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하 (1908년)
1. 개요
주영하는 일제강점기 말부터 한국 전쟁 이후까지 활동한 북한의 정치인이다. 1945년 조선공산당 북조선지부 홍원군책, 함경남도 임시인민위원회 위원, 원산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북조선 노동당 창당 후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정치국 위원 등을 지냈으며, 북조선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 남북협상 조직준비위원장, 초대 주소련 북조선 대사, 교통상, 외무성 부상 등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중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를 지냈으나, 1953년 종파분자로 몰려 실각하고 지방공장 지배인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교육성 부상으로 복귀했으나 박창옥, 윤공흠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실각, 노동교화소로 추방되었다.
-
러시아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 -
김영재 (1952년)
김영재(1952년)는 강원도 출신으로 행정고시 합격 후 공직에 입문하여 상공부, 산업통상자원부 등에서 주요 보직을 거쳐 한국가스공사 사장,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국가장의위원회 위원과 대외경제상으로 활동 후 변호사가 되었다. -
러시아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 -
박의춘
박의춘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여러 국가의 대사를 거쳐 외무성 부상, 주 러시아 대사를 역임하고 외무상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외교 활동을 수행했다. -
일제강점기의 노동운동가 -
박헌영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에 의해 처형되어 그의 생애와 활동은 논란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일제강점기의 노동운동가 -
이현상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활동한 이현상은 6·10 만세운동 참여, 노동 및 항일 운동, 남로당 활동, 남부군 사령관으로서의 게릴라전 지휘 등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빨치산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북한에서 애국렬사로 추앙받고 있다. -
1908년 출생 -
에드워드 텔러
헝가리 출신 이론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는 수소폭탄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논쟁적인 활동으로 인해 과학 기술 발전과 윤리적 책임에 대한 논쟁을 야기한 인물이다. -
1908년 출생 -
존 바딘
존 바딘은 트랜지스터와 초전도 현상에 대한 이론적 설명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두 번 수상한 미국의 물리학자로서, 트랜지스터 발명과 BCS 이론 발표를 통해 현대 전자공학과 물리학 발전에 혁신적인 기여를 했다.
2. 약력
* 1945년 8월 조선공산당 북조선지부 홍원군책, 함경남도 임시인민위원회 위원
* 1945년 9월 원산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 1946년 8월 북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정치위원
* 1947년 2월 북조선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
* 1948년 4월~5월 남북협상 조직준비위원장, 제1차 남북협상 참여
* 1948년 8월 해주 제2차 남북협상, 남한 몫의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1948년 9월 북한 교통상
* 1949년 10월 주소련 북조선 초대 대사
* 1951년 교통상, 내각 외무성 부상
* 1953년 8월 종파분자로 몰려 실각, 지방공장 지배인
* 1956년 교육성 부상, 박창옥, 윤공흠 사건 연루, 노동교화소 추방
주영하는 김일성 파와 타협했지만, 박헌영의 지지자로 남았다. 북한 정부 기관지 민주조선은 북한에 남은 남조선 노동당 전직 당원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주영하를 비판했다. 김일성의 빨치산파, 소련파, 연안파는 또한 주영하를 제거하려고 했다.
2.1. 해방 직후 ~ 북조선 노동당 창당 (1945~1946)
1945년 8월 조선공산당 북조선지부 홍원군책을 맡았다. 같은 해 함경남도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45년 9월 원산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46년 8월 소련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 노동당이 창당되자, 국내파를 대표하여 북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정치위원이 되었다.
1946년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열린 북조선 노동당 제1차 당대회에서 당의 제1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과 당 비서국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8월 31일 제1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과 함께 당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2.2. 북한 정권 수립 초기 (1947~1951)
1947년 2월 북조선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8년 3월 27~30일에 열린 북조선 노동당 제2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재선되었고, 3월 31일 제2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부위원장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1948년 4월~5월에는 남북협상 조직준비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제1차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1948년 8월 해주에서 개최된 제2차 남북협상에서는 남한 몫의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북한이 공식 선포되면서 김일성 내각의 교통상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 9월 24~25일에 열린 제2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허가이에게 당 부위원장과 검사위원회 위원장직을 물려주었다.
1949년 10월 주소련 북조선 초대 대사를 역임했다. 1951년에는 교통상과 내각 외무성 부상을 겸임했다.
2.3. 실각과 숙청 (1953~1956)
1953년 8월, 주영하는 종파분자로 몰려 실각하고 지방 공장 지배인으로 좌천되었다. 이는 한국 전쟁 직후 이승엽 등 12명에 대한 공개 재판에서 드러난 허구적 음모 때문이었다. 이 재판에서 주영하는 박헌영이 총리가 될 경우, 장시우와 함께 부총리가 될 예정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주영하는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를 역임했다.
1956년, 주영하는 교육성 부상으로 복귀했으나, 박창옥, 윤공흠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실각하고 노동교화소로 추방되었다.
3. 정치적 숙청 배경
주영하는 1908년에 태어났다. 1946년 8월, 소련의 지시에 따라 창설된 북조선 노동당 정치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국내파를 대표했다. 제1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겸 비서국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48년 제2차 당대회에서 다시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제2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허가이에게 당 부위원장과 검사위원회 위원장직을 물려주었다.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주영하는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를 지냈다.
3.1. 김일성과의 권력 투쟁
주는 1946년 8월 소련의 지시에 따라 창설된 북조선 노동당 정치위원회 위원이었다. 그는 새로 창당된 당에서 국내파를 대표했다. 김일성 내각의 총리로 임명된 것은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공식 선포되었을 때였다. 주는 김일성 파와 타협했지만, 박헌영의 지지자로 남았다.
북한 정부 기관지인 민주조선은 북한에 남은 남조선 노동당 전직 당원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주를 비판했다. 빨치산파, 소련파, 연안파 등 김일성 파벌은 또한 주를 제거하려고 했다.
한국 전쟁 종전 직후인 1953년 8월 이승엽과 다른 12명의 피고인에 대한 공개 재판에서 허구적인 음모가 드러났다. 고소인에 따르면, 공모자들은 김일성을 전복하고 박헌영을 총리로 만들 계획이었다. 주는 박헌영의 부총리로서 장시우를 동반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