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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 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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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캘빈 쿨리지는 1872년 7월 4일에 태어난 미국의 정치인으로, 1923년부터 1929년까지 미국의 제30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매사추세츠 주지사,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으며, 보스턴 경찰 파업 진압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재임 기간 동안 '쿨리지 번영'으로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이끌었지만, 대공황으로 인해 그의 정책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쿨리지는 '조용한 캘'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과묵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퇴임 후에는 자서전을 저술하고 언론 기고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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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 쿨리지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존 캘빈 쿨리지 주니어
출생일1872년 7월 4일
출생지플리머스 노치, 버몬트, 미국
사망일1933년 1월 5일
사망지노샘프턴, 매사추세츠, 미국
안장 장소플리머스 노치 묘지
정당공화당
배우자그레이스 구드휴 (1905년 10월 4일 결혼)
자녀2명, 존 포함
친척캘빈 갈루샤 쿨리지 (조부)
파크 폴라드 (사촌)
교육애머스트 대학교 (문학사)
직업정치인
변호사
칼빈 쿨리지 초상화
공식 초상화, 1924년
미국 대통령
제30대 대통령임기 시작: 1923년 8월 2일
임기 종료: 1929년 3월 4일
부통령없음 (1923년~1925년)
찰스 G. 도스 (1925년~1929년)
전임 대통령워런 G. 하딩
후임 대통령허버트 후버
미국 부통령
제29대 부통령임기 시작: 1921년 3월 4일
임기 종료: 1923년 8월 2일
대통령워런 G. 하딩
전임 부통령토머스 R. 마셜
후임 부통령찰스 G. 도스
매사추세츠 주지사
제48대 주지사임기 시작: 1919년 1월 2일
임기 종료: 1921년 1월 6일
부지사채닝 H. 콕스
전임 주지사새뮤얼 W. 맥콜
후임 주지사채닝 H. 콕스
매사추세츠 부지사
제46대 부지사임기 시작: 1916년 1월 6일
임기 종료: 1919년 1월 2일
주지사새뮤얼 W. 맥콜
전임 부지사그래프턴 D. 쿠싱
후임 부지사채닝 H. 콕스
매사추세츠 상원
상원 의장임기 시작: 1914년 1월 7일
임기 종료: 1915년 1월 6일
전임 의장레비 H. 그린우드
후임 의장헨리 고든 웰스
상원 의원임기 시작: 1912년 1월 3일
임기 종료: 1915년 1월 6일
전임 의원앨런 T. 트레드웨이
후임 의원존 B. 헐
선거구버크셔, 햄프던, 햄프셔 카운티
노샘프턴 시장
제16대 시장임기 시작: 1910년 1월 3일
임기 종료: 1912년 1월 1일
전임 시장제임스 W. 오브라이언
후임 시장윌리엄 페이커
매사추세츠 하원
하원 의원임기 시작: 1907년 1월 2일
임기 종료: 1909년 1월 6일
선거구제1 햄프셔 선거구
전임 의원모세 M. 배셋
후임 의원찰스 A. 몽고메리

2. 어린 시절과 경력

캘빈 쿨리지는 1872년 7월 4일 버몬트주 플리머스에서 태어났으며, 미국 독립 기념일에 태어난 유일한 대통령이다. 애머스트 대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1899년 노샘프턴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00년부터 1902년까지 시 법률 자문관을 역임했다.

1905년에는 그레이스 애나 구드휴와 결혼했는데, 쿨리지는 과묵한 반면 그레이스는 사교적인 성격으로 서로 정반대였다. 두 아들 존 쿨리지(1906년생)와 캘빈 2세 (1908년생)를 두었다.

쿨리지는 1910년과 1911년에 노샘프턴 시장으로 선출되었고, 1912년부터 1915년까지 매사추세츠주 상원 의원을 지냈다. 1914년과 1915년에는 상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6년부터 1918년까지 부주지사,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매사추세츠주지사를 역임했다. 1919년 보스턴 경찰 파업을 강경 진압하여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는 노동 운동에 적대적이었으며, 노동 지도자 새뮤얼 곰퍼스에게 "누구도, 어디에서도, 언제 어떤 때라도 공공의 안전에 대한 파업의 권리는 없다"라고 단언했다.[10]

매사추세츠주지사 시절 보스턴 경찰 파업에서 매사추세츠 주군을 사열하는 쿨리지

2. 1. 출생과 가계

존 캘빈 쿨리지 2세는 1872년 7월 4일 버몬트주 플리머스 노치(플리머스 노치)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 중 유일하게 독립기념일에 태어난 인물이다. 그는 존 캘빈 쿨리지 1세(1845–1926)와 빅토리아 조세핀 무어(1846–1885) 사이에서 태어난 두 자녀 중 장남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지만, 어린 시절부터 중간 이름인 캘빈으로 불렸다. 쿨리지 가문에서는 여러 세대에 걸쳐 캘빈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개신교 종교개혁가인 장 칼뱅을 기리는 의미에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4]

쿨리지 1세는 여러 직업을 가졌으며 번영하는 농부이자 상인이자 공무원으로서 주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그는 사법관과 세금징수원을 포함한 여러 지역 직책을 역임했고, 버몬트주 의회의 양원에서 활동했다. 쿨리지가 12세였을 때, 만성 질환을 앓던 어머니가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아마도 결핵이었을 것이다. 그의 여동생인 아비가일 그레이스 쿨리지(1875–1890)는 쿨리지가 18세였을 때 15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아마도 충수염 때문이었을 것이다. 쿨리지의 아버지는 1891년 플리머스의 한 교사와 재혼하여 80세까지 살았다.

쿨리지 가문은 뉴잉글랜드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의 가장 오래된 미국 조상인 존 쿨리지는 1630년경 영국 캠브리지셔주 코트넘(코트넘, 캠브리지셔주, 영국)에서 이주하여 매사추세츠주 워터타운(워터타운, 매사추세츠주)에 정착했다. 쿨리지의 증조부이기도 한 존 쿨리지는 독립 전쟁에서 미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플리머스 마을의 최초 선출직 관리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인 캘빈 갤루샤 쿨리지는 버몬트주 하원 의원을 지냈다. 그의 사촌인 파크 폴라드는 버몬트주 캐번디시(캐번디시, 버몬트주)의 사업가이자 오랫동안 버몬트 민주당 위원장을 역임했다.[5][6] 쿨리지는 또한 1625년생인 새뮤얼 애플턴의 후손이었는데, 새뮤얼 애플턴은 매사추세츠주 입스위치(입스위치)에 정착하여 필립 왕 전쟁 기간 동안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를 이끌었다. 쿨리지의 어머니는 플리머스 노치 농부인 하이럼 던랩 무어와 아비가일 프랭클린의 딸이었다.

쿨리지 농가


애머스트 대학교 학부생 시절의 쿨리지

2. 2. 교육 및 변호사 활동

버몬트주 플리머스에서 존 캘빈 쿨리지 1세와 빅토리아 무어 사이에서 태어난 캘빈 쿨리지는 7월 4일 (미국 독립 기념일)에 태어난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쿨리지는 애머스트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Phi Gamma Delta의 회원이 되어 1895년 최우등 졸업을 하였다.[7] 졸업 후 아버지의 권유로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으로 이주하여 변호사가 되기위한 법률 수습을 받았다. 1897년 매사추세츠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지방 변호사가 되었다.[8] 1899년에는 노샘프턴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00년부터 1902년까지 시 법률 자문관을 역임했다.[10]

1905년 쿨리지는 그레이스 애나 구드휴와 결혼하였다. 쿨리지는 조용하고 진지했던 반면 그레이스 여사는 말이 많고 재미를 좋아하는 편으로, 둘은 성격이 정반대였다. 그들은 존 쿨리지(1906년생)와 캘빈 2세 (1908년생) 두 아들을 두었다.[9]

2. 3. 결혼과 가족

1905년 쿨리지는 그레이스 애나 구드휴와 결혼하였다. 쿨리지는 조용하고 진지했던 반면, 그레이스 여사는 말이 많고 재미를 좋아하는 성격으로 두 사람은 정반대였다. 슬하에 두 아들 존(1906년생)과 캘빈 2세(1908년생)를 두었다.

3. 정치 경력



쿨리지는 버몬트주 플리머스에서 태어나 매사추세츠주에서 주로 활동한 정치인이다. 애머스트 대학교를 졸업한 후 노샘프턴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시의회 의원(1899), 시 변호사(1900 ~ 1902), 법원 서기(1904), 주 하원 의원(1907 ~ 1908)을 역임했다.

1905년 쿨리지는 그레이스 애나 구드휴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1910년1911년 노샘프턴 시장, 1912년부터 1915년까지 매사추세츠주 상원 의원, 1916년부터 1918년까지 부주지사,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역임했다. 1919년 보스턴 경찰 파업을 강경하게 진압하여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는 노동 지도자 새뮤얼 곰퍼스에게 "누구도, 어디서나, 언제나 공공의 안전을 공격할 권리는 없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3. 1. 초기 정치 활동 (노샘프턴 시의원 ~ 매사추세츠 주지사)

1872년 7월 4일, 버몬트주 플리머스에서 존 캘빈 쿨리지 1세와 빅토리아 무어에게서 태어난 쿨리지는 미국 독립 기념일에 태어난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애머스트 대학교를 1895년 Cum laude로 졸업하고, 이름에서 '존'을 뺐다.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1899년 시의회 의원, 1900년부터 1902년까지 시 변호사, 1904년 법원 서기, 1907년부터 1908년까지 주 하원 의원을 역임했다.

1905년 쿨리지는 그레이스 애나 구드휴와 결혼했다. 쿨리지는 조용하고 진지했던 반면, 그레이스 여사는 말이 많고 재미를 좋아하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슬하에 두 아들 존(1906년생)과 캘빈 2세(1908년생)를 두었다.

쿨리지는 1910년1911년 노샘프턴 시장으로 선출되었고, 1912년부터 1915년까지 매사추세츠주 상원을 지냈다. 1916년부터 1918년까지 부주지사,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역임했다. 1919년 보스턴 경찰 파업을 강경하게 진압하기 위해 매사추세츠 주군에 명령을 내려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는 후에 노동 지도자 새뮤얼 곰퍼스에게 "누구도, 어디서나, 언제나 공공의 안전을 공격할 권리는 없습니다."라고 썼다.

3. 2. 보스턴 경찰 파업 진압 (1919)



1919년, 보스턴 경찰국 경찰관들이 노조를 결성하려 하자, 경찰국장 에드윈 유 커티스는 이를 용납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8월, 미국노동총연맹은 보스턴 경찰 노조에 허가증을 발부했다.[1] 커티스는 노조 지도자들이 불복종 혐의로 직무에서 해임될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노조가 해산되면 정직을 취소하겠다고 밝혔다.[2] 보스턴 시장 앤드류 피터스는 커티스를 설득하여 며칠 연기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커티스는 노조 지도자들을 정직시켰다.[3] 다음 날, 보스턴 경찰의 약 4분의 3이 파업에 들어갔다.[4] 쿨리지는 커티스의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처음에는 지역 당국에 맡겼다. 그는 무법 행위가 발생해야만 대중이 경찰에게 파업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날 밤과 다음 날, 도시에서 폭력과 폭동이 발생했다.[5] 소방관 등의 동조 파업을 우려한 피터스는 매사추세츠 주방위군 부대를 소집하고 커티스를 직무에서 해임했다.[6]

쿨리지는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하고 개입하여, 주방위군 부대를 더 소집하고 커티스를 복직시켰으며 경찰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행사했다.[8] 커티스는 파업자 전원을 해고했고, 쿨리지는 새로운 경찰을 모집하라고 명령했다.[9]

그날 밤 쿨리지는 미국노동총연맹 지도자 새뮤얼 고퍼스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고퍼스는 "어떤 무질서가 발생했든, 그것은 경찰관의 권리가 부인된 커티스의 명령 때문입니다…"라고 썼다.[10] 쿨리지는 고퍼스에게 답신을 보내 파업에 대한 어떠한 정당성도 부인했고[11], 이 답변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12] 전국의 신문들은 쿨리지의 성명을 보도했고, 그는 파업 반대자들에게 새로운 영웅이 되었다. 제1차 적색 공포 속에서 많은 미국인들은 러시아, 헝가리, 독일에서와 같은 공산주의 혁명이 확산될까 두려워했다. 쿨리지는 조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몇몇 친구들을 잃었지만, 전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그를 주목했다.[13] 보스턴 경찰 파업은 쿨리지에게 단호한 지도자이자 법과 질서의 엄격한 집행자로서의 전국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국장이 잘못했다는 당신의 주장은 도시를 방비하지 않은 잘못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회를 제공했고, 범죄 집단은 행동을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어디에서도, 언제든지 공공 안전에 대해 파업할 권리는 없습니다. ... 저는 매사추세츠의 주권을 옹호하고, 주민들의 헌법과 법률에 따라 공무원에 대한 권한과 관할권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도 동등하게 결의를 다하고 있습니다."
"캘빈 쿨리지 주지사의 새뮤얼 고퍼스에게 보낸 전보", 1919년 9월 14일[7]


4. 대통령 재임 (1923 ~ 1929)

1923년 8월 2일 워런 G. 하딩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급사하면서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쿨리지는 워싱턴 D.C.로 돌아와 컬럼비아 특별구 연방 지방 법원 배석판사 애돌프 A. 홀링 주니어의 입회 하에 다시 한번 취임 선서를 했다. 이는 주 공무원의 연방 선서 집행 권한에 대한 의문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쿨리지는 하딩 행정부의 정책을 대체로 유지하면서, 티팟 돔 사건 등 여러 스캔들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했다. 그는 의회의 스캔들 조사가 충분하다고 보았고, 의회 조사에 협조하지 않은 법무장관 해리 M. 도허티의 사퇴를 요구했다.

1923년 12월 6일 의회 연설에서 쿨리지는 워딩의 공식 예산 절차, 이민 제한 시행, 펜실베이니아 석탄 파업 중재 등 워딩의 정책 대부분을 지지했다. 이 연설은 최초로 라디오로 방송된 대통령 연설이었다. 쿨리지 임기 한 달 만에 워싱턴 해군 조약이 선포되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1924년 5월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을 위한 보너스 법안이 그의 거부권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었다.

1924년 6월, 쿨리지 대통령이 재향군인국 예산안에 서명하는 모습


이민법에 서명하여 남부와 동유럽 이민을 제한했지만, 일본인 이민자의 특정 배제에 대한 불만을 표명하는 서명 성명을 첨부했다.[15] 또한, 1924년 세입법에 서명하여 최고 한계 세율을 46%로 인하하고, 전반적인 개인 소득세 세율을 인하하며, 상속세를 인상하고 새로운 증여세를 도입했다.

1924년 6월 2일에는 인디언 시민권법에 서명하여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원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당시 원주민 3분의 2는 이미 시민권을 획득한 상태였다.[16][17][18]

쿨리지는 국제연맹 가입에는 반대했지만, 고립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1928년 켈로그-브리앙 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전쟁 방지를 위한 국제적 노력을 이끌었다. 이 조약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서명국들이 국가 정책 수단으로서 전쟁을 포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21] 비록 전쟁 방지라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법의 기초를 제공했다.[21]

1924년 다우에스 계획을 수립하여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 문제를 해결하고 독일 경제를 안정시키고자 했다.[23] 1927년 제네바 해군 군축 회의를 후원하여 해군력 감축을 시도했으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불참, 영국과 미국의 순양함 톤수 합의 실패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4]

쿨리지는 이전 행정부의 소련 불인정 정책을 유지했다. 멕시코 혁명 이후 알바로 오브레곤과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 정권을 인정하고, 크리스테로 전쟁 중 멕시코 정부를 지원했다.[26] 니카라과아이티 점령을 지속했지만, 1924년 도미니카 공화국 점령은 종료했다.[26]

1928년 쿠바 아바나에서 열린 팬아메리칸 회의에 참석하여 미국을 대표했다. 이는 쿨리지가 재임 중 유일하게 방문한 외국이었다. 그는 2016년 버락 오바마 이전까지 쿠바를 방문한 마지막 미국 대통령이었다.[21]

1927년 여름, 쿨리지는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1] 그는 "또 다른 임기를 수행한다면 1933년까지 백악관에 있게 될 것입니다… 워싱턴에서 10년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오래 있는 것입니다. 너무 깁니다!"라고 이유를 밝혔다.[2]

4. 1. 대통령직 승계

192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확보하려 했으나 오하이오주 상원 의원 워런 G. 하딩에게 패배하였다. 당수들은 부통령으로 위스콘신주 상원 의원 어빈 렌루트를 지명하길 원했으나 전당 대회의 사절단들은 쿨리지를 지명하였다. 하딩 - 쿨리지 공천 후보는 제임스 M. 콕스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923년 8월 2일 워런 G. 하딩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급사하자, 다음 날 새벽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쿨리지의 집에는 전기와 전화도 없었기에, 쿨리지는 대통령 사망 소식을 전령으로부터 구두로 전해 들었다.[45] 8월 3일 새벽 2시 47분, 자택 응접실에서 공증인인 아버지의 입회 하에 등유 램프 불빛 아래에서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쿨리지는 즉시 워싱턴 D. C.로 돌아갔다. 그 후, 8월 21일 컬럼비아 특별구 연방 지방 법원 배석판사 애돌프 A. 홀링 주니어의 입회 하에 다시 한번 취임 선서를 했다.

4. 2.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24년 선거인단 투표 결과


1924년 6월 10일부터 12일까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렸고, 쿨리지는 1차 투표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1] 일리노이주 출신 프랭크 로든(Frank Orren Lowden)이 2차 투표에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3차 투표에서 전 준장 찰스 G. 도스(Charles G. Dawes)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수락했다.[1]

민주당은 다음 달 뉴욕시에서 전당대회를 개최했다. 전당대회는 곧 교착상태에 빠졌고, 103차 투표 끝에 대의원들은 마침내 타협 후보인 존 W. 데이비스를 대통령 후보로, 찰스 W. 브라이언(Charles W. Bryan)을 부통령 후보로 합의했다. 위스콘신주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로버트 M. 라 폴레트가 공화당에서 분당하여 새로운 진보당을 결성하면서 민주당의 희망은 커졌다. 많은 사람들은 1912년과 마찬가지로 공화당의 분열이 민주당의 대통령 당선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2]

전당대회와 어린 아들 캘빈의 죽음 이후, 쿨리지는 은둔적인 생활을 했다. 그는 나중에 "아들이 죽었을 때, 대통령직의 권력과 영광이 함께 사라졌다"고 말했다.[3] 애도하는 와중에도 쿨리지는 표준적인 선거 운동을 펼쳤다. 상대 후보를 이름으로 언급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신의 정부 이론에 대한 연설을 했다.[4] 쿨리지의 슬픔과 그의 본래의 비대결적인 스타일 때문에 1896년 이후 가장 조용한 선거 운동이었다.[5] 다른 후보들은 더 현대적인 방식으로 선거 운동을 했지만, 공화당 분열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1920년과 비슷했다. 쿨리지와 도스는 남부와 라 폴레트의 고향인 위스콘신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승리했다. 쿨리지는 382명의 선거인단과 상대 후보들의 총합보다 250만 표 많은 득표수로 선거에서 승리했다.[6]

4. 3. 경제 정책: "쿨리지 번영"과 그 이면

쿨리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미국은 "광란의 20년대"로 알려진 급속한 경제 성장기를 경험했다.[13] 그는 자유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 정책을 펼쳤으며, "미국의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기업 활동의 자유를 옹호했다. 그는 잉여 농산물을 정부가 매입하도록 하는 맥너리-호겐 농장 구호 법안을 거부했다.[14] 쿨리지는 세금을 낮추고 국가 부채를 줄이는 정책을 추진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쿨리지를 이론적인 자유방임주의 옹호자로 비판했지만, 역사가 로버트 소벌은 쿨리지가 매사추세츠 주지사 시절 노동 시간 제한, 아동 노동 반대, 공장 안전 조치 등을 지지했다는 점을 들어 그의 연방주의적 관점을 설명했다. 소벌은 1920년대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주 정부와 지방 정부의 책임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쿨리지가 대통령으로서 같은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13]

쿨리지는 재무장관 앤드루 멜런의 감세 정책을 지지했는데, 멜런은 세금을 낮추면 정부 수입이 오히려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회는 이에 동의하여 쿨리지 재임 기간 동안 세율이 인하되었다. 또한 쿨리지는 연방 지출을 줄이고 연방 부채를 상환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1924년에는 소득세율을 낮추고 약 200만 명에 대한 소득세를 폐지하는 세입법이 통과되었다. 1926년과 1928년에도 세금 인하 법안이 통과되었고, 연방 부채를 줄이기 위한 지출 억제 정책이 지속되었다. 1927년에는 가장 부유한 2%만이 연방 소득세를 납부했다. 쿨리지 행정부 동안 연방 지출은 동결되었고, 연방 부채의 4분의 1이 상환되었다. 그러나 주 정부와 지방 정부의 지출은 크게 증가하여 1927년에는 연방 예산을 초과했다. 1929년, 쿨리지의 세율 인하 정책으로 10만 달러 이상 소득자의 세율이 24%로 낮아진 후, 연방 정부는 10억 달러 이상의 소득세를 징수했으며, 그 중 65%는 10만 달러 이상 소득자에게서 징수되었다.[14]

쿨리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가장 논란이 많았던 문제 중 하나는 농민 구제 문제였다. 의회 일각에서는 농산물 가격 하락에 대응하기 위해 연방 정부가 농산물을 매입하여 해외에 저가로 판매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1924년에 처음 법안이 제출되었을 때 농무장관 등은 지지했지만, 가격 상승으로 인해 많은 의원들이 법안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부결되었다. 1926년 농산물 가격이 다시 하락하자, 맥네리-호건 농업 구제 법안이 제안되었다. 이 법안은 연방 농업위원회가 풍년일 때 잉여 농산물을 매입하여 나중에 판매하거나 해외에 판매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쿨리지는 이 법안에 반대하며 농업은 "독립적인 사업 기반"을 유지해야 하고 "정부 통제는 정치적 통제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농업 현대화를 통해 수익성을 높이자는 허버트 후버의 제안을 지지했다. 멜런 장관은 맥네리-호건 법안이 건전하지 않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서한을 썼고, 법안은 부결되었다.

맥네리-호건 법안이 부결된 후, 쿨리지는 덜 급진적인 커티스-크리스프 법안을 지지했지만, 이 법안 역시 통과되지 못했다. 1927년 2월, 의회는 맥네리-호건 법안을 다시 통과시켰지만, 쿨리지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거부권 행사 이유로 이 법안이 농민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고 수출업자에게만 이익을 주며 연방 관료제를 확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의회는 거부권을 번복하지 못했지만, 1928년 5월 더 많은 표를 얻어 법안을 다시 통과시켰고, 쿨리지는 다시 거부권을 행사했다. 버몬트 출신 농부의 아들인 쿨리지는 "농부들은 돈을 많이 번 적이 없다.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4. 4. 사회 정책: 이민 제한과 인디언 시민권법

쿨리지는 1924년 이민법에 서명하여 남부와 동유럽 이민을 제한했지만, 일본인 이민자의 특정 배제에 대한 불만을 표명하는 서명 성명을 첨부했다.[15] 1924년 6월 2일, 쿨리지는 인디언 시민권법에 서명하여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원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 당시 그들 중 3분의 2는 결혼, 군 복무(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은 1919년 시민권을 부여받음), 또는 이전에 이루어진 토지 할당을 통해 이미 시민권을 획득했다.[16][17][18]

쿨리지 대통령이 미국 원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에 서명한 후 오세이지족 남성들과 함께


쿨리지는 쿠 클럭스 클랜을 싫어했으며, 그에게서 임명을 받은 클랜 회원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4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경쟁자들과 러닝메이트는 종종 클랜을 공격했지만, 쿨리지는 그 문제를 피했다.[19] 쿨리지 행정부 시절, 흑인 린치 사건은 감소했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쿠 클럭스 클랜을 떠났다.

쿨리지는 자신의 첫 번째 연두교서에서 흑인들의 권리는 미국 헌법에 따라 "다른 시민들의 권리만큼이나 신성하다"고 말하며 그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공적이고 사적 의무"라고 말하며 흑인 시민권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했다.[20] 쿨리지는 린치를 연방 범죄로 규정하는 법률 제정을 거듭 촉구했지만, 의회는 그러한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1924년 6월 6일, 쿨리지는 하워드 대학교에서 졸업식 연설을 했는데, 그는 흑인들이 교육에서 빠르게 발전하고 수년 동안 미국 사회에 기여한 것에 대해 감사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24년 10월 연설에서 쿨리지는 차이의 관용을 미국의 가치로 강조하고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에 기여한 것에 감사를 표하며 그들이 "우리나라를 현재의 모습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4. 5. 외교 정책: 고립주의와 국제 평화 노력

쿨리지는 국제연맹 가입을 반대했지만, 그의 행정부는 고립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쿨리지의 국무장관 프랭크 켈로그와 프랑스 외무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이름을 딴 1928년켈로그-브리앙 조약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1929년 비준된 이 조약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서명국들이 "서로의 관계에서 국가 정책의 수단으로서 전쟁을 포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21] 이 조약은 전쟁 방지라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법의 기초를 제공했다.[21]

1924년, 쿨리지 행정부는 찰스 다우에스를 다국적 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다우에스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간 지불액을 고정하고, 미국 은행의 대규모 대출을 통해 독일 경제를 안정시키고자 했다.[23]

쿨리지는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의 성과를 이어받아 1927년 제네바 해군 군축 회의를 후원하여 해군력 감축을 시도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불참, 영국과 미국의 순양함 톤수 합의 실패로 회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28년 의회는 미국의 해군력 증강을 승인했다.[24]

쿨리지는 이전 행정부의 소련 불인정 정책을 유지했다.[21]

멕시코 혁명 이후, 쿨리지는 알바로 오브레곤과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 정권을 인정하고, 크리스테로 전쟁 중 멕시코 정부를 지원하며 무기 금수 조치를 해제했다. 또한 드와이트 모로우를 주멕시코 미국 대사로 임명하여 양국 간 갈등을 완화하고자 했다.[26]

쿨리지 행정부는 니카라과아이티 점령을 지속했지만, 1924년 도미니카 공화국 점령은 종료되었다.[26] 1925년 니카라과에서 해병대를 철수시켰으나, 1927년 정치적 불안이 심화되자 다시 파병했다. 헨리 L. 스팀슨을 특사로 파견하여 에스피노 네그로 조약을 중재, 내전을 종식시키고 미국의 군사적 존재를 확대했다.[26]

1928년 쿨리지는 쿠바 아바나에서 열린 팬아메리칸 회의에 참석하여 미국을 대표했다. 이는 쿨리지가 재임 중 유일하게 방문한 외국이었다. 그는 2016년 버락 오바마 이전까지 쿠바를 방문한 마지막 미국 대통령이었다.[21]

쿨리지는 캐나다와 협력하여 세인트 로렌스 해상 수로 건설을 승인했다.[25]

4. 6. 1928년 대선 불출마 선언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쿨리지는 재선에 도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927년 여름, 사우스다코타주 블랙힐스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나는 1928년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습니다."라는 간결한 성명을 발표했다.[1] 기자들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한 후, 쿨리지는 "제가 또 다른 임기를 수행한다면 1933년까지 백악관에 있게 될 것입니다… 워싱턴에서 10년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오래 있는 것입니다. 너무 깁니다!"라고 설명했다.[2] 쿨리지는 회고록에서 "대통령직은 그 직책을 맡은 사람들과 그들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큰 희생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우리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 되지만, 우리가 달성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 이상을 시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라며 불출마 이유를 밝혔다.[3]

5. 퇴임 이후와 죽음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쿨리지는 초당파 철도 위원회 의장, 맹인 재단 명예 회장, 뉴욕 생명 보험 회사 이사, 미국 골동품 연구 사회 회장, 애머스트 대학교 수탁자를 지냈다. 메인주 루이스턴베이츠 칼리지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

1929년 자서전을 펴냈으며, 1930년부터 1931년까지 '''"캘빈 쿨리지가 말한다"'''라는 신문 칼럼을 썼다.[1] 1933년 1월 5일 노샘프턴의 저택에서 60세에 관상 동맥 혈전증으로 사망했다.[1] 쿨리지는 건강이 급속히 쇠퇴하면서 후버의 재선 패배에 실망감을 느꼈고, 옛 친구에게 "난 이 시대에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고 느낀다"라고 말했다.[1]

쿨리지는 가족 농가가 박물관으로 유지된 버몬트주 플리머스 노치에 안장되었다. 버몬트주는 1972년 7월 4일 쿨리지의 100세 생일을 기념하여 새로운 역사적 장소 방문객 센터를 개관했다.[1]

1930년 플로리다 오렌지 축제에서 자몽을 받는 쿨리지

6. 유산과 평가

재임 중에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큰 인기를 누렸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쿨리지를 대체로 평균 이하로 평가한다. 데이비드 그린버그(David Greenberg) 럿거스 대학교(Rutgers University) 학자는 "대중은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의 재임 기간 동안 그를 좋아하고 존경했지만,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은 그의 명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그의 정책에 대한 여론을 바꿔놓았다"고 말했다.[27] 역사학자들은 쿨리지가 세계적으로 상황이 잘 돌아가던 시기에 집권했기 때문에 높은 대중적 지지를 얻었을 뿐이라며, 그의 소극적인 태도를 "무위정부 대통령"으로 묘사하며 비판한다.[28][29] 일부 역사학자들은 연방 규제 권한을 확대한 법률에 서명한 것에 대해 쿨리지를 비판하며, 이것이 미래 대통령 행정부의 부패의 길을 열었다고 주장한다.[30]

1982년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의 설문 조사에서 49명의 역사학자들은 쿨리지를 8번째로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했다.[31] 2006년 영국 언론인 윌리엄 쇼크로스(William Shawcross)는 쿨리지를 20세기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말했다.[32] 2021년 C-SPAN 설문 조사에서 역사학자들은 쿨리지를 44명의 대통령 중 24위로 평가했다. 설문 조사에 참여한 역사학자들은 그에게 "도덕적 권위"와 "행정 능력"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내렸지만, "의제 설정"과 "평등한 정의 추구"에 대해서는 낮은 평가를 내렸다.[33]

역사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쿨리지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그의 무관여 정부 접근 방식은 현대 보수주의자들과 공화당 정치인들에게 계속해서 공감을 얻고 있다.[34] 1981년 새로 취임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은 쿨리지의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칭찬했다.[27] 나중에 레이건은 백악관 집무실에 있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초상화를 내리고 쿨리지의 초상화로 교체했다.[35][36][37][38]

백악관 집무실에서 쿨리지 초상화를 배경으로 찍은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 사진


쿨리지는 조용하고 은둔적인 정치인으로 알려졌지만, 새로운 매체인 라디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대통령 재임 중 여러 차례 라디오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기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520차례의 기자 회견을 열었는데, 이는 그 이전이나 이후 어떤 대통령보다도 기자들과 정기적으로 만난 것이다. 쿨리지의 두 번째 취임식은 라디오로 중계된 최초의 대통령 취임식이었다. 1923년 12월 6일, 그의 의회 연설은 라디오로 방송되었는데, 이는 최초의 대통령 라디오 연설이었다.[39] 쿨리지는 새로 설립된 연방 라디오 위원회에 라디오 규제 권한을 부여하는 1927년 라디오 법에 서명했다. 1924년 8월 11일, 리 드 포레스트를 위해 개발한 포노필름 사운드온필름 기법을 사용한 시어도어 W. 케이스는 백악관 잔디밭에서 쿨리지를 촬영하여 "침묵의 캘"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를 사운드 필름에 등장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드 포레스트 필름의 제목은 ''President Coolidge, Taken on the White House Grounds''였다. 찰스 린드버그가 1927년 대서양 횡단 비행 후 미국 해군 함선을 타고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쿨리지 대통령은 그를 미국으로 환영하고 명예훈장을 수여했는데,[41] 이 행사는 필름으로 기록되었다.[42]

1932년 쿨리지의 공식 대통령 초상화

7. 주요 대통령 법령들

법령명내용
1924년 이민 법령1924년에 쿨리지 대통령이 서명.
1924년 수익 법령1924년에 쿨리지 대통령이 서명.
1924년 인디언 시민권 법령1924년에 쿨리지 대통령이 서명.
1926년 수익 법령1926년에 쿨리지 대통령이 서명.
1927년 라디오 법령1927년에 쿨리지 대통령이 서명.
1928년 수익 법령1928년에 쿨리지 대통령이 서명.


8. 행정부와 내각

앞줄 왼쪽부터: 해리 S. 뉴, 존 W. 위크스, 찰스 에번스 휴스, 쿨리지, 앤드루 멜론, 할란 F. 스톤, 커티스 D. 윌버
뒷줄 왼쪽부터: 제임스 J. 데이비스, 헨리 C. 월리스, 허버트 후버, 휴버트 워크]]

직책성명임기
대통령캘빈 쿨리지1923년 - 1929년
부통령(1기) 공석1923년 - 1925년
찰스 도즈 (2기)1925년 - 1929년
국무장관찰스 휴즈1923년 - 1925년
프랭크 켈로그1925년 - 1929년
재무장관앤드루 멜론1923년 - 1929년
육군장관존 위크스1923년 - 1925년
드와이트 데이비스1925년 - 1929년
법무장관해리 도허티1923년 - 1924년
하런 스톤1924년 - 1925년
존 서전트1925년 - 1929년
우정장관해리 뉴1923년 - 1929년
해군장관에드윈 덴비1923년 - 1924년
커티스 윌버1924년 - 1929년
내무장관휴버트 워크1923년 - 1928년
로이 웨스트1928년 - 1929년
농무장관헨리 웰레스1923년 - 1924년
하워드 고어1924년 - 1925년
윌리엄 저딘1925년 - 1929년
상무장관허버트 후버1923년 - 1928년
윌리엄 위팅1928년 - 1929년
노동장관제임스 J. 데이비스1923년 - 1929년



쿨리지는 전임 하딩 대통령의 내각 각료들을 유임시켰으나, 일부는 스캔들에 연루된 인사들도 있었다. 쿨리지는 하딩의 연설문 작성가 주드슨 T. 웰리버를 유임시켰고, 1925년 11월 스튜어트 크로포드가 웰리버의 뒤를 이었다. 쿨리지는 C. 바스컴 슬램프를 대통령 비서(현재의 백악관 비서실장)로 임명했다.

쿨리지 내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재무장관 앤드루 멜론이었다. 그는 행정부의 재정 정책을 통제했으며, 쿨리지 자신보다 더 강력한 인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상무장관 허버트 후버 또한 쿨리지 내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데, 이는 쿨리지가 친기업적 제안으로 긍정적인 언론 보도를 얻는 후버의 능력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국무장관 찰스 에반스 휴스는 1925년 쿨리지의 재선 이후 사임할 때까지 외교 정책을 이끌었으며, 이후 프랭크 B. 켈로그가 국무장관직을 맡았다. 쿨리지는 재선 이후 윌리엄 M. 자딘을 농무장관에, 존 G. 사전트를 법무장관에 임명했다. 쿨리지는 첫 임기 동안 부통령이 없었지만, 찰스 도즈가 두 번째 임기 동안 부통령이 되었고, 도스와 쿨리지는 농업 정책 등에서 의견 충돌을 빚었다.

9. 대법원 임명

쿨리지는 1925년 할런 F. 스톤을 미국 대법원의 대법관으로 임명하였다.[1] 스톤은 쿨리지와 같은 애머스트 대학교 출신으로 월가 변호사이자 보수 공화당원이었다. 1924년, 쿨리지는 하딩 대통령의 법무장관인 해리 M. 도허티에 의해 손상된 법무부의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스톤을 법무장관으로 임명했는데, 당시 스톤은 컬럼비아 로스쿨 학장직을 맡고 있었다.[1] 쿨리지가 스톤 이외의 다른 사람을 대법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고려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스톤 자신은 쿨리지에게 벤저민 N. 카르도조를 임명할 것을 촉구했다.[1] 스톤은 사법 자제를 확고히 믿는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뉴딜 정책 법안을 옹호하는 데 자주 투표하는 법원의 세 명의 자유주의 판사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1] 훗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스톤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했다.

쿨리지 대통령은 할런 피스크 스톤을 먼저 법무장관으로, 그 후 대법원 판사로 임명했다.

10. "조용한 캘"

쿨리지는 유능하고 효과적인 대중 연설가로 알려졌지만, 사생활에서는 과묵하여 "조용한 캘"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1] 백악관 만찬에서 한 손님이 쿨리지에게 "오늘 내기를 했는데, 당신에게서 세 단어 이상을 끌어낼 수 있다고 했어요."라고 말하자, 쿨리지는 "당신이 졌어요."라고 답했다.[12] 그러나 쿨리지의 다른 만찬 손님은 "그의 침묵에 불평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가 응답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평범함 너머에 도달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음을 느껴야 했다."고 말했다.

1924년 선거에 대비하여 쿨리지의 막내 아들 캘빈 2세는 백악관 코트에서 테니스를 치다가 물집이 생겼다. 물집이 감염되어 캘빈 2세는 사망하였다. 그 후 쿨리지는 더욱 내성적으로 변했다. 대통령을 알던 사람들은 그가 아들의 사망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내 아들이 죽을 때 대통령의 영광이 그와 함께 갔다."고 말했다.

그의 내성적인 성격은 기억술 '''"시원한 캘"'''의 영감이 되기도 하였다.

11.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 (선거인단)결과당락
1915년 선거매사추세츠 부주지사46대공화당52.13%255,542표1위
매사추세츠 부주지사 당선
1916년 선거매사추세츠 부주지사46대공화당56.07%283,166표1위
1917년 선거매사추세츠 부주지사46대공화당60.37%223,157표1위
1918년 선거매사추세츠 주지사48대공화당50.87%214,863표1위
매사추세츠 주지사 당선
1919년 선거매사추세츠 주지사48대공화당60.94%317,774표1위
1920년 선거미국의 부통령29대공화당65.80%1,218,215표 (404명)1위
미국의 부통령 당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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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Presidents ranked from worst to best https://www.cbsnews.[...] 2021-04-22
[3] 웹사이트 Significant Papers – Coolidge Prosperity Gave America the Reserve to Weather the Great Depression https://coolidgefoun[...] 2021-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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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뉴스 Bold Park Pollard https://www.newspape[...] 1923-08-17
[6] 서적 Chubb Hill Farm and Cavendish, Vermont: A Family and Town History, 1876–1960 https://books.google[...] Cavendish Historical Society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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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뉴스 Calvin Coolidge https://www.newspape[...] 2024-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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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뉴스 Dusting Off Calvin Coolidge https://www.newspape[...] The Tampa Tribune 1981-06-14
[37] 뉴스 White House pedlar of an ageless dream https://www.newspape[...] The Observer 1984-01-29
[38] 뉴스 Is Coolidge's Picture Coming Down?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86-11-29
[39] 논문 The Presidential address 1967
[40] 웹사이트 Silent Cal, Not So Silent https://blogs.loc.go[...] 2016-11-03
[41] 웹사이트 Medal of Honor will be awarded to Lindbergh https://www.upi.com/[...] 1927-05-23
[42] 웹사이트 Lindbergh honored by President Calvin Coolidge https://www.youtube.[...] 1927
[43] 간행물 Whose Country is This? 1921
[44] 서적 ちょっと笑える話 文藝春秋
[45] 서적 アメリカ大統領を読む事典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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