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SS의용기병사단 뤼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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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7SS의용기병사단 뤼초는 1945년 2월에 편성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활동한 독일 무장친위대 기병사단이다. 제8SS기병사단, 제22SS의용기병사단의 잔존 병력을 중심으로 편성되었으며,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출신 독일계 의용병과 일부 다른 국가 출신 의용병으로 구성되었다. 부다페스트 전투 이후 아마이저 전투단, 카이텔 전투단, SSL 전투단으로 분리되어 동부 전선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종전 직전 미국군에 항복하거나 소련군에 포로로 잡히는 등 궤멸되었다.

제37SS의용기병사단 뤼초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부대 정보
부대 명칭제37SS의용기병사단 뤼초
원어 명칭37. SS-Freiwilligen-Kavallerie-Division „Lützow“독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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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장
창설일1945년 2월
해체일1945년 5월
국가나치 독일
소속무장친위대
규모사단
병종기병
역할미상
표어나의 명예는 충성 (Meine Ehre heißt Treue!)
지휘관
주요 지휘관발데마르 페겔라인 (1945년 2월 26일 – 1945년 3월)
카를 게젤레 (1945년 3월 – 1945년 5월)
참전
주요 전투제2차 세계 대전
독소 전쟁
부다페스트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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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년 폐지 - 일본 제국 육군

2.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 2월, 부다페스트 전투에서 사실상 궤멸된 제8SS기병사단과 제22SS의용기병사단의 잔존 병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병사단 편성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제33기병사단으로 명명될 예정이었으나, 다른 부대들의 사단 승격으로 인해 1945년 3월 26일 공식적으로 제37SS의용기병사단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사단은 완전한 편성을 마치지 못한 채 아마이저 전투단(Kampfgruppe Ameiser독일어)과 카이텔 전투단(Kampfgruppe Keitel독일어) 등 여러 전투단으로 나뉘어 동부 전선헝가리오스트리아 지역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때문에 사단 전체가 단일 지휘체계 아래 작전을 수행한 적은 없으며, 각 전투단은 개별적으로 격전을 치르다 종전을 맞이했다. 사단의 구체적인 편성 과정과 전투 기록은 하위 문서를 참조하라.

2.1. 편성 배경

1945년 2월 11일, 부다페스트에서 포위된 독일 제9SS산악군단과 헝가리 제1군 일부 병력은 소비에트 붉은 군대의 포위망을 돌파하려 시도했다. 이 작전에는 제8SS기병사단과 제22SS의용기병사단의 잔존 병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탈출 시도는 소련군에게 사전에 간파되었고, 결국 785명만이 포위망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제8SS기병사단과 제22SS의용기병사단의 생존자는 최대 170명에 불과하여 사실상 궤멸 상태에 이르렀다.

제37SS의용기병사단의 편성은 부다페스트 전투가 벌어지기 전부터 계획되고 있었다. 당초에는 제8SS기병사단과 제22SS의용기병사단의 잔존 병력을 모아 제33SS기병사단을 창설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부다페스트 포위망에서 탈출한 병력이 예상보다 훨씬 적었기 때문에 계획 수정이 불가피했다. 결국 1945년 2월 19일, 두 기병사단의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과 이미 편성 중이던 부대를 합쳐 제33기병사단을 편성하라는 명령이 공식적으로 내려졌다.

그러나 사단 번호 '33'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무장척탄병 여단 샤를마뉴를 비롯한 다른 SS 여단들이 사단으로 승격되면서 번호가 조정되었고, 1945년 3월 26일 공식적으로 제37SS의용기병사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단의 장교와 하사관은 징집된 독일인들로 구성되었으나, 병력의 대다수는 헝가리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독일계 의용병들이었다. 그 외 다른 국가 출신 의용병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단은 편성 직후 아마이저 전투단(Kampfgruppe Ameiser독일어)과 카이텔 전투단(Kampfgruppe Keitel독일어)으로 나뉘어 파견되었기 때문에, 사단으로서 통합된 지휘 아래 작전을 수행한 적은 없었다.

사단 편성 초기에는 헤르만 페겔라인의 동생인 발데마르 페겔라인 친위대 준장이 사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2월 28일부터는 카를 궤젤레(Karl Gesele독일어) 친위대 대령이 지휘를 맡았다. 또한, 제93SS의용기병연대의 연대장은 빌헬름 카이텔 원수의 아들인 카를-하인츠 카이텔 친위대 중령이 맡았다.

2.2. 주요 전투

사단은 완전한 편성을 마치기도 전에 동부 전선 말기의 혼란 속에서 여러 전투단으로 나뉘어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전투단들은 주로 헝가리오스트리아 지역에서 소련 붉은 군대의 공세에 맞서 싸웠으나, 전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단 예하 부대들은 다음과 같은 주요 전투에 전투단 단위로 참여했다.

* 아마이저 전투단: 1945년 2월 말 가장 먼저 편성되어 3월 초부터 도나우강 북안의 그란 교두보 전투와 이후 철수 작전에 참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직전 미국군에게 항복했으나, 상당수 병력이 소련군에게 넘겨졌다.
* 카이텔 전투단: 1945년 3월 말 빈 공세에 대응하여 편성되었으며, 비너 노이슈타트 인근 방어선에서 치열한 지연전을 펼치다 서쪽으로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고 미군에게 항복했다.
* SSL 전투단: 1945년 4월 초 빈 방어전에 투입되었고, 도나우강 북안 교두보 확보를 위한 전투에 참여한 후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 시기에 사단 명칭 "뤼초"가 부여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처럼 사단은 통합된 지휘 아래 체계적인 작전을 수행하기보다는, 각 전투단이 개별적으로 격렬한 전투와 철수를 반복하며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소모되었다. 각 전투단의 구체적인 활동 내역은 하위 문서를 참조하라.

2.2.1. 아마이저 전투단

사단 편성이 진행 중이던 1945년 2월 25일, 사단은 1개 전투단을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따라 제92SS의용기병연대를 주축으로 하고 연대장인 안톤 아마이저(Anton Amaizer) 친위대 중령을 지휘관으로 하는 아마이저 전투단이 편성되었다.

전투단은 1945년 3월 5일부터 16일까지 빅스케 방어를 포함한 그란 교두보 및 도나우강 북안 지역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이후 3월 21일부터는 도나우강을 따라 어려운 철수전을 벌였다.

4월 1일에는 프레스부르크 동쪽으로 철수했으며, 4월 5일에는 마르흐강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 뒤 전투단은 제96보병사단에 배속되어 해당 사단 소속으로 전투를 이어갔다. 1945년 5월 8일, 전투단의 남은 병력은 플라이슈타트에서 미국군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항복한 병사 대부분은 5월 14일에 소련 적군에게 넘겨져 이후 힘든 시기를 겪게 되었다.

2.2.2. 카이텔 전투단

1945년 3월 17일, 소련 붉은 군대는 빈 공세를 시작했고, 이로 인해 독일군은 진행 중이던 봄의 각성 작전을 중단하고 패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3월 26일, 전투 준비 중이던 제37SS의용기병사단은 전투단을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93SS의용기병연대를 주축으로 카이텔 전투단이 편성되었다.

카이텔 전투단은 비너 노이슈타트와 마테르스부르크 사이에 위치한 명목상의 방어선인 "니더도나우 요새지대"로 파견되어, 치열한 방어전을 펼치며 지연 전술을 수행했다. 4월 4일, 전투단은 비너 노이슈타트 남서부에서 전투를 치렀고, 8일에는 "뮐러 전투단"을 추가로 편성했다. 뮐러 전투단은 푸흐부르크에서 소련 붉은 군대를 한 차례 격퇴했으나, 이어진 반격으로 인해 철수해야 했다.

이후 카이텔 전투단은 클로스터 계곡을 통해 서쪽으로 철수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었지만 페르니츠와 장크트 에기트까지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4월 29일에는 슈바르차우에서 제117엽병사단과 합류했다.

전투단은 이후 미군과 항복 협상을 진행했다. 5월 12일, 빈디슈가르슈텐에 도착한 카이텔 전투단이 미군에 항복했고, 다음 날인 13일에는 엔스에 도착한 뮐러 전투단도 항복했다. 전투단 소속 병력 약 2,000명 가운데, 5월 13일 포로 수용소로 보내지기 직전 정렬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인원은 180명에 불과할 정도로 손실이 컸다.

2.2.3. 사단 본부 (SSL 전투단)

1945년 4월 1일, 빈에서 소련 붉은 군대의 대공세가 시작되자 제37SS의용기병사단에도 출격 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미 2개 전투단이 차출된 상태였기 때문에, 사단 본부를 중심으로 남은 병력과 잡다한 부대를 모아 SSL 전투단을 급히 편성해야 했다. 여러 설이 있지만, 이 시기에 사단 명칭 "Lützow독일어"가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부여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빈 시가에서는 이미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독일군 부대들이 안전하게 철수하기 위해서는 도나우 북안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독일군은 맹렬하게 진격해오는 소련군에 맞서 필사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SSL 전투단 역시 큰 피해를 입었으나, 빈 북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4월 14일에는 빈 북쪽에 위치한 Stockerau독일어에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4월 17일, SSL 전투단에서 사단 본부 병력이 빠져나갔고, 남은 잔존 병력은 제96보병사단으로 편입되었다. 사단 본부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일부가 프라하로 향했다는 정보도 있지만, 정확한 경로는 불분명하다.

2.3. 종전과 전후

이 사단의 대원 몇 명이 종전 직후인 5월 13일에 발생한 알트하임 포로 수용소의 대탈주에 관여했다.

3. 부대 구성

제37SS의용기병사단 뤼초는 기병 연대를 중심으로 포병, 정찰, 대전차, 공병, 통신, 의무, 보급 및 예비 부대 등으로 구성된 최종 전투 서열을 갖추었다.

3.1. 주요 부대

* 제92SS기병연대
* 제93SS기병연대
* 제94SS기병연대
* 제37SS 포병대대 (2개 포대, 10.5 cm leFH 18)
* 제37SS 정찰대대
* 제37SS 대전차대대 (1개 중대, 헤처 장비)
* 제37SS 공병대대
* 제37SS 통신중대
* 제37SS 의무대대
* 제37SS 보급부대
* 제37 야전예비대대

4. 역대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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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퇴임계급(당시)성명
1945년 2월 26일1945년 2월 28일친위대 준장발데마르 페겔라인 Waldemar Fegelein독일어
1945년 3월 1일1945년 5월친위대 대령카를 게제레 Karl Gesele독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