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기 브뤼닝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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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기 브뤼닝 내각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1931년 10월부터 1932년 5월까지 하인리히 브뤼닝이 이끈 내각이다. 베르사유 조약, 바이마르 헌법, 세계 대공황 등의 배경 속에서, 브뤼닝 내각은 배상금 지불 종료를 핵심 과제로 삼고, 디플레이션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경제 정책 실패와 사회적 불안 심화, 힌덴부르크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인해 1932년 5월 30일 사임했고, 프란츠 폰 파펜 내각으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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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 브뤼닝 내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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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 정보 | |
내각 이름 | 제2기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 |
내각 종류 | 해당 없음 |
내각 번호 | 18대 |
관할 국가 | 바이마르 공화국 |
재임 기간 | 1931년 10월 10일 ~ 1932년 6월 1일 (7개월 22일) |
총리 | 하인리히 브뤼닝 |
부총리 | 헤르만 디트리히 |
국가 원수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의회 상황 | 소수 대통령 내각 |
의회 구성 | |130|577|per=1}} |
야당 | 독일 국가인민당 독일 공산당 나치당 |
선거 | 1930년 연방 선거 |
의회 임기 | 바이마르 공화국 제5대 국가의회 |
이전 내각 | 제1기 브뤼닝 내각 |
다음 내각 | 폰 파펜 내각 |
구성 정당 |
2.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에 놓였다.
1930년 3월, 독일 중앙당 소속 하인리히 브뤼닝이 독일 총리에 임명되어 내각을 구성하였다.
3. 브뤼닝 내각의 성립과 정책
3. 1. 제2차 브뤼닝 내각 (1931.10 ~ 1932.05)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 등 베를린 정치계 배후 인물들은 하인리히 브뤼닝이 제안하는 것보다 더 보수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브뤼닝 자신도 보수 우파 정당인 독일 국가 인민당(DNVP)의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와 나치당(NSDAP)의 아돌프 히틀러와 대화하며 힌덴부르크 대통령 지지 조건으로 새 정부에 그들을 포함시키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1]
이후 내각 개편은 주로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힌덴부르크는 내각 구성원들이 정당에 얽매이지 않고 이전보다 더 보수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브뤼닝이 이를 약속한 후, 힌덴부르크는 정부의 사임을 수락하고 브뤼닝에게 새 내각 구성을 요청했다.[1]
1931년 10월 9일, 새 정부 구성이 완료되었으나 힌덴부르크의 기대만큼 보수적이지는 않았다. 브뤼닝은 중공업계 주요 인사를 참여시키지 못했고, 대신 BASF 이사진 출신인 헤르만 발름볼트가 경제부 장관을 맡았다. 빌헬름 그뢰너는 내무부 장관을 겸임하게 되었고, 법무부 장관은 독일 국가인민당과 가까운 쿠르트 욜이 맡았다. 보수국민당의 고트프리트 트레비라누스는 교통부 장관이 되었고, 브뤼닝 자신은 외무부 장관을 겸임했다. 11월 7일에는 한스 슐랑에-쇠닝겐이 동부 지원 담당 위원 겸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
독일 인민당은 더 이상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차악으로서 새 내각을 지지하게 되었다. 정부는 사회민주당 등의 도움으로 10월 16일 불신임 투표에서 살아남았고, 국회는 1932년 2월까지 휴회했다.[1]
제2기 브뤼닝 내각은 초기에는 국가사회주의자들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였으나, 이는 히틀러와 나치당을 협력으로 이끌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나치와의 화해 시도는 사회민주당 등의 반발을 샀고, 브뤼닝은 1931년 12월 8일 라디오 연설에서 나치와 거리를 두었다.[1]
같은 날, 경제와 재정을 확보하고 국내 평화를 보호하기 위한 제4차 긴급 조례가 발표되었다. 정부는 디플레이션 경제 정책을 고수하며 임금과 물가를 낮추고, 금리 인하와 판매세 인상을 단행했다. 또한 정치 단체의 제복 착용을 금지했다.[1]
브뤼닝 정부의 핵심 과제는 배상금 지불 종료였다. 국제 결제 은행 특별 자문 위원회는 독일의 배상금 지불 능력에 대해 논의했고, 전면적인 재검토와 국제 회의를 제안했다. 1932년 1월 9일, 브뤼닝은 독일이 배상금 지불을 재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2] 이후 1932년 로잔 회의에서 배상금 지불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1932년 2월 26일, 브뤼닝의 경제 정책에 대한 불신임 투표는 실패했고,[3] 3월 29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정부가 국회의 참여 없이 예산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긴급 법령을 발표했다.[4] 4월, 제네바에서 열린 군비 축소 및 제한 회의에서 브뤼닝은 베르사유 조약의 군축 조항 철폐를 요구했으나, 프랑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
3. 1. 1. 내각 명단
4. 브뤼닝 내각의 경제 정책과 사회적 영향
제2기 브뤼닝 내각은 국가사회주의자들에게 어느 정도 관대한 태도를 보였으나, 이는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정당이 정부 협력 대신 급진적인 반대를 포기하도록 설득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나치와의 화해 시도는 사회민주당과 집권 정당 대표들 사이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브뤼닝은 1931년 12월 8일 라디오 연설에서 나치와 거리를 두었다.
브뤼닝 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 지불 종료를 핵심 과제로 삼았다. 브뤼닝의 요청으로 국제 결제 은행 특별 자문 위원회는 독일의 영 플랜 의무 이행 가능성을 논의했고, 배상금 지불 전면 재검토와 로잔 국제 회의를 제안했다. 1932년 1월 9일 브뤼닝은 후버 모라토리엄 만료 후 독일의 배상금 지불 재개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했고,[2] 이후 1932년 로잔 회의에서 배상금 지불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1932년 2월 26일, 브뤼닝 경제 정책에 대한 불신임 투표는 실패했다.[3] 3월 29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국회 참여 없이 예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긴급 법령을 발표했다.[4] 4월, 제네바 군비 축소 및 제한 회의에서 브뤼닝은 베르사유 조약 군축 조항 철폐를 요구했으나 프랑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5]
4. 1. 긴축 재정과 디플레이션 정책
1931년 12월 8일, 내각 내 어려운 협상 끝에 경제와 재정을 확보하고 국내 평화를 보호하기 위한 제4차 긴급 조례가 발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과 관련된 외교 정책상의 이유로 정부는 디플레이션 경제 정책을 고수했다. 정부는 적극적인 경제 프로그램이나 신용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고용 창출 방안을 제안하지 않았다. 임금과 물가가 모두 낮아졌으며, 정부는 전반적인 구매력이 급격하게 감소하지 않고 독일 제품이 해외에서 더 쉽게 판매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금리는 신중하게 인하되었고, 판매세는 인상되었는데, 이 두 조치는 모두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2] 또한 이 긴급 법령은 정치 단체의 제복 착용을 전면 금지함으로써 국내의 급진화를 억제하려 했다.5. 브뤼닝 내각의 외교 정책
브뤼닝 내각은 독일의 국제적 지위 회복과 경제 제재 완화를 위해 노력했다.
5. 1. 배상금 문제와 로잔 회의
브뤼닝 내각의 핵심 과제는 배상금 지불을 종료하는 것이었다. 브뤼닝의 요청에 따라 국제 결제 은행의 특별 자문 위원회는 독일이 최근 채택된 영 플랜에 따라 의무를 계속 이행할 수 있는지 여부를 논의했다. 위원회는 배상금 지불의 전면적인 재검토와 스위스 로잔에서 열릴 국제 회의를 위한 광범위한 조치를 제안했다. 1932년 1월 9일 브뤼닝은 후버 모라토리엄이 7월 1일에 만료된 후 독일이 배상금 지불을 재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2] 이후 1932년 6월과 7월에 열린 1932년 로잔 회의는 사실상 배상금 지불의 종결로 이어졌다.5. 2. 군축 회담과 독일의 재무장 요구
1932년 4월, 제네바에서 열린 군비 축소 및 제한 회의에서 브뤼닝은 독일과 관련된 베르사유 조약의 군축 조항 철폐를 요구했으나, 프랑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6. 브뤼닝 내각의 몰락과 나치당의 부상
경제 위기가 심화되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브뤼닝 내각은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갔다. 정부가 대량 실업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배상금 지급 종료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적절한 국가 프로그램이 없었던 것도 문제였다.[2]
이러한 상황에서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히틀러와 비밀 협상을 진행하여 나치당을 정권에 참여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히틀러는 브뤼닝의 축출, 돌격대(SA)와 친위대(SS)에 대한 금지령 해제, 그리고 새로운 선거 실시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6. 1. 대통령 힌덴부르크와의 갈등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을 비롯한 베를린 정치계의 배후 인물들은 브뤼닝보다 훨씬 보수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내각 구성원들이 정당에 얽매이지 않고 이전보다 더 보수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브뤼닝은 이를 따르겠다고 약속했다.[1]브뤼닝 정부는 대량 실업 문제 해결을 배상금 지급 종료에 종속시키고, 일자리 창출을 위한 국가 프로그램 부재로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2]
브뤼닝이 힌덴부르크의 신뢰를 잃은 것은 더 큰 문제였다. 1932년 4월 10일 대통령 재선에서 힌덴부르크는 SPD과 중앙당의 지지에 힘입어 당선되었는데, 브뤼닝에게 개인적인 책임을 돌리며 분개했다.[3]
1932년 4월 13일, 브뤼닝 내각은 대통령 긴급 칙령을 통해 나치 돌격대(SA)와 친위대(SS)를 금지했다.[4] 힌덴부르크는 SPD가 지원하는 흑적금이 금지되지 않은 것에 분노했다. 슐라이허는 이를 이용해 브뤼닝과 빌헬름 그뢰너 국방장관을 반대했고, 그뢰너는 5월 12일 사임했다. 슐라이허는 나치를 포함하는 새 정부를 위해 물밑 협상을 벌였고, 군대 지원을 받는 권위주의 정부를 구상했다.[5] 히틀러는 브뤼닝 축출, SA/SS 금지 해제, 새 선거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동부 지원 논쟁도 브뤼닝 몰락의 요인이었다. 정부는 독일 동부의 과도한 부채 농지를 매입, 분할하여 정착민에게 제공하려 했으나, 힌덴부르크는 이를 "농업 볼셰비즘"이라며 반대했다. 측근들의 영향으로 힌덴부르크는 브뤼닝 해임을 결심했다.
1932년 5월 30일, 힌덴부르크는 브뤼닝에게 새 긴급 칙령 발령과 인사이동에 동의하지 않겠다고 통보했고, 다음 날 브뤼닝 정부는 사임했다. 1932년 6월 1일, 힌덴부르크는 프란츠 폰 파펜을 새 총리로 임명했다.
6. 2. 나치당의 권력 장악
브뤼닝 정부는 대량 실업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배상금 지급 종료에만 집중하면서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다.[1]또한, 브뤼닝은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힌덴부르크의 재선을 도왔지만, 힌덴부르크는 브뤼닝이 중앙당과 사회민주당(SPD)의 지지를 받았다는 이유로 그에게 불만을 품었다.[2]
1932년 4월 13일, 브뤼닝 내각은 나치 돌격대(SA)와 친위대(SS)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3] 이는 나치당의 폭력 행위에 대한 프로이센 등 여러 주 정부의 압력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힌덴부르크는 국가방패 흑적금과 같은 친민주주의 무장 단체는 금지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었다.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브뤼닝과 국방장관 빌헬름 그뢰너를 압박했고, 결국 그뢰너는 5월 12일에 사임해야 했다. 슐라이허는 나치당을 포함하는 새로운 정부 구성을 위해 비밀 협상을 진행했고, 군대의 지원을 받는 권위주의 정부를 세우고 나치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4] 히틀러는 브뤼닝 해임, SA/SS 금지 해제, 새로운 선거 실시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5]
브뤼닝의 몰락은 동부 지원을 둘러싼 논쟁으로 가속화되었다. 정부는 독일 동부 지역의 부채가 많은 농지를 매입하여 정착민들에게 제공하려 했으나, 힌덴부르크는 이를 "농업 볼셰비즘"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힌덴부르크는 브뤼닝을 해임하기로 결정했다.
1932년 5월 30일, 힌덴부르크는 브뤼닝에게 정부가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새로운 긴급 칙령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통보했고, 브뤼닝 내각은 다음 날 사임했다. 1932년 6월 1일, 힌덴부르크는 슐라이허의 추천에 따라 프란츠 폰 파펜을 새로운 총리로 임명했다.
7. 브뤼닝 내각에 대한 평가와 역사적 교훈
브뤼닝 내각은 경제 위기 극복에 실패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참조
[1]
웹사이트
Das Kabinett Brüning II 10. Oktober 1931–1. Juni 1932
https://www.bundesar[...]
2023-08-06
[2]
논문
Eleven Years of Reparations
https://www.jstor.or[...]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32-06
[3]
웹사이트
Was War am 26. Februar 1932
https://chroniknet.d[...]
2023-06-27
[4]
웹사이트
Was War am 29.März 1932
https://chroniknet.d[...]
2023-06-27
[5]
논문
France and the World Disarmament Conference of 1932–34
https://openaccess.c[...]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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