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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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비는 조조의 아들로, 위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무를 겸비한 재능을 보였으며, 217년 조조가 위왕이 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220년 조조가 죽자 위왕위를 계승하고 후한을 멸망시킨 후 황제에 즉위하여 위나라를 건국했다. 조비는 내치에 힘써 구품관인법을 시행하고 유학을 부흥시키려 했으나, 법률의 가혹함과 군사적 실패 등으로 민심을 잃었다. 그는 손권에게 속아 이릉대전에서 패배하는 등 군사적 역량의 부족함을 드러냈고, 40세에 병사했다. 조비는 문학적 재능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인물에 대한 평가와 통치 방식에 있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조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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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리벤이 그린 조비와 그의 두 신하 (보스턴 미술관 소장)
이름조비
한자 표기曹丕
로마자 표기Cao Pi
자환
생년기원후 187년경
출생지패국 초현
사망일기원후 226년 6월 29일
사망 장소낙양
묘소수양릉 (연사시, 허난성)
아버지조조
어머니변황후
통치
왕조조위
연호황초
묘호고조
시호문황제
관직
위왕 (한나라)기원후 220년 3월 15일 – 220년 12월 11일
승상 (한나라)기원후 220년 3월 15일 – 220년 12월 11일
위 황제기원후 220년 12월 11일 – 226년 6월 29일
이전조조 (위왕, 승상)
계승조예 (황제)
가족
배우자문소황후
문덕황후 곽씨
이부인
반부인
주문
구씨
임씨
유부인 (언니)
유부인 (동생)
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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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220년 정월, 조조가 죽자 조비는 위왕의 자리를 이었다. 그해 후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황제에 올라 조위를 건국하고 수도를 허창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비가 헌제를 협박하여 제위를 넘겨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정사 《삼국지》에서는 그러한 묘사가 없다. 다만, 헌제(민제)가 스스로 양위를 주도한 것이 아니라 조비가 선양이라는 평화로운 형식적 절차를 통해 한나라 4백 년 사직을 찬탈했다고 여겨진다. 헌제는 산양공에 봉해져 하내군 산양현 1만 호를 받았으나, 한때는 주살되었다는 소문도 널리 퍼졌는데, 촉한에서는 이 소문을 유비가 황제로 즉위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황제 즉위 후 조비는 내치에 힘썼다. 제도를 확립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며 유학을 부흥시키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제도적으로는 행정 구역을 재정비하고 구품관인법을 시행했으며, 구휼책과 사면령을 내려 민심 이반을 막고 일부 지역에는 세금 면제책도 시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휼책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던 제도로, 조비만이 시행한 것은 아니며 현대적인 복지 제도와는 거리가 멀다. 유학 부흥을 위해 공자의 묘당을 다시 세우고 관리하게 했으며, 제사 규칙을 정하고 장례 제도를 개선했다. 유교 경전 저술에도 힘썼으나, 스스로는 패륜적인 행위를 거듭하여 지도 계급의 도덕성 향상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구품관인법 제정은 사대부 계층의 문벌 귀족화를 초래하여 폐단을 낳았고, 이들은 훗날 고평릉의 변으로 위나라 정권을 찬탈하게 된다.

조비 시대에는 법률이 가혹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컸고, 강제 이주와 여성 징발 등으로 민심을 잃었다. 군사적으로는 이릉대전을 앞두고 손권의 거짓 항복을 받아들여 오왕으로 책봉했으나, 손권이 태도를 바꾸자 대군을 동원해 공격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고 국력만 낭비했다. 이로 인해 오나라를 적으로 돌리고, 촉나라는 국력을 회복하여 조예 대에 제갈량의 북벌을 초래했다. 조비의 군재는 조조조창에 비해 뛰어나지 못했으며, 서성의 가짜 성에 속아 후퇴하기도 했다.

226년(황초 7년), 주색에 빠져 병을 얻은 조비는 병세가 위독해지자 아들 조예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조진, 조휴, 사마의, 진군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조예는 조비가 사사로운 이유로 피해를 준 사람들을 사면, 복권했다.

2.1. 출생과 성장

조조변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였다. 조비의 저서 《전론》(典論)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조조의 영재교육을 받고, 6살 때 궁술을 마쳐 좌우 어느 쪽으로도 자유자재로 쏠 줄 알았으며, 8살 때는 말에 올라탄 채 활을 쏠 수 있었다. 검술에도 능하여 여러 스승을 사사하고 모든 검법에 숙달했으며, 문학적 소양도 뛰어나 8살에 붓을 들면 훌륭한 문장이 되었고, 고금의 경서와 주석, 제자백가 등에 통달하여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이는 본인의 저서에 나오는 내용으로 객관적인 내용은 아니다.

조조에게는 25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조앙은 측실 유씨 부인이 낳았으나 정실 정씨 부인의 양자로 들어가 적자로 입적되었으며, 197년 장수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차남 조삭 역시 적자로 입적되었으나 조앙이 죽기 전에 병사했다. 이후 변씨 부인이 정실이 되면서 조비의 후계 지위는 굳건해졌다. 그러나 환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조충이 총명하여 조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208년 1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204년, 조비는 아버지의 경쟁 상대였던 원소 세력 공격에 종군했다. 그곳에서 원소의 둘째 아들 원희의 아내 견씨를 취하여 처로 삼았고, 이듬해 견씨는 조예를 낳았다. 211년, 오관중랑장 겸 부승상이 되었으나, 조조는 다섯째 아들 조식의 재능을 아껴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식이 술로 인해 조조의 노여움을 사 총애를 잃자, 217년 31세의 나이로 조조가 위왕에 오르면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조비는 행동이 가볍고 감정 표현을 자제하지 못하는 면이 있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세자로 낙점되자 기쁜 나머지 신비의 목을 끌어안고 기뻐했다고 한다. 신비가 딸 신헌영에게 이 일을 전하자, 신헌영은 왕이 되어 국사를 짊어지는 것이 고된 일인데도 기뻐하는 것을 보니 위의 앞날이 걱정된다고 한탄했다.

건안 2년(197년), 조조의 정실 딩씨가 양자로 키우던 이복 형 조앙(생모는 유씨)이 완성 전투에서 전사하자, 딩씨는 조조와 이별한다. 둘째 형 조삭도 곧 병사했고, 생모 변씨가 조조의 정실이 되면서 조비는 조조의 적자로 취급받게 된다. 《삼국지》 위지에 따르면, 무재로 추천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조조 밑에서 오관중랑장 겸 부 승상이 되어 조조의 부재를 지켰다. 건안 21년-22년(216년-217년)에는 동생 조식과 후계 다툼을 벌였다. 다툼 초반에는 조비가 우유부단했으나, 부하의 계책으로 우위를 되찾았다. 조조는 가후의 조언에 따라 조비를 후계자로 결정, 217년에 태자로 정식 지명했다. 건안 24년(219년), 조조가 한중 출병으로 부재 중일 때 위풍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진위가 조비에게 밀고하여 위풍은 처형되었다.

2.2. 권력 장악과 후한 멸망

220년 정월, 조조가 죽자 조비는 위왕의 자리를 이었다. 그해, 후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황제에 올라 조위를 건국했으며, 수도를 허창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비가 헌제를 협박하여 제위를 넘겨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정사 《삼국지》에서는 그러한 묘사가 없다. 다만, 헌제(민제)가 스스로 양위를 주도한 것이 아니라 조비가 선양이라는 평화로운 형식적 절차를 통해 한나라 4백 년 사직을 찬탈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조비는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했으며, 헌제는 산양공에 봉해져 하내군 산양현 1만 호를 받았다. 한때 헌제가 주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촉한에서는 이 소문을 유비가 황제로 즉위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실제로는 헌제가 주살되지 않았고 조예 대에 죽고 시호도 추증받았다.

조비는 황제 즉위 후 내치에 힘썼다. 제도를 확립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며 유학을 부흥시키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제도적으로는 행정 구역을 재정비하고 구품관인법을 시행했으며, 구휼책과 사면령을 내려 민심 이반을 막고 일부 지역에는 세금 면제책도 시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휼책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던 제도로, 조비만이 시행한 것은 아니며 현대적인 복지 제도와는 거리가 멀다.

유학 부흥을 위해 공자의 묘당을 다시 세우고 관리하게 했으며, 제사 규칙을 정하고 장례 제도를 개선했다. 유교 경전 저술에도 힘썼으나, 스스로는 패륜적인 행위를 거듭하여 지도 계급의 도덕성 향상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또한, 구품관인법 제정은 사대부 계층의 문벌 귀족화를 초래하여 폐단을 낳았고, 이들은 훗날 고평릉의 변으로 위나라 정권을 찬탈하게 된다.

조비 시대에는 법률이 가혹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컸고, 강제 이주와 여성 징발 등으로 민심을 잃었다. 군사적으로는 이릉대전을 앞두고 손권의 거짓 항복을 받아들여 오왕으로 책봉했으나, 손권이 태도를 바꾸자 대군을 동원해 공격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고 국력만 낭비했다. 이로 인해 오나라를 적으로 돌리고, 촉나라는 국력을 회복하여 조예 대에 제갈량의 북벌을 초래했다. 조비의 군재는 조조나 조창에 비해 뛰어나지 못했으며, 서성의 가짜 성에 속아 후퇴하기도 했다.

2.3. 황제 즉위와 통치

220년 정월 조조가 죽자 위왕의 자리를 이었고, 그 해에 후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황제에 올라 조위를 건국하고 수도를 허창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비가 헌제를 협박하여 제위를 넘겨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정사 《삼국지》에서는 그런 묘사는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헌제(민제)가 스스로 양위를 주도한 게 아니라 조비가 선양이라는 평화로운 형식적 절차를 통해 한나라 4백년 사직을 찬탈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헌제는 산양공에 봉해져 하내군 산양현 1만 호를 받았으나, 한때는 주살되었다는 소문도 널리 퍼졌는데, 촉한에서는 이 소문을 유비가 황제로 즉위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조비는 황제 즉위 후 내치에 힘쓰며 제도의 확립, 민심 안정, 유학 부흥에 노력했다. 행정 구역을 재확립하고 구품관인법을 실행했으며, 구휼책과 사면령을 내려 민심 이반을 막고 일부 지역에는 세금 면제책도 시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휼책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던 제도로, 현대적인 복지제도와는 거리가 멀다.

유학 부흥을 위해 공자 묘당을 다시 세우고 관리와 제사 규칙을 정했으며, 장례 제도를 개선하고 유교 경전 저술에 힘썼다. 그러나 도덕성 향상을 내세웠음에도 스스로 패륜적인 행위를 거듭하여 지도 계급의 도덕성 향상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구품관인법 제정은 사대부 계층의 문벌 귀족화를 초래하여 고평릉의 변으로 이어지는 폐단을 낳았다.

조비 시대에는 법률의 가혹함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컸다. 백성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척박한 고향을 개간하도록 강요했으며, 백성의 딸이나 유부녀를 빼앗아 병사들의 아내로 주는 일이 잦아 백성들의 불만이 높았다. 이러한 민심 이반은 위나라 멸망 이후 육조 시대의 야사와 민담에서 조비를 비판하는 내용이 범람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군사적으로는 이릉대전을 앞두고 손권이 거짓 항복해오자 유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고 오왕으로 책봉했다. 이릉대전 승리 후 손권이 태도를 바꾸자, 조비는 대군을 동원해 매년 손권을 공격했지만 성과 없이 국력만 낭비하고 난세를 연장했다. 오나라를 적으로 돌리고, 이릉대전에서 대패한 촉나라가 국력을 회복하여 조예 대에는 제갈량의 북벌을 초래했다. 조비는 유비의 병법을 비판했지만, 정작 자신은 서성의 가짜 성에 속아 후퇴하는 등 군재가 부족했다.

226년(황초 7년), 주색에 빠져 병을 얻은 조비는 조예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조진, 조휴, 사마의, 진군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조예는 조비가 사사로운 이유로 피해를 준 사람들을 사면, 복권했다.

220년 봄, 조조 사후 장패 휘하 청주 군단이 이탈하고 조창이 도착하면서 권력 승계에 혼란이 있었다. 조비는 서둘러 위왕으로 자칭하고 헌제의 승인을 받았다. 조창과 조식 등 형제들을 봉지로 돌려보내고 강제의 도움으로 정치 상황을 안정시켰다.

같은 해 겨울, 조비는 헌제에게 선위를 강요하여 11월 25일에 조위를 건국했다. 이는 한나라의 멸망과 삼국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폐위된 헌제는 산양공에 봉해졌고, 조비는 조부 조숭과 부친 조조에게 황제 시호를 내리고 모친 변황후를 황태후로 삼았다. 수도를 허창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조비는 유능한 관리들을 임명하여 제국을 다스렸으나, 비판에 열려 있지 않아 그를 비판하는 관리들은 강등되거나 처형되기도 했다.

헌제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황제에 즉위했으나, 겉으로는 가신들에게 선양을 상주하게 하고 헌제로부터 선양 제안을 받은 것을 사퇴하는 형식을 취했다. 진군의 구품관인법은 후세에 오랫동안 계승되었다.

유엽의 진언을 무시하고 이릉 전투 직후 30만 군세로 오를 공격했다. 황초 3년(222년-223년)의 출병에서 조휴조진 등이 활약했지만, 조인, 장료 등이 패배했다. 조비는 주연이 지키는 강릉성을 포위했으나, 역병과 식량 부족으로 퇴각했다. (222년부터 223년에 걸친 삼면에서의 전투).

황초 5년(224년), 가후신비의 진언을 무시하고 10만 친정군을 이끌고 광릉으로 출격했으나, 서성의 가짜 성벽에 놀라 퇴각했다.

황초 6년(225년), 장제포훈의 충고를 무시하고 다시 광릉으로 진군했으나, 추위로 장강이 얼어붙자 철수했다. 손소의 야습으로 위군은 패주하고 조비의 물품을 빼앗겼다.

황초 7년(226년) 5월, 병으로 쓰러져 사마의, 조진, 진군, 조휴에게 황태자 조예를 부탁하고 붕어했다.

2.4. 대외 관계와 군사적 실패

220년 조조가 죽자 위왕의 자리를 이어받은 조비는 그해 후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황제에 올라 조위를 건국한다. 헌제(민제)가 스스로 양위를 주도한 게 아니라 조비가 선양이라는 평화로운 형식적 절차를 통해 한나라 4백년 사직을 찬탈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촉한에서는 헌제가 주살되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는데, 이는 유비가 황제로 즉위하는 명분이 되었다.

과거 의상을 착용한 조비의 목판화.
과거 의상을 착용한 조비의 목판화.


조비의 즉위 소식과 헌제가 처형당했다는 거짓 소문이 유비의 영토인 익주에 전해지자, 유비는 221년 5월 황제를 자칭하며 촉한을 건국했다. 손권은 중국 남동부와 남부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릉대전을 앞두고 위와 촉의 협공을 우려한 손권이 거짓으로 순종의 뜻을 밝히며 항복해오자 조비는 그 항복을 받아들였다. 유엽은 손권의 속마음을 알고 항복을 받아주는 대신 촉과 함께 오를 먼저 정벌할 것을 건의했지만 조비는 받아들이지 않고 손권을 오히려 오왕으로 책봉했다. 유엽은 손권을 오왕으로 책봉하면 오의 단결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이 또한 반대했지만 조비는 듣지 않았다.

손권의 복종은 오래가지 못했다. 222년 육손의 지휘 하에 손권의 군대가 이릉 전투에서 촉군을 격파한 후, 손권은 위나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조비가 손권에게 그의 후계자 손등을 인질로 낙양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자, 손권은 이를 거부하고 위나라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끊었다. 조비는 직접 손권을 공격하는 원정을 이끌었고, 이에 손권은 위나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며 동오를 건국했다.

222년부터 223년에 걸친 삼면에서의 전투에서 조비는 유엽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30여 만의 군세로 세 갈래에서 오의 배후를 공격했다. 조비도 완에 진주하여 스스로 친정군의 진두 지휘를 맡아 조휴, 조진, 조인 등에게 가세했다. 양주 방면에서는 조휴여범을 격파하고, 조진, 하후상, 장합 등이 손성, 제갈근을 격파했지만, 후에 조인, 장제, 조휴, 장료, 장패 등이 오군에게 잇달아 패배했다. 형주 방면에서는 조비가 매일 조진, 하후상 등에게 끊임없이 원군을 보내 오 장수 주연이 지키는 강릉성을 포위했으나, 위군은 전사자가 많았고, 식량이 바닥난 주연을 공격하지 못했고, 또한 포위군 중에서 역병이 유행했기 때문에 퇴각했다.

224년 조비는 스스로 10여 만의 친정군을 지휘하여 광릉으로 출격했으나, 오 장수 서성이 장강 연안에 쌓은 가짜 성벽이 수백 리에 걸쳐 이어지자 "위에는 기병이 천 군이나 있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 개탄했다. 또한 위군의 함대가 큰 파도에 휩쓸려 피해가 광범위했으며, 많은 배가 적진으로 흘러갔고, "에게는 아직 인재가 많아 공격하는 것은 어렵다."라고 다시 감탄했다. 자신의 용선도 적진에 갇혔기 때문에 피해를 입은 위군은 패주했다.

225년 조비는 장제, 포훈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또다시 스스로 10여 만의 친정군을 발하여 광릉으로 진군했다. 이 해는 추위가 심해 장강이 얼어붙어 조비는 "하늘이 남북을 나누려 하는 것인가"라고 탄식했지만, 자신의 용선(기함)을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철수했다. 이 퇴각을 기회로 여긴 오 장수 손소는 결사대 500명으로 10여 만의 위군을 야습하여, 공포에 빠진 위군을 수춘으로 패주하게 했다.

이처럼 조비는 매년 손권을 공격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국력만 낭비하였고 이는 난세를 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2.5. 죽음

226년(황초 7년), 평소 주색을 즐기던 조비는 병을 얻었고, 병세가 위독해지자 아들 조예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조진, 조휴, 사마의, 진군에게 조예를 부탁하고 사망하였는데, 황제 자리에 오른 지 7년, 향년 40세였다. 조예는 조비가 사사로운 이유로 피해를 준 모든 사람을 찾아내어 사면, 복권했다.

조비가 황제가 된 직후, 황후 자리를 두고 문제가 발생했다. 견씨가 조비의 아내였으나, 조비는 견씨를 낙양으로 불렀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거절했다. 221년 8월, 견씨가 사망하고 황후 자리는 곽여왕에게 돌아갔다.

곽여왕은 조비의 아이를 낳지 못했다. 조예는 조비의 장남이었지만, 어머니 견씨의 죽음으로 태자가 되지 못하고 "평원왕"으로 임명되었다. 조비는 다른 아들을 후계자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226년 여름, 병이 깊어지자 마침내 조예를 태자로 지명했다. 조비는 임종 직전에 조예를 조진, 진군, 사마의에게 맡겼다. 조예는 아버지 조비가 사망한 후 21세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3. 평가와 논란

조비는 대체로 유능했지만, 제국을 다스리는 데 있어 뛰어난 행정가는 아니었다고 평가된다. 그는 능력보다는 출신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비판에 개방적이지 않아 자신을 비판하는 관리들을 강등시키거나 심지어 처형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노련한 손권에게 속아 농락당했고, 군사적으로는 오나라와의 전투에서 세 번이나 패배했다. 또한, 재위 기간 동안 잦은 반란을 제대로 막지 못해 백성들이 피해를 입었고, 수해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조비는 왕권 강화에 집중하여 환관의 고위직 진출을 막고, 가까운 친척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번병의 힘을 약화시키고 사마의를 비롯한 사마씨 일족의 성장을 초래했다. 서진의 무제 사마염은 이를 반면교사 삼아 황족을 우대했지만, 지나친 우대로 인해 팔왕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조비는 구품중정법을 제정하여 시행했지만, 이 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부패를 초래했다. 힘없는 가문 출신은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었고, 힘 있는 세족 출신은 낮은 관직을 맡지 않아 뇌물이 횡행하고 귀족 계급이 형성되었다. 사마의는 이 제도의 결함을 이용하여 자신의 측근을 등용했고, 이는 결국 서진 시대에 호족들이 귀족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 문화적인 면에서 조비는 "문장은 경국의 대업"이라는 문장경국 사상을 내세우며 문학을 장려했다. 또한, 본격적인 유서의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황람』(현재는 전해지지 않음)을 편찬하도록 했다.

제갈량은 조비의 재능이 자신의 10분의 1이라고 평가했으며, 손권은 조비가 조조보다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3.1. 긍정적 평가

진수는 조비에 대해 "문제는 천부적으로 문학적 소질이 있어서, 붓을 대면 문장이 되었고, 넓은 지식도 갖추고 있었고, 기억력이 탁월해 다방면으로 재능을 갖추었다. 만일 여기에 그의 도량이 약간만 더 크고 공평한 마음 씀씀이에 힘쓰며 도의의 존립에 노력을 기울이고 덕망이 있는 마음을 더욱 넓힐 수 있었다면 어찌 고대의 현군이 멀리 있었겠는가."라고 평했다. 이는 조비가 문학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제왕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은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휘종과 유사하게 예술가적 기질은 뛰어났지만, 제왕의 덕목은 갖추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3.2. 부정적 평가

조비는 여러 면에서 인간성에 문제가 많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내렸지만, 과거에 사소한 원한이 있는 자는 육친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후계 경쟁자였던 조식의 측근들은 조비 즉위 직후 삼족이 몰살되었고, 조식은 어머니 변태후의 만류로 목숨만 건졌지만 지방으로 쫓겨나 철저한 감시 속에 쓸쓸히 죽었다. 동생 조창도 비슷하게 취급되었으며, 《세설신어》에는 조비에게 독살되었다고 나온다. 조강지처인 견황후도 질투가 심하다는 이유로 사사했다.

조비는 아버지 조조에게도 패륜적인 행위를 했다. 조조가 죽은 해(220년)에 고향에서 축제를 벌였는데, 당시 삼년상 기간이었음에도 행동을 조심하지 않았다. 동진의 손성은 이를 두고 "위나라가 오래 가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평했다. 221년에는 낙양에서 조조의 제사를 평민과 같은 방식으로 치렀다. 조조는 위왕이었고 조비는 황제였으므로 제왕의 격식에 맞는 제사를 지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조조는 측실들에게 바느질하며 살라며 재물을 주고 귀향시켰는데, 조비가 병에 걸려 어머니 변씨가 문병을 가니 조조의 측실들이 돌아와 있었다. 조조가 죽은 직후부터 조비가 그들을 불렀다는 것이다. 변씨는 "네가 남긴 것은 개나 쥐도 먹지 않을 것이다"라며 조비가 죽은 후에도 애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비는 사냥에 광적으로 집착하여 조조의 상중에도 사냥을 나갔다. 부마도위 포훈이 자제를 요청하자 표를 찢고 사냥을 떠났다. 한번 사냥에 수천 명이 동원되어 예산이 소모되었고, 사냥터는 민가와 논밭을 없애고 만들었기에 백성들에게 큰 폐를 끼쳤다.

조비의 비인간성은 친구에게도 적용되었다. 절친 하후상의 애첩을 죽였고, 하후상은 슬픔을 못 이겨 우울 증세를 보이다 죽었다. 조비는 조강지처 견황후를 내팽개쳐 죽였다는 점에서 이중성을 보였다.

개국공신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충이 인육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조비는 광대를 시켜 해골을 왕충의 안장에 매달아 웃음거리로 삼았다. 관우에게 항복했다 돌아온 우금에게 조조의 묘에 관우에게 항복하는 그림을 그리게 하여 우금을 욕보여 죽게 하였다. 사마광은 이를 두고 조비의 행위가 임금답지 못하다고 논평했다.

조홍에게 재물을 빌리려다 거절당하자 원한을 품고, 조홍의 식객이 죄를 범하자 처형하려 했다. 무선황후의 협박과 곽황후의 애걸로 조홍은 죽음은 면했지만 면직당하고 봉토를 깎였다.

포훈의 아버지 포신은 조조의 공신이었으나, 포훈은 곽황후의 동생을 법대로 처형했다는 이유로 조비에게 죽임을 당했다. 조비는 사소한 트집으로 신하들을 처형한 일이 많았다.

조비는 인재를 보는 안목도 좋지 않았다. 맹달을 얼굴이 잘생겼다는 이유로 중용했으나, 맹달은 조비 사후 위나라를 배신했다. 정의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여동생과의 결혼을 막았고, 정의는 조식의 편을 들었다가 집안 남자들이 몰살당했다. 다만 막내동생 조간에게는 극진히 대우했는데, 이는 조간이 너무 어려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진수는 조비에 대해 "문학적 소질은 있었지만, 도량이 작고, 공평하지 않았으며, 도의와 덕망이 부족하여 현군과는 거리가 멀었다"라고 평했다. 이는 휘종과 유사한 점이다.

조비는 유능했지만, 제국 관리에 특별하지 않은 행정가로 여겨졌다. 비판에 열려 있지 않아 비판하는 관리들은 강등되거나 처형되기도 했다.

조비는 조식을 두려워하여 봉토를 줄이고 측근들을 처형했다. 위나라 제후들은 중앙 정치에서 멀어졌고, 영지에서도 최소한의 권한만 가졌다.

조비는 부하들을 자주 조롱했다. 우금번성 전투에서 관우에게 사로잡혔다가 오나라에 억류된 후 위나라로 돌아왔다. 조비는 우금을 복귀시키고 오나라에 사신으로 보낼 것이라 발표했지만, 조조의 묘에 참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우금은 조조의 묘에서 자신이 항복하는 그림을 보고 후회와 수치심에 병이 나 죽었다. 조비는 우금에게 부정적인 시호 "여후(厲侯)"를 내려 사람들이 그를 "사나운 후작(혹은 악독한 후작)"으로 기억하게 했다.

조비는 재위 기간 동안 영내의 잦은 난을 막지 못해 백성이 살해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수해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왕권을 중시하여 환관의 승진을 제한하고, 곽씨를 황후로 세울 때 태후에게 상소 올리는 것을 금지했다. 가까운 친척에게도 엄격하여 형제들을 변방으로 보내 권력을 깎았다. 이로 인해 번병의 힘이 약해졌고, 사마의가 중용되어 사마씨의 대두를 초래했다. 서진의 무제 사마염은 황족을 우대했지만, 지나친 후대로 팔왕의 난을 일으켰다.

정치 면에서는 손권에게 농락당했고, 군사 면에서는 오나라에 3연패를 기록했다. 경험 부족과 친족의 힘을 깎고 사마의를 중용한 점, 구품관인법 시행과 공신 처형 등으로 위의 수명을 단축시켰다는 지적이 있다.

문화 면에서는 "문장은 경국의 대업"이라며 문장경국 사상을 내걸고, 『황람』을 편찬했다.

제갈량은 조비의 재능이 자신의 10분의 1이라고 평가했고, 손권은 조비가 조조보다 못하다고 평가했다.

조비가 제정한 구품중정법은 정국의 부패를 초래했다. 힘없는 가문 출신은 상위 관료가 될 수 없고, 힘 있는 세족 출신이 하위 관료가 되는 일도 없었다. 뇌물이 횡행하고 귀족 계급이 형성되었다. 사마의는 이를 악용하여 측근을 등용했고, 서진 시대에 호족들이 귀족화되어 귀족 대두의 시대를 맞이했다. 왕조 정권은 부패했고, 호족 공동체는 사리사욕으로 붕괴하게 된다.

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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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자녀
문소황후 견씨
문덕황후 곽씨슬하 없음
귀인 이씨(貴人 李氏)차남 : 찬애왕 조협
귀인 시씨(貴人 柴氏)슬하 없음
귀인 음씨(貴人 陰氏)슬하 없음
한 헌제의 장녀
귀인 유씨(貴人 劉氏)
슬하 없음
한 헌제의 차녀
귀인 유씨(貴人 劉氏)
슬하 없음
부인 이씨(夫人 李氏)슬하 없음
숙원 반씨(淑媛 潘氏)3남 : 북해도왕 조유
숙원 주씨(淑媛 朱氏)4남 : 동무양회왕 조감
소의 구씨(昭儀 仇氏)5남 : 동해정왕 조림
서희(徐姬)6남 : 원성애왕 조례
소희(蘇姬)7남 : 한단회왕 조옹
장희(張姬)8남 : 청하도왕 조공
송희(宋姬)9남 : 광평애왕 조엄
손희(孫姬)슬하 없음
임씨(任氏)슬하 없음
설영운(薛靈芸)슬하 없음
막경수(莫瓊樹)슬하 없음
단교소(段巧笑)슬하 없음
진상의(陳尙衣)슬하 없음
생모 불명차남 : 조개(曹喈)

5. 기타

* 알까기와 비슷한 놀이를 당대에 유행하였는데 프로급으로 잘했다.
* 탈모가 심해져 어의가 치료를 시작했다는 기록이 의서 외대비요에 남아있으며, 처방받은 탈모약의 재료와 정량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도 남아있다.
* 황제가 되는 과정은 《삼국지밀사》에 묘사되어 있다.
*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진·삼국무쌍》과 《무쌍OROCHI》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하며, 《삼국지》 시리즈에도 등장한다.
* 2010년 중국 텔레비전 드라마 《삼국지》에서 위빈이 조비를 연기했다.
* 지괴소설 『열이전』의 저자로 여겨지지만, 현행 『열이전』은 여러 문헌에 인용된 이야기를 모은 집본이며, 조비 사후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어 정확한 관계는 알 수 없다.
* 보검을 제조하여 '비경'이라고 이름 붙였다.
* 형 조앙이 전사한 완성 전투에서 11세였던 조비는 목숨을 위협받았지만 도망쳤다. 나중에 장수가 부탁하러 왔을 때 "너는 내 형을 죽여 놓고 어떻게 태연하게 나를 만날 수 있느냐"라고 욕했고, 장수는 불안을 느껴 자살했다.
* 등전과의 검술 시합에서 사탕수수를 무기 삼아 대결을 벌여 등전의 팔을 세 번 맞혔다.
* 번성 전투에서 포로가 된 우금이 귀환했을 때, 조비는 우금을 조조의 능에 참배하도록 했다. 그곳에는 우금이 항복하는 그림이 걸려 있었고, 우금은 수치심과 분노로 병들어 죽었다. 조비는 우금에게 려후라는 시호를 내려 조롱했지만, 아들에게는 작위를 잇게 했다.
* 방덕이 위나라에 충성을 다해 순국한 것을 높이 평가하여, 방덕의 묘에 사자를 보내 장후의 시호를 내리고 아들 4명에게 작위를 하사했다.
* 조홍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앙심을 품고 황제 즉위 후 다른 죄목을 핑계 삼아 죽이려 했다. 변태후의 중재로 사형은 면했지만, 영지와 작위를 삭감당했다.
* 태자 시절 곽부인의 동생이 죄를 범했을 때 포훈이 이를 다스렸고, 조비가 사면을 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조비는 즉위 후 포훈을 좌천시켰고, 결국 사적인 원한으로 처형했다.
* 조조의 공신 신피와는 사이가 좋았고, 그의 간언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조비가 태자가 되었을 때 신피에게 기쁨에 겨워 어깨에 안기는 등 지나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 외출하려던 중 말이 황제의 옷에 밴 향기를 싫어하여 무릎을 물자, 화가 난 조비는 말을 죽였다.
* 사마의, 진군, 오질, 주삭은 조비의 총애를 받아 '사우'라고 불리며 중책을 역임했다.
* 방통의 동생 방림의 아내가 홀로 딸을 키우다 위나라에 투항한 방림과 다시 살게 되자, 조비는 그녀를 칭찬하고 물품을 하사하여 절개를 표창했다.
* 견씨에 대한 총애가 식자 견씨에게 죽음을 내렸다. 매장할 때에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덮고, 입에는 겨를 채워 넣었다.
* 상중에 있는 조휴를 걱정하여 음주와 식육을 강요했지만, 조휴는 더욱 쇠약해졌다.
* 이복 동생 조충이 요절했을 때, 조조는 조비에게 "창서(조충)의 죽음은 나에게 큰 슬픔이지만, 너에게는 기쁨이다"라고 말했다. 조비는 즉위 후 조충에 대해 열등감을 품었다고 회고했다.
* 조인이 관우에게 포위되었을 때 조조는 조식을 시켜 조인을 구원하려 했으나, 조비가 조식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들어 실패했다.
* 왕충이 과거 인육을 먹었던 것을 비웃기 위해 묘지에서 해골을 가져오게 하여 왕충의 안장에 묶어두게 했다.
* 장수교위 대릉이 잦은 수렵을 간하자 분노하여 처형될 뻔했으나 감형되었다.
* 정의의 용모가 사시(眇)라는 이유로 누이 청하장공주와의 혼인을 반대했지만, 후에 정의가 유능하다는 것을 알고 후회했다. 정의는 조식파였으며, 조비는 즉위 후 보복 인사로 정의 일족을 주살했다.
* 양준에게 후계자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구했을 때 조식 쪽이 훌륭하다고 대답하자 앙심을 품었다. 조비는 양준을 감옥에 가두었고, 양준은 자살했다.
* 동생 조창을 독살했다. 조비는 조창과 바둑을 두고 대추를 먹을 때 독을 넣어 조창을 죽게 했다.
* 장료가 입조하자 조비는 장료를 칭찬하고 저택과 어전을 지어주었다. 장료가 병에 걸리자 문병을 보내고 직접 초대하여 문병하기도 했다.
* 하후상의 애첩을 암살했다. 하후상이 슬픔에 잠겨 정신병을 앓자 조비는 "과했었다"라고 반성하고 전과 같이 후대했지만, 하후상은 1년 후 죽었다.
* 조조가 죽었을 때 조비는 조조의 총희들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조비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변후는 "개나 쥐도 네 밥 부스러기는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탄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