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고구려-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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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4차 고구려-수 전쟁은 수나라의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한 전쟁으로, 614년에 일어났다. 수 양제는 양현감의 난 진압 이후에도 고구려 정벌을 시도하여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으나, 비사성이 함락된 후 고구려의 항복 요청으로 휴전 협정을 맺었다. 수 양제는 고구려 영양왕에게 직접 수나라 조정에 입조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고, 암살 시도까지 겪으며 분노했으나 결국 재침공하지 못했다.

제4차 고구려-수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제4차 고구려-수 전쟁
전체고구려-수 전쟁
날짜614년
장소랴오둥반도
결과고구려의 형식적 항복
교전 세력
교전국 1수나라
교전국 2고구려
지휘관
수나라 지휘관수 양제
우문술
내호아
고구려 지휘관영양왕
고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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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수 양제양현감의 난을 진압했으나 수나라는 국내 혼란이 더욱 거세졌다. 도적이 들끓고, 지방에서는 통제력이 약해진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드는 세력이 늘어났으며 국가의 소집이나 징수에 불응하는 자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양제는 다시 고구려 정벌을 시도하였다. 614년 영양왕 25년 봄 2월, 황제가 모든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정벌할 일을 의론하게 하였는데, 여러 날 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다시 징발하여 여러 길로 함께 진군하게 하였다.

3. 비사성의 함락과 휴전 협정

수 양제는 직접 회원진에 행차하였으나, 수나라는 징발된 군사들이 기일을 어기는 등 어지러운 상황이었고, 고구려도 역시 지쳐 있었다.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은 고구려 군사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비사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성으로 향하려 했다. 고구려의 총사령관 건무영양왕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게 하고, 고구려에 투항해 있던 곡사정을 수나라로 돌려보냈다. 수 양제내호아를 소환하고 철수를 시작했다.

8월에 수 양제가 회원진으로부터 수나라 군대를 돌이켜 철수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겨울 10월, 수 양제고구려 영양왕이 직접 수 나라 조정에 들어와 예방하라고 하였지만 영양왕이 끝내 듣지 않았다. 고구려는 조의 가운데 일인(一仁)이라는 자가 수 양제에게 표를 바치는 척 하며 활을 쏘아 뇌를 맞혔다. 수 양제는 크게 놀라 실신하였고, 양명은 서둘러 양광을 업고 후퇴하여 회원진에 병력 철수를 명하였다. 수 양제는 자신이 작은 나라를 이기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하여 다시 공격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4. 영양왕의 수나라 입조 거부와 수 양제의 분노

수 양제는 회원진에서 돌아와 고구려 사신과 곡사정에 대한 일을 태묘에 고하고, 영양왕에게 직접 수나라 조정에 들어와 예방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영양왕은 이를 거부했다. 고구려 조의 일인(一仁)이라는 자가 수 양제에게 표를 바치는 척하며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수 양제는 크게 분노하여 다시 공격을 기도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5. 역사적 평가와 의의

5.1. 긍정적 평가

5.2. 부정적 평가

5.3. 한국사에 미친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