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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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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의는 형주 출신의 촉한의 관료로, 제갈량 사후 권력 투쟁에서 패하여 자결했다. 그는 형주 자사 부군의 주부로 시작해 관우를 흠모하여 그의 휘하로 들어갔고, 유비에게 발탁되어 상서까지 올랐다. 유비 사후 제갈량에게 중용되어 군무를 수행하며 위연과 갈등을 겪었다. 제갈량 사후 위연을 제거하고 철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나, 제갈량의 후계자로 장완이 지명되자 불만을 품고 비난하다가 유배되었고,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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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오장원 제갈량 사당의 양의 동상
오장원 제갈량 사당의 양의 동상
이름양의
한자 표기楊儀
로마자 표기Yang Yi
위공(威公)
출생불명
출생지형주양양군
사망235년
사망지노산현, 사천성
직업관료
관직
중군사234년 ~ 235년
군주유선
수군장군230년 ~ 234년
군주유선
승상제갈량
승상 장사230년 ~ 234년
군주유선
승상제갈량
참군225년 ~ 230년
군주유선
승상제갈량
홍농태수 (명목상)222년 ~ 225년
군주유비 / 유선
승상제갈량
상서219년 ~ 222년
군주유비
승상제갈량

2. 생애

형주 상양군(현재의 후베이성 샹양시 일대) 출신으로[1], 후한 말 건안 연간에 형주자사 부군의 주부(主簿)를 지냈다. 이후 부군을 떠나 양양 태수 관우에게 귀순하여 공조(功曹)가 되었고, 유비에게 발탁되어 좌장군병조연(左將軍兵曹掾)을 거쳐 219년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상서로 승진했다.[1] 221년 유비가 촉한을 건국한 후, 상서령 유파와의 불화로 인해 위나라 영토였던 홍농군 태수로 좌천되는 등 부침을 겪기도 했다.[2]

223년 유비 사후, 승상 제갈량에게 중용되어 참군(參軍), 장사(長史) 등을 역임하며 북벌 기간 동안 부대 편성, 군량 및 군수물자 조달 등 행정 및 병참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성격이 편협하고 다른 이들과 쉽게 충돌했으며, 특히 고위 장수였던 위연과는 극심한 갈등 관계에 있었다. 제갈량은 두 사람의 재능을 모두 아꼈기에 어느 한쪽을 내치지 못하고 그들의 불화를 안타까워했다.

234년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병사하자, 양의는 제갈량의 유언에 따라 강유, 비의 등과 함께 촉군의 철수를 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명령 계통을 둘러싸고 위연과의 갈등이 폭발하여 내전 직전까지 갔으나, 결국 위연을 반역자로 몰아 제거하고 군대를 청두로 무사히 귀환시켰다.

양의는 위연을 제거하고 군대를 성공적으로 철수시킨 공으로 자신이 당연히 제갈량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생전에 양의의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그의 편협한 성격을 문제 삼아 장완을 후계자로 지목해 두었다. 결국 장완이 상서령과 익주자사에 임명되어 정권을 이어받은 반면, 양의는 실권 없는 중군사(中軍師)에 임명되자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6] 그는 자신의 경력과 능력이 장완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고, 비의에게 "승상이 돌아가셨을 때 차라리 위나라에 투항했더라면 이렇게 영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위험한 발언까지 하였다.

이 발언이 비의를 통해 유선에게 보고되면서, 235년 양의는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서민으로 강등되어 한가군(현재의 쓰촨성 야안시 루산현)으로 유배되었다.[7] 유배지에서도 조정과 인물들을 비방하는 상소를 계속 올리다가 결국 체포 명령이 내려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8] 그의 사후, 남은 가족들은 성도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8]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임용

양의(楊儀)는 형주 상양군(현재의 후베이성 샹양시 일대) 출신이다.[1] 후한 말 건안 연간, 처음에는 형주 자사 부군의 주부(主簿)로 일했으나, 이후 부군을 떠나 양양 태수이던 관우에게 귀순했다.[1] 관우는 양의를 공조(功曹)로 임명하고, 그를 익주(현재의 사천성과 충칭시 일대)의 수도인 청두로 보내 유비를 만나게 했다.[1]

유비는 양의와 군사 전략 및 정치 현안에 대해 논의한 후 그의 식견에 만족하여, 양의를 좌장군부의 병조연(兵曹掾)으로 삼았다.[1] 당시 유비는 한나라 중앙 정부로부터 명목상 좌장군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건안 24년(219년), 유비가 한중 전투에서 승리하고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을 칭하자, 양의는 상서로 승진했다.[1]

장무 원년(221년), 유비는 조비후한 계승에 맞서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촉한을 건국했다. 이듬해 유비가 동맹에서 적으로 돌아선 손권의 오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이릉 전투를 일으켰을 때, 양의는 상서령(尚書令) 유파와 불화를 겪었다.[2] 이로 인해 양의는 홍농군(현재의 허난성 링바오 시 일대) 태수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홍농군은 당시 위나라의 영토였으므로, 이는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명목상의 임명이었다.[2]

2. 2. 제갈량의 북벌 참여와 위연과의 갈등

유비 사후, 유선 치하에서 승상 제갈량은 건흥 3년(225년) 양의를 참군(參軍)으로 삼아 자신의 막부로 전임시켰다. 같은 해 양의는 제갈량을 따라 남정에 참여하여 촉나라 남부의 반란 세력과 불안정한 부족들을 토벌하는 데 기여했다. 건흥 5년(227년)에는 제갈량을 따라 한중군으로 이동했으며, 건흥 8년(230년)에는 장사(長史)로 승진하고 수군장군(綏軍將軍)의 직위가 더해졌다. 이후 제갈량이 조위를 상대로 여러 차례 북벌을 단행할 때, 양의는 부대 편성 계획 수립, 군량미 계산, 군수 물자 조달 등 주로 후방 지원 및 참모 역할을 수행하며 제갈량을 보좌했다. 그는 뛰어난 행정 처리 능력을 발휘하여 복잡한 군수 업무를 차질 없이 처리했다.

그러나 양의는 촉한의 고위 장수였던 위연과 사이가 매우 나빴다. 두 사람은 자주 의견 충돌을 일으키며 다투었고, 위연이 격분하여 칼을 뽑아 양의를 위협하면 양의가 두려워 눈물을 흘리는 일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비의가 종종 나서서 두 사람의 갈등을 중재하려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제갈량은 양의의 행정 능력과 위연의 용맹함을 모두 아꼈기에 어느 한쪽을 내치지 못하고 두 사람의 불화에 고심했다.

건흥 12년(234년),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위나라 군대와 대치하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제갈량은 임종 직전 양의, 비의, 강유 등에게 철수를 명했다. 양의는 제갈량의 유언에 따라 총지휘를 맡아 촉군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이때 사마의가 추격해오자[11], 강유는 양의에게 군대의 깃발을 되돌리고 북을 치며 반격할 것처럼 보이게 하라고 조언했다. 이에 사마의는 복병을 의심하고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하고 물러섰다. 이는 훗날 "죽은 제갈량이 살아있는 사마의를 달아나게 했다"는 이야기의 배경이 되었다.

한편, 위연은 자신이 강유보다 선임임에도 불구하고 양의의 지휘 아래 후퇴하는 것을 거부하며 불만을 품었다. 그는 양의 등이 퇴각하는 길목인 잔도를 불태워 퇴로를 막고, 양의가 모반했다고 유선에게 표를 올렸다. 양의 역시 위연이 모반했다고 표를 올리면서 두 사람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이때 왕평이 나서 위연의 행동이 부당함을 꾸짖자, 위연 휘하의 병사들은 위연에게 잘못이 있다고 판단하여 흩어졌다. 홀로 남겨진 위연은 아들들과 함께 한중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양의의 명을 받은 마대에게 추격당해 살해되었고 그의 삼족 또한 멸족되었다. 『삼국지』 서 위연전에 따르면, 양의는 마대가 가져온 위연의 목을 발로 밟으며 "용노(지혜가 부족한 놈)! 다시 한 번 못된 짓을 할 수 있다면 해 봐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연을 제거하고 성공적으로 군대를 철수시킨 양의는 자신의 공이 크다고 여겨 당연히 제갈량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생전에 양의의 재능은 높이 평가했지만 그의 성격이 편협하고 도량이 좁다고 판단하여, 장완을 자신의 후계자로 은밀히 지명해 두었다. 제갈량 사후 장완이 상서령과 익주자사에 임명되어 정권을 총괄하게 된 반면, 양의는 실권이 없는 명예직인 중군사(中軍師)에 임명되었다. 양의는 경력이나 실적 면에서 자신이 장완보다 월등하다고 생각했기에 이러한 처우에 큰 불만을 품고 원망과 탄식을 일삼았다.

양의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고, 사람들은 그의 절제 없는 언행을 두려워하여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오직 비의만이 그를 위로했는데, 양의는 비의에게 자신의 원망을 토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예전 승상이 죽었을 적에 내가 만약 군을 들어 위씨에게 갔다면 지금 내 처지가 이토록 영락했겠소!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되돌릴 수 없습니다."

비의는 이 말을 비밀리에 유선에게 보고했다. 결국 건흥 13년(235년) 정월, 양의는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서민으로 강등되어 한가군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양의는 조정과 인물들을 비방하는 격한 내용의 상소를 계속 올렸고, 마침내 조정에서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체포 소식을 들은 양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사후, 처자는 성도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양의의 행적이 일부 각색되어 나타난다. 가정 전투에서 마속의 실책이 보고되자 자신이 대신 출전하겠다고 자청하거나, 제갈량 사후 비단 주머니 속 계책에 따라 위연을 유인하여 마대로 하여금 죽이게 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제갈량 사후 후계 문제에 불만을 품고 비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가 유배된 후 자결하는 과정은 역사 기록과 유사하게 그려진다.

2. 3. 제갈량 사후 권력 투쟁과 죽음

건흥 12년(234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위나라와 대치 중 병으로 사망하자, 양의는 강유, 비의와 함께 제갈량의 유언에 따라 군대를 철수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나라의 사마의가 추격해왔으나[11], 강유의 지시로 양의가 군대의 기를 되돌리고 북을 치며 맞설 듯한 태세를 보이자 사마의는 복병을 의심하고 추격을 멈췄다.

그러나 위연은 양의의 지휘를 받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군대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그는 양의 등이 퇴각하지 못하도록 잔도를 불태워 길을 끊고, 양의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촉한 조정에 표를 올렸다. 양의 또한 위연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표를 올리며 서로를 비난했다. 이 과정에서 왕평이 양의 측에 서서 위연의 부당함을 꾸짖자, 위연의 병사들은 잘못이 위연에게 있다고 판단하고 흩어졌다. 고립된 위연은 아들들과 함께 한중으로 도망쳤으나, 양의의 명령을 받은 마대에게 추격당해 살해되었고 그의 삼족 또한 멸족되었다. 『삼국지』 촉서 위연전에 따르면, 양의는 마대가 가져온 위연의 목을 발로 밟으며 "용노(庸奴, 지혜가 부족한 미련한 종놈)! 다시 악행을 저지를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성공적으로 군대를 철수시키고 정적인 위연까지 제거한 양의는 청두로 돌아와 자신이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연히 자신이 제갈량의 뒤를 이어 촉한 정부의 새로운 수장이 될 것이라 기대하며, 조정(趙正)에게 주역으로 자신의 운명을 점치게 했으나 결과가 좋지 않자 실망했다.[6] 그러나 제갈량은 생전에 양의의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성격이 편협하고 충동적이라고 판단하여, 장완을 자신의 후계자로 은밀히 지목해 두었다.

제갈량 사후, 장완은 상서령 겸 익주 자사로 임명되어 정권을 계승했지만, 양의는 실권이 거의 없는 중군사라는 직책에 임명되었을 뿐이었다.[6] 양의는 과거 장완보다 자신이 경력이나 재능 면에서 우월하다고 여겼기에 이러한 인사에 큰 불만을 품고 공공연히 불평을 늘어놓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격한 표현 때문에 그를 멀리했지만, 비의만이 그를 찾아 위로했다. 양의는 비의에게 "예전 승상(제갈량)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로 투항했더라면 지금처럼 초라하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라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비의는 이 말을 비밀리에 유선에게 보고했다. 결국 건흥 13년(235년) 정월[7], 양의는 모든 관직에서 파면되어 서민으로 강등되었고, 한가군(현재의 쓰촨성 야안시 루산현)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양의는 조정과 타인을 비방하는 격한 내용의 상소를 계속 올렸다. 조정에서는 이를 황제의 권위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하고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체포 소식을 들은 양의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8] 그의 사후, 남은 가족들은 성도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8]

3. 평가


  • 진수는 양의에 대해 "실무 처리 능력이 뛰어났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유봉, 팽양, 요립, 이엄, 유염, 위연 등과 함께 언급하며 "그들의 거동을 관찰하고 그들의 언행이 예법에 부합되는지를 살펴보면, 그들이 초래한 재앙과 허물은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여 그의 처신에는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 양희는 《계한보신찬》에서 "위공(양의)은 마음이 좁고, 많은 사람들과 다름을 취했다. 한가한즉 이치에 미치고, 궁핍한즉 상하고 침해했다. 순리를 버리면 흉함으로 들어감은, 주역에서 말한 바다"라고 평가하며 그의 편협한 성품과 불안정한 태도를 비판했다.
  • 오나라손권촉한의 사신 동회에게 "위연과 양의는 소인이다"라고 낮게 평가했다.[12]
  • 배잠의 기록에 따르면, 양의는 형주에 주둔하던 관우의 추천으로 유비를 만났고, 유비는 그의 군사 및 내정 관련 식견을 높이 사 제갈량의 참군으로 발탁했다고 한다.

4. 친족 관계

형 양려(楊慮)와 일족 양옹이 있었다.[10] 양려의 는 위방(威方)으로, 젊어서부터 덕행(德行)이 뛰어나 형주 지역의 명망 있는 학자로 알려졌다.[9][10] 주(州)와 군(郡), 삼공(三公) 등 여러 곳에서 관직을 제안하며 초빙했으나, 양려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9][10] 그의 문하에는 허사를 비롯한 수백 명의 제자가 있었으며, 제자들은 그의 높은 덕행을 존경하여 '덕행 양군'(德行楊君)이라고 불렀다.[9][10] 그러나 양려는 1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13][10]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간행물 Zizhi Tongjian 235-03-14
[8] 서적 Sanguozhi
[9] 서적 Chuguo Xianxian Zhuan
[10] 서적 楊儀伝
[11] 서적 삼국지
[12] 서적 삼국지
[13]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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