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5항공사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315항공사단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창설되었으며, 한국 전쟁과 냉전 시기에는 수송 임무를 담당했다. 1944년 7월 콜로라도에서 창설되어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 그룹을 지휘했으며, 일본 본토 석유 시설 공격에 참여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에는 수송사단으로 재편되어 부상자 후송, 물자 및 병력 수송을 지원했다. 이후 인도차이나 전쟁 프랑스군 지원, USS 푸에블로 나포 사건 지원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으며, 1969년 4월 예산 삭감으로 해체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2. 역사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 비행단 4개를 지휘하기 위해 1944년 7월 콜로라도 페터슨 비행장에서 '''제315폭격비행단'''이 창설되었다.[1] 제2항공군에 의해 예하 비행단들은 캔자스에서, 비행단은 콜로라도에서 훈련받았다.
1945년 3월 말, 비행단 본부는 마리아나 제도 괌으로 이동하여 XXI 폭격 사령부에 배속되었다. 제315비행단은 B-29 비행단 중 5번째이자 마지막 비행단이었다. 대부분의 비행단과 비행대대는 B-29B 항공기를 운용했는데, B-29B는 꼬리 기관총을 제외한 다른 B-29에 사용된 모든 총과 조준 장비를 제거하여 무게를 줄였다. 또한 폭격 및 항법을 위한 AN/APQ-7 이글 레이더와 꼬리 기관총 조준용 AN/APG-15 두 개의 새로운 레이더 장치가 설치되었다.[3]
마리아나 제도에서 비행단은 제16, 제331, 제501, 제502 폭격비행단을 지휘했다. 제16, 제501 폭격비행단은 4월 중순, 제331, 제502 폭격비행단은 5월 중순에 도착했다.[4]
예하 비행단들은 추크 모엔섬, 추크 석호, 캐롤라인 제도와 마리아나 제도의 다른 지점들을 상대로 "셰이크다운" 임무를 수행했다. 6월 26일, 제16, 제501 폭격비행단은 욧카이치 우쓰베 정유소를 공격하면서 일본에 대한 전투 임무를 시작했고, 8월 1일, 제315, 제502 폭격비행단은 가와사키 미쓰비시 하바나 정유소를 공격하면서 전투에 참여했다. 4개 비행단 모두 일본의 석유 산업 시설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4]
8월 14일, 비행단은 마지막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그 후, B-29는 일본과 만주에 있는 연합군 전쟁 포로 수용소에 구호 물품을 수송했다. 비행단들은 전선에 늦게 도착하여 1946년 4/5월이 되어서야 미국으로 돌아왔다.[4]
1946년 5월 말, 비행단은 일본 아시야 육군 비행장으로 이동하여 제5공군 군사 점령 부대의 일부가 되었다. 1946년 1월 '''제315혼성비행단'''으로 재지정되어 점령 임무를 수행하는 전투기 및 폭격 부대를 혼합하여 통제했으며, 점령 기간 동안 일본 상공에 방공을 제공했다. 1950년 3월 해체되었다.[1]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1951년 1월 사단은 다시 동원되어 극동 공군에 재배속되었다. '''제315 항공 사단'''(전투 수송)으로 재지정되었으며,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 직후 설립된 극동 공군 전투 수송 사령부(임시)의 자원을 인수했다.[1]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사단은 다음 부대의 지휘 및 통제를 맡았다:[1]
사단은 부상자를 한국에서 후송하고, 물자와 인원을 공수했으며, 비상 물자, 자재, 증원 병력, 우편, 식량 및 탄약을 수송했다. 또한 일본에서 연합 훈련에 참여하고, 수많은 전투 임무에 참여했으며, 극동 지역 내에서 정기 수송 일정을 운영했다.[1]
한국 전쟁이 끝나기 전, 제315항공사단은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53년 5월부터 1954년 7월까지 페어차일드 C-119 플라잉 박스카를 프랑스군에 제공하고, 프랑스 공군 조종사와 정비 인력을 훈련시켰으며, 프랑스군 지원을 위한 추가적인 공수 임무를 수행했다.[1] 1954년 6월에서 7월 사이에는 '오퍼레이션 부상 전사(Operation Wounded Warrior)'를 통해 인도차이나에서 부상당한 프랑스군 509명을 후송했다.[5] 프랑스군을 수송하는 14,000마일의 공수 작전은 정치적 고려로 인해 동쪽 경로를 따랐다.[6]
1954년 7월, 제315항공사단은 서태평양 지역에서 정상적인 공수 작전을 재개했으며, 일본에서 훈련 연습에 참가했다. 아시야 기지에서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까지 평시 대비 작전을 계속했고, 1962년에는 동남아시아에서 확대되는 분쟁에 대한 공수 지원을 시작했다. 한편, 제315항공사단은 극동 지역에서 일상적인 공수 작전을 계속 수행하고, 인도주의적 임무를 수행했으며, 가능할 때마다 훈련 연습에 참가했다.[1]
1968년 1월 북한의 USS 푸에블로 나포로 촉발된 위기 상황에서, 제315항공사단은 대한민국으로의 긴급 공수 작전을 지원했다.[1]
2. 1. 제2차 세계 대전
'''제315폭격비행단'''은 1944년 7월 콜로라도 페터슨 비행장에서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 비행단 4개를 지휘하기 위해 창설되었다.[1] 제2항공군에 의해 예하 비행단들은 캔자스에서, 비행단은 콜로라도에서 훈련받았다.
1945년 3월 말, 비행단 본부는 중앙 태평양 마리아나 제도의 괌으로 이동하여 XXI 폭격 사령부에 배속되었다. 제315비행단은 B-29 비행단 중 5번째이자 마지막 비행단이었다. 대부분의 비행단과 비행대대는 B-29B 항공기를 운용했다. B-29B는 꼬리 기관총을 제외한 다른 B-29에 사용된 모든 총과 조준 장비를 제거하여 무게를 줄였다. 또한, 폭격 및 항법을 위한 AN/APQ-7 이글 레이더와 꼬리 기관총 조준용 AN/APG-15 두 개의 새로운 레이더 장치가 설치되었다.[3]
마리아나 제도에서 비행단은 제16, 제331, 제501, 제502 폭격비행단을 지휘했다. 제16, 제501 폭격비행단은 4월 중순, 제331, 제502 폭격비행단은 5월 중순에 도착했다.[4]
예하 비행단들은 추크의 모엔섬, 추크 석호, 캐롤라인 제도와 마리아나 제도의 다른 지점들을 상대로 "셰이크다운" 임무를 수행했다. 6월 26일, 제16, 제501 폭격비행단은 욧카이치의 우쓰베 정유소를 공격하면서 일본에 대한 전투 임무를 시작했다. 8월 1일, 제315, 제502 폭격비행단은 가와사키의 미쓰비시 하바나 정유소를 공격하면서 전투에 참여했다. 4개 비행단 모두 일본의 석유 산업 시설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4]
8월 14일, 비행단은 마지막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그 후, B-29는 일본과 만주에 있는 연합군 전쟁 포로 수용소에 구호 물품을 수송했다. 비행단들은 전선에 늦게 도착하여 1946년 4/5월이 되어서야 미국으로 돌아왔다.[4]
1946년 5월 말, 비행단은 일본 아시야 육군 비행장으로 이동하여 제5공군 군사 점령 부대의 일부가 되었다. 1946년 1월 '''제315혼성비행단'''으로 재지정되어 점령 임무를 수행하는 전투기 및 폭격 부대를 혼합하여 통제했으며, 점령 기간 동안 일본 상공에 방공을 제공했다. 1950년 3월 해체되었다.[1]
2. 2. 한국 전쟁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1951년 1월 사단은 다시 동원되어 극동 공군에 재배속되었다. 사단은 '''제315 항공 사단'''(전투 수송)으로 재지정되었으며, 북한의 남침 직후인 1950년 6월에 설립된 극동 공군 전투 수송 사령부(임시)의 자원을 인수했다.[1]사단은 다음 부대의 지휘 및 통제를 맡았다:[1]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사단은 부상자를 한국에서 후송하고, 물자와 인원을 공수하며, 비상 물자, 자재, 증원 병력, 우편, 식량 및 탄약을 수송하고, 일본에서 연합 훈련에 참여하고, 수많은 전투 임무에 참여했으며, 극동 지역 내에서 정기 수송 일정을 운영했다.[1]
2. 3. 냉전
한국 전쟁이 끝나기 전, 제315항공사단은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53년 5월부터 1954년 7월까지 페어차일드 C-119 플라잉 박스카를 프랑스군에 제공하고, 프랑스 공군 조종사와 정비 인력을 훈련시켰으며, 프랑스군 지원을 위한 추가적인 공수 임무를 수행했다.[1] 1954년 6월에서 7월 사이에는 '오퍼레이션 부상 전사(Operation Wounded Warrior)'를 통해 인도차이나에서 부상당한 프랑스군 509명을 후송했다.[5] 프랑스군을 수송하는 14,000마일의 공수 작전은 정치적 고려로 인해 동쪽 경로를 따랐다.[6]
1954년 7월, 제315항공사단은 서태평양 지역에서 정상적인 공수 작전을 재개했으며, 일본에서 훈련 연습에 참가했다. 아시야 기지에서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까지 평시 대비 작전을 계속했고, 1962년에는 동남아시아에서 확대되는 분쟁에 대한 공수 지원을 시작했다. 한편, 제315항공사단은 극동 지역에서 일상적인 공수 작전을 계속 수행하고, 인도주의적 임무를 수행했으며, 가능할 때마다 훈련 연습에 참가했다.[1]
1968년 1월 북한의 USS 푸에블로 나포로 촉발된 위기 상황에서, 제315항공사단은 대한민국으로의 긴급 공수 작전을 지원했다.[1]
3. 기록
'''제315폭격비행단'''은 1944년 7월 콜로라도 페터슨 비행장에서 4개의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 그룹을 지휘하는 조직으로 발족하여, 콜로라도에서 훈련을 받았다.[1] 1945년 3월 말 중앙 태평양 지역 마리아나 제도의 괌으로 이동하여 제21폭격사령부에 배속된 5번째이자 마지막 B-29 비행단이 되었다. 제315비행단은 제16, 제331, 제501, 제502를 지휘했으며, 이들은 추크의 모엔섬, 추크 석호, 그리고 캐롤라인 제도와 마리아나 제도의 다른 지점들을 상대로 "셰이크다운" 임무를 수행했다.[4]
1946년 5월 말 일본 아시야 육군 비행장으로 이동하여 제5공군 군사 점령 부대의 일부가 되었으며, 1946년 1월 '''제315혼성비행단'''으로 재지정되어 점령 임무를 수행하는 전투기 및 폭격 부대를 통제했고, 점령 기간 동안 일본 상공에 방공을 제공했다. 이 부대는 1950년 3월에 해체되었다.[1]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1951년 1월 제315항공사단은 다시 동원되어 극동 공군에 재배속되었다. '''제315 항공 사단'''(전투 수송)으로 재지정되었으며, 한국 전쟁 기간 동안 부상자 후송, 물자 및 인원 공수, 비상 물자 수송, 증원 병력 수송, 우편, 식량 및 탄약 수송, 일본 연합 훈련 참여, 전투 임무 참여, 극동 지역 내 정기 수송 일정 운영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1]
1953년 5월부터 1954년 7월까지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위해 C-119 플라잉 박스카를 제공하고, 프랑스 공군 조종사와 정비 인력을 훈련시켰으며, 프랑스군 지원을 위한 추가적인 공수 임무를 수행했다.[1]
1954년 7월, 제315항공사단은 서태평양 지역에서 정상적인 공수 작전을 재개했으며, 일본에서 훈련 연습에 참가했다. 1962년에는 동남아시아 분쟁에 대한 공수 지원을 시작했다. 제315항공사단은 극동 지역에서 일상적인 공수 작전을 계속 수행하고, 인도주의적 임무를 수행했으며, 훈련 연습에 참가했다.[1]
1968년 1월 북한의 USS 푸에블로 나포 사건으로, 제315항공사단은 대한민국으로의 긴급 공수 작전을 지원했다.[1] 제315항공사단은 예산 삭감으로 인해 1969년 4월에 해체되었고, 제314, 제374 및 제463는 재배치되었다.[1]
제315항공사단의 시기별 주둔지는 다음과 같다.
3. 1. 계보
- 1944년 6월 7일, '''제315폭격비행단, 초중량(315th Bombardment Wing, Very Heavy영어)'''으로 창설됨.[1]
- 1944년 7월 17일, 활동 개시.[1]
- 1946년 1월 8일, '''제315혼성비행단(315th Composite Wing영어)'''으로 개편됨.[1]
- 1948년 8월 20일, 해산함.[1]
- 1951년 1월 10일, '''제315항공사단 (전투화물)(315th Air Division (Combat Cargo)영어)'''로 개편됨.[1]
- 1951년 1월 25일, 활동 개시.[1]
- 1967년 8월 1일, '''제315항공사단(315th Air Division영어)'''으로 개편됨.[1]
- 1969년 4월 15일, 해산함.[1]
- 1978년 7월 1일, 분포표 '''제315항공사단(315th Air Division영어)'''로 통합정리됨. (비활동으로 남음)[1]
3. 2. 소속
3. 3. 편성
제315항공사단은 시기별로 다양한 부대로 구성되어 편성이 변화했다.; 제2차 세계 대전
; 비행단
; 비행전대
; 비행대대
3. 3. 1. 제2차 세계 대전
'''제315폭격비행단'''은 1944년 7월 콜로라도 페터슨 비행장에서 4개의 매우 무거운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 그룹을 지휘하는 조직으로 발족했다. 비행단은 콜로라도에서 훈련을 받았고, 예하 그룹들은 제2항공군에 의해 캔자스에서 훈련을 받았다.[1]
훈련이 완료되자 비행단 본부는 1945년 3월 말 중앙 태평양 지역 마리아나 제도의 괌으로 이동했다. 제315비행단은 XXI 폭격 사령부에 배속된 5번째이자 마지막 B-29 비행단이었다. 비행단의 대부분의 그룹과 비행대대는 B-29B 항공기를 운용했다. 제한 생산된 B-29B는 꼬리 기관총을 제외한 다른 B-29에 사용된 모든 총과 조준 장비를 제거하여 무게를 줄이도록 설계되었다. 무게를 줄임으로써 B-29B는 조금 더 높이, 조금 더 멀리 비행할 수 있었다. B-29B 항공기에는 두 개의 새로운 레이더 장치가 설치되었다. 하나는 폭격 및 항법을 위한 AN/APQ-7 이글 레이더였고, 다른 하나는 꼬리 기관총을 조준하는 데 사용되는 AN/APG-15였다. 이 두 개의 레이더 장치로 인해 B-29B는 독특한 모양을 갖게 되었는데, APQ-7 안테나는 두 개의 폭탄창 문 사이의 동체 아래에 작은 날개처럼 나타났고, APG-15는 꼬리 기관총 아래 항공기 꼬리에 공 모양의 안테나를 추가했다.[3]
마리아나 제도에서 비행단은 제16, 제331, 제501, 제502를 지휘했다. 제16과 제501은 4월 중순에 가장 먼저 도착했고, 제331과 제502는 1945년 5월 중순에 도착했다.[4]
예하 그룹들은 추크의 모엔섬, 추크 석호, 그리고 캐롤라인 제도와 마리아나 제도의 다른 지점들을 상대로 "셰이크다운" 임무를 수행했다. 제16과 제501은 6월 26일 욧카이치의 우쓰베 정유소를 공격하면서 일본에 대한 전투 임무를 시작했다. 제315와 제502는 8월 1일에 가와사키의 미쓰비시 하바나 정유소를 공격하면서 전투에 참여했다. 4개 그룹 모두에게 일본의 석유 산업 목표가 주요 목표였다.[4]
비행단은 적대 행위가 끝난 8월 14일에 마지막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그 후, 비행단의 B-29는 일본과 만주에 있는 연합군 전쟁 포로 수용소에 구호 물품을 수송했다. 전선에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그룹들은 1946년 4월/5월이 되어서야 미국으로 돌아왔다.[4]
비행단은 1946년 5월 말 일본 아시야 육군 비행장으로 이동하여 제5공군 군사 점령 부대의 일부가 되었다. 1946년 1월 '''제315혼성비행단'''으로 재지정되어 점령 임무를 수행하는 전투기 및 폭격 부대를 혼합하여 통제했으며, 점령 기간 동안 일본 상공에 방공을 제공했다. 이 부대는 점령 임무에서 해제되어 1950년 3월에 해체되었다.[1]
사령관은 프랭크 암스트롱 준장이며, 기지는 괌에 위치했다. 예하에 제16폭격비행단, 제331폭격비행단, 제501폭격비행단, 제502폭격비행단의 4개의 폭격비행단(Bomber Group)[7]을 보유했다.
3. 3. 2. 한국 전쟁 및 냉전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1951년 1월 제315항공사단은 다시 동원되어 극동 공군에 재배속되었다. '''제315 항공 사단'''(전투 수송)으로 재지정되었으며, 북한의 남침 직후인 1950년 6월에 설립된 극동 공군 전투 수송 사령부(임시)의 자원을 인수했다.[1]사단은 다음 부대를 지휘 및 통제했다:[1]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제315항공사단은 부상자 한국 후송, 물자 및 인원 공수, 비상 물자, 자재, 증원 병력, 우편, 식량 및 탄약 수송, 일본 연합 훈련 참여, 수많은 전투 임무 참여, 극동 지역 내 정기 수송 일정 운영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1]
한국에서의 전투 작전이 종료되기 전, 제315항공사단은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53년 5월부터 1954년 7월까지 프랑스군에게 C-119 플라잉 박스카를 제공하고, 프랑스 공군 조종사와 정비 인력을 훈련시켰으며, 프랑스군 지원을 위한 추가적인 공수 임무를 수행했다.[1] 1954년 6월에서 7월 사이에는 오퍼레이션 부상 전사(Operation Wounded Warrior) 동안 인도차이나에서 부상당한 프랑스군 509명을 소개했다.[5] 프랑스군을 수송하는 14,000마일의 공수 작전은 정치적 고려로 인해 동쪽 경로를 따랐다.[6]
1954년 7월, 제315항공사단은 서태평양 지역에서 정상적인 공수 작전을 재개했으며, 일본에서 훈련 연습에 참가했다. 아시야 기지에서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까지 평시 대비 작전을 지속했다. 1962년에는 동남아시아에서 확대되는 분쟁에 대한 공수 지원을 시작했다. 한편, 제315항공사단은 극동 지역에서 일상적인 공수 작전을 계속 수행하고, 인도주의적 임무를 수행했으며, 가능할 때마다 훈련 연습에 참가했다.[1]
1968년 1월 북한의 USS 푸에블로 나포로 촉발된 위기 상황에서, 제315항공사단은 대한민국으로의 긴급 공수 작전을 지원했다.[1]
제315항공사단은 예산 삭감으로 인해 1969년 4월에 해체되었다. 제315항공사단의 작전 부대(제314, 제374 및 제463)는 재배치되었다.[1]
3. 4. 기지
참조
[1]
웹사이트
Factsheet 315 Air Division
http://www.afhra.af.[...]
Air Force Historical Research Agency
2007-10-12
[2]
서적
Combat Units
[3]
문서
2015-02
[4]
문서
2015-02
[5]
웹사이트
http://c141heaven.in[...]
Hanger Digest, AMC Museum Foundation
[6]
간행물
"Toward the Air Mobility Command 1994 Revised"
[7]
서적
東京大空襲 B29から見た三月十日の真実
光人社NF文庫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