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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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문술은 북주와 수나라 시대를 거치며 활약한 무장이다. 북주 무제의 명으로 개부되었으며, 수나라가 건국된 후 우위대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는 진나라를 정벌하고 고구려 원정에 참여하는 등 수나라의 주요 군사 작전에 참여했으나, 고구려 원정에서 살수대첩의 패배를 겪고 몰락했다. 이후 양제의 측근으로 권세를 누렸으나 탐욕스러운 행태를 보였으며, 결국 아들들이 양제를 시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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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7년 출생 - 사다함
사다함은 신라 시대의 화랑으로, 대가야 정벌에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가야인들을 관대하게 대했으며, 절친한 무관랑의 죽음 이후 17세에 사망하여 잡찬에 추증되었다. - 547년 출생 - 곽영 (547년)
곽영은 북주와 수나라 시대에 우문호의 측근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군사적 업적을 세웠으며, 수나라 건국 후에도 활약하다 유성에서 사망하여 병부상서로 추증되고 당나라 명장 곽자의의 조상이 되었다. - 617년 사망 - 설세웅
설세웅은 북주와 수나라 시대를 거치며 북제 토벌, 번우의 반란 진압, 토욕혼 정벌 등 여러 전공을 세우고 돌궐 공격에서 승리했으나 고구려 원정 패전 후 이밀 토벌 중 사망한 청렴하고 용맹한 장수이다. - 617년 사망 - 위현
위현은 남북조 시대부터 수나라를 거친 관료이자 군인으로, 수나라에서 양현감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위무에 능한 관리로 평가받았다. - 수나라의 상서령 - 이건성
당 고조 이연의 장남 이건성은 당나라 건국에 기여했으나 동생 이세민과의 권력 투쟁 중 현무문의 변에서 살해당한 후 황태자로 복권된 인물이다. - 수나라의 상서령 - 왕세충
왕세충은 수나라 말기에 군벌로 활동하며 정나라를 건국했으나 당 태종에게 패하여 항복한 인물이다.
우문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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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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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우문(宇文) |
휘 | 술(述) |
시호 | 장(莊) |
작위 | 허국공(許國公) |
생몰 기간 | 555년 ~ 616년 |
시대 | 수나라 |
출생지 | 하발(夏拔, 현재의 산시성 헝수이시) |
사망지 | 수나라 수도 뤄양 |
사인 | 병사 |
관직 및 경력 | |
주요 관직 | 내사시랑(內史侍郎) 어비대장군(右翊衛大將軍) 병부상서(兵部尙書) 태위(太尉) |
주요 활동 | 고구려-수 전쟁 참전 양현감의 난 진압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우문귀 |
아들 | 우문화급 우문지급 우문사급 |
기타 | |
관련 인물 | 수 양제 |
2. 생애
우문술의 조상은 원래 포예두(破野頭)라는 이름이었으며, 종족은 선비족이었다. 그들은 선비족의 우문 분파를 따르면서 이름을 우문으로 바꿨다.[5] 그의 가문은 북위에서 장수로 복무했으며, 북주에서는 아버지 우문성이 황족 친족부의 장관을 지냈다.
젊은 시절 우문술은 기마술과 궁술에 능숙하여 북주 무제 때 아버지의 업적 덕분에 중급 관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무제의 섭정 우문호의 총애를 받아 그의 개인 경호대 사령관이 되었다.
580년, 북주 선제가 사망한 후, 선제의 장인 수 문제 양견이 섭정을 맡자, 장군 위치경이 반란을 일으켰다. 우문술은 위효관의 휘하에서 복무하며 위치경의 장군 이준(李雋)을 격파하는 등 공을 세워 작위가 보공(褒公)으로 승격되었다.
581년, 양견은 북주를 멸하고 수나라를 세웠고, 우문술은 수나라의 장군으로 복무했다. 588년 수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할 때 장강을 건너 진나라 수도 건강 공격을 도왔고, 이후 진나라 장군 소환과 소암을 격파하여 진나라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진나라 정벌 이후, 우문술은 양광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가 황태자가 되도록 돕는 등 측근으로 활동했다.
604년, 수 문제가 사망하고 양광이 양제로 즉위하자, 우문술은 조정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607년에는 토욕혼 정벌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612년, 고구려 원정에 참여했으나, 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에게 대패하여 평민으로 강등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613년 다시 고구려 원정에 참여했으나, 양현감의 반란으로 회군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615년, 동돌궐의 시비가한이 연문군을 공격했을 때 양제를 호위했다. 616년, 양제가 양주의 수도인 강도로 돌아가고 싶어하자, 이를 공식 제안했고, 양제가 동의했다. 우문술은 양제를 따라 강도로 갔고, 그곳에서 616년 겨울에 병으로 사망했다.
2. 1. 북주 시기
무제 때 아버지 우문성의 전공으로 개부(開府)로 임명되었다.[5] 우문호에게 신임을 받아 친신을 영했다. 무제가 친정을 시작하자 좌궁백이 되었고, 영과중대부에 누진하여 박릉군공에 봉해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복양군공으로 개봉되었다.[5]580년 위지경이 상주에서 난을 일으키자, 행군총관으로 병사 3,000명을 이끌고 위효관의 휘하에서 위지경을 공격했다. 하양으로 진군하여 위지경의 부장인 이준을 회주에서 격파했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위지돈을 영교에서 공격하여 선봉에 서서 적진을 함락시켰다. 위지경의 난이 평정되자 전공으로 상주국에 임명되었고, 작위는 포국공으로 진급했다.[5]
2. 2. 수 문제 시기
581년, 양견이 북주의 정제에게서 선양받고 수나라를 건국하자 우문술은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임명되었다.[7]588년 행군총관(行軍總管)이 되었으며, 이듬해 남조의 진을 정벌할 때 강을 넘어 석두성(石頭城)을 점령한 뒤 삼오(三吳)를 평정했다.[7]
진나라 정벌에 대한 공으로 우문술은 안주총관(安州總管)이 되었는데, 양주에 주둔하게 된 진왕(晉王) 양광에게 이를 양보하였다. 이에 양광은 우문술을 수주총관(壽州總管)에 임명하도록 주청함으로써, 두 사람은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후 우문술은 양광이 태자에 책봉되는 것을 돕기 위해 장안에 있는 양소의 동생 양약(楊約)을 찾아가 뇌물을 주고 양소를 측근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양소와 함께 양광에게 독고황후 앞에서는 바른 말과 행동을 보일 것을 간언했다.
2. 3. 수 양제 시기
604년(인수 4년) 양제가 즉위하자 우문술은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으로 임명되고 허국공(許國公)에 봉해졌다.[5] 양제는 우문술을 총애하여 그의 계책을 경청하여 따랐으며, 그로 인해 우문술의 권세는 조정을 뒤흔들 정도가 되었다. 이때부터 우문술은 탐욕스럽고 비루해졌으며, 뇌물을 받아 재산이 넘쳐나고 노복이 1,000명에 이르렀다.607년, 양제가 북방 변경을 순찰하던 중 유림에 도착했을 때, 우문화급과 우문지급이 돌궐과 금지된 무역을 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양제는 격분하여 처형하려 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살려두고 노예로서 우문술에게 넘겨주었다.
608년, 배거가 철륵을 설득하여 토욕혼을 공격하게 했고, 철륵이 토욕혼을 격파하자 모용복운이 수나라에 항복하겠다고 제의했다. 양제는 우문술을 보내 항복을 받으려 했지만, 우문술 군대의 강함을 두려워한 모용복운이 서쪽으로 도망쳤다. 이에 우문술은 토욕혼을 공격하여 수천 명을 사로잡았다. 양제는 이로써 과거 토욕혼 영토에 네 개의 군을 설치했다.
615년, 우문술은 이혼(李渾)이 뇌물 지급 약속을 어기자 앙심을 품고 그가 반역을 모의한다고 거짓 고발했다. 양제는 우문술에게 조사를 맡겼고, 우문술은 증거를 조작하여 이혼과 그의 일족 32명을 처형했다.
같은 해 가을, 우문술은 양제와 함께 북방 변경을 순찰했다. 동돌궐의 시비가한이 연문군을 기습 공격했고, 양제는 군의 거점으로 피신했다.[2] 돌궐은 9월 11일에 마을을 포위했다.[3][4] 우문술은 탈출을 제안했지만, 소위 등이 반대하여 양제는 탈출을 포기했다. 대신 양제의 요청으로 이성 공주가 시비가한에게 거짓 보고를 보냈고, 가한은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616년 가을, 양제가 농민 반란 상황을 문의하자, 우문술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반란이 대체로 진압되었다고 알렸다. 얼마 후 양제가 양주의 수도인 강도로 돌아가고 싶어하자, 우문술은 이를 공식적으로 제안했고, 양제가 동의했다.
2. 3. 1. 고구려 원정과 살수대첩
612년(대업 8년)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자 우문술은 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었으며, 우중문(于仲文)과 함께 별동대 305,000명을 거느리고 살수를 넘어 평양으로 향하던 중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乙支文德)의 계책에 빠지고 크게 무너져 단 2,700명만이 요서로 간신히 도망해 돌아왔다.[6]양제는 진노했으나, 차마 우문술을 죽이지는 못하고 관작을 삭탈해 서민으로 강등시켰다.[6]
이듬해인 613년(대업 9년) 양제가 다시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키자, 우문술은 관작을 돌려받고 양의신(楊義臣)과 함께 두 번째로 압록강을 넘었으나, 후방인 여양(黎陽)에서 예부상서(禮部尙書) 양현감(楊玄感)이 반기를 들고 거병하자 양제의 밀명을 받고 급히 철군했으며, 하양(河陽)에서 양현감의 군을 크게 깨뜨렸다.[6]
그 공으로 포목 수천 필을 하사받았으며, 614년(대업 10년) 양제가 세 번째로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키자 대고구려 전선에 복귀해 회원(懷遠)까지 갔으나, 후에 귀환했다.[6]
612년의 제1차 고구려 원정에서, 우문술은 부여도군장이 되어, 수나라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회전했다.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대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들의 피로를 유도했다. 우문술은 하루에 7번의 전투에서 승리하고는 자만하여, 평양성까지 30리 떨어진 살수에 진군했다. 을지문덕이 항복하는 척 사자를 보내자, 피로에 지친 수나라 군대의 사기는 떨어졌다. 수나라 군대의 절반이 살수를 건넜을 때, 을지문덕은 후방에서 수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이를 크게 격파했다. 수나라 군대는 하룻밤 사이에 압록강까지 도주했다. 고구려에 원정했던 수나라 9개의 군대 30만 5,000명 중 요동성으로 귀환한 것은 불과 2,7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5] 양제는 격노했고, 우문술 등이 동도 낙양으로 귀환하자, 관작을 삭탈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613년, 양제가 다시 고구려 원정을 일으키자, 우문술은 관작을 회복하고, 장군인 양의신 등과 함께 다시 압록강을 건너갔다. 양현감이 난을 일으켰기 때문에 불려 돌아와, 위현·래호아·굴돌통 등과 함께 양현감을 포위했다. 양현감은 관중 방면으로 전진하려 했지만, 우문술은 문향황천원에서 양현감을 따라잡아, 이를 크게 격파했다. 양현감이 참수되자, 다시 고구려 전선에 복귀하여, 회원에 이르렀다가 귀환했다.[5]
2. 3. 2. 몰락
604년(인수 4년) 양광이 양제로 즉위하자 우문술은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으로 임명되고 허국공(許國公)에 봉해졌다.[5] 양제는 우문술을 총애하여 그의 계책을 경청하여 따랐으며, 그로 인해 우문술의 권세는 조정을 뒤흔들 정도가 되었다. 이때부터 우문술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비루해졌으며, 평소에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뇌물을 바치니, 그의 집에는 재화가 넘쳐나고 노복은 1,000명에 이르게 되었다.612년(대업 8년)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자 우문술은 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었으며, 우중문과 함께 별동대 305,000명을 거느리고 살수를 넘어 평양성으로 향하던 중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의 계책에 빠져 크게 패하고, 단 2,700명만이 요서로 간신히 도망해 돌아왔다.[5]
양제는 진노했으나, 차마 우문술을 죽이지는 못하고 관작을 삭탈해 서민으로 강등시켰다.[5] 이듬해에 양제가 다시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키자, 우문술은 관작을 돌려받고 양의신과 함께 두 번째로 압록강을 넘었다.[5] 그러나 후방인 여양(黎陽)에서 예부상서(禮部尙書) 양현감이 반기를 들고 거병하자 양제의 밀명을 받고 급히 철군했으며, 하양(河陽)에서 양현감의 군을 크게 격파했다. 그 공으로 포목 수천 필을 하사받았으며, 614년(대업 10년) 양제가 세 번째로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키자 대고구려 전선에 복귀해 회원(懷遠)까지 갔으나, 후에 귀환했다.[5]
616년(대업 12년) 7월 강도(江都)에서 용주(龍舟)를 새로 만들 때 우문술은 양제를 따라 강도로 들어와 머무르게 되었으며, 이듬해[6] 강도에서 훙했다. 우문술은 임종을 앞두고 양제에게 두 아들인 우문화급·우문지급을 보살펴 줄 것을 간절히 청했으나, 이들은 훗날 양제를 시해했다. 사후 사도(司徒)·상서령(尙書令)·십군태수(十郡太守)로 추증되었으며, '공(恭)'이라는 시호를 받았다.[5]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우문장수(宇文長壽) | 옥야진군주(沃野鎭軍主) |
조부 | 우문문고(宇文文孤) | 옥야진군주 |
아버지 | 우문성(宇文盛) | 상주국(上柱國), 대종백(大宗伯) |
장남 | 우문화급(宇文化及, ? ~ 619년) |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양제(煬帝) 시해 후 황제 참칭, 두건덕(竇建德)에게 패배 후 처형 |
차남 | 우문지급(宇文智及, ? ~ 619년) | 장작소감(將作少監), 형과 함께 양제 시해 후 제왕(齊王)에 봉해짐, 두건덕에게 패배 후 처형 |
3남 | 우문사급(宇文士及, ? ~ 642년) | 전중감(殿中監), 정국공(郢國公), 시호 종(縱) |
참조
[1]
서적
Sui Shu
"[대업십이년] 겨울 10월 기축"
[2]
서적
2006
https://books.google[...]
[3]
웹사이트
大業
http://db1x.sinica.e[...]
615-08
[4]
서적
Zizhi Tongjian
[5]
서적
隋書
[6]
서적
수서
616
[7]
문서
오군(吳郡)·오흥(吳興)·회계(會稽)를 함께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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