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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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뢰 전투는 수나라 멸망 후 당나라의 중국 통일 과정에서 결정적인 전투였다. 당 태종 이세민이 이끄는 당군은 621년 호뢰관에서 두건덕의 하군과 왕세충의 정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당나라는 중원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중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호뢰 전투는 내전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세민의 위상을 크게 높여 이후 현무문의 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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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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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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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수말당초 |
날짜 | 621년 5월 28일 |
장소 | 호뢰관, 허난 성 |
결과 | 당나라의 승리 |
관련 전투 | 수말당초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당나라 |
교전국 2 | 정나라, 하나라 |
지휘관 및 지도자 | |
당나라 | 진왕 이세민 |
하나라 | 하왕 두건덕 |
병력 규모 | |
당나라 | 3,000명 (야전 병력), 50,000명 (지원 병력) |
하나라 | 100,000–120,000명 |
사상자 및 피해 | |
하나라 | 3,000명 사망, 약 50,000명 포로 |
기타 정보 | |
관련 전투 | 수말당초 |
2. 역사적 배경
수나라에서 당나라로의 전환기에, 수 양제의 실정과 고구려-수 전쟁 실패는 왕조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각지에서 반란을 야기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여러 군웅들이 할거했는데, 이연은 태원을 근거지로 장안을 점령하고 당나라를 건국했다. 당나라는 이세민의 활약으로 북서쪽 경쟁자들을 제압했으나, 중원 지역에는 왕세충과 두건덕이 버티고 있었다. 왕세충은 낙양을 중심으로 정나라를, 두건덕은 하나라를 세워 황하 북쪽을 장악했다.[1]
2. 1. 수나라의 쇠퇴와 군웅할거
수나라 제2대 황제인 수 양제(604-618)의 후반 통치 기간 동안 왕조의 권위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고구려 정복 시도는 막대한 물적, 인적 비용을 소모했고, 자연재해까지 겹쳐 지방의 불안을 야기했다. 군사적 실패는 황제의 권위와 정통성('천명')을 실추시켰다.[1] 양제는 한국 원정에 집착했고,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반란이 확산되었다. 616년, 그는 중국 북부를 포기하고 강도로 물러났으며, 618년 암살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1]양제의 철수에 따라 지방 총독들과 유력자들이 권력을 주장하며 9명의 주요 경쟁자가 등장했다. 일부는 황제 칭호를, 다른 일부는 '공작', '왕'과 같은 겸손한 칭호에 만족했다.[1] 이연은 당나라의 공작이자 북서쪽 태원 (현대 산시성)의 총독으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수나라와 관련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뛰어난 경력을 가진 이연은 유력한 왕위 후보였다. 그의 지역은 훌륭한 자연 방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인구, 장안 및 낙양과 같은 황궁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1] 617년 가을, 이연과 그의 아들 이세민, 이건성은 남쪽으로 진군하여 수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11월 9일 장안을 점령했다. 이연은 618년 6월 16일 당나라의 초대 황제를 자칭했다.[1]
618-620년, 이세민이 이끄는 당나라는 북서쪽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산시성을 장악한 유무주의 공격을 격퇴했지만, 중원, 허베이성, 허난성으로 통제 범위를 확장해야 했다.[1] 이는 새로운 왕조가 지역 정권으로 남을지, 통일 왕조가 될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였다.[1] 620년 초, 이 지역에는 두 개의 주요 정권이 있었다. 허난성은 낙양에 기반을 둔 왕세충이 통치했는데, 그는 연사 전투에서 이밀을 격파하고 그의 군대와 영토를 흡수한 후 정나라의 초대 황제를 자칭한 전 수나라 장군이었다. 허베이성은 611년에 이미 수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두건덕이 통치했다. 그는 허베이성 남중부 명주를 근거지로 황하 남쪽으로 통제 범위를 확장하여 '하(夏)나라 왕' 칭호를 주장했다. 왕세충과 두건덕은 모두 기존의 수나라 관료와 행정 기구를 사용하여 자신의 영역을 유지했다.[1]
619년, 두건덕은 이연의 사촌 이사통 휘하의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황하 북쪽 영토를 점령했다. 낙양의 왕세충은 당나라의 권위를 인정한 하류 황하 도시들에게 지속적인 위협이었다.[1] 두건덕은 기사도적이고 신중한 자제를 통해 영토를 확장했지만, 왕세충의 독단성과 무례함은 지지자들을 소외시켰고, 진숙보와 라사신 등 뛰어난 장군들이 당나라에 합류하게 만들었다.[1] 당나라는 왕세충에 대한 습격을 시작하여 사기를 떨어뜨리고 많은 부하들이 탈주하게 했다. 왕세충은 충성을 보장하기 위해 장군 가족을 인질로 잡고, 친족 처벌을 부과하는 등 가혹한 정책을 펼쳤으나, 이는 오히려 그의 정권을 더욱 약화시켰다.[1]
2. 2. 당나라의 중원 진출과 이세민의 활약
620년 8월, 류무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직후, 이세민은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산시성에서 낙양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1] 당 태자 (이세민)의 전략적 목표는 황하 계곡을 바다까지 점령하여 북쪽의 경쟁 정권(예: 두건덕)과 남쪽 동맹국 간의 연결을 끊는 것이었다. 특히 회하 지역을 통제하던 반군 지도자 두복위는 당의 권위를 인정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선주에서 출발한 이세민의 진군은 왕세충이 공개적인 대결을 피하고 낙양 성벽 안에 머물면서 별다른 저항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9월까지 당군은 도시 주변에 요새화된 야영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세민은 제국 분할을 기반으로 한 화해 제안을 거부했다. 양측이 낙양 주변에서 접전을 벌이며 도시로 들어오는 보급품 호송대를 보호하거나 차단하려 하는 동안, 당의 별동대는 남쪽, 동쪽, 북쪽으로 더 깊숙이 진입하여 왕세충의 통제에서 하남 중부 지역의 대부분을 빼앗았다. 연말까지 상양, 서주 등 멀리 떨어진 도시들만이 왕세충의 통제하에 남았지만, 이들은 어떤 지원도 제공할 수 없었다. 인근 소림사의 승려들 또한 이세민 편에 서서 환원산에서 왕세충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의 조카 왕인제를 사로잡았다.
수도와 그 주변 지역에 고립된 왕세충은 절망하여 더욱 공격적으로 변했고, 621년 초 당나라 봉쇄를 돌파하려는 두 차례의 주요 시도를 감행했다. 두 전투 모두 치열했지만 결국 당나라가 승리했는데, 이는 이세민이 1,000명의 중무장 기병을 이끌고 개입한 덕분이었다. 이러한 시도가 실패하면서 포위는 더욱 좁아졌고, 공성 무기가 모든 방향에서 도시를 매일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다. 낙양의 보급 상황은 포위가 겨울과 봄까지 계속되면서 꾸준히 악화되었다. 3월까지 사람들은 음식의 흔적을 찾기 위해 흙을 뒤지거나 쌀과 진흙으로 만든 떡을 먹었다고 한다. 가장 높은 관료들조차 고통을 면치 못했고, 왕세충이 궁에 억류한 3만 명의 포로 중 10분의 1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세충은 항복 제안을 거부하고, 620년 말에 이미 사절을 보낸 두건덕의 개입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3. 호뢰관 전투의 전개
수 말기, 이연이 장안을 점령하고 당나라를 건국하자, 왕세충은 낙양에 웅거하며 정나라를 세웠다. 진왕 이세민은 동쪽 정벌을 위해 출병했다.
무덕 3년 7월, 고조는 이세민에게 왕세충 정벌 명령을 내렸다. 왕세충은 당군이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여러 왕들에게 요충지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이세민이 자간(현재 허난성 뤄양시 신안현 동쪽 30리)으로 진군하자, 왕세충은 낙양으로 퇴각했다. 당군은 낙양 주변의 도시를 공략하여 정군의 병참을 끊고, 낙양의 북망산으로 진주하여 낙양을 압박했다.
당군의 기세가 커지자, 하남의 50여 주는 잇따라 항복했다. 왕세충이 두건덕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중서성 시랑 유빈은 두건덕에게 출병을 권했다. 두건덕은 왕세충의 정나라가 패하면 자신의 하나라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왕세충의 요청에 응해 출병하고, 사자를 보내 왕세충과 화의를 맺었다.
이세민은 호뢰 전투에서 두건덕의 하군이 지칠 때까지 전투를 회피하다가 기병돌격을 감행하여 하군을 와해시키고 두건덕을 사로잡았다. 두건덕이 붙잡히자 왕세충은 항복했고, 이로써 왕세충의 정나라와 두건덕의 하나라가 모두 당나라에 복속되었다.[1]
3. 1. 낙양 포위전과 두건덕의 개입
당 황자 진왕 이세민이 이끄는 당군이 두건덕의 하군과 왕세충의 정군과 맞서 싸웠다. 호뢰관은 낙양 동쪽에 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고개였다. 당시 이세민은 왕세충이 수도로 삼고 있던 낙양을 공략하고 있었는데, 왕세충이 원군으로 부른 두건덕이 남하하자 두건덕을 상대하기 위해 호뢰곡까지 동진했다. 이세민은 두건덕의 하군이 지칠 때까지 전투를 회피하다가 기병돌격을 감행하여 하군을 와해시키고 두건덕을 사로잡았다.[1] 두건덕이 붙잡히자 왕세충은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고 항복했다. 이로써 왕세충의 정나라와 두건덕의 하나라가 모두 당나라에 복속되었다.[1]
620년 8월, 류무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직후, 이세민은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산시성에서 낙양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선주에서 출발한 이세민의 진군은 왕세충이 공개적인 대결을 감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낙양 성벽 안에 머물면서 별다른 저항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9월까지 당군은 도시 주변에 요새화된 야영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제국 분할을 기반으로 한 화해 제안은 이세민에 의해 거부되었다. 양측이 낙양 주변에서 접전을 벌이며 도시로 들어오는 보급품 호송대를 보호하거나 차단하려 하는 동안, 당의 별동대는 남쪽, 동쪽, 북쪽으로 더 깊숙이 진입하여 왕세충의 통제에서 하남 중부 지역의 대부분을 이탈시켰다. 연말까지 상양, 서주의 멀리 떨어진 도시들만이 왕세충의 통제하에 남았지만, 어떤 지원도 제공할 수 없었다. 인근 소림사의 승려들 또한 이세민 편에 서서 환원산에서 왕세충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의 조카 왕인제를 사로잡았다.
수도와 그 주변 지역에 고립된 왕세충은 절망하고 더욱 공격적으로 변하여 621년 초 당나라 봉쇄를 돌파하려는 두 차례의 주요 시도를 감행했다. 두 전투 모두 치열했지만 결국 당나라가 승리했는데, 이는 이세민이 1,000명의 중무장 기병을 이끌고 개입한 덕분이었다. 이러한 시도의 실패는 포위가 더욱 좁아지는 것을 의미했으며, 공성 무기가 모든 방향에서 도시를 매일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다. 낙양의 보급 상황은 포위가 겨울, 그리고 봄까지 계속되면서 꾸준히 악화되었다. 3월까지 사람들은 음식의 흔적을 찾기 위해 흙을 뒤지거나 쌀과 진흙으로 만든 떡을 먹었다고 한다. 가장 높은 관료들조차 고통을 면치 못했고, 왕세충이 궁에 억류한 3만 명의 포로 중 10분의 1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세충은 항복 제안을 거부하고, 620년 말에 이미 사절을 보낸 두건덕의 개입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낙양 포위전 동안, 두건덕과 당나라는 협상을 벌였지만, 이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두건덕은 당나라가 제기한 위협을 무시할 수 없었지만, 아직 완전한 결별을 할 의향은 없었고, 619년에 포획한 당나라 공주를 석방하는 등 화해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왕세충의 간청이 그의 조정에 도착했을 때, 두건덕은 그의 고문 유빈의 설득으로 그 상황이 위험과 기회를 모두 제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낙양이 함락되면 당나라는 다음으로 두건덕을 공격할 것이지만, 두건덕이 개입하여 낙양을 구원한다면 약화된 왕세충을 몰아내고 하남을 자신의 하(夏)나라에 병합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따라서 두건덕이 왕세충의 상황이 위태로워질 때까지, 즉 4월까지 기다린 후 낙양 포위를 풀기 위해 서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의도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당나라는 두건덕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산서에 있는 기지에서 그의 측면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두건덕은 그의 영토를 굳건히 수비할 병력을 충분히 보유하면서도, 이세민과 싸우기 위해 거대한 군대를 소집할 수 있었다. 10세기 '구당서'와 11세기 '자치통감'은 두건덕의 군대를 10만 명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8세기 '통전'과 '태종존실'(단편만 남아 있음)은 12만 명으로 묘사하고 있다. 비록 과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 정도 규모의 군대는 당시 충분히 가능했다. 하(夏)나라 군대는 수레와 배로 구성된 유사하게 큰 보급 부대를 동반했다.
하(夏)나라 군대의 접근은 낙양에 주둔한 당나라 군대를 곤경에 빠뜨렸다. 증원군에 대한 전망도 없고, 최근에 점령한 하남의 도시들에 대한 충성심도 의심스러워, 낙양에 있는 왕세충의 병력과 두건덕의 군대 사이에 갇히는 것은 재앙을 초래할 수 있었다. 이세민의 더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으며 신중한 장군들은 포위를 포기하고 서쪽 관중으로 물러날 것을 제안했지만, 당 태자는 이를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렇게 되면 동중국 전체를 두건덕에게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인구가 많은 북동부 평원을 두건덕에게 넘겨주면 그의 정권이 강화되고, 그는 남쪽으로 확장하여 두복위와 다른 당나라의 협력자들이 항복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제국의 통일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당나라 정권 자체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C.P. 피츠제럴드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적 결정"이라고 부른 상황에서, 이세민은 그의 군대의 일부로 하(夏)나라 군대와 대결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의 군대의 대부분은 낙양 포위를 유지하도록 했다. 이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패배하면 주력 당나라 군대가 전멸할 위험이 있고, 두건덕이 낙양뿐만 아니라 산서와 장안까지 점령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었다.
낙양 포위를 동생 이원길과 장군 구돌통에게 맡기고, 이세민은 3,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4월 22일에 낙양 동쪽 약 약 96.56km 떨어진 호뢰관을 점령했다. 그의 병력은 현지 마을의 수비대에 의해 보강되었지만, 당나라 군대의 최고 병력 중 일부를 대표한다고 해도 10,000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호뢰관은 사수의 협곡으로 형성되었다. 양쪽 강둑에는 절벽과 가파른 언덕이 늘어서 있고, 남쪽에는 숭산이 솟아 있어 황하 남쪽 강변을 따라 동서로 뻗어 있는 도로가 이곳을 지나기 때문에 중요한 전략적 중요성을 지녔다.
수 말년에 군웅이 할거하여, 당 고조 이연은 장안을 공격하여 '당'을 칭하고, 왕세충은 낙양에 웅거하여 '정'을 칭했다. 진왕 이세민은 동정(東征)을 위해 출병할 것을 결단했다.
무덕 3년(620년) 7월, 고조는 이세민에게 왕세충 정벌의 조서를 발했다. 왕세충은 당군이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접하고, 여러 왕들에게 요충지를 지키게 하고, 왕세충은 스스로 군을 이끌었다. 이세민이 자간(현재 허난성 뤄양시 신안현의 동쪽 30리)으로 진군하자, 왕세충은 낙양으로 퇴각했다. 당군은 낙양 주변의 도시를 공략하여 정군의 병참을 끊고, 낙양의 북망산으로 진주하여 낙양을 압박했다.
당군의 기세가 커서, 하남의 50여 주는 잇따라 항복했다. 왕세충이 두건덕에게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중서성 시랑인 유빈은 두건덕에게 출병을 권했다. 두건덕은, 왕세충의 정이 일단 패퇴하면 두건덕의 '하'도 유지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왕세충의 요청에 응해 출병하고, 사자를 파견하여 왕세충과 화의를 맺었다.
3. 2. 호뢰관에서의 대치
620년 8월, 류무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직후, 이세민은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산시성에서 낙양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1] 선주에서 출발한 이세민의 진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9월까지 당군은 도시 주변에 요새화된 야영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소림사의 승려들 또한 이세민 편에 서서 환원산에서 왕세충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의 조카 왕인제를 사로잡았다.수도와 그 주변 지역에 고립된 왕세충은 621년 초 당나라 봉쇄를 돌파하려는 두 차례의 주요 시도를 감행했으나, 두 전투 모두 당나라가 승리했다. 이러한 시도의 실패는 포위가 더욱 좁아지는 것을 의미했으며, 낙양의 보급 상황은 포위가 겨울, 그리고 봄까지 계속되면서 꾸준히 악화되었다. 3월까지 사람들은 음식의 흔적을 찾기 위해 흙을 뒤지거나 쌀과 진흙으로 만든 떡을 먹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세충은 항복 제안을 거부하고, 620년 말에 이미 사절을 보낸 두건덕의 개입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낙양 포위전 동안, 두건덕과 당나라는 협상을 벌였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두건덕은 왕세충의 간청에 따라, 그의 고문 유빈의 설득으로 낙양이 함락되면 당나라가 다음으로 두건덕을 공격할 것이지만, 두건덕이 개입하여 낙양을 구원한다면 약화된 왕세충을 몰아내고 하남을 자신의 하(夏)나라에 병합하는 것이 쉬울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을 내렸다. 따라서 두건덕이 왕세충의 상황이 위태로워질 때까지, 즉 4월까지 기다린 후 낙양 포위를 풀기 위해 서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의도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10세기 '구당서'와 11세기 '자치통감'은 두건덕의 군대를 10만 명으로, 8세기 '통전'과 '태종존실'(단편만 남아 있음)은 12만 명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夏)나라 군대의 접근은 낙양에 주둔한 당나라 군대를 곤경에 빠뜨렸다. 이세민의 더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으며 신중한 장군들은 포위를 포기하고 서쪽 관중으로 물러날 것을 제안했지만, 당 태자는 이를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렇게 되면 동중국 전체를 두건덕에게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세민은 그의 군대의 일부로 하(夏)나라 군대와 대결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의 군대의 대부분은 낙양 포위를 유지하도록 했다. 이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낙양 포위를 동생 이원길과 장군 구돌통에게 맡기고, 이세민은 3,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4월 22일에 낙양 동쪽 약 96km 떨어진 호뢰관을 점령했다. 호뢰관은 사수의 협곡으로 형성되었으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두건덕의 군대가 호뢰에 도착했을 때, 이세민은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앞에 두고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대담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기병 500명만을 이끌고 강을 건너 하(夏)의 진영으로 진격했다. 이세민은 이 성공을 발판 삼아 두건덕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신하 대하듯 하며 이 지역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두건덕은 이에 대응하여 사수(思水)의 성벽 도시를 공격했지만, 그곳과 서쪽 고지가 당군에 의해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두건덕은 고개 동쪽 16km 떨어진 반주(Ban-zhu) 평원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 후 몇 주 동안 그는 호뢰로 여러 차례 진격하여 전투를 제의했다. 그러나 이세민은 수적으로 열세한 병력으로 하군을 쉽게 막아낼 수 있는 강력한 방어 위치에 머무르는 데 만족했다. 당 태자는 시간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시간이 흐르면서 하의 상황도 악화되었다.
하군의 규모를 고려할 때, 두건덕에게 남은 유일한 대안은 당나라의 위치를 완전히 우회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두건덕의 문관 중 한 명인 령경(Ling Jing)은 다른 전략적 접근 방식을 제안했는데, 이세민과의 교전을 피하고 황하 북쪽으로 건너 산서(Shanxi)의 당나라 핵심 지역을 공격하여 당나라를 약화시키고, 하군이 사상자를 내지 않고 낙양 포위를 풀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두건덕의 부인인 조부인의 지지를 받았지만, 하 장군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채택되지 않았다.
군사 역사가 데이비드 A. 그래프는 두건덕이 반주에 머물기로 결정한 주요 요인은 물류 문제였다고 보는데, 그의 거대한 군대는 보급을 위해 황하와 그 운하 네트워크에 매우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3. 이세민의 전략과 두건덕의 패배
당 황자 진왕 이세민은 두건덕의 하군과 왕세충의 정군에 맞서 전략적인 요충지인 호뢰관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이세민은 왕세충의 수도 낙양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왕세충의 원군으로 두건덕이 남하하자 그를 상대하기 위해 호뢰곡까지 동진했다.이세민은 두건덕의 군대가 지칠 때까지 전투를 피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는 하군이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기병 돌격을 감행하여 하군을 무너뜨리고 두건덕을 사로잡았다.[1] 두건덕이 붙잡히자 왕세충은 항복했고, 이로써 왕세충의 정나라와 두건덕의 하나라는 모두 당나라에 복속되었다.
낙양 포위전 기간 동안 두건덕과 당나라는 협상을 벌였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두건덕은 당나라의 위협을 무시할 수 없었지만, 완전한 결별을 원하지는 않았고, 619년에 포획한 당나라 공주를 석방하는 등 화해적인 제스처를 취했다.[1] 왕세충의 간청이 그의 조정에 도착했을 때, 두건덕은 고문 유빈의 설득으로 그 상황이 위험과 기회를 모두 제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낙양이 함락되면 당나라가 다음으로 두건덕을 공격할 것이지만, 두건덕이 개입하여 낙양을 구원한다면 약화된 왕세충을 몰아내고 하남을 자신의 하(夏)나라에 병합하는 것이 쉬울 것이었다.[1] 따라서 두건덕은 왕세충의 상황이 위태로워질 때까지, 즉 4월까지 기다린 후 낙양 포위를 풀기 위해 서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1]
당나라는 두건덕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산서에 있는 기지에서 그의 측면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두건덕은 자신의 영토를 굳건히 수비할 병력을 충분히 보유하면서도, 이세민과 싸우기 위해 거대한 군대를 소집할 수 있었다.[1] 10세기 '구당서'와 11세기 '자치통감'은 두건덕의 군대를 10만 명으로, 8세기 '통전'과 '태종존실'(단편만 남아 있음)은 12만 명으로 묘사하고 있다.[1] 비록 과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 정도 규모의 군대는 당시 충분히 가능했다. 하(夏)나라 군대는 수레와 배로 구성된 유사하게 큰 보급 부대를 동반했다.[1]
하(夏)나라 군대의 접근은 낙양에 주둔한 당나라 군대를 곤경에 빠뜨렸다. 증원군에 대한 전망도 없고, 최근에 점령한 하남의 도시들에 대한 충성심도 의심스러워, 낙양에 있는 왕세충의 병력과 두건덕의 군대 사이에 갇히는 것은 재앙을 초래할 수 있었다.[1] 이세민의 더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으며 신중한 장군들은 포위를 포기하고 서쪽 관중으로 물러날 것을 제안했지만, 당 태자는 이를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렇게 되면 동중국 전체를 두건덕에게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1] 인구가 많은 북동부 평원을 두건덕에게 넘겨주면 그의 정권이 강화되고, 그는 남쪽으로 확장하여 두복위와 다른 당나라의 협력자들이 항복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제국의 통일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당나라 정권 자체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1] C.P. 피츠제럴드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적 결정"이라고 부른 상황에서, 이세민은 그의 군대의 일부로 하(夏)나라 군대와 대결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의 군대의 대부분은 낙양 포위를 유지하도록 했다.[1] 이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패배하면 주력 당나라 군대가 전멸할 위험이 있고, 두건덕이 낙양뿐만 아니라 산서와 장안까지 점령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었다.[1]
낙양 포위를 동생 이원길과 장군 굴돌통에게 맡기고, 이세민은 3,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4월 22일에 낙양 동쪽 약 약 96.56km 떨어진 호뢰관을 점령했다.[1] 그의 병력은 현지 마을의 수비대에 의해 보강되었지만, 당나라 군대의 최고 병력 중 일부를 대표한다고 해도 10,000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1] 호뢰관은 사수의 협곡으로 형성되었다. 양쪽 강둑에는 절벽과 가파른 언덕이 늘어서 있고, 남쪽에는 쑹산이 솟아 있어 황하 남쪽 강변을 따라 동서로 뻗어 있는 도로가 이곳을 지나기 때문에 중요한 전략적 중요성을 지녔다.[1]
두건덕의 군대가 호뢰에 도착했을 때, 이세민은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앞에 두고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대담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기병 500명만을 이끌고 강을 건너 하(夏)의 진영으로 진격했다.[1] 이 병력의 대부분을 매복시킨 채, 이세민은 호위병 4~5명과 함께 전진했다. 하 군대가 공격해 오자 이세민은 정확한 궁술로 여러 명을 쓰러뜨리며, 그들을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이 준비한 매복으로 유인했다.[1] 하군은 300명 이상을 잃었고, 여러 고위 장교가 포로로 잡혔다.[1]
이세민은 이 성공을 발판 삼아 두건덕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신하 대하듯 하며 이 지역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1] 두건덕은 이에 대응하여 사수(思水)의 성벽 도시를 공격했지만, 그곳과 서쪽 고지가 당군에 의해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1] 그 후 두건덕은 고개 동쪽 약 16.09km(약 16km) 떨어진 반주(Ban-zhu) 평원에 군대를 주둔시켰다.[1] 그 후 몇 주 동안 그는 호뢰로 여러 차례 진격하여 전투를 제의했다. 그러나 이세민은 수적으로 열세한 병력으로 하군을 쉽게 막아낼 수 있는 강력한 방어 위치에 머무르는 데 만족했다. 당 태자는 시간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 대치 상황이 하루 더 지속될수록 낙양의 수비대는 굶주림과 항복에 더 가까워졌고, 이것이 일어나면 그는 당나라 군대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공격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었다.[1] 더욱이 시간이 흐르면서 하의 상황도 악화되었다. 하는 보급품을 실은 뱃길을 어렵게 거슬러 올라가야 했지만, 당군은 반대로 강물의 흐름에 도움을 받았고, 하군의 규모가 크다는 것은 매주 야전에서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이 하의 재정을 더욱 고갈시킨다는 것을 의미했다.[1]
호뢰 근처 언덕에는 다른 고개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더 작았고 마찬가지로 방어하기 어려웠다. 하군의 규모를 고려할 때, 두건덕에게 남은 유일한 대안은 당나라의 위치를 완전히 우회하는 것이었는데,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가거나, 더 남쪽으로 가서 환원(Huanyuan) 고개를 통과하는 것이었다.[1] 실제로 두건덕의 문관 중 한 명인 령경(Ling Jing)은 다른 전략적 접근 방식을 제안했는데, 이세민과의 교전을 피하고 황하 북쪽으로 건너 산서(Shanxi)의 당나라 핵심 지역을 공격하여 당나라를 약화시키고, 하군이 사상자를 내지 않고 낙양 포위를 풀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1] 이 계획은 두건덕의 부인인 조부인의 지지를 받았지만, 하 장군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채택되지 않았다.[1]
군사 역사가 데이비드 A. 그래프는 두건덕이 반주에 머물기로 결정한 주요 요인은 물류 문제였다고 보는데, 그의 거대한 군대는 보급을 위해 황하와 그 운하 네트워크에 매우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 게다가 지난 몇 년 동안 두건덕이 격파한 여러 반란 지도자들의 군대를 포함하고 있어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하군의 이질적인 특성 때문에, 두건덕은 군대를 분할하여 여러 부대를 독립적인 임무에 파견할 수 없었다.[1]
결과적으로 한 달이 지난 후 당 태자는 대결을 강요하기로 결정했다. 이세민이 이같은 결정을 내린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라프는 "두의 군대의 사기가 저하되었다고 믿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낙양이 함락된 후 노출된 하군이 하북으로 안전하게 물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하거나, 낙양의 예상외로 긴 저항에 좌절했을 가능성도 있다.[1] 동시에, 이세민은 두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당나라에 그의 영토를 신속하게 흡수할 수 있는 전술적 상황의 기회를 분명히 활용하려 했다.[1]
이세민은 적이 전투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하기 위해 기병대를 보내 두의 보급선을 습격하게 한 후, 황하를 건너 1,000명의 기병과 함께 자신의 병력 일부를 이끌고 산시 방면으로 공격을 막기 위해 병력을 분산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밤중에 이 병력들은 몰래 강을 다시 건넜다.[1] 두는 미끼를 물었고, 5월 28일 이른 아침에 그의 군대의 상당 부분을 이끌고 호뢰로 진격하여 시수강 동쪽에 병력을 배치하여 당나라에 도전했다. 이세민의 계획에 따라 당군은 전투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1] 대신 언덕의 강력한 방어 위치에 머물면서 하군이 지쳐서 물러나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라프에 따르면, 당나라는 "이제 사기가 저하되고 조직이 와해된 하군에게 돌진하여 덮칠 것"이었다.[1] 이것은 이세민이 이미 유무주와 간쑤 동부의 지배자 설인고를 제압하기 위해 사용했던 그의 일반적인 청사진과 일치했다.[1] 당 태자는 적이 전진하도록 내버려두고, 그들의 보급선을 늘린 다음,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적절하고 방어하기 좋은 위치를 선택했다. 그는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고 대신 상대의 보급선을 습격하여 약점이나 후퇴의 조짐을 기다렸다.[1] 그런 다음 그는 압도적인 전장 성공을 목표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했는데, 그라프의 말처럼 "끊임없는 기병 추격"으로 이를 결정적으로 만들어 활용하고 상대의 정권 전체를 붕괴시켰다.[1]
자신의 우세한 병력이 승리할 수 있도록 당군을 평야로 유인하기 위해 두는 300명의 기병을 보내 시수강을 건너 이세민의 공격을 유발했다. 이세민은 자신의 계획을 고수하면서 두가 제공한 지연의 구실을 이용하기 위해 200명의 기병만 보냈다.[1] 두 기병대 간의 결투는 잠시 동안 지속되었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양측은 모두 전열로 물러났다.[1] 이것과 하군 장교와 당나라 장군 우지징더 사이의 작은 충돌을 제외하고, 양군은 오전 8시부터 정오까지 대치 상태를 유지했고, 이때 하군 병사들이 갈증과 피로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하여 병사들이 앉거나 대형을 깨고 물을 길어왔다.[1] 이세민은 높은 곳에서 이를 지켜보았다. 이전의 기만적인 공격에서 돌아온 말들과 기병대가 다시 완전한 전력을 갖추자, 당 태자는 우문사급 휘하의 300명의 기병을 탐색 공격으로 보냈다.[1]
이세민은 사기가 저하되고 분산된 하군이 이 공격으로 혼란에 빠져 응집력 있는 방어를 펼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자 더 많은 기병대를 보내 두의 좌익을 남쪽에서 공격하게 했다.[1] 당의 공격은 당시 그의 장교들과 회의를 하고 있던 두에 의해 의도치 않게 지원받았다. 그의 군대가 무너지면서 두는 그의 군대 전체에게 강에서 시수 계곡의 더 나은 방어 위치인 동쪽 절벽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1] 그러나 확산되는 혼란 속에서 많은 장교들이 제때 병사들에게 도달할 수 없었고, 장군들이 내린 명령이 종종 전투 대열에 전달되지 못했다. 하군에 혼란이 퍼지는 것을 본 이세민은 자신의 군대에 철수하는 하군에 대한 전면 공격을 시작하라고 명령했고, 자신은 나머지 기병대의 선두에서 공격을 이끌었다.[1] 이세민의 18세 사촌 이도현은 특히 이 전투 단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하군 진영을 돌파하여 후방에 나타나 다시 반대편으로 돌아서서 이 행위를 여러 번 반복하여 전투가 끝났을 때 그의 갑옷에 너무 많은 화살이 꽂혀 중국 기록은 그의 모습을 고슴도치에 비유했다.[1]
그 후 벌어진 전투는 치열했지만, 이세민과 그의 기병대 일부가 하군 진영을 돌파하여 동쪽 절벽에 도달하여 당나라 깃발을 양군 모두에게 보이게 되면서 결정되었다.[1] 측면에서 당나라 기병대가 도착한 것과 함께, 이 전개는 하군의 완전한 붕괴를 야기했다. 당군과 동쪽 절벽 사이에 갇힌 3,000명의 하군 병사가 전장에서 또는 그 후의 추격전에서 쓰러졌지만, 50,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고 나머지는 주변 시골로 흩어졌다.[1] 여기에는 황하를 건너는 길을 찾으려다 부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진 두건덕 자신도 포함되었다.[1] 하나라의 패배는 완전했다. 단지 수백 명의 기병만이 하나라 수도에 도달했고, 그들의 통치자가 포로로 잡히면서 나머지 하군의 군대를 결집할 가능성은 사라졌다.[1]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두건덕이 처형된 후, 그의 부하였던 유흑달이 두건덕의 옛 세력권에서 재반란을 일으켰다.
호뢰 전투는 수나라 멸망 이후 벌어진 내전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가 승리함으로써, 당나라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왕세충과 두건덕을 제거하고 북동부 평원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당나라는 다른 경쟁 세력에 비해 독보적인 우위를 확보하고, 중국 재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당나라의 권위는 아직 중국 전체를 포괄하지 못했고, 몇 년 동안 반란이 일어났다. 특히 621년 말, 허베이의 전 하(夏)나라 관리들이 두건덕의 처형에 반발하여 유흑타의 지휘 하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진압되었다. 호뢰 전투에서 결정된 내전의 흐름은 바뀌지 않았고, 다양한 반군 지도자들이 차례로 제압되었다. 마지막 지도자인 양사도는 628년 6월에 패배하여 내전이 종식되었다.
629년, 당시 중국 황제였던 이세민은 내전 동안 그가 싸웠던 7개의 전투 현장에 불교 사찰을 세울 것을 명령했다. 호뢰에는 "공감 평등 사원"이라는 이름을 붙여, 갈등으로 인한 분열을 치유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보여주었다.
호뢰 전투는 중원의 정세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이세민은 두건덕과 왕세충의 두 세력을 한 번에 평정하여 중국 북방을 통일하고, 당나라 판도의 기초를 확정했다. 고조는 이세민의 군공이 매우 커 특별한 직위를 설치하여 그에게 부여했다. 이 일은 간접적으로 이후의 현무문의 변을 초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4. 1. 정나라와 하(夏)나라의 멸망
두건덕이 사형당한 후, 그의 부하였던 유흑달이 두건덕의 옛 세력권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호뢰 전투에서 당나라가 승리하면서 뤄양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구원병이 올 희망이 사라지자 왕세충은 6월 4일에 항복했다. 이세민은 포로로 잡힌 두건덕과 그의 장수들을 성벽 앞에서 보여준 뒤 항복을 받아냈다. 이세민은 개선 행렬의 선두에서 금색 갑옷을 입고, 두 명의 포로가 된 경쟁자들과 그들의 측근, 자신의 장군 25명, 그리고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두건덕의 아내와 고위 관리들은 하(夏)나라 진영에서 탈출하여 허베이의 안전한 지역에 도달했지만, 일부는 두건덕의 양자 밑에서 계속 싸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7산성을 포함한 대부분은 이 전투의 결과를 당나라가 통치할 '천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징조로 간주했다. 6월 10일, 하(夏)나라는 공식적으로 당나라에 항복했고, 두건덕의 동맹인 서원랑과 왕세충의 형제인 시편이 다음 날에 항복했다. 당나라가 패배한 경쟁자 대부분을 관대하게 대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두건덕과 왕세충은 곧 제거되었다. 두건덕은 장안으로 보내져 처형되었고, 왕세충은 표면적으로는 쓰촨으로 망명하도록 허락되었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에 살해되었다.
두 건덕의 하(夏)나라 군대가 패퇴한 후, 좌복야 제선행과 두 건덕의 조(曹) 황후는 단 100기의 기병을 이끌고 명주로 도망쳤다. 두 건덕의 신하는 두 건덕의 양자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으나 제선행은 이 안을 배척하고, 최종적으로 백관과 전국의 옥새를 가지고 당나라에 항복했다.
7월, 두 건덕은 장안으로 보내져 참수되었다. 당 고조가 왕세충의 죄상을 열거하자, 왕세충은 "저의 죄는 원래 죽어 마땅하지만, 진왕은 일찍이 저를 죽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했고, 고조는 왕세충을 사면하여 서인으로 강등시켜 파촉의 땅으로 유배 보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왕세충의 원수였던 망자 독고기의 아들 독고수덕은 왕세충과 그의 형 왕세운의 경호가 허술한 틈을 타 그들을 살해했다. 고조는 독고수덕의 관직을 파면하는 데 그쳤다. 이후 왕세충의 기타 친족은 모반 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
두 건덕의 사후, 옛 신하였던 장병들은 분개하여 유흑달을 왕으로 추대하고 반년 이내에 두 건덕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무덕 6년(천조 2년, 623년), 유흑달은 이건성에 의해 평정되었다.
4. 2. 이세민의 위상 강화와 현무문의 변
호뢰 전투에서 당나라의 승리는 왕세충의 뤄양에 대한 희망을 꺾었다. 구원병이 오지 않자 왕세충은 6월 4일에 항복했다. 이세민은 두건덕과 그의 장수들을 포로로 잡아 성벽 앞에서 보여주었다. 이세민은 금색 갑옷을 입고 개선 행렬을 이끌며 장안으로 돌아왔다. 2명의 포로와 그들의 측근, 25명의 장군, 1만 명의 기병이 행렬에 참여했다. 두건덕의 아내와 고위 관리들은 하(夏)나라 진영에서 탈출하여 허베이의 안전한 지역으로 도망쳤지만, 대부분은 이 전투의 결과를 당나라가 '천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징조로 받아들였다. 6월 10일, 하(夏)나라는 공식적으로 당나라에 항복했다.[1]데이비드 그래프에 따르면, 호뢰 전투는 수(隋)나라 멸망 이후 "내전에서 가장 결정적인 교전"이었다.[1] C. P. 피츠제럴드는 이를 "세계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로 평가했다.[1] 두건덕과 왕세충을 물리침으로써 당나라는 가장 강력한 두 경쟁자를 제거하고 중요한 북동부 평원을 통제하여 다른 모든 경쟁 세력에 대한 독보적인 우위를 확보했다.[1]
두건덕의 하(夏)나라 군대가 패배한 후, 좌복야 제선행과 두건덕의 조(曹) 황후는 단 100기의 기병을 이끌고 명주로 도망쳤다. 두건덕의 신하는 두건덕의 양자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으나 제선행은 이 안을 배척하고, 최종적으로 백관과 전국의 옥새를 가지고 당나라에 항복했다.
7월, 두건덕은 장안으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당 고조가 왕세충의 죄상을 열거하자, 왕세충은 "저의 죄는 원래 죽어 마땅하지만, 진왕은 일찍이 저를 죽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했고, 고조는 왕세충을 사면하여 서인으로 강등시켜 파촉(巴蜀)의 땅으로 유배 보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왕세충의 원수였던 망자 독고기의 아들 독고수덕은 왕세충과 그의 형 왕세운의 경호가 허술한 틈을 타 그들을 살해했다. 고조는 독고수덕의 관직을 파면하는 데 그쳤다. 이후 왕세충의 기타 친족은 모반 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
두건덕의 사후, 옛 신하였던 장병들은 분개하여 유흑달을 왕으로 추대하고 반년 이내에 두건덕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무덕 6년(천조 2년), 유흑달은 이건성에 의해 평정되었다.
호뢰 전투는 중원의 정세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이세민은 두건덕과 왕세충의 두 세력을 한 번에 평정하여 중국 북방을 통일하고, 당나라 판도의 기초를 확정했다. 이세민의 군공은 매우 커, 고조는 이세민을 위해 특별한 직위를 설치하여 그에게 부여했다. 이 일은 간접적으로 이후의 현무문의 변을 초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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