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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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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곤은 조조의 아들이자 조위의 제후왕으로,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2만 편이 넘는 글을 지었다. 그는 한나라 헌제로부터 평향후에 봉해졌으며, 조비가 조위를 건국한 후 제후왕에 봉해졌다. 조곤은 겸손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칭찬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아내와 첩들에게 베를 짜게 하는 등 절약하는 생활을 했다. 조비와 조예 치세 동안 여러 차례 작위가 변경되었으며, 235년에 사망하여 공왕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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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곤

2. 생애

조곤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즐겼으며, 10대 때부터 뛰어난 문장력을 보였다. 일생 동안 2만여 개의 문장을 지었다.[15] 조조 사후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받아 위나라를 건국한 후, 평향후, 동향후, 찬후 등에 봉해졌다. 황초 2년(221년)에 으로 승급되었고, 이듬해 북해왕에 봉해졌다. 그 후로도 찬왕, 중산왕 등 봉지를 전전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소박하였으며, 자신의 처첩들에게도 베를 짜게 하는 등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여 조카 명제가 흠모하였다. 한번은 입조하였을 때 금령을 범하여 청룡 원년(233년)에 고소되었는데, 담당 관리가 식읍 두 현 및 750호를 깎았으나, 황제는 처벌을 원치 않았고 근신하였으므로 이듬해에 복권되었다.

청룡 3년(235년) 가을, 병에 걸려 태의의 진료를 받았고, 태비와 형 조린의 문병을 받았다. 병이 심해지자 속관들에게 명령을 내려 죽을 준비를 해 동당을 짓게 했다. 다 지어지자 '''수지지당'''(遂志之堂)이라 이름 짓고, 그곳으로 옮겨 세자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 이해에 요절했고, 시호(恭)이라 하였다. 작위는 적자 조부가 이었다.[15]

2. 1. 초기 생애 (한나라 시기)

한나라 말기 권력을 잡고 조위의 기반을 마련한 군벌 조조의 아들 조군은, 어머니가 조조의 첩 두부인(杜夫人)이었다. 두부인은 조림을 낳기도 했다.[1]

216년, 조군은 한나라 꼭두각시 황제 헌제에게서 "평향후(平鄉侯)"에 봉해졌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학문에 열심이었고, 아홉 살에 이미 글을 지을 수 있었다. 시중들은 그가 과로로 병들까 염려하여 휴식을 권했지만, 조군은 글 읽고 쓰는 것을 즐겨 쉬지 않고 계속했다.[2] 217년, 헌제는 조군의 봉호를 "동향후(東鄉侯)"를 거쳐 "찬후(贊侯)"로 변경했다.[3]

2. 2. 조위 시기

조곤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즐겼으며, 10대 때부터 뛰어난 문장력을 보였다. 일생 동안 2만여 개의 문장을 지었다고 한다.[15] 조조가 죽고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받아 위나라를 건국한 후, 조곤은 평향후(平鄕侯), 동향후(東鄕侯), 찬후(贊侯) 등에 봉해졌다. 황초 2년(221년)에 으로 승급되었고, 이듬해 북해왕에 봉해졌다. 그 후로도 찬왕(贊王), 중산왕 등 봉지를 전전하였다.

228년, 조비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조예의 재위 기간 동안 푸양현(濮陽縣)에서 제후의 자리에 올랐다.[8] 231년 겨울, 조예는 조곤을 수도 낙양(洛陽)으로 불러 예를 표하게 했다. 이듬해, 조곤의 칭호를 "중산왕(中山王)"으로 바꾸었다.[9]

아들 조부가 중산왕 작위를 계승하였고, 이후 위나라 황제들의 재위 기간 동안 조부의 영지에 속한 호구 수는 증가하여 조환(曹奐)의 재위 기간에는 3,400호에 달했다.[16]

2. 2. 1. 조비 치세

조비조조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후, 221년 조군은 제후왕의 작위를 받았다. 신하들이 축하하자 조군은 백성들의 고생을 모르고 살아왔다며, 자신의 약점을 지적해 달라고 부탁했다.[4]

조군은 책을 읽고 깊이 생각하는 것을 즐겼다. 주변 신하들은 조비의 명에 따라 조군의 행동을 보고하고 칭찬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군은 이를 듣고 신하들을 꾸짖으며, 덕을 쌓고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며 다른 사람에게 알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5]

222년, 조군은 북해왕으로 격상되었다. 같은 해, 예 서쪽 장수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조군은 상서로운 징조라며 조비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조비는 기뻐하며 조군에게 금 10을 하사하고 칭찬하였다.[6]

223년, 조비는 조군의 작위를 찬왕으로 변경하였고, 226년에는 복양왕으로 변경하였다.[7]

조비 치세 동안 조군의 작위 변화는 다음과 같다.

시기작위
221년찬공(賛公)
222년북해왕
223년찬왕(贊王)
226년복양왕(濮陽王)


2. 2. 2. 조예 치세

조곤은 성품이 온화하고 소박하였으며, 자신의 처첩들에게도 베를 짜게 하는 등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여 조카 명제가 그를 흠모하였다.[8] 한번은 입조하였을 때 금령을 범하여 청룡 원년(233년)에 고소되었는데, 담당 관리가 고집하여 조곤의 식읍 두 현 및 750호를 깎았으나, 황제는 조곤의 처벌을 원치 않았고 조곤이 근신하였으므로 이듬해에 복권시켰다.[10][11][12]

청룡 3년(235년) 가을, 병에 걸리자 태의의 진료를 받았고, 태비와 형 조린(曹霖)의 문병을 받았다. 그러나 병은 더욱 심해졌고, 속관들에게 명령을 내려 죽을 준비를 해 동당을 짓게 했다. 다 지어지자 '''수지지당'''(遂志之堂)이라 이름 짓고, 그곳으로 옮겨 세자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13] 이해에 죽어 요절했고, 시호(恭)이라 하였다. 작위는 적자 조부가 이었다.[14][15]

3. 평가

조곤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십수 세에 뛰어난 글을 지었으며, 생애 동안 2만 자가 넘는 글을 남겼다. 재능은 조식(曹植)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와 견줄 만하다고 평가받았다. 성격은 온화하고 소박했으며, 주변의 칭찬에도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아내와 첩들에게도 베를 짜게 하여 검소하게 생활하는 등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다.[1]

3. 1. 긍정적 평가

조곤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십수 세에 뛰어난 글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주변에서는 그가 학문에 너무 열중하여 병이 날까 염려하여 독서를 삼가라고 충고했지만, 조곤은 이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생애 동안 2만 자가 넘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재능은 조식(曹植)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와 견줄 만하다고 평가받는다.[1]

또한 조곤은 성격이 온화하고 소박하여, 주변 사람들이 그의 승진을 축하하거나 선행을 임금에게 알리면 오히려 놀라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첩들에게도 베를 짜게 하여 검소하게 생활하는 모범을 보였다.[1]

3. 2. 부정적 평가

조곤은 학문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조식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조식과 견줄 만했다는 평가도 있다.[1]

4. 가족 관계

항목내용
아들조부
아들 영읍경초(景初)·정원(正元)·경원(景元) 연간에 여러 차례 봉토를 더 받아 총 3,400호[4]



조곤은 아들 조부(曹孚)를 두었으며, 조곤 사후 작위를 계승하였다.[4]

5. 기타

조곤은 조식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와 견줄 만한 재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다. 성격은 온화하고 소박했으며, 벼슬이 오르거나 선행이 알려져도 오히려 두려워했다. 아내와 첩들에게도 베를 짜게 하는 등 검소하게 생활했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20
[2] 서적 Sanguozhi vol. 20
[3] 서적 Sanguozhi vol. 20
[4] 서적 Sanguozhi vol. 20
[5] 서적 Sanguozhi vol. 20
[6] 서적 Sanguozhi vol. 20
[7] 서적 Sanguozhi vol. 20
[8] 서적 Sanguozhi vol. 20
[9] 서적 Sanguozhi vol. 20
[10] 서적 Sanguozhi vol. 20
[11] 서적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0
[12] 서적 Sanguozhi vol. 20
[13] 서적 Sanguozhi vol. 20
[14] 서적 Sanguozhi vol. 3
[15] 서적 Sanguozhi vol. 20
[16] 서적 Sanguozhi vol.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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