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히폴리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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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의 히폴리투스는 2-3세기경 활동한 기독교 신학자이자, 로마 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는 교황 제피리누스 치하에서 장로로 활동하며, 양태론을 비판하고 로고스 교리를 옹호했다. 교황 갈리스토 1세의 윤리적 관점에 반대하여 대립 주교로 선출되기도 했다.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 시대의 박해로 사르데냐로 유배되어 사망했으며, 사후 순교자로 추앙받았다. 그는 다양한 저술 활동을 통해 성경 해석, 변증학, 연대기, 교회법 등 다방면의 주제를 다루었으며, 특히 로고스 신학과 종말론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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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히폴리투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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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 |
기본 정보 | |
존칭 | 성인 |
직함 | 교부, 신학자, 순교자 |
출생 | 기원후 170년경, 로마, 로마 제국 |
사망 | 기원후 235년경 (65세), 사르데냐, 로마 제국 |
공경 | 가톨릭 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성공회 |
축일 | 가톨릭 교회: 8월 13일 동방 정교회: 1월 30일 콥트 정교회: 메시르 6일 |
수호 | 비비에나(이탈리아), 멕시코 시티, 말 |
신학 정보 | |
시대 | 교부 시대 |
언어 | 그리스어 |
사상 및 운동 | 삼위일체론 |
주요 관심사 | 변증론, 종말론, 기독론, 성경 해석 |
주요 저서 | 필로소푸메나 사도 전통 |
2. 생애
히폴리투스의 출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빅토리아 시대의 한 이론에 따르면, 교황 제피리누스(199–217년) 치하 로마 교회 장로로서 학식과 웅변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당시 젊은이였던 오리게네스가 그의 설교를 들었다.[3][18] G. 샐몬은 히폴리투스가 로마의 그리스어 사용 기독교인들의 지도자였다고 주장하며,[7] 앨런 브렌트는 로마의 가내 교회가 매력적인 스승을 중심으로 모인 그리스 철학 학교와 유사한 형태로 발전한 것으로 보았다.[5]
2. 1. 초기 활동
히폴리투스는 교황 제피리누스(199년–217년) 시대에 로마 교회 장로로서 학식과 웅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젊은이였던 오리게네스가 그의 설교를 듣기도 했다.[3][18]히폴리투스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존재에 대한 다른 명칭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양태론을 비판하고,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로고스 교리를 옹호하여 성부와 로고스("말씀")를 구분했다.[4] 그는 윤리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이었으며, 교황 갈리스토 1세(217년–222년)가 간음과 같은 심각한 죄를 범한 기독교인들에게 면죄부를 확대하자 이에 격분했다.[4]
히폴리투스는 양태론(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격을 하나의 신의 양태가 변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가장 격렬한 반대자였다.[29]
2. 2. 교황과의 갈등
히폴리투스는 교황 갈리스토 1세(217–222년)가 간음과 같은 심각한 죄를 범한 기독교인들에게 면죄부를 확대하자 이에 격분하여 반대하였다.[4] 그는 뚜렷한 엄격주의를 옹호했다.[26] 이 시기에 그는 스스로 로마의 대립 주교로 선출된 것으로 보이며, 교황 우르바노 1세(222–230년)와 교황 폰티아노(230–235년)를 계속 공격했다.[1]2. 3. 유배와 죽음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 시대의 박해로 히폴리투스와 교황 폰티아노는 235년에 함께 사르데냐로 유배되었으며,[6] 광산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7] 교황 파비아노(236–250년) 시대에 히폴리투스와 폰티아노의 시신은 로마로 옮겨졌다. ''354년의 연대기''(보다 정확하게는 ''리베리아 목록'')에 따르면, 236년 8월 13일에 두 시신이 로마에 매장되었으며, 히폴리투스의 시신은 티부르티나 가도의 묘지에 안치되었고,[6] 고해자 유스티누스가 그의 장례를 집전했다고 전해진다. 이 문서는 약 255년경에 히폴리투스가 순교자로 여겨졌으며 그에게 주교가 아닌 사제의 지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그가 사망하기 전에 분열주의자였지만 교회로 다시 받아들여졌음을 시사한다.[1][18]3. 전승
히폴리투스라는 이름은 초기 기독교의 다양한 성인전 및 순교록 자료에 나타난다. 작가 히폴리투스의 생애에 대한 사실은, 히폴리투스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유명한 기독교인들과 달리, 서방에서는 결국 잊혀졌는데, 아마도 그가 헬라어로 글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야코부스 데 보라기네의 『황금 전설』(13세기)에 따르면, 히폴리투스는 로마 황제를 섬긴 군인이었고, 성 라우렌티우스에 의해 기독교도가 되었다고 한다.[31] 순교한 성 라우렌티우스의 유해를 매장한 후, 데키우스 황제의 추격을 받아 256년경에 사나운 말의 목에 발이 묶여 가시와 엉겅퀴 밭을 끌려 다니다가 죽었다고 한다.[32]
그림에서는 순교 장면이나 군인의 모습으로 묘사되며, 히폴리투스의 고문에 사용되었다고 하는 곤봉, 쇠빗, 밧줄, 창과 종려나무가 성인으로서의 소지품이 된다.[33]
3. 1. 서방 교회의 전승
교황 다마수스 1세는 히폴리투스에게 경구를 헌정했는데,[18] 이는 노바티아누스파 분파의 사제를 언급한 것이다. 5세기에 프루덴티우스는 "성 히폴리투스의 수난"에서 이 견해를 제시했다. 7세기와 8세기의 수난사에는 그가 성 라우렌티우스에게 개종한 군인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 전설은 로마의 성무일과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는 포르투스의 주교로 여겨졌던 같은 이름의 순교자와 혼동되기도 했으며,[1] 깊은 우물에 빠져 죽었다고 전해진다.[6]프루덴티우스의 설명에 따르면, 순교자 히폴리투스는 야생마에게 끌려 죽임을 당했는데,[8] 이는 아테네에서 야생마에게 끌려 죽은 신화 속의 히폴리토스 이야기와 매우 유사하다. 그는 성인의 지하 묘지를 묘사하고, 그곳에서 히폴리투스의 처형을 나타내는 그림을 보았다고 말한다. 또한 8월 13일을 히폴리투스를 기념하는 날로 확정했지만, 이는 동방 정교회의 메나이온에 보존된, 라우렌티우스에게 개종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한 설명으로 인해 히폴리투스는 말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병든 말들을 영국 허트퍼드셔의 세인트 이폴리츠로 데려왔는데, 그곳에는 그에게 헌정된 교회가 있다.[9]
3. 2. 야생마 전승
프루덴티우스의 설명에 따르면, 순교자 히폴리투스는 야생마에게 끌려 죽었는데,[8] 이는 아테네에서 야생마에게 끌려 죽은 신화 속 히폴리토스 이야기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프루덴티우스는 성인의 지하 묘지를 묘사하고, 그곳에서 히폴리투스의 처형을 나타내는 그림을 보았다고 말한다. 또한 8월 13일을 히폴리투스를 기념하는 날짜로 확정했지만, 이것은 다시 동방 정교회의 메나이온에 보존된, 라우렌티우스에게 개종한 사람을 가리킨다.[8]이러한 설명으로 히폴리투스는 말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병든 말들이 영국 허트퍼드셔의 세인트 이폴리츠로 데려와졌으며, 그곳에는 그에게 헌정된 교회가 있다.[9]
3. 3. 동방 교회의 전승
동방 정교회에서 성 히폴리투스의 축일은 8월 13일이며, 이 날은 대축일인 변모 축일의 사후 축제이기도 하다.[9] 사후 축제에는 변모 축일의 찬송가를 반복해야 하므로, 성 히폴리투스의 축일은 전날이나 다른 편리한 날로 옮겨질 수 있다. 동방 정교회는 또한 1월 30일에 ''"로마 교황 성 히폴리투스"''의 축일을 기념하는데, 이 인물과 동일인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9]4. 저술
히폴리투스는 성경 해석, 설교, 변증학, 논쟁, 연대기, 교회법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그의 저작들은 주제의 다양성 면에서 오리게네스의 저작과 비교되기도 한다.[11]
히폴리투스 저작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1551년 발견된 조각상에는 히폴리투스의 저작으로 추정되는 제목들이 새겨져 있었으나, 일부 학자들은 이 목록에 의문을 제기한다.[26][18]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와 예로니모 역시 히폴리투스의 저작 목록을 남겼지만, 이들 중 일부는 실제로 히폴리투스의 저작이 아닐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히폴리투스에게 귀속된 성경 해석학적 작품 중 가장 잘 보존된 것은 ''예언자 다니엘에 대한 주석''과 ''아가에 대한 주석''이다.[1] ''아가에 대한 주석''은 아가서의 첫 세 장까지를 다루는, 아가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독교적 해석으로 알려져 있다.
히폴리투스는 양태론(성부, 성자, 성령을 하나의 신의 양태 변화로 보는 것)에 대한 가장 격렬한 반대자였다.
4. 1. 주요 저서
히폴리투스는 성경 해석, 설교, 변증학, 논쟁, 연대기, 교회법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많은 저작을 남겼다.[18]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모든 이단 반박(Philosophumena)''': 10권으로 구성된 저작으로, 제1권이 가장 중요하다.[2] 이교 마술사들의 속임수를 비난하고 이단을 반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34]
- '''사도 전승''': 감독 서임식의 일부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최초의 전례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11] 현재 가톨릭 교회의 주교 서임식의 단어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업데이트된 ''사도 전승''에서 유래했다.[17]
- '''다니엘 주석''', '''아가 주석''': 성경 해석학적 작품으로, 초기 기독교 주석의 중요한 예시이다.[1] 특히 ''아가 주석''은 부활절에 사용하기 위해 작곡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2]
-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독교 종말론 발전에 중요한 저작이다.[20] 히폴리투스는 이 저작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제시했다.[20]
- '''70인의 사도에 관하여''': (잠재적으로) 초기 자료로서 주목할 만하다.[19]
히폴리투스의 세계 연대기는 세계 창조에서부터 234년까지의 기간을 다루며, 동서양의 많은 연대기적 작품의 기초가 되었다.[16][18]
4. 2. 기타 저서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와 예로니모는 히폴리투스의 다양한 저작 목록을 기록했다.[26][18] 히폴리투스는 성경 해석, 설교, 변증학 및 논쟁, 연대기, 교회법 등 다양한 주제로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11]히폴리투스의 저작 중 성경 해석학적 작품으로는 ''예언자 다니엘에 대한 주석''과 ''아가에 대한 주석''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1] ''아가에 대한 주석''은 아가서의 첫 세 장에 대한 초기 기독교적 해석으로, 신비 교육의 일부로 여겨진다.[12]
히폴리투스는 연대기 및 교회법 관련 작품으로도 영향력을 남겼다. 234년까지의 세계 창조에서부터의 기간을 다룬 그의 세계 연대기는 동서양 연대기 작품의 기초가 되었다.[16][18] ''사도 전승''에는 가장 초기의 서임 의식이 포함되어 있으며,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업데이트된 가톨릭 교회의 현재 주교 서임식 단어의 기원이 되었다.[6][17]
3세기 이후 동방의 교회 규범 편집에서 많은 법규들이 히폴리투스에게 귀속되었는데, 히폴리투스 규범이나 히폴리투스를 통한 헌장에서 볼 수 있다.[18] 이 자료 중 어느 정도가 히폴리투스의 진정한 저작인지, 수정되었는지, 잘못 귀속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18] ''페타 네게스트''는 에티오피아 법률의 헌법적 기초로 사용되었으며, 히폴리투스는 '''아불리데스'''로 기억된다.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에 관하여''와 ''그리스도의 70인의 사도에 관하여''라는 두 작품은 19세기에 발견되어 히폴리투스의 작품에 대한 부록에 포함되었다.[19]
히폴리투스는 양태론(성부, 성자, 성령을 하나의 신의 양태 변화로 보는 것)에 대한 가장 격렬한 반대자였다. 에우세비우스는 히폴리투스의 저작으로 『창조의 6일에 대해』, 『창조의 6일에 이어지는 것에 대해』, 『마르키온에 대한 반박』, 『찬가에 대해』, 『파스카에 대해』, 『에제키엘서의 여러 부분에 대해』 등을 언급했다.[36]
5. 신학 사상
히폴리투스는 양태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성부와 로고스를 구분하는 로고스 신학을 옹호했다.[37] 이레네오,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이 삼위일체에서 성부의 우위를 인정하는 종속설을 받아들였다. 양성설에 대해서는, 「고통받은 예수」와 「고통받지 않는 그리스도」를 분리하는 입장을 취했다.
노에토스가 주장하는 천부고난설(성부 하느님이 고난받았다는 주장)에 대해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비판했다.[37] 그는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을 증명한다고 주장하며, "유일한 하느님, 두 개의 페르소나, 세 번째 구원의 활동(오이코노미아) 즉 성령의 은혜"라고 기록했다.[37]
히폴리투스는 기독교 종말론 발전에 중요한 인물로,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에 관하여''와 ''예언자 다니엘 주석''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제시했다.[20]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치세 동안 박해가 시작되면서 많은 초기 기독교 작가들이 묵시적 종말론적 주제를 다루었다.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에 관하여''는 가장 초기의 작품 중 하나로, 202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21] 히폴리투스는 이레네우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21]
히폴리투스는 다니엘의 70주 예언을 문자 그대로의 해로 해석하는 오랜 관례를 따랐다. 그는 다니엘서 2장과 7장의 평행 예언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는데, 다른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이를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와 구체적으로 관련지었다. 그의 사건 해석과 그 의미는 기독론적이다.[22]
히폴리투스는 재림이 임박했다는 믿음에 동의하지 않았다.[23] 그는 다니엘 주석에서 가까운 미래에 재림을 예측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재림 전에 창조로부터 6천 년이 지나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가 아담 이후 5500년에 태어났다고 말하면서, "6천 년의 완성이 되기까지"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500년이 지나야 하며, "이런 방식으로 종말이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24]
5. 1. 로고스 신학
히폴리투스는 양태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성부와 로고스를 구분하는 로고스 신학을 옹호했다.[37] 양태론은 성부, 성자, 성령을 한 하느님의 다른 모습으로 보는 견해인데, 히폴리투스는 이에 반대하여 성부와 성자가 별개라고 주장했다.그는 이레네오,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이 삼위일체에서 성부의 우위를 인정하는 종속설을 받아들였다. 즉, 성부가 성자보다 역할적으로 위에 있다고 보았다. 「양성설」에 대해서는, 「고통받은 예수」와 「고통받지 않는 그리스도」를 분리하는 입장을 취했다.
히폴리투스는 노에토스가 주장하는 천부고난설(성부 하느님이 고난받았다는 주장)에 대해,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그리스도는 어떤 아버지에게 가는가, 대답하라"라고 비판했다.[37] 그는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을 증명한다고 주장하며, "유일한 하느님, 두 개의 페르소나, 세 번째 구원의 활동(오이코노미아) 즉 성령의 은혜"라고 기록했다.[37]
5. 2. 종말론
히폴리투스는 기독교 종말론 발전에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 요약집인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에 관하여''와 ''예언자 다니엘 주석''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제시했다.[20]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치세 동안 박해가 시작되면서 많은 초기 기독교 작가들이 묵시적 종말론적 주제를 다루었다.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에 관하여''는 가장 초기의 작품 중 하나이다. 히폴리투스는 이레네우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21] 그러나 이레네우스와는 달리 히폴리투스는 자신의 시대에 교회에 대한 예언의 의미에 집중했다. 교리적 저술 중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에 관하여''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아마도 202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히폴리투스는 다니엘의 70주 예언을 문자 그대로의 해로 해석하는 오랜 관례를 따랐다. 그는 다니엘서 2장과 7장의 평행 예언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는데, 다른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이를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와 구체적으로 관련지었다. 그의 사건 해석과 그 의미는 기독론적이다.[22]
히폴리투스는 재림이 임박했다는 믿음에 동의하지 않았다.[23] 그는 다니엘 주석에서 가까운 미래에 재림을 예측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재림 전에 창조로부터 6천 년이 지나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가 아담 이후 5500년에 태어났다고 말하면서, "6천 년의 완성이 되기까지"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500년이 지나야 하며, "이런 방식으로 종말이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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