노든의 세계 감시 폭로에 따르면, 스웨덴은 공식적으로 중립국이지만 미국 및 동맹국과 정보 연계를 맺고 있었다. 2006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 국가안보국(NSA) 내부 문서에는 스웨덴과의 "관계"가 "그 국가의 정치적 중립성 때문에 최고 기밀 수준으로 보호받고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18]1954년, 스웨덴은 UKUSA 협정의 일환으로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협력 및 정보 공유에 관한 비밀 조약을 체결했다.[20] 구체적인 협력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스웨덴 국방무선통신소(FRA)는 미국 NSA의 분석 데이터베이스인 XKeyscore에 접근할 수 있었다.[19]
- 스웨덴은 FRA와 스웨덴 보안청 간의 정보 공유를 위한 법적 틀을 제공하는 스웨덴 법률 변경 사항을 NSA에 제공했다.[19]
- 2013년 1월부터 NSA의 대테러 분석가가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 배치되었다.[19]
2004년, 영국의 정부통신본부(GCHQ), NSA, FRA는 FRA가 GCHQ와 상의 없이 NSA와 직접 협력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이는 릭스다그가 FRA의 법률 변경을 제안하는 논란 많은 법안을 통과시키기 수년 전에 이루어졌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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