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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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통보는 조선 시대에 사용된 화폐이다. 1423년 세종대왕 시기에 처음 주조되었으나, 원자재 부족과 낮은 환율로 인해 사용이 중단되었다. 인조 시대에 재발행되었으나, 후금과 청나라의 침입으로 인해 다시 중단되었다. 1881년에는 10문 및 1전 단위의 시험 주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조선통보는 한국 화폐 제도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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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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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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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면 | 1 문, 10 문, 1 전 |
주조 시기 | 1423–1425년, 1625–1633년, 1881년 (10 문 및 1 전) |
재질 | 구리 합금 |
앞면 | 조선통보 (朝鮮通寶) |
뒷면 | 빈칸 (1 문) 十 (10 문) 戸 / 户 - 一錢 (1 전) |
로마자 표기 | Joseon Tongbo |
한글 표기 | 조선통보 |
한자 표기 | 朝鮮通寶 |
관련 정보 | |
관련 화폐 | 상평통보 |
2. 역사
조선 초기에는 베와 곡식이 일반적인 통화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목화가 중요한 교환 수단이었다. 조선 정부는 목화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최고급 목화에 "조선통폐지인(Joseon Tongpyejiin)"이라는 글씨를 찍어 품질 보증을 하고, 이를 전국에서 통화로 사용하게 했다.[4]
세종대왕 재위 시절인 1423년부터 "조선통보"()라는 주화가 주조되기 시작했다.[5][6] 이 주화는 당나라의 개원통보를 본떠 만들었으며,[8] 구리를 기준으로 160개에 1근(, ) (600g)으로 환산되었지만, 실제 시장 환율은 자주 변동되었다.[7] 지름은 약 24mm이고 무게는 3.2g에서 4g 사이였다.[5] 그러나 이 통화 제도는 인기가 없어 몇 년 후 사람들은 다시 물물교환으로 돌아갔다.[7] 조선의 왕들은 주화 사용을 장려하는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4]
1625년 인조 때 세종 대와 같은 명문을 새긴 새로운 형태의 조선통보가 다시 주조되었다.[5] 인조는 화폐 유통을 촉진하기 위해 경복궁 앞에 음식점을 열도록 빈터를 임대하기도 했다.[4] 정부는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게 하고, 관리들이 출장 경비를 화폐로 사용하게 하는 등 화폐 사용을 장려했다.[4]
1881년경에는 여러 종류의 10문(文) 및 1전(錢) 단위 조선통보 시험 주화가 만들어졌다. 이 주화들은 실험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매우 희귀하며, 당시 기록도 많지 않다.[5]
2. 1. 초기 발행 (1423년 ~ 1425년)
조선 초기에는 베와 곡식이 가장 일반적인 통화였으며, 이 시기에는 목화가 가장 중요한 교환 수단으로 여겨졌다.[4] 조선 정부는 한국 경제에서 목화가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인지하고 최고급 목화에 "조선통폐지인(Joseon Tongpyejiin)"이라는 글씨를 찍었는데, 이는 정부의 품질 보증으로 볼 수 있으며 한국 전역에서 통화로 사용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4] 현금 주화가 다시 도입되기 전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조선 사회에서는 물물교환이 일반적이었다.[4]세종대왕 재위 시절인 1423년부터 "조선통보"()라는 현금 주화가 주조되기 시작했다.[5][6] 세종 때 만들어진 주화는 구리를 기준으로 160개에 1근(, ) (600g)으로 환산되었지만, 실제 시장 환율은 자주 변동되었다. 그러나 이 통화 제도는 인기가 없어 몇 년 후 사람들은 다시 물물교환으로 돌아갔다.[7]
세종 시대의 조선통보는 1423년(세종 5년), 1424년(세종 6년), 1425년(세종 7년)에만 발행되었으며, 이들 주화는 모두 뚜렷하고 명확하게 새겨진 중국 한자의 해서체를 사용했고, 뒷면은 대부분 공백이었다("광배"라고 함).[5] 이 첫 번째 조선통보는 지름이 약 24mm이고 무게는 3.2~4그램 정도였다.[5] 이 주화들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개원통보(開元通寶) 주화를 본떠 만들어졌다.[8]
첫 번째 조선통보는 원자재 부족과 환율이 주화의 내재가치보다 낮아져 재정적으로 매력이 없어짐에 따라 도입 후 곧 생산이 중단되었다.[9] 조선의 왕들은 꾸준히 주화를 장려하는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고, 광범위한 사용을 위해 주조를 장려했다.[4] 이러한 조치를 통해 국왕들은 한국 백성들이 주화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신을 해소하고 한국 주화의 가치를 높이기를 바랐다.[4]
2. 2. 재발행과 유통 노력 (1625년 ~ 1633년)
1625년 인조 때 세종 대와 같은 명문을 새긴 새로운 형태의 조선통보가 주조되었다.[5] 인조는 화폐 유통을 촉진하기 위해 경복궁 앞에 음식점을 열도록 빈터를 임대하려 했다.[4] 이는 물물교환 대신 화폐 사용의 가치를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한 것이었다.[4]정부는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게 하고, 관리들이 출장 경비를 화폐로 사용하게 하는 등 화폐 사용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4] 가뭄이나 흉작으로 곡물과 직물 생산이 줄어 유통량이 감소한 것도 화폐 사용 확산의 요인이었다.[4]
두 번째 조선통보 시리즈는 첫 번째 시리즈 이후 약 2세기 만인 1625년(인조 3년)에 발행되었다. 이 화폐는 '팔분체'(八分體)라는 '관서체'로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5] 당시에는 정부뿐 아니라 사설 주조도 허용되어 다양한 형태의 화폐가 나타났다.[5]
두 번째 조선통보는 대체로 황갈색을 띠며, 새겨진 한자는 표준화되지 않았다. 글씨 획은 가늘거나 굵고, 크거나 작았다.[5] 테두리가 넓은 것과 좁은 것이 섞여 있었다. 첫 번째 조선통보와 달리 예서체 명문은 드물었다.[5]
2. 3. 근대 화폐 제도 도입 이전의 실험 (1881년)
1881년경에는 여러 종류의 10문(文) 및 1전(錢) 단위 조선통보 시험 주화가 만들어졌다. 이 주화들은 실험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매우 희귀하며, 당시 기록도 많지 않다.[5] 이 주화들은 지름이 45mm, 무게가 약 30g인 경향이 있지만, 일부 보고에 따르면 지름 48.2mm, 무게 29g인 것도 있다.[5] 일부는 뒷면이 무늬 없이 비어 있는데, 앞면의 한자 표기가 "소자(小字)" 또는 "대자(大字)" 여부에 따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다른 것들은 뒷면의 정사각형 중앙 구멍 바로 위에 한자 "十"(십, "열")이 있는 것들도 있다.[5]1전 단위의 조선통보 주화 역시 실험적으로 발행되었으며, 뒷면의 정사각형 중앙 구멍 바로 위에 조선 재정부의 화폐 주조소 표식이 있는 경향이 있다. 이 표식은 보통 "戸"로 표기되었지만, 때때로 "户"로 표기된 것도 있다.[5] 정사각형 중앙 구멍의 오른쪽에는 액면가를 나타내는 한자 "一錢"(일전, ''il jeon'')이 있었다. 1전 조선통보 주화는 지름이 47.6mm이고 무게가 31g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5]
당시에는 400문(또는 1문짜리 소액 주화 400개)의 가치가 은 1냥(兩)과 같았다.[5] 따라서 이 조선통보 주화 계획에서는 1전짜리 주화 한 개가 10문짜리 주화 40개의 가치를 지녔고, 1냥의 1/10에 해당했다.[5]
1전 조선통보 주화의 다른 변형들은 한자 "通"의 머리 부분(윗부분) 쓰는 방법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5] 또한, 한자 "鮮"의 쓰는 방법에도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魚"의 아래 네 개의 획(또는 점)을 쓰는 방법과 "羊"의 머리 부분(윗부분)을 새기는 방법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5]
3. 주조 및 형태
세종대왕 재위 시절인 1423년부터 "조선통보"()라는 현금 주화가 주조되기 시작했다.[5][6] 세종 때 만들어진 주화는 구리를 기준으로 160개에 1근(600g)으로 환산되었지만, 실제 시장 환율은 자주 변동되었다.[7]
세종 시대의 조선통보는 1423년(세종 5년), 1424년(세종 6년), 1425년(세종 7년)에만 발행되었으며, 모두 뚜렷하고 명확하게 새겨진 중국 한자의 해서체를 사용했고, 뒷면은 대부분 공백이었다("光背"라고 함).[5] 지름은 약 24밀리미터이고 무게는 3.2~4그램 정도였다.[5] 이 주화들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개원통보(開元通寶, ''Gaewon Tongbo'') 주화를 본떠 만들어졌다.[8] 그러나 원자재 부족과 환율 문제로 도입 후 곧 생산이 중단되었다.[9]
1625년, 인조 시대에 세종대왕 때와 같은 명문을 새긴 새로운 형태의 조선통보가 주조되었다.[5] 약 2세기 만에 제작된 두 번째 '조선통보'는 '팔분체'(八分體)라고 하는 '관서체'로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5] 이 시대에는 정부뿐만 아니라 사설 주조도 허용되었기 때문에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5]
두 번째 '조선통보'는 대체로 황갈색을 띠며, 새겨진 한자는 표준화되지 않았다. 글씨의 획은 가늘거나 굵고 크거나 작을 수 있으며, 테두리도 넓거나 좁은 등 다양하다. 예서체로 명문이 새겨진 '조선통보'는 첫 번째 '조선통보'와 달리 훨씬 드물다.[5]
두 번째 '조선통보'는 이후 '상평통보' 시리즈의 모태가 되었지만, 후금과 청나라의 침입으로 인해 발행이 중단되었다. 이 전쟁 이후 한국은 화폐 생산을 위해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구리를 수입해야 했다.[11]
1881년경에는 여러 종류의 10문(文) 및 1전(錢) 단위의 조선통보 시험 주화가 만들어졌다. 이 주화들은 실험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매우 희귀하며, 당시 기록도 많지 않다.[5] 지름은 45밀리미터, 무게는 약 30그램인 경향이 있지만, 일부 보고에 따르면 지름 48.2밀리미터, 무게 29그램인 것도 있다.[5] 일부는 뒷면이 무늬 없이 비어 있는데, 앞면의 한자 표기가 "소자(小字)" 또는 "대자(大字)" 여부에 따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다른 것들은 뒷면의 정사각형 중앙 구멍 바로 위에 한자 "十"(십, "열")이 있는 것도 있다.[5]
1전 단위의 조선통보 주화 역시 실험적인 발행으로 제작되었으며, 뒷면의 정사각형 중앙 구멍 바로 위에 조선 재정부의 화폐 주조소 표식이 있는 경향이 있다. 이 표식은 보통 "戸"로 표기되었지만, 때때로 "户"로 표기된 것도 있다.[5] 정사각형 중앙 구멍의 오른쪽에는 액면가를 나타내는 한자 "一錢"(일전, ''il jeon'')이 있었다. 1전 조선통보 주화는 지름이 47.6밀리미터이고 무게가 31그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5]
1전 조선통보 주화의 다른 변형들은 한자 "通"의 머리 부분(윗부분) 쓰는 방법이나 "鮮"의 쓰는 방법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魚"의 아래 네 개의 획(또는 점)을 쓰는 방법과 "羊"의 머리 부분(윗부분)을 새기는 방법에도 차이가 있었다.[5]
4. 사회경제적 영향
조선 초기에는 목화가 중요한 교환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정부는 "조선통폐지인"이라는 글씨를 찍어 품질 보증을 하고 전국에서 통화로 사용될 수 있도록 하였다.[4] 현금 주화가 다시 도입되기 전까지 조선 사회에서는 물물교환이 일반적이었다.[4]
세종대왕 재위 시절인 1423년부터 "조선통보"()라는 현금 주화가 주조되기 시작했으나[5][6], 통화 제도는 인기가 없어 몇 년 후 사람들은 다시 물물교환으로 돌아갔다.[7] 첫 번째 조선통보는 원자재 부족과 낮은 환율로 인해 곧 생산이 중단되었다.[9]
조선의 왕들은 주화 사용을 장려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쳤다.[4] 임진왜란 이후에는 군수품 조달과 국가 재정 확보를 위해 화폐 유통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4] 1625년, 인조는 새로운 화폐 유통을 촉진하기 위해 경복궁 앞에 음식점을 열도록 하였다. 이는 백성들에게 화폐 사용의 가치를 알리고자 하는 시도였다.[4]
정부는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도록 하고, 관리는 출장 시 경비 지불에 화폐를 사용하도록 하는 등 화폐 사용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가뭄이나 흉작으로 인해 곡물과 직물 생산이 어려워진 것도 화폐 사용 확산의 요인이었다.[4] 1651년, 효종은 조선 백성들에게 '조선통보'를 사용하고 포목을 화폐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왕명을 내렸다.[5]
숙종 시대에는 농업 생산량 증가와 함께 전국에 약 1,000개의 시장이 개설되면서 상업과 산업이 발전했고, 이는 화폐 유통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상품 생산과 상업 발전은 안정적인 통화 시스템 구축에 기여했다. 화폐는 운반과 보관이 용이하여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4]
두 번째 '조선통보'는 후금과 청나라의 침입으로 인해 발행이 중단되었다. 이후 조선은 화폐 생산을 위해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구리를 수입해야 했다.[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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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Herald – English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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