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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제1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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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제1공화국은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수립되어 1926년 5월 28일 쿠데타로 붕괴될 때까지 존속했던 공화국이다. 19세기 말 사회적 불만과 왕실 부패 속에서 공화주의 운동이 확산되었고, 1910년 혁명을 통해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공화정 초기에는 1911년 헌법 제정을 통해 의회 중심의 공화정 체제를 수립했으나, 정당의 분열과 잦은 내각 교체로 정치적 불안정성을 겪었다. 특히 반교권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며 가톨릭 교회를 탄압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이후 시드니우 파이스의 군사 독재, 스페인 독감 유행, 경제난 등으로 혼란이 심화되었으며, 1926년 쿠데타로 제1공화국은 붕괴되었다. 제1공화국은 민법 개정, 교육 혁신, 국가와 교회의 분리 등 20세기 포르투갈에 지울 수 없는 유산을 남겼다.

2. 역사적 배경

19세기 말, 포르투갈은 영국과의 외교적 갈등, 경제 위기, 왕실의 부패 등으로 인해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었다. 특히 1890년 영국의 최후통첩 사건[10]은 포르투갈 국민들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했고, 포르투에서 급진파 공화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폭동이 발생하며[11] 공화주의 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란이 진압된 후 검열 제도, 반정부주의자 제거, 선거구 개정이 이루어졌고, 1901년 공화당은 의회에서 추방되었다.[12] 그러나 20세기 초 개신당과 진보당이 내분으로 분열되었고, 이들의 일부를 흡수한 공화당이 세력을 확대했다.[13] 1908년에는 과격파 공화주의자에 의해 포르투갈 국왕 카를루스 1세와 왕세자 루이스 필리페가 암살되면서[14] 왕정에 대한 불신은 더욱 심화되었다.

2. 1. 1910년 10월 5일 혁명

1910년 10월 3일, 공화주의자들은 리스본에서 혁명을 일으켰다.[15] 혁명 발발 후, 마누엘 2세 국왕은 지브롤터로 망명하였고, 이틀 뒤인 10월 5일에 리스본 시민들의 환호 속에 공화정이 선포되었다.[15] 혁명 직후, 테오필루 브라가가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안토니오 조제 알메이다와 아폰수 코스타가 브라가를 보좌하는 체제가 만들어졌다.[17] 임시 정부는 구 정권과의 단절을 보여주기 위해 국기를 변경하고, 새 통화 에스쿠두를 발행했다.[18] 왕정 시대의 국가인 『Hino da Carta』 대신 1890년 최후 통첩 때 불렸던 『아 포르투게자』가 국가로 채택되었고, 1911년 6월 30일 이후에는 기존의 파란색과 흰색 국기 대신 녹색과 빨간색 국기가 채택되었으며, 국기에서 왕관이 제거되고 국가의 기원을 나타내는 천구의가 남겨졌다.[19] 또한 반성직주의를 내세워 예수회를 비롯한 모든 수도회가 폐지되고 교회 재산이 몰수되었다.[15] 1911년에는 정교 분리법이 시행되어 포르투갈과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15]

1917년에 발행된 4에스쿠두 주화

3. 공화정 초기 (1910-1914)

1910년 10월 5일 혁명 직후 임시 정부는 테오필루 브라가를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안토니오 조제 알메이다와 아폰수 코스타가 브라가를 보좌하는 체제를 만들었다.[17]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화당은 구 정권과의 단절을 위해 국기를 변경하고, 을 대체하는 새 통화 에스쿠두를 발행했다.[18] 왕정 시대의 국가인 『』 대신 1890년 최후 통첩 때 불렸던 『아 포르투게자』가 국가로 채택되었고, 1911년 6월 30일 이후에는 기존의 파란색과 흰색 국기 대신 녹색과 빨간색 국기가 채택되었으며, 국기에서 왕관이 제거되고 국가의 기원을 나타내는 천구의가 남겨졌다.[19]

1911년 새 헌법이 제정되어 의회 중심의 공화정 체제가 수립되었다.[21] 새 헌법은 브라질프랑스를 본떠 입법부가 행정부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 의회가 대통령의 임명·해임 권한을 가졌다.[21] 그리고 양원제 국회,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직접 선거가 제정되었고, 알메이다와 브리투 카마쇼가 옹립한 마누엘 데 아리아가가 대통령에 취임했다.[22]

그러나 '공화당' 조차 분열되어, 가장 보수적인 세력은 분리되어 '진화당'과 '공화 연합당'을 형성했다.[22] 베르나르디누 마샤두를 대통령으로 지지하던 코스타가 당내에 민주파를 결성하자 카마쇼 주변에는 보수적인 그룹이 형성되었고, 중도파는 알메이다 아래로 모였다.[22] 1912년까지 공화당은 아폰수 코스타의 민주당, 카마쇼의 통일당, 알메이다의 개진당으로 분열되었고,[22] 각 당이 항쟁을 계속했기 때문에 내각의 안정이 유지되지 않았다.[21] 민주당은 전국적으로 영향력을 가졌고, 통일당은 남부, 개진당은 북부에 지반을 두었으며, 각 당은 기관지에서 다른 당과 다른 정치 방침을 주장했지만, 당에 속하는 정치인들의 행동에는 큰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23]

1913년 1월, 민주당의 지도자인 아폰수 코스타가 통일당의 지지를 얻어 수상에 취임했다. 코스타는 선거권 확대로 농촌에서 보수 세력이 확대될 것으로 보고 1913년 선거법을 개정하여 농촌에 많은 문맹 호주와 현역 군인에게 참정권을 박탈하여 유권자 수는 1911년 당시 84만 명에서 40만 명으로 감소했다.[25] 코스타 내각에서는 도시의 중소 부르주아지의 요구에 부응하는 세제 개혁이 실시되었고, 왕정 시대 이래의 적자를 해소한 결과 1912년부터 1914년에 걸쳐 국가 재정은 흑자로 호전되어 지지 기반을 전국으로 넓혔다.[25] 그러나 노동 쟁의는 격화되어 1910년 말부터 임금 인상과 노동 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파업이 도시에서 농촌으로 확대되어 1912년 1월에는 처음으로 총파업이 벌어졌다.[25] 내각은 파업과 시위에 엄격한 탄압을 가해 도시 노동자로부터의 지지를 잃어갔다.[25]

또한, 포르투갈에서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코임브라 대학교에 대항하여 리스본 대학교, 포르투 대학교가 설치되었다.[18]


  • 하위 레벨 제목(sub-sectionTitle): 반교권주의 정책
  • 하위 레벨 본문(sub-content):

```content

공화정부는 예수회를 추방하고 교회 재산을 몰수하는 등 강력한 반교권주의 정책을 추진했다.[4] 역사학자 스탠리 페인은 "대다수의 공화주의자들은 가톨릭교가 개인주의적 중산층 급진주의의 가장 큰 적이며, 포르투갈 내에서의 영향력의 원천으로서 완전히 파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지적한다.[3] 아폰수 코스타 법무부 장관의 지휘 아래, 혁명은 즉시 가톨릭 교회를 공격했으며, 임시 정부는 처참한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반종교 정책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3][4]

공화국 출범 5일 후인 1910년 10월 10일, 신정부는 모든 수도원과 수도회를 폐지하도록 명령했고, 모든 수도원 거주자는 추방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다.[4] 예수회는 포르투갈 시민권을 포기해야 했다.[4] 1911년 11월 3일, 이혼을 합법화하는 법이 통과되었으며, 혼외 출생 자녀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화장을 허용하며, 묘지를 세속화하고,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금지하고, 사제복 착용을 금지하는 법도 통과되었다.[4] 또한, 예배 시간을 알리기 위한 교회 종의 울림이 특정 제약을 받게 되었고, 종교 축제의 공개적인 축하 행사가 금지되었다.[4] 정부는 또한 신학교 운영에 간섭하여 교수를 임명하고 교육 과정을 결정할 권리를 가졌다.[4] 아폰수 코스타가 제정한 이 일련의 법률은 1911년 4월 20일에 통과된 교회와 국가 분리법으로 절정에 달했다.[4]

공화주의자들은 "적대적인" 교회와 국가 분리 접근 방식을 보였는데, 이는 프랑스 혁명 중의 탈기독교화와 미래의 1917년 멕시코 헌법 및 1931년 스페인 헌법과 유사했다.[5] 1911년 5월 24일, 교황 비오 10세는 회칙 ''Iamdudum''을 발표하여 새로운 공화국의 반교권주의를 종교적 시민 자유의 박탈과 "교회 탄압을 위해 포르투갈에서 제정된 믿을 수 없는 일련의 과잉과 범죄"를 이유로 비난했다.[6]

3. 1. 반교권주의 정책

공화정부는 예수회를 추방하고 교회 재산을 몰수하는 등 강력한 반교권주의 정책을 추진했다.[4] 역사학자 스탠리 페인은 "대다수의 공화주의자들은 가톨릭교가 개인주의적 중산층 급진주의의 가장 큰 적이며, 포르투갈 내에서의 영향력의 원천으로서 완전히 파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지적한다.[3] 아폰수 코스타 법무부 장관의 지휘 아래, 혁명은 즉시 가톨릭 교회를 공격했으며, 임시 정부는 처참한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반종교 정책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3][4]

공화국 출범 5일 후인 1910년 10월 10일, 신정부는 모든 수도원과 수도회를 폐지하도록 명령했고, 모든 수도원 거주자는 추방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다.[4] 예수회는 포르투갈 시민권을 포기해야 했다.[4] 1911년 11월 3일, 이혼을 합법화하는 법이 통과되었으며, 혼외 출생 자녀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화장을 허용하며, 묘지를 세속화하고,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금지하고, 사제복 착용을 금지하는 법도 통과되었다.[4] 또한, 예배 시간을 알리기 위한 교회 종의 울림이 특정 제약을 받게 되었고, 종교 축제의 공개적인 축하 행사가 금지되었다.[4] 정부는 또한 신학교 운영에 간섭하여 교수를 임명하고 교육 과정을 결정할 권리를 가졌다.[4] 아폰수 코스타가 제정한 이 일련의 법률은 1911년 4월 20일에 통과된 교회와 국가 분리법으로 절정에 달했다.[4]

공화주의자들은 "적대적인" 교회와 국가 분리 접근 방식을 보였는데, 이는 프랑스 혁명 중의 탈기독교화와 미래의 1917년 멕시코 헌법 및 1931년 스페인 헌법과 유사했다.[5] 1911년 5월 24일, 교황 비오 10세는 회칙 ''Iamdudum''을 발표하여 새로운 공화국의 반교권주의를 종교적 시민 자유의 박탈과 "교회 탄압을 위해 포르투갈에서 제정된 믿을 수 없는 일련의 과잉과 범죄"를 이유로 비난했다.[6]

4. 제1차 세계 대전과 공화국의 위기 (1914-1918)

1917년 포르투갈 육군 소령 시드니우 파이스는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다.[30]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은 포르투갈에 프랑스 파병을 요청했지만, 영국의 요청을 부당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파이스의 쿠데타를 지지했다.[30] 파이스는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고 직접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게 하는 헌법 개정을 단행했고, 1918년 대통령에 취임하여 독재 정치를 시작했다. 파이스의 주변에는 왕정 복귀를 요구하는 우익 세력인 루지타니아 통합주의 구성원들이 모여들었고, 민주당, 개진당, 통일당은 파이스와 대립했다.[31] 망명 중인 마누엘 2세의 귀국을 바라는 왕당파, 복권을 꾀하는 성직자 및 지주, 반전을 주장하는 노동조합, 노동조합과 대립하는 자본가 등 다양한 세력이 파이스를 지지했지만, 각 계층을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데는 실패했다.[32]

파이스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스페인 독감 유행으로 약 10,000명이 사망했고, 생활고를 호소하는 파업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등 치안이 악화되었다.[33] 파이스는 국가 식량을 확보하고 매점매석과 암시장의 단속을 강화했지만 성과는 없었다.[34] 군사 독재 정권에는 유능한 참모가 부재하여 행정이 혼란에 빠졌고, 공포 정치가 시행되었으며, 민중 사이에 불만이 확산되었다.[35] 1918년 10월, 코임브라에서 군부의 민주당 파가 봉기했고, 반란은 에보라와 리스본까지 확산되었다. 결국 1918년 12월 파이스는 리스본에서 암살되었다.[36]

파이스 암살 이후, 1919년 1월 19일 왕당파는 북부 포르투와 남부 리스본에서 왕정 복귀를 선언했다(북부 왕국/Monarchy of the North영어). 그러나 리스본 시민들은 공화제를 지지하여 남부의 왕당파는 즉시 진압되었고, 2월 13일 북부 왕당파도 포르투를 내주면서 내전은 종결되었다.[31]

4. 1. 시도니우 파이스의 독재 (1917-1918)

1917년 포르투갈 육군 소령 시드니우 파이스는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다.[30]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은 포르투갈에 프랑스 파병을 요청했지만, 영국의 요청을 부당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파이스의 쿠데타를 지지했다.[30] 파이스는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고 직접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게 하는 헌법 개정을 단행했고, 1918년 대통령에 취임하여 독재 정치를 시작했다. 파이스의 주변에는 왕정 복귀를 요구하는 우익 세력인 루지타니아 통합주의 구성원들이 모여들었고, 민주당, 개진당, 통일당은 파이스와 대립했다.[31] 망명 중인 마누엘 2세의 귀국을 바라는 왕당파, 복권을 꾀하는 성직자 및 지주, 반전을 주장하는 노동조합, 노동조합과 대립하는 자본가 등 다양한 세력이 파이스를 지지했지만, 각 계층을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데는 실패했다.[32]

파이스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스페인 독감 유행으로 약 10,000명이 사망했고, 생활고를 호소하는 파업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등 치안이 악화되었다.[33] 파이스는 국가 식량을 확보하고 매점매석과 암시장의 단속을 강화했지만 성과는 없었다.[34] 군사 독재 정권에는 유능한 참모가 부재하여 행정이 혼란에 빠졌고, 공포 정치가 시행되었으며, 민중 사이에 불만이 확산되었다.[35] 1918년 10월, 코임브라에서 군부의 민주당 파가 봉기했고, 반란은 에보라와 리스본까지 확산되었다. 결국 1918년 12월 파이스는 리스본에서 암살되었다.[36]

파이스 암살 이후, 1919년 1월 19일 왕당파는 북부 포르투와 남부 리스본에서 왕정 복귀를 선언했다(북부 왕국/Monarchy of the North영어). 그러나 리스본 시민들은 공화제를 지지하여 남부의 왕당파는 즉시 진압되었고, 2월 13일 북부 왕당파도 포르투를 내주면서 내전은 종결되었다.[31]

5. 제1공화국의 붕괴 (1919-1926)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 측으로 참전한 포르투갈은 승전국이었지만, 전쟁의 결과는 참담했다.[37] 전쟁으로 인한 재정 악화는 심각했고, 시도니우 파이스의 독재 이후 여론은 구세주의 등장을 기대하는 분위기였다.[38] 많은 군인들이 정치에 개입하게 되었고,[38] 1919년부터 1921년까지 18개의 내각이 난립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다.[36]

전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포르투갈은 국제적인 인정을 받고 식민지 영유권을 보장받았지만, 국내 정치는 안정을 찾지 못했다.[36] 재정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1914년부터 1920년 사이에 물가가 452%나 상승했다.[38] 통화 가치 하락은 수입품 가격 폭등을 야기했지만, 역설적으로 수입 대체 산업의 성장을 촉진하기도 했다.[38] 산업 성장과 1919년 결성된 노동총동맹의 주도로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은 향상되었지만, 공화정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중산층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39]

1921년 5월, 리베라토 핀토가 반란을 일으켜 자유당 내각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38] 같은 해 10월 19일에는 피의 밤 사건이 발생하여 안토니오 그란조 수상을 포함한 여러 정치인이 암살당하고, 보수 정권이 붕괴되었다.

1923년부터 포르투갈 경제는 회복세를 보였고, 1924년에는 에스쿠도 가치 하락이 멈추고 채무도 감소했다.[40] 그러나 정부의 사회주의적 정책은 노동자 계층 외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40] 1925년 4월 18일, 스페인의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군사 정권을 모방하려는 장교들의 군사 봉기가 일어났지만 실패했다. 이 봉기는 우익 세력뿐만 아니라 상공업자와 지주들의 경제 동우회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40]

1926년 5월 28일, 마누엘 고메스 다 코스타 장군이 브라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리스본으로 진군했다(1926년 5월 28일 쿠데타). 왕당파와 우익은 물론, 민주당 정권에 비판적인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도 쿠데타를 지지했다. 잦은 내각 교체로 인한 불안정한 정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여론이 높았다.[41] 베르나르디누 마샤두 대통령(사진)은 조제 멘데스 카베사다스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사임했으며, 6월에 고메스 다 코스타에 의해 군사 정권이 수립되면서 제1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6. 제1공화국의 유산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1920년대까지 공화주의적 꿈의 실패와 붕괴를 강조해 왔다.[7] 1920년대에 내려진 결론은 국가의 질병에 대한 해결책은 단순히 국왕을 제거하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7] 제1공화국은 높아진 기대와 초라한 성과의 대립으로 인해 붕괴되고 종말을 맞이했다.[7]

그러나, 제1공화국은 20세기 포르투갈에 지울 수 없고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다.[8] 갱신된 민법, 교육 혁명의 기초, 국가와 교회의 분리 원칙, 해외 제국(1975년에야 종식됨), 그리고 오늘날 포르투갈의 집단적 정체성을 여전히 규정하는 강한 상징적 문화(국기, 국가, 거리 이름 지정 등)가 그것이다.[8]

현재의 포르투갈 국기는 제1공화국에서 유래되었다.
공화국의 주요 유산은 실제로 기억의 유산이었다.[8]

7. 주요 인물

포르투갈 제1공화국은 1910년부터 1926년까지 16년 동안 8명의 대통령, 1개의 임시 정부, 45명의 총리 및 1개의 헌법적 "훈타"를 거치는 등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

테오필루 브라가는 1910년부터 1911년까지 임시 정부 대통령을 역임했고, 1915년에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마누엘 드 아리아가는 1911년부터 1915년까지 초대 선출 대통령을 역임했다. 베르나르디누 마샤두는 1915년부터 1917년까지, 그리고 1925년부터 1926년까지 두 차례 대통령을 역임했으나, 두 번 모두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시도니우 파이스는 1917년부터 1918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했지만 암살당했다. 주앙 두 칸투 이 카스트루는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안토니우 조제 드 알메이다는 1919년부터 1923년까지, 마누엘 테이셰이라 고메스는 1923년부터 1925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했다.

포르투갈 제1공화국은 16년(1910–1926) 동안 8명의 대통령, 1개의 임시 정부, 45명의 총리 및 1개의 헌법적 "훈타"를 거치는 등 불안정한 시기였다.

제1공화국 시기 역대 총리는 다음과 같다.


  • 주앙 샤가스 (1911년 9월 4일 - 1911년 11월 13일)
  • 아우구스투 드 바스콘셀루스 (1911년 11월 13일 - 1912년 6월 16일)
  • 두아르테 레이테 (1912년 6월 16일 - 1913년 1월 9일)
  • 아폰수 코스타 (1913년 1월 9일 - 1914년 2월 9일)
  • 베르나르디누 마샤두 (1914년 2월 9일 - 1914년 12월 12일)
  • 빅토르 우고 데 아세베두 코르티뉴 (1914년 12월 12일 - 1915년 1월 28일)
  • 조아킹 피멘타 드 카스트루 (1915년 1월 28일 - 1915년 5월 14일)
  • 군사 정권 (1915년 5월 14일 - 1915년 5월 17일)
  • * 조제 노르톤 드 마투스
  • * 안토니우 마리아 다 실바
  • * 조제 데 프레이타스 리베이루
  • * 알프레두 데 사 카르도주
  • * 아르바루 데 카스트루
  • 조제 데 카스트루 (1915년 5월 17일 - 1915년 11월 29일)
  • 아폰수 코스타 (1915년 11월 29일 - 1916년 3월 16일)
  • 안토니우 조제 데 알메이다 (1916년 3월 16일 - 1917년 4월 25일)
  • 아폰수 코스타 (1917년 4월 25일 - 1917년 12월 8일)
  • 시도니우 파이스 (1917년 12월 8일 - 1918년 12월 23일)
  • 주앙 타마니니 바르보사 (1918년 12월 23일 - 1919년 1월 27일)
  • 조제 레르바스 (1919년 1월 27일 - 1919년 3월 30일)
  • 도밍구스 페레이라 (1919년 3월 30일 - 1919년 6월 30일)
  • 알프레두 데 사 카르도주 (1919년 6월 30일 - 1920년 1월 21일)
  • 도밍구스 페레이라 (1920년 1월 21일 - 1920년 3월 8일)
  • 안토니우 마리아 바프티스타 (1920년 3월 8일 - 1920년 6월 6일)
  • 조제 라모스 프레투 (1920년 6월 6일 - 1920년 6월 26일)
  • 안토니우 마리아 다 실바 (1920년 6월 26일 - 1920년 7월 19일)
  • 안토니우 그란조 (1920년 7월 19일 - 1920년 11월 20일)
  • 아르바루 데 카스트루 (1920년 11월 20일 - 1920년 11월 30일)
  • 리베라투 핀투 (1920년 11월 30일 - 1921년 3월 2일)
  • 베르나르디누 마샤두 (1921년 3월 2일 - 1921년 5월 23일)

7. 1. 대통령

포르투갈 제1공화국은 1910년부터 1926년까지 16년 동안 8명의 대통령, 1개의 임시 정부, 45명의 총리 및 1개의 헌법적 "훈타"를 거치는 등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

테오필루 브라가는 1910년부터 1911년까지 임시 정부 대통령을 역임했고, 1915년에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마누엘 드 아리아가는 1911년부터 1915년까지 초대 선출 대통령을 역임했다. 베르나르디누 마샤두는 1915년부터 1917년까지, 그리고 1925년부터 1926년까지 두 차례 대통령을 역임했으나, 두 번 모두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시도니우 파이스는 1917년부터 1918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했지만 암살당했다. 주앙 두 칸투 이 카스트루는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안토니우 조제 드 알메이다는 1919년부터 1923년까지, 마누엘 테이셰이라 고메스는 1923년부터 1925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했다.

7. 2. 총리

포르투갈 제1공화국은 16년(1910–1926) 동안 8명의 대통령, 1개의 임시 정부, 45명의 총리 및 1개의 헌법적 "훈타"를 거치는 등 불안정한 시기였다.

제1공화국 시기 역대 총리는 다음과 같다.

  • 주앙 샤가스 (1911년 9월 4일 - 1911년 11월 13일)
  • 아우구스투 드 바스콘셀루스 (1911년 11월 13일 - 1912년 6월 16일)
  • 두아르테 레이테 (1912년 6월 16일 - 1913년 1월 9일)
  • 아폰수 코스타 (1913년 1월 9일 - 1914년 2월 9일)
  • 베르나르디누 마샤두 (1914년 2월 9일 - 1914년 12월 12일)
  • 빅토르 우고 데 아세베두 코르티뉴 (1914년 12월 12일 - 1915년 1월 28일)
  • 조아킹 피멘타 드 카스트루 (1915년 1월 28일 - 1915년 5월 14일)
  • 군사 정권 (1915년 5월 14일 - 1915년 5월 17일)
  • * 조제 노르톤 드 마투스
  • * 안토니우 마리아 다 실바
  • * 조제 데 프레이타스 리베이루
  • * 알프레두 데 사 카르도주
  • * 아르바루 데 카스트루
  • 조제 데 카스트루 (1915년 5월 17일 - 1915년 11월 29일)
  • 아폰수 코스타 (1915년 11월 29일 - 1916년 3월 16일)
  • 안토니우 조제 데 알메이다 (1916년 3월 16일 - 1917년 4월 25일)
  • 아폰수 코스타 (1917년 4월 25일 - 1917년 12월 8일)
  • 시도니우 파이스 (1917년 12월 8일 - 1918년 12월 23일)
  • 주앙 타마니니 바르보사 (1918년 12월 23일 - 1919년 1월 27일)
  • 조제 레르바스 (1919년 1월 27일 - 1919년 3월 30일)
  • 도밍구스 페레이라 (1919년 3월 30일 - 1919년 6월 30일)
  • 알프레두 데 사 카르도주 (1919년 6월 30일 - 1920년 1월 21일)
  • 도밍구스 페레이라 (1920년 1월 21일 - 1920년 3월 8일)
  • 안토니우 마리아 바프티스타 (1920년 3월 8일 - 1920년 6월 6일)
  • 조제 라모스 프레투 (1920년 6월 6일 - 1920년 6월 26일)
  • 안토니우 마리아 다 실바 (1920년 6월 26일 - 1920년 7월 19일)
  • 안토니우 그란조 (1920년 7월 19일 - 1920년 11월 20일)
  • 아르바루 데 카스트루 (1920년 11월 20일 - 1920년 11월 30일)
  • 리베라투 핀투 (1920년 11월 30일 - 1921년 3월 2일)
  • 베르나르디누 마샤두 (1921년 3월 2일 - 1921년 5월 23일)

참조

[1] 논문 Monarchy and Republic in Contemporary Portugal: From Revolution to the Rise of Executive Power https://www.jstor.or[...] 2017-01
[2] 문서 in [[Continental Portugal]], [[Madeira]] and [[Azores]], official in the [[Portuguese Empire]]
[3] 서적 A history of Spain and Portugal 1973
[4] 웹사이트 Portugal – The First Republic, 1910–26 https://www.britanni[...] 2021-07-16
[5] 서적 Totalitarianism and Political Religions https://books.google[...] Routledge
[6] 웹사이트 IAMDUDUM: ON THE LAW OF SEPARATION IN PORTUGAL http://www.papalency[...]
[7] 간행물 E-Journal of Portuguese History http://www.brown.edu[...] 2011
[8] 문서 The Memory of the Portuguese First Republic throughout the Twentieth Century 2011
[9] 서적 現代のポルトガル
[10] 서적 図説 ポルトガルの歴史
[11] 서적 ポルトガルの歴史
[12] 서적 ポルトガルの歴史
[13] 서적 ブルジョワジーの世紀 山川出版社 2000-06
[14] 서적 図説 ポルトガルの歴史
[15] 서적 図説 ポルトガルの歴史
[16] 서적 現代のポルトガル
[17] 서적 ポルトガル史
[18] 서적 ポルトガル
[19] 서적 ポルトガル 震災と独裁、そして近代へ
[20] 서적 現代のポルトガル
[21] 서적 図説 ポルトガルの歴史
[22] 서적 ポルトガル史
[23] 서적 ポルトガル史
[24] 서적 ポルトガル史
[25] 서적 現代のポルトガル
[26] 서적 ポルトガルの歴史
[27] 서적 現代のポルトガル
[28] 서적 ポルトガル
[29] 서적 ポルトガル史
[30] 서적 ポルトガルの歴史
[31] 서적 現代のポルトガル
[32] 서적 ポルトガルの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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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서적 ポルトガル史
[35] 서적 現代のポルトガル
[36] 서적 図説 ポルトガルの歴史
[37] 서적 ポルトガル史
[38] 논문 現代のポルトガル
[39] 논문 現代のポルトガル
[40] 논문 現代のポルトガル
[41] 논문 現代のポルトガ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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