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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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는 캐나다 출신의 창조론자이자 홍수지질학을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진화론에 반대하며, 성경의 대홍수를 통해 지구의 지형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프라이스는 정규 과학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지질학을 연구하며 여러 저서를 출판했다. 그의 주장은 과학계에서 비판받았지만, 20세기 중반 창조과학 운동의 부흥과 함께 재평가되었고, 특히 한국 창조과학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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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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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70년 8월 26일 |
출생지 | 뉴브런스윅주 해브록, 캐나다 |
사망일 | 1963년 1월 24일 |
사망지 | 로마린다, 캘리포니아, 미국 |
직업 | 창조론 저술가 |
알려진 것 | 홍수 지질학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
2. 생애
1870년 8월 26일 캐나다 뉴브런즈윅주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프라이스의 아버지는 그가 12살 때 사망했고, 그는 어머니를 따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다녔다. 17살에 12살 연상의 안식일교 여성과 결혼하여 엘런 화이트의 책을 판매했다.
1897년 가을, 배틀크릭 대학에 등록하여 2년간 고전 강좌를 수강했으나, 학업을 중단하고 다시 책을 팔았다. 이후 뉴브런즈윅의 사범학교에서 1년 교사 양성 과정을 수강했는데, 이것이 그가 받은 유일한 정규 과학 교육이었다.
세인트로렌스 만의 트레이커디에서 근무할 때 의사 알프레드 스미스 박사를 만나 진화론에 관한 책을 접하고 진화를 수용할 뻔했으나, 안식일교 교리에 맞게 논리를 구성하여 신앙심을 지켰다. 그는 진화론 반박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지질학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1902년 안식교 복음 전도사로 일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여러 차례 직업을 바꾸었다. 1904년 여름, 다시 종교 서적 판매를 시작했으나, 잦은 실패로 자살을 생각했다. 가족의 권유로 뉴욕에서 신문과 잡지 기고를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경제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캐나다에 있던 부인의 요청으로 안식교 본부에서 일용직 노동자 자리를 얻어 생계를 유지하며, 틈틈이 박물관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1907년부터 1938년까지 홍수지질학을 연구하며 기존 지질학을 비판하고, 책과 강연 활동을 했다. 1938년 건강 악화로 교수직을 사임했으나, 저술 활동은 계속하다 67세에 은퇴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는 1870년 8월 26일 캐나다 뉴브런즈윅 주의 농가에서 태어났다.[3][4] 아버지는 프라이스가 12살 때 사망했고, 어머니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에 입교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망 이후 프라이스도 어머니를 따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다니게 되었다.1897년 가을, 프라이스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대학인 배틀크릭 대학(현 앤드루스 대학교)에 등록하여 2년 동안 고전 강좌를 수강했다. 1896년, 뉴브런즈윅 주립 사범학교(현재 뉴브런즈윅 대학교)에서 1년 과정의 교사 훈련 과정을 수료했는데, 이 과정에서 광물학을 포함한 자연 과학의 기초 과정을 수강했다. 이때 받은 과학교육이 그가 받은 유일한 정규 과학교육이었다.
2. 2. 진화론과의 만남, 그리고 반박
세인트로렌스 만의 작은 마을인 트레이커디에서 근무할 때 의사 알프레드 스미스 박사(Alfred Corbett Smith, 1841-1909)에게 진화에 관한 책을 빌려 보면서 진화를 수용할 뻔했다.[1] 그러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교리에 맞게 논리를 구성하여 신앙심이 흔들리는 것을 막았다.[1] 그는 진화에 대해 반박하는 일을 하느님이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이라고 여겼고, 이는 그의 진로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2] 그는 책을 쓰면서 공격의 초점을 지질학에 맞추었는데, 그 이유는 진화의 근거를 제공하는 학문이 지질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1906년, 스탠퍼드 대학교 총장이자 화석 어류 전문가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프라이스의 ''비논리적인 지질학''에 대한 서평에서 "어떤 지질학자도 [그의 연구]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7] 조던은 프라이스에게 "현장과 실험실에서 고생물학에 대한 건설적인 연구를 시작"하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4]
넘버스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가 문자적인 창조 주간의 안식일 교리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프라이스에게 안식일 교리는 재림교 신자들을 진화론으로부터 구원한 것이었다.[5] 그는 엘렌 G. 화이트의 창조론에 대한 입장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고, 성경과 과학이 최근의 창조를 요구한다고 세상에 설득하려 했다.[6]
프라이스는 '지질 시대'와 그들이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한 엄격한 라이엘의 균일론을 비판했다. 지구의 지질학에 대한 대안적인 설명으로, 그는 홍수 지질학을 재창조했다.[6] 그는 고대 시대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화석의 겉보기 순서를 재해석하는 방법을 숙고했다. 다양한 지질학 문헌을 연구한 후, 프라이스는 "단순한 이론을 벗겨낸 암석과 화석의 사실은 화석의 불변의 순서에 대한 진화론적 이론, 즉 진화론 교리의 중추를 훌륭하게 반박한다"고 결론 내렸다.[4]
프라이스의 1913년 저서 ''지질학의 기초''는 "어떤 종류의 화석 암석이든 오래되었든 젊든 다른 종류의 화석 암석 위에 정합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정합적인 층서 서열의 법칙"을 제시했다. 프라이스에게 이 법칙은 "층의 순서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공식화된 가장 중요한 법칙"이었다.[8]
예일 대학교 지질학자 슈처트의 잡지 ''사이언스''에 실린 ''새로운 지질학''에 대한 서평은 프라이스가 "지질학적 악몽을 품고 있다"고 언급했다.[9] 그러나 창조론자들은 이 새로운 책을 환영했다. 해리 리머는 그것이 "진정한 과학의 걸작[이며] '거짓으로 불리는' 과학의 고대 오류 중 일부를 설득력 있게 폭로한다"고 주장했다.[10] 몇 년 안에 프라이스는 여러 보수적인 종교 정기 간행물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한 ''사이언스'' 편집자는 그를 "근본주의자들의 주요 과학적 권위자"라고 묘사했다.[11]
과학적 방법론에 대해 우려한 프라이스는 화이트헤드와 다른 철학자들을 읽었고 사실은 항상 해석의 대상임을 이해했다. 프라이스는 "귀납적 지질학"이 최근의 창조를 추론한다고 확신했지만, 창조론과 자연주의 사이의 논쟁은 과학의 범위를 벗어나 "철학과 신학의 경계선을 넘어선"다고 인정했다. 그는 자연주의자들이 다윈과 라이엘의 "색안경을 통해" 사실을 바라본 반면, 창조론자들은 성경을 사용하여 자연 세계를 해석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원에 대한 창조론적 설명은 자연 연구만으로는 가설로 발전할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 종교에 의해 제안되었다"고 말했다.[4]
프라이스의 창조 과학 옹호(및 진화론 공격)는 1925년 그의 이론과 주장이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에 의해 유명한 스코프스 재판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되면서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브라이언은 프라이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프라이스는 영국에서 가르치는 데 바빴다. 프라이스는 브라이언에게 재판 중에 가능한 한 과학을 피하도록 조언했다.[12] 재판 중 변호사 클래런스 대로우는 "당신은 프라이스를 언급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당신처럼 믿는 지질학자로 서명하는 사람이라고 당신이 아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의 모든 과학자는 [그]가 사기꾼이고 사칭자이며 전혀 지질학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조롱했다.[12]
프라이스의 아이디어는 1960년대 초 헨리 M. 모리스와 존 C. 위트컴에 의해 그들의 저서 ''창세기 홍수''에서 다시 차용되었는데, 회의론자 마틴 가드너는 이 책을 "스코프스 재판 이후... 진화론에 대한 가장 중요한 공격"이라고 부른다. 모리스는 1984년 저서 ''현대 창조론의 역사''에서 프라이스의 논리와 글쓰기 스타일에 대해 찬사를 보냈고, ''새로운 지질학''을 읽은 경험을 "내 인생을 바꾼 경험"이라고 언급했다.[4]
프라이스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해리 림머, 윌리엄 벨 라일리와 같은 구창조론자들보다 그의 견해에서 더 보수적이었다. 브라이언, 림머, 라일리와는 반대로 프라이스는 국지적 홍수의 개념을 거부하고 순수한 문자적 6일 창조, 즉 24시간으로 구성된 6일을 고집했다. 그는 라일리의 세대 창조론 견해가 "악마의 위조품"이라고 생각했다.[13] 프라이스는 그의 경력 대부분 동안 림머와 그의 간극 창조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무시했다.[14]
2. 3. 안식교 전도사, 좌절, 그리고 재기
1902년 안식교 복음 전도사로 일하기 시작했으나, 일이 맞지 않아 여러 차례 직업을 바꾸었다. 1904년 여름에는 다시 종교 서적 판매를 시작했다.[2] 잦은 실패로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으나, 가족의 권유로 뉴욕에서 신문과 잡지 기고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패하여 경제적, 정신적으로 매우 피폐해졌다.[3] 캐나다에 있던 부인이 안식교 본부에 도움을 요청했고, 총회장은 프라이스에게 일용직 노동자 자리를 주선하여 생계를 잇게 했다. 프라이스는 일하면서도 틈틈이 박물관을 방문하며 연구를 계속했다. 자존감은 거의 사라졌지만, 저술과 연구의 목표는 잃지 않았다.[4]2. 4. 홍수지질학 연구와 저술 활동
1907년부터 1938년까지 홍수지질학을 연구하면서 기존 지질학을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면서 책을 쓰고 대학에서 강연을 했다. 1938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철학 및 지질학 교수직을 사임했으나, 그 후에도 저술 활동을 계속하다가 67세에 은퇴했다.3. 주요 저서
4. 주요 입장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는 20세기 초, 생명체가 비교적 최근에 출현했으며 대홍수로 인해 지구 지형이 재배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일과정설에 반대하며, 보편적 대홍수가 현재의 지질학적 증거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지질학자들이 화석으로 바위 연대를 측정하고, 화석 연대는 지질주상도 상 위치로 측정한다며 비판했다. 그는 종의 분화와 인종 기원에 대한 독자적인 주장을 펼쳤으며, 루이 아가시의 빙하 이론을 비판했다.
4. 1. 홍수지질학
20세기 초, 프라이스는 대홍수가 지구 지형을 재배치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보편적 대홍수가 현재 존재하는 지질학적 증거들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타당하다고 주장하며, 동일과정설을 반대했다. 지질학자들이 화석을 통해 바위의 연대를 측정하고, 화석의 연대는 지질주상도 상의 위치로 측정한다며 비난했다.프라이스는 종의 분화에 대해, 사탄이 이종교배와 잡종교배를 선동했으며, 최초에 하느님이 종을 만들었을 때는 분리된 채로 이어지도록 했다고 주장하며 자연선택에 반대했다. 그는 자연을 지배하는 엄청난 힘에 의한 극단적인 환경변화가 종의 변화를 일으킨다고 보았다.
인종의 기원에 대해서는 홍수 이후 환경의 영향, 하느님의 언어 혼잡, 부정적인 이종교배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흑인의 탄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프라이스는 하느님의 의도를 위반하는 인종 혼합이 인간의 퇴화를 초래했으며, 이로 인해 원숭이도 생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질학자들이 인간의 조상이라 여기는 유인원들에 대해 "중심적 혈통으로부터 분리되어 퇴화된 자손들"이라고 하였다.
루이 아가시의 빙하 이론을 비판하며, 북아메리카 대륙을 덮는 빙하에 대해 "지질학적 세계로부터 오늘의 세계로의 변이를 조금 덜 폭력적이고 덜 격변적으로 만들기 위해 지적인 충격을 흡수하는 일종의 정신적 완충 장치"로 여겼다. 아가시의 이론에 대해서는 "최면 상태에서 악마의 암시를 받아" 만들어졌다고 했다.
프라이스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해리 림머, 윌리엄 벨 라일리와 같은 구창조론자들보다 더 보수적이었다. 그는 국지적 홍수 개념을 거부하고 순수한 문자적 6일 창조, 즉 24시간으로 구성된 6일을 고집했다. 그는 라일리의 세대 창조론 견해가 "악마의 위조품"이라고 생각했고,[13] 림머의 간극 창조론에 대해서도 무시했다.[14]
4. 2. 종의 분화와 인종 기원
프라이스는 종의 분화가 사탄의 이종교배와 잡종교배 선동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주장하며 자연선택에 반대했다. 그는 하느님이 처음에 종을 만들 때는 분리된 채로 유지되도록 했다고 믿었다. 프라이스는 자연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에 의한 극단적인 환경 변화가 종의 변화를 유발한다고 주장했다.인종의 기원에 대해 프라이스는 홍수 이후 환경의 영향, 하느님의 언어 혼잡, 그리고 부정적인 이종교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흑인의 탄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남쪽으로 내려간 불쌍하고 작은 친구는
축축한 숲 속에서 하나님을 잃었다네.
잔인한 태양빛이 작열했을 때, 그의 피부는 검어졌고
머리카락은 열대의 열로 누렇게 그을렸네.
그리고 그의 마음은 텅 비어 버렸네.영어
프라이스는 하느님의 의도를 거스르는 인종 혼합이 인간의 퇴화를 초래했으며, 심지어 원숭이도 이로 인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질학자들이 인류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유인원들에 대해 "중심 혈통에서 분리되어 퇴화된 자손들"이라고 묘사했다.
4. 3. 기타
루이 아가시의 빙하 이론을 "악마의 암시"라고 비판하였다. 프라이스는 북아메리카 대륙을 덮는 빙하에 대해 "지질학적 세계로부터 오늘의 세계로의 변이를 조금 덜 폭력적이고 덜 격변적으로 만들기 위해 지적인 충격을 흡수하는 일종의 정신적 완충 장치"로 여겼다.5. 평가 및 영향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는 '새로운 대격변설'을 주장했지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창조론자들을 제외하고는 홍수지질학으로 전향한 사람은 없었다.[13] 1960년대 창조과학회가 생기고 창조론 부흥기가 도래하면서 재평가받기 시작했고, 많은 근본주의자들이 창세기를 프라이스식으로 읽기 시작했다.[13] 그의 이론은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 사고의 척추처럼 작용했다.[14]
프라이스는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불안해했고, 이로 인해 정규 교육과 고급 학위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5. 1. 당대 과학계의 비판
프라이스가 '새로운 대격변설'(New catastrophism)을 주장하고 나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창조론자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이 홍수지질학으로 전향한 사람은 없었다.[13] 그가 재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창조과학회가 생기고, 창조론 부흥기가 도래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많은 근본주의자들이 창세기를 프라이스식으로 읽기 시작했다.[13] 그의 이론은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 사고의 척추처럼 작용했다.[14]프라이스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해리 림머, 윌리엄 벨 라일리와 같은 구창조론자들보다 더 보수적인 견해를 가졌다. 브라이언, 림머, 라일리와는 반대로 프라이스는 국지적 홍수의 개념을 거부하고, 순수한 문자적 6일 창조, 즉 24시간으로 구성된 6일을 고집했다. 그는 라일리의 세대 창조론 견해가 "악마의 위조품"이라고 생각했다.[13] 프라이스는 그의 경력 대부분 동안 림머와 그의 간극 창조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무시했다.[14]
5. 2. 창조과학 운동에 미친 영향
1960년대 창조과학 운동이 부흥하면서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의 주장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많은 근본주의자들이 창세기를 프라이스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13] 헨리 모리스를 비롯한 창조과학자들은 프라이스의 이론을 차용하여 현대 창조과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프라이스의 이론은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 사고의 척추처럼 작용했다.[14]6. 비판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등 다른 구창조론자들보다 보수적인 견해를 가졌다.[13] 그는 24시간으로 구성된 6일 창조라는 문자적 해석을 고집했고, 세대 창조론을 "악마의 위조품"이라 비판했으며,[13] 간극 창조론도 무시했다.[14]
프라이스는 정규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해 정규 교육과 고급 학위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6. 1. 과학적 근거 부족
프라이스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해리 림머, 윌리엄 벨 라일리와 같은 구창조론자들보다 자신의 견해에 있어 더 보수적이었다. 브라이언, 림머, 라일리와는 달리 프라이스는 국지적 홍수의 개념을 거부하고, 24시간으로 구성된 6일 창조라는 순수한 문자적 해석을 고집했다. 그는 라일리의 세대 창조론 견해를 "악마의 위조품"이라고 생각했다.[13] 프라이스는 그의 경력 대부분 동안 림머와 그의 간극 창조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14]6. 2. 정규 교육 부족
정규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점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그는 정규 교육과 고급 학위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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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ke Street Dive vocalist has wild family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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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설과는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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