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프 프랑수아 뒤플렉스
1. 개요
조제프 프랑수아 뒤플렉스는 1697년에 태어나 1763년에 사망한 프랑스의 식민지 행정가이다. 그는 프랑스 동인도 회사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여러 차례 인도와 아메리카를 항해했으며, 1742년에는 인도 내 프랑스 시설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뒤플렉스는 인도 왕자들 간의 분쟁을 이용하여 프랑스의 이익을 증진하려 했으며, 세포이로 불리는 토착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영국과의 경쟁에서 마드라스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프랑스 정부의 정책 변화로 인해 해임되었고, 말년에는 빈곤 속에 사망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파리의 지명, 프랑스 해군 군함, 인도 지명 등에 그의 이름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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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식민지 행정장관 -
장 드쿠
프랑스 해군 제독이자 식민지 행정관이었던 장 드쿠는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해군 경력을 쌓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으로 임명되어 통치하며 식민지 주민과 베트남인 간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기근에 대한 책임 논란과 일본의 쿠데타로 축출 후 재판을 받았다. -
1763년 사망 -
아우구스트 3세
아우구스트 3세는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 작센 선제후였으며,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으로 왕위에 올라 예술과 건축을 후원했지만, 폴란드 문제에는 소극적이었고 통치 기간을 하인리히 폰 브륄에게 위임했다. -
1763년 사망 -
아베 프레보
아베 프레보는 격정적인 삶을 바탕으로 인간 심리를 탐구하는 작품을 남긴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사제, 번역가이다. -
노르주 출신 -
피에르 모루아
피에르 모루아는 릴 시장, 프랑스 총리, 상원 의원을 역임했으며, 주 40시간 근무제 단축 등 노동자 중심의 정책을 시행하고 사회당 제1서기 및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의장으로 활동한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치인이다. -
노르주 출신 -
뱅자맹 파바르
뱅자맹 파바르는 릴 OSC 유소년팀 출신의 프랑스 축구 선수로, VfB 슈투트가르트와 바이에른 뮌헨을 거쳐 현재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수비수로 활약하며, 프랑스 국가대표팀으로 2018 FIFA 월드컵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다.
2. 생애
뒤플렉스는 1697년 1월 23일 랑드르시에서 태어나 프랑스 동인도 회사 선박으로 인도와 아메리카를 항해했다. 1720년 벵골 최고 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730년 샹데르나고르 감독관을 거쳐 1742년 프랑스령 인도 총독이 되었다. 그는 인도 왕자들 간의 계승 분쟁을 이용하여 프랑스 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며, 세포이 군대를 양성하고 알람파라이 요새를 기증받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7년 전쟁 발발과 프랑스 정부의 정책 변화로 1754년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1763년 빈곤 속에서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 및 경력
뒤플렉스는 1697년 1월 23일 랑드르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뒤플렉스는 부유한 페르미에 제네랄이었는데, 뒤플렉스를 상인으로 키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뒤플렉스가 과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1715년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선박에 태워 인도 항해를 보냈다. 뒤플렉스는 여러 차례 아메리카와 인도를 항해했으며, 1720년에는 벵골의 최고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뛰어난 사업 수완을 보였으며, 공식적인 임무 외에도 자신의 계정으로 대규모 사업을 벌여 재산을 모았다.
1730년, 뒤플렉스는 샹데르나고르에서 프랑스 문제의 감독관이 되었다. 1741년, 그는 회의 의원 중 한 명의 미망인인 잔 알베르와 결혼했다. 알베르는 힌두교인들에게 조안나 베굼으로 알려졌으며, 남편이 토착 왕자들과의 협상에서 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그의 명성은 1742년 그가 인도 내 모든 프랑스 시설의 총독으로 임명되는 데 기여했다.
2.2. 프랑스령 인도 총독 시절
뒤플렉스는 1742년 인도 내 모든 프랑스 시설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인도 왕자들 사이의 끊임없는 계승 분쟁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증진시킬 기회를 보았다. 이를 위해 그는 토착 왕자들과 관계를 맺고, 복장과 환경에서 동양적인 화려함을 채택했다. 그는 세포이라고 불리는 토착 군대를 건설했는데, 그들은 그의 지휘 하에 보병으로 훈련받았으며 마이소르의 유명한 하이데르 알리도 포함되었다.
영국은 이에 불안해했지만, 그들의 정착지와 권력에 대한 위험은 뒤플렉스와 부르봉 섬(오늘날의 레위니옹) 프랑스 총독 베르트랑 프랑수아 마에 드 라 부르도네 사이의 격렬한 상호 질투로 부분적으로 완화되었다.
1746년 마드라스 전투 이후 마드라스가 프랑스에 항복했을 때, 뒤플렉스는 그 도시를 영국 통치 하에 반환하는 것에 반대하여 라 부르도네가 서명한 조약을 위반했다. 그는 그 후 세인트 데이비드 요새 (1747)에 대한 원정을 보냈고, 이는 영국의 동맹인 아르코트 나바브를 장악했다. 뒤플렉스는 다시 세인트 데이비드 요새 점령을 시도했고, 이번에는 성공했다.
1748년 콜카타는 프랑스에 의해 포위되었지만, 작전 중에 엑스라샤펠 조약에서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평화가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뒤플렉스는 다음으로 남인도 정복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다. 그는 카르나틱과 데칸 고원의 주권을 주장하는 두 명의 분쟁자들을 돕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영국은 뒤플렉스의 계획 실현을 막기 위해 그들의 라이벌 편에 섰다.
1750년 데칸의 수바다르는 알람파라이 요새를 프랑스에 기증했다. 이는 뒤플렉스와 프랑스 군대의 봉사에 대한 그의 감사의 표시였다.
1751년부터 뒤플렉스는 사절 시에 드 브루노를 파견하고, 몬이 버마족과의 갈등에서 군사적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버마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브루노는 이 노력에서 놀랍도록 성공적이었고, 프랑스와 몬족 간의 더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7년 전쟁의 출현은 프랑스의 관심이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이 관계가 무산되었다.
1754년 프랑스 정부는 평화를 간절히 원하여, 뒤플렉스를 교체하고 필요하다면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특별 위원을 인도에 파견했다. 이 명령들은 가혹하게 실행되었고, 뒤플렉스의 업적은 한순간에 파괴되었으며, 그는 1754년 10월 12일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공공 정책을 추진하는 데 개인 재산을 소비했지만, 회사는 그 의무를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정부는 그를 야심차고 탐욕스러운 모험가로 간주하며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그는 1763년 11월 10일 잊혀진 채 죽었다.
2.3. 카르나티크 전쟁과 몰락
뒤플렉스는 인도 총독으로 임명된 후, 인도 왕자들 사이의 계승 분쟁을 이용하여 프랑스의 이익을 증진시키려 했다. 그는 토착 왕자들과 관계를 맺고, 복장과 생활 방식에서 동양적인 화려함을 추구했다. 또한, 세포이라고 불리는 토착 군대를 조직하여 자신의 지휘 하에 보병으로 훈련시켰으며, 마이소르의 하이데르 알리도 그중 한 명이었다.
영국은 이러한 움직임에 불안감을 느꼈지만, 뒤플렉스와 부르봉 섬의 프랑스 총독 베르트랑 프랑수아 마에 드 라 부르도네 사이의 심각한 불화로 인해 프랑스의 세력 확장은 주춤했다.
1746년 마드라스 전투에서 마드라스가 프랑스에 항복했을 때, 뒤플렉스는 라 부르도네가 서명한 조약을 어기고 도시를 영국에 반환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후 세인트 데이비드 요새 (1747)에 원정을 보냈으나, 영국의 동맹인 아르코트 나바브에게 패배했다. 뒤플렉스는 다시 세인트 데이비드 요새 점령을 시도하여 성공했다.
1748년 콜카타가 프랑스에 의해 포위되었으나, 작전 도중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평화가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뒤플렉스는 남인도 정복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고, 카르나틱과 데칸 고원의 주권을 주장하는 두 명의 분쟁자들을 돕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영국은 뒤플렉스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반대편을 지원했다.
1750년 데칸의 수바다르는 알람파라이 요새를 프랑스에 기증했는데, 이는 뒤플렉스와 프랑스 군대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1751년부터 뒤플렉스는 시에 드 브루노를 사절로 파견하여, 몬이 버마족과의 갈등에서 군사적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버마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브루노는 이 노력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프랑스와 몬족 간의 관계를 강화했다. 그러나 7년 전쟁 발발로 프랑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리면서 이 관계는 약화되었다.
1754년 프랑스 정부는 평화를 원하여 뒤플렉스를 교체하고 필요하다면 체포하라는 명령과 함께 특별 위원을 인도에 파견했다. 이 명령은 가혹하게 실행되었고, 뒤플렉스의 업적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는 1754년 10월 12일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공공 정책을 추진하는 데 개인 재산을 사용했지만, 회사는 그 의무를 인정하지 않았고, 정부는 그를 야심차고 탐욕스러운 모험가로 간주하며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는 1763년 11월 10일 잊혀진 채 사망했다.
2.4. 말년
1754년 프랑스 정부는 평화를 간절히 원하여, 뒤플렉스를 교체하고 필요하다면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특별 위원을 인도에 파견했다. 이 명령은 가혹하게 실행되었고, 뒤플렉스의 업적은 한순간에 파괴되었으며, 그는 1754년 10월 12일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공공 정책을 추진하는 데 개인 재산을 소비했지만, 회사는 그 의무를 인정하지 않았고, 정부는 그를 야심차고 탐욕스러운 모험가로 간주하며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1756년 아내 잔이 사망하자 1758년에 재혼했다. 1763년 11월 10일, 뒤플렉스는 잊혀진 채 빈곤 속에 사망했다.
3. 유산 및 평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은 뒤플렉스를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식민지 총독", 로버트 클라이브의 대적"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총명하지만 군사적 재능은 클라이브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했다.
3.1. 기념
* 파리 15구의 광장, 도로 및 지하철역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프랑스 해군은 그의 이름을 딴 군함 4척을 운용했다. (상선 2척 제외)
* 증기 코르벳함 Dupleix프랑스어 (1861–1887): 일본 혁명에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 7,700톤급 장갑 순양함 (1897–1919)
* 툴롱에서 자침된 10,000톤급 순양함 (1929–1942)
* F70형 프리깃 Dupleix프랑스어
* 두플렉스 대학(College Dupleix)은 카나이랄 비디아만디르(Kanailal Vidyamandir)와 서벵골 찬단나가르에 있는 찬단나가르 대학의 이전 이름이었다.
* 인도 의회 근처 뉴델리의 도로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퐁디셰리의 네루 거리의 이전 이름은 뒤플렉스 가(Rue Dupleix)였다.
프랑스는 1870년에야 뒤플렉스의 공헌을 인정하여 두 개의 동상을 제작했는데, 하나는 푸두체리에, 다른 하나는 프랑스에 세워졌다. 현재 푸두체리 동상은 록 해변 끝자락에 있는 구베르 애비뉴에 위치해 있다. 이 동상은 1870년 7월 16일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1979년에 현재 바르티 공원 중앙에 있던 동상이 해변의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뒤플렉스는 위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큰 코와 턱에서 초상화로 흔히 묘사되는 올리버 크롬웰의 모습이 일부 나타난다. 동상에서 뒤플렉스는 가발과 긴 승마 부츠를 착용한 궁정 복장을 하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푸두체리 지도, 왼손은 칼자루에 얹혀 있다.
2014년 푸두체리 정부의 공공사업부(PWD)에서 뒤플렉스 동상 복원 사업을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