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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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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헌영은 1900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 운동가이다.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3.1 운동에 참여했으며,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여 핵심 인물로 활동했으며, 여러 차례 투옥과 망명을 반복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조선인민공화국 건설에 참여했으나, 미군정과 갈등을 겪었다. 1948년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여 부수상 겸 외무상을 역임했으나, 1953년 숙청되어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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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8년의 박헌영
1948년의 박헌영
이름박헌영
로마자 표기Bak Heonyeong
한자 표기朴憲永
이명이정, 이춘, 덕영
출생일1900년 5월 28일
출생지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
사망일1955년 12월 18일
사망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국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민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배우자주세죽, 정순년, 이순금, 윤레나
자녀딸: 비비안 박, 나타샤 박, 아들: 박병삼
부모아버지: 박현주, 어머니: 이학규
본관영해 박씨
학력
고등학교경성고등보통학교
대학교국제레닌학교
직책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term_start: 1949년 6월 24일
term_end: 1953년 8월 6일
chairman: 김일성
alongside: 허가이
convocation: 2차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term_start: 1948년 9월 9일
term_end: 1953년 3월 3일
premier: 김일성
alongside: 홍명희, 김책, 허가이, 최창익, 최용건
convocation: 1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상term_start: 1948년 9월 9일
term_end: 1953년 3월 3일
predecessor: 신설
successor: 남일
premier: 김일성
convocation: 1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의장term_start: 1946년 11월 24일
term_end: 1949년 6월 30일
chairman: 허헌
alongside: 이기석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당수 겸 서기장term_start: 1945년 9월 14일
term_end: 1946년 11월 24일
predecessor: 신설
successor: 허헌
경력
주요 경력조선로동당 고문 겸 중앙대표최고위원
조선로동당 당무위원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군 복무조선인민군 중장, 총정치국장
군 복무 기간1950년 6월 - 1953년 12월
주요 참전한국 전쟁
기타
종교없음 (무신론)
별명아호는 이정
가족 관계
이복형제이복형: 박지영, 이복누이: 박신기, 박간난
친인척사위: 빅토르 마르코프, 사촌 형: 박건영, 사촌 동생: 박자영, 조카: 박병석, 5촌 조카: 박병일

2. 생애

박헌영은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였으며, 해방 후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의 지도자였다.[25][26] 충청남도 예산군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서자로 태어나 차별 속에서 성장했으며, 이는 그가 일찍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배경이 되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공산주의 활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4]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공산당 창립을 주도하고 핵심 지도자로 활동하며 '조선의 레닌'[30]이라 불릴 정도로 영향력을 가졌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수차례의 투옥과 망명, 지하 활동을 반복해야 했다.[47] 특히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었을 때 정신이상자로 위장하여 풀려난 뒤 소련으로 탈출한 일화는 유명하다.[27][47] 소련에서 국제레닌학교 등을 다니며 이론을 다졌고, 코민테른의 지시로 국내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활동하다 다시 투옥되기도 했다. 출옥 후에는 경성콤그룹을 지도하며 지하 활동을 이어가다 광복을 맞았다.[106][107]

1945년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책임비서가 되어 남한 좌익 진영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했다.[260][5] 그러나 미군정과의 대립, 신탁통치 찬반 논쟁 등으로 정치적 입지가 불안정해졌고, 1946년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 이후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지하로 잠적했다.[196] 1948년 남북협상 참여를 계기로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 부총리 겸 외무상 등 요직을 맡았다.[3]

북한 정권 초기에는 김일성과 함께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나, 한국전쟁의 책임 문제와 권력 투쟁 과정에서 점차 밀려났다. 결국 1953년 정전협정 직후 '미제의 간첩'이라는 혐의로 숙청되었고,[3] 1955년 또는 1956년에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7][8][9][266]

2. 1. 초기 생애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출신으로, 영해 박씨 양반 가문의 서자였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4] 같은 해 3월 1일에 일어난 3.1 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한국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4]

2. 1. 1. 출생과 가계

1900년 5월 28일[34]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333번지 빗돌마을에서 태어났다. 출생일에 대해서는 5월 1일 설과 음력 5월 5일 설도 있다.[36] 아버지는 지주이자 상업에 종사하던 박현주(朴鉉柱)이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소실인 이학규(李學圭)이다. 서자(庶子)로 태어났으며, 태어날 당시 아버지에게는 본처 소생의 10여 세 연상의 이복형 박지영(朴芝永), 박신기 등이 있었다.[35]

본관은 영해 박씨(寧海 朴氏)로, 신라의 문신 박제상(朴堤上)의 56대손이다. 선대는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으나, 아버지 박현주와 큰아버지 박현정이 함께 벼 장사로 돈을 벌어 중류 이상의 생활을 했다.[37] 아버지는 땅을 가진 지주이자 정미소를 경영하는 상인이었으며,[38] 박헌영이 대흥보통학교 입학 당시 아버지의 직업은 농업으로 기록되었으나,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에는 양반 신분에 직업은 상업으로 기록되어 있었다.[38]

어머니 이학규는 충청남도 서산군 출신의 과부로,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데리고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에서 국밥집을 하다가 박현주의 첩이 되었다.[39] 이로 인해 박헌영에게는 10여 세 차이 나는 이부(異父) 누이가 있었다.[39] 어머니는 서산 출신이라 '서산댁'으로 불렸으며, 춘궁기에 마을 사람들에게 식량 등을 베풀어 덕망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박헌영이 투옥되었을 때 어머니가 사망하자 마을 주민들이 장례를 치러주기도 했다.

유년기에 한학을 배우고, 대흥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YMCA 학당에 다니며 기독교를 접하고 영어를 배웠다. 1916년 서울의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며,[4] 이범석, 시인 심훈 등과 동창이었다. 1919년 3월 1일 발발한 3.1 운동에 참여했으며,[4] 같은 해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4]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국 독립운동에 참여했다.[4]

성년까지 생존한 자녀로는 딸 박 비비안나와 아들 박병삼(법명 원경)이 있다. 가까운 친척은 대부분 후사가 끊겼고, 5촌 조카 박병일(한국 전쟁 중 사망)이 양자를 들여 후사를 잇고 있다. 충청남도 예산에 그의 5대조 묘가 있다.[293]

'''박헌영의 가계'''
구분관계이름생몰년비고
친가할아버지박홍원(朴弘遠)1839년 1월 18일 ~ ? (기일 3월 6일)박제상의 54대손[294]
할머니전주 이씨(全州李氏)1838년 7월 7일 ~ 1893년 4월 25일이일석(李逸錫)의 딸
백부박현정(朴鉉定)1858년 9월 27일 ~ 1933년 11월 18일
사촌형박건영(朴健永)1890년 12월 9일 ~ 1955년 3월 25일
5촌 조카박병일(朴秉一)? ~ 1950년?한국 전쟁 중 사망, 양자로 후사 이음
숙부박현세(朴鉉世)1872년 1월 18일 ~ 1919년 10월 9일
사촌동생박자영(朴滋永)1916년 7월 24일 ~ 1950년 8월 25일
사촌누이--4명
고모박씨(朴氏)-
고모부신석종(申錫鍾)-
직계아버지박현주(朴鉉柱)1867년 7월 7일 ~ 1934년지주, 상인
어머니 (본처)탐진 최씨(耽津崔氏)1872년 ~ 1912년 3월 21일[295][296]최철원(崔喆源)의 딸
이복형박지영(朴芝永)1891년? 8월 3일 ~ 1946년?
이복형수장기례(張基禮)1891년 3월 19일 ~ ?
조카박병석(朴秉奭)1922년 ~ ?
조카며느리이경용-
이복누이박신기(朴新基)1905년 12월 8일 ~ ?
서모이름 미상-
이복누이박간난(朴干難)1912년 2월 10일 ~ 1913년 5월 29일[297]요절
어머니 (생모)이학규(李學圭)1867년 12월 10일 ~ 1943년아버지 박현주의 소실
배우자 및 자녀배우자주세죽(朱世竹)1901년 6월 2일 ~ 1953년김단야와 재혼
박 비비안나 (박영)1928년 ~ 2013년발레리나, 대학교수
사위빅토르 마르코프? ~ 2003년
배우자정순년(鄭順年)1922년 ~ 2004년 12월 15일
아들박병삼 (원경)1941년 ~ 2021년승려
배우자윤레나1920년경 ~ ?생사불명
박 나타샤(朴Наташа)생사불명
아들박 세르게이(朴Серге́й)1952년 ~ 생사불명
이부 누이미상생몰년 미상어머니 이학규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외가진외증조부이일석(李逸錫)-할머니(전주 이씨)의 아버지


2. 1. 2. 유년기와 학창 시절

박헌영은 1900년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인 영해 박씨 박현주와 그의 소실 이학규 사이에서 태어났다.[41] 본관은 영해 박씨(寧海朴氏)이며, 신라의 정승 박제상의 56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자였기 때문에 조선 양반 가문의 후손임에도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의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1898년, 1899년, 1901년 등 여러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1900년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머니 이학규는 박헌영이 두 살 때 예산 신양면 우시장 근처에서 독립하여 국밥집과 행상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아버지 박현주가 시장에 여관을 차려주기도 했고, 근처 광산 덕분에 국밥집 장사가 잘 되어 유년 시절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39] 하지만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주변의 무시와 천대를 받으며 자랐다. 기억력이 뛰어나 3~4세에도 글을 쓸 줄 알았다고 하며,[41] 어머니는 그를 예산읍서당에 보내 한학(漢學)을 배우게 했다. 후일 그의 비서를 지낸 박갑동은 고향 주민들이 '박헌영이 공산주의 사상을 갖게 된 동기는 서자로서 겪은 차별에 대한 저항 의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고 기록했다.[42] 다만, 박헌영이 사회주의자였고 월북 후 처형당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오랫동안 그에 대해 증언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소년기에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뒤, 신식 학교인 대흥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했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YMCA 학당에 입학하여 교회를 다니며 영어를 배웠고, 학당을 졸업했다. 1916년에는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4] 경성고보 재학 시절 동창으로는 이범석, 시인 심훈 등이 있었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해 3월 1일에 발발한 3·1 운동에 참여했으며, 이후 한국 독립운동에도 관여했다.[4] 같은 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2. 2.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활동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동했다.[25][26] 몰락한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나 일찍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조선공산당의 핵심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의 활동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망명, 투옥, 지하 활동으로 점철되었으며, '조선의 레닌'[30], '암흑 속의 별'[31], '비운의 혁명가' 등의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이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자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는 1921년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를 맡았다. 1922년 1월에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주최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조선 대표 중 한 명으로 참가했다.

1923년 4월 국내에서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려다 체포되었으나 1924년 출옥하였다. 이후 잠시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운동을 이어갔다. 1925년 4월 18일, 서울에서 조봉암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립을 주도했으며, 동시에 창립된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 및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다.[12] 이 시기부터 그의 활동은 주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같은 해 말,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다. 1926년 재판 과정에서는 정신이상자로 가장하여[27] 병보석으로 풀려났다.[47] 이후 건강 악화를 이유로 가택에 감금되었으나, 1928년 12월 소련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 당국은 그가 탈출한 뒤에야 그의 연기를 알아차렸다.

소련 망명 후 모스크바국제레닌학교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하며 공산주의 이론을 심화했다. 1931년 학업을 마친 뒤 코민테른의 지시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상하이를 거쳐 1932년 국내에 잠입했으나, 1933년 다시 체포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39년 9월 만기 출옥한 박헌영은 1940년부터 이재유, 이관술 등과 접촉하며 지하 공산주의 조직인 경성콤그룹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1941년 경성콤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자,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42년 12월 광주로 피신하여 김성삼(金成三)이라는 가명으로 벽돌 공장 노동자로 위장하며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은신 생활을 이어갔다. 이 시기 그는 극소수 동지들과의 연락 외에는 외부 활동이 거의 단절된 상태였다.[106][107]

2. 2. 1. 3.1 운동 참여와 망명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이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일로 일본 관헌의 주목을 받게 되어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는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에 가입했으며, 1921년에는 상하이지부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주최 극동인민대표자회의(극동 여러 민족 대회)에 참가하였다.

1923년 4월 국내에서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려다 체포되었으나 1924년 출옥하였다. 출옥 후 1924년 8월부터 김단야, 이승엽 등과 함께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였고, 잠시 동아일보 기자로도 일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필화 사건으로 조선일보에서 해직되었다.

1925년 4월 18일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여하였으며, 이때 창립된 측면 조직인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책임비서를 맡았다. 같은 날 경성 자택에서 조봉암, 김찬 등과 고려공산청년회 창립 대회를 열었으며, 박헌영은 7명의 중앙집행위원 중 헌법위원으로 선출되었다.[12]

소련으로 탈출 직후의 박헌영과 첫 번째 부인 주세죽, 1928년


국제레닌학교 재학 중 다른 한국 학생들과 함께한 박헌영


1929년 모스크바 국제 레닌 학교 학생들. 박헌영은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주세죽은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뒷줄 오른쪽 끝에 호찌민이 있다.


1933년 9월 14일, 서대문 감옥에서 촬영된 박헌영


1925년 말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으나[47], 1926년 재판 과정에서 배설물을 먹는 등 정신이상자로 가장하여 그해 11월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건강 악화를 이유로 가택에 감금되었으나, 1928년 12월 임신 중이던 아내 주세죽과 함께 만주를 거쳐 소련으로 탈출하였다. 일본 당국은 그가 탈출한 뒤에야 정신이상자 행세가 연기였음을 알았다.

소련 망명 후 모스크바국제레닌학교(1928년 11월 입학)와 동방노력자공산대학(1929년 입학)에서 수학했다. 1931년 학업을 마친 뒤 코민테른의 지시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1932년 국내에 잠입했으나, 1933년 다시 체포되었다. 1934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39년 9월 출옥하였다.

2. 2. 2. 공산주의 운동과 투옥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이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다.[47] 상하이에서는 1921년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책임비서를 맡았다. 1922년 1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주최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조선 대표 중 한 명으로 참가했다.

1923년 4월, 국내에서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려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1924년 출옥하였다. 출옥 후 1924년 8월부터 김단야, 이승엽 등과 함께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으나, 10월 필화 사건으로 해직되었다. 잠시 동아일보 기자로도 활동했으며, 같은 해 김억 등과 함께 에스페란토 보급 운동에도 참여하여 경성에서 강습회를 열고 조선에스페란토연맹 결성에 관여했다.[13]

1925년 4월 18일, 서울 자택에서 조봉암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47] 그는 일본 유학생 중심의 사회주의 단체였던 화요회 소속이었다. 동시에 창립된 고려공산청년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 겸 헌법위원을 맡았다.[12] 1925년 10월에는 반기독교 대회의 연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말, 상하이의 여운형에게 보내려던 보고서가 신의주에서 발각되면서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다.[47]

1926년 재판 과정에서 박헌영은 정신이상자인 척 연기하며 자신의 배설물을 먹는 등의 행동을 하여[47] 결국 1928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28년 12월, 임신 중이던 아내 주세죽과 함께 소련으로 극비리에 탈출했다.[47] 일본 경찰은 그가 탈출한 뒤에야 정신이상 연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련 망명 후 딸 박 비비안나를 낳았으나, 혁명 활동을 위해 딸을 고아원에 맡겨야 했다. 1928년 11월부터 모스크바의 국제레닌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47] 1929년에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여 1931년까지 수학했다.

1931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상하이로 이동하여 국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지도하려 했다. 그는 잡지 「콤뮤니스트」를 만들어 국내로 반입시키려 했으나 발각되었고, 1932년 국내 잠입 후 1933년 다시 체포되었다.

1934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39년 9월 만기 출옥한 박헌영은 1940년 2월부터 이재유, 이관술 등과 접촉하며 지하 공산주의 조직인 경성 콤그룹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42년 12월 광주로 피신하여 김성삼(金成三)이라는 가명으로 벽돌공장 노동자로 위장하며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은신 생활을 이어갔다.

2. 2. 3. 재판과 광인 행세, 그리고 탈출

1925년 말, 박헌영은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다른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었다.[47]

1926년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그는 법정에서 정신이상자처럼 행동했다. 자신의 배설물을 먹는 등[12] 광인(狂人) 행세를 하여 일본 경찰과 법원을 속이려 했다.

1928년, 정신이상자로 가장하여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47] 그해 12월 임신 중이던 아내 주세죽과 함께 만주를 거쳐 소련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47] 그가 탈출한 뒤에야 일본 경찰 당국은 박헌영의 광인 행세가 탈출을 위한 연기였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2. 2. 4. 소련 유학과 국제 공산주의 활동

1921년 상하이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고,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를 맡았다. 1922년 1월에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주최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하였다.

1923년 4월 국내에서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려다 체포되었으나 1924년 출옥하였다. 출옥 후 잠시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1924년 10월 필화사건으로 해직되었다. 같은 해 김억 등과 함께 경성에서 에스페란토 강습회를 열고 조선에스페란토연맹 결성에 참여하기도 했다.[13] 1925년 4월 18일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여하였고,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를 맡았다.[12] 이 시기부터 해방 전까지 주로 지하에서 활동하였다.

1925년 말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었다.[47] 재판 과정에서 정신이상자인 척 연기하여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1928년 12월 임신 중이던 아내 주세죽과 함께 만주를 거쳐 열차로 소련 모스크바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에야 그의 정신이상 연기가 드러났다.

소련 망명 후 딸 박 비비안나를 낳았으나, 딸은 고아원에 맡겨졌다. 1928년 11월 모스크바의 국제레닌대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으며, 1929년에는 동방노력자대학 2년 과정에 입학하였다. 1931년 대학 과정을 마친 뒤,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로 이동하여 조선 국내의 공산당 조직을 지도하려 하였다. 그는 상하이에서 잡지 「콤뮤니스트」를 만들어 국내로 밀반입시키려 했으나 발각되었다.

1932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1933년 다시 체포되었다. 1934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1939년 9월 출옥하였고, 1940년 2월부터는 이재유, 이관술 등과 함께 지하 조직인 경성 콤그룹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2년 12월 일제의 검거망이 좁혀오자 광주로 피신하여 김성삼(金成三)이라는 가명으로 벽돌 공장 인부로 위장하며 은신 생활을 이어갔다.

2. 2. 5. 체포와 재투옥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된 바 있다.[51] 이후 1923년 4월 국내에서 공산주의 조직 결성을 시도하다 다시 체포되었으나, 1924년 출옥하였다.

1925년 말에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신의주 사건)으로 또다시 투옥되었다.[47] 이때 박헌영은 정신이상자로 위장하는 방식으로 병보석을 얻어내 1928년 석방되었다.

1932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였으나 1933년 다시 체포되었다. 1934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고, 1939년 9월 만기 출옥하였다.

2. 2. 6. 은신과 지하 활동

1939년 9월 출옥한 박헌영은 1940년 2월부터 이재유, 이관술 등과 접촉하며 지하 조직인 경성콤그룹 활동에 참여하고 이를 지휘했다.

1941년 경성콤그룹일제 총독부 경찰에 발각되어 검거 선풍이 불자, 이관술, 이현상, 김삼룡 등 주요 조직원들이 체포되었다. 박헌영은 검거망을 피해 서울 아지트를 버리고 대구를 거쳐 전라남도 광주로 피신했다.[47] 광주에서는 '김성삼'(金成三)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벽돌과 기와를 굽는 공장의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신분을 숨겼다. 이 과정에서 "행상인도 되어보고…약사나 심지어 점쟁이 노릇"까지 해가며 경찰의 추적을 피했다고 전해진다.[47] 한때는 종연방직공장의 변소 청소부로 일하기도 했다.

은신 중에도 박헌영은 이순금을 통해 경성 주재 소련영사관과 비밀 교신을 시도하기도 했다.[103][104][105] 그러나 이 시기 박헌영은 전남 지역의 극소수 조직원을 제외하고는 다른 경성콤그룹 조직원들과의 연락이 거의 두절된 상태였다.[106] 역사가 서중석은 이 시기 박헌영의 활동에 대해 "뚜렷한 활동을 했다는 자료는 어디에서도 안 나온다. 몇몇 동지들하고 연락하는 정도의 활동이었다"고 평가했다.[107] 실제로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재건 과정에서 동료였던 권오직이 "우리는 박헌영 동지가 해외로부터 귀국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당시 공산주의 운동가들 사이에서도 그의 행방은 묘연했다.

2. 3. 해방 정국에서의 활동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동안 지하에서 벌여온 독립운동을 마치고 공개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곧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당 책임비서가 되어 해방 정국의 주요 좌파 지도자로 부상했다.[260][5] 당시 그는 남한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공산주의자였다.[5]

박헌영은 여운형, 김규식 등이 추진한 좌우합작운동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이를 무원칙한 야합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는 참여하여 평양을 방문했다.

미군정 하에서 조선공산당과 이후 결성된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은 점차 탄압을 받게 되었다. 특히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 이후 박헌영에게 체포령이 내려지자 그는 지하로 잠적했고,[196] 결국 1948년 남북협상을 계기로 월북하여 북한에 남았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부수상 겸 외무상 등을 역임했으나,[3] 김일성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한국 전쟁 이후 숙청되었다.

2. 3. 1. 조선공산당 재건과 인민공화국 선포

박헌영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위대한 박헌영 선생이여 빨리 나오시라'는 격문이 돌았다. 일부에서는 박헌영이 직접 붙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박헌영은 8월 17일 벽돌공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와, 8월 20일 명륜동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열고 '8월 테제'를 발표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이미 10여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장안빌딩에 간판을 걸고 조선공산당을 결성한 상태였는데, 이들은 '장안파 공산당'으로 불렸다. 박헌영이 이끄는 세력은 '재건파 공산당'으로 불렸다. 박헌영은 장안파의 지도자 영입 제안을 거부하고 오히려 해산을 요구했다. 그는 장안파의 홍남표, 노동우, 최원택 등과 여운형 계열의 이강국, 최용달 등을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건준 내 다수의 장안파를 제거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격렬한 논쟁 끝에 장안파는 1945년 8월 24일 해체되고 재건파에 합류하게 되었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재건 과정에서 조봉암고경흠을 배제했다.[116] 고경흠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 이론가였다가 전향하여 일제강점기 말부터 여운형을 따랐고, 여운형이 사망할 때까지 그의 비서로 활동했다. 박헌영과 조봉암의 관계는 1932년 이전부터 좋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117] 조선공산당 원로 김철수는 이러한 갈등이 박헌영이 개인적 추종자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117] 김철수는 1932년 옥중에 있던 박헌영에게 전향해서라도 살아남으라고 권유했다가 오히려 심한 비판과 미움을 받기도 했다. 1946년 5월, 조봉암은 박헌영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경고하고 좌익에서 우익으로 전향하며 조선공산당을 탈당하였다.

1945년 9월 6일 박헌영은 일부 인사들과 함께 건준을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격상시키고 정부 수립을 선포했으며, 내각 명단을 기초하여 초대 주석으로 이승만을 추대했다.[118] 이 시기부터 박헌영은 여운형을 경시하기 시작했고, 두 사람 사이의 반목과 불화는 계속되었다.[47][119] 9월 7일 여운형에게 두 번째 테러가 발생하여 20여 일간 치료를 받게 되었고, 그가 정치 활동을 중단한 사이 인민공화국의 기반은 박헌영에게 넘어갔다.[120] 이후 여운형에게 여러 차례 테러가 가해졌는데, 극우 단체 외에 박헌영을 암살 배후로 지목하는 견해도 있다.[121]

9월 11일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기반으로 조선공산당이 공식적으로 재건되었고, 박헌영은 서열 1위의 중앙위원이자 위원장 겸 총비서로 선출되었다. 9월 20일 박헌영은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테제를 발표하며 혁명 노선을 분명히 했다.[261]

박헌영이 서울의 공산주의 세력을 통합하는 동안 평양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발족하여 후에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했다. 이로써 박헌영은 남쪽 지역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10월 8일과 9일에는 개성에서 김일성과 회담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협의했다. 당시에는 조선의 정치 운동 주류가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여겨졌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여했으나, 11월 친일파 청산 문제를 둘러싸고 이승만과 갈등을 빚으며 탈퇴했다. 12월 1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을 환영하는 서울운동장 행사에 참석했고, 12월 30일에는 김구와 임정 세력이 주도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상임위원)이 되었다.[162]

1946년 1월 5일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당수로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며 조선이 민주주의 변혁 과정에 있다고 발표했다. 이 내용은 다음날 조선인민보 등에 보도되었다.[5] 그러나 모스크바 회담 이후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46년 2월 15일에는 여운형, 이승엽, 김원봉 등과 함께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단 의장으로 추대되었다.[262] 이승만공산주의에 대한 비판과 독설을 이어가자, 박헌영은 이승만을 향해 "독재적인 것을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원칙을 세우자"고 반박했다.[263]

1946년 박헌영(왼쪽)과 여운형(오른쪽)


1946년 9월, 박헌영은 1946년 9월 총파업을 조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파업에는 최고조일 때 25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은 다른 좌파 정당들과 합병하여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했고, 박헌영은 부위원장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1946년 여름, 미군정은 박헌영을 포함한 남로당 지도부에 체포 명령을 내렸다. 이에 박헌영 등 지도부는 소련 군정 하의 북한으로 월경했다. 일설에 따르면 1946년2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김일성과 박헌영 중 북한 지도자로 누가 더 적합한지 면접을 보았고, 김일성이 선택되었다고 한다.[14] 박헌영이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평양에 기반이 약했고, 1930년대 초부터 코민테른과 관계를 맺어왔던 점이 스탈린과 측근들의 불신을 샀다는 분석도 있다.

2. 3. 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와 갈등

미군소련군의 주둔을 예상한 박헌영은 1945년 8월 20일 무렵부터 새로운 정부 수립을 위해 움직였다. 좌익 세력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고, 미군의 진주를 고려하여 서둘러 인공을 수립했다. 또한, 민족통일전선을 시도하며 각 부문에서 대중을 조직하고 지역마다 인민위원회를 세웠다.[122]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박헌영과 여운형이 소련군과 사전에 협의하지 않았다는 점은 이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수립과 북한 측의 인공 부인에서 드러난다.[122]

1945년 9월 19일 김일성소련에서 귀국했다. 미군이 직접 군정을 실시한 남한과 달리, 북한의 소련은 김일성을 내세워 대리 통치하는 데 집중했다.[124] 김일성은 새로운 지도부 구성을 주장하며 분란을 일으켰고, 박헌영 등은 이를 분파 행동이라며 제지했다. 초기 소련 역시 김일성이 전면에 나서기에는 이르다고 판단하여,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10월 14일)를 평양에서 여는 등 김일성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124]

박헌영, 1946년


1945년 10월,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요청했다. 박헌영은 당초 당의 본부는 수도에 둔다는 점과 일국일당주의 원칙을 들어 반대했으나,[154] 소련군정의 강력한 후원을 받는 김일성의 요구와 압력으로 결국 10월 8일과 9일 개성에서 김일성과 회담하여 분국 설치에 합의하게 된다.[154] 이는 박헌영을 따르는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에 엄연히 당 중앙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북에 새로운 당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은 분파 행동"이라며 강력히 반발했음에도 불구하고[154], 사실상 김일성과 소련군정의 의도가 관철된 결과였다.[154]

이 합의에 따라 1945년 10월 10일부터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비공개로 열렸고, 마지막 날인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립되었다. 이로써 박헌영과 김일성의 관계는 당수와 당원의 관계에서 동등한 위치로 조정되었다. 분국 창립 대회에서는 책임비서에 김용범, 제2비서에 국내파의 오기섭과 연안파의 김무정이 각각 선임되었고, 김일성은 17명의 집행위원 중 한 명으로 포함되는 데 그쳤다.[154] 김일성이 바로 책임비서에 오르지 못한 것은 당시 그의 정치적 기반이 아직 확고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그는 두 달 뒤 열린 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책임비서가 되었다.[154]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이후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연안파 중심의 조선신민당과 통합하여 북조선로동당(북로당)으로 발전했다. 북로당은 다시 남한의 남조선로동당(남로당)과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되었다.[154] 그러나 이후 북한의 공식 문헌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라는 명칭 대신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154] 이는 김일성이 과거 '미제 고용간첩'으로 숙청한 박헌영의 수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154] 북조선분국 설치 허용은 박헌영의 정치적 실책 중 하나였다는 평가와, 소련김일성을 선택한 사실상의 김일성 승리라는 시각이 공존한다. 1946년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당대 당 통합 형식의 합당을 요구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여 조선로동당을 창건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박헌영이 재건한 조선공산당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2. 3. 3. 미군정과의 관계와 좌우합작운동 참여

신탁 통치 반대 운동


1945년 10월 27일 박헌영은 미 제24군 사령관 존 하지 미국 육군 중장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박헌영은 하지에게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진보적인 민주주의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이 미국의 이해와도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신탁 통치 문제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악화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1945년 12월 27일부터 국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좌우를 막론하고 격렬한 반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조선공산당 역시 초기에는 반탁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관술은 존 하지와의 대담에서 반탁 입장을 밝혔고,[158] 정태식도 반탁을 주장했다.[159] 박헌영 또한 김구 등 임정 세력이 12월 30일 결성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에 중앙위원(상임위원)으로 참여했다는 당시 언론 보도가 있다.[162] 같은 날 40여 개의 좌익 단체들도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신탁통치안 철폐를 요구하는 성명을 채택했다.[163] 이처럼 초기에는 박헌영을 포함한 좌익 진영 전체가 반탁 운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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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46년 1월 초,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은 갑자기 입장을 바꿔 신탁통치 지지(찬탁)로 돌아섰다. 미군정 기록에 따르면, 하지 사령관은 1월 1일 박헌영을 만났을 때는 강경한 반탁 입장이었으나, 1월 3일 다시 만났을 때는 정반대로 바뀌었다고 기록했다.[164][165] 1월 2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는데,[166][167] 이는 책임비서인 박헌영이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급격한 입장 변화의 배경에는 소련의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며, 당시 미군정도 그렇게 판단했다.[171] 박병엽은 박헌영이 12월 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지침을 받고 돌아왔다고 증언했으나,[160][161] 12월 30일 반탁 운동 참여 기록과 상충되어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162]

1월 3일로 예고되었던 좌익 진영의 반탁 집회는 당일 현장에서 지도부에 의해 돌연 찬탁 집회로 변경되어 큰 혼란이 벌어졌다.[169][170][210] 박헌영은 1월 5일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공개적으로 찬탁 입장을 밝히고, 이승만, 김구 등 반탁 세력을 비판했다.[172][173][174]

동아일보 창간호


박헌영의 찬탁 선회는 큰 파장을 일으켰고, 특히 1946년 1월 5일 뉴욕 타임스 존스턴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이 왜곡 보도되면서 논란이 증폭되었다. 박헌영은 인터뷰에서 현재 한국은 소비에트화할 단계가 아니며, 설령 소비에트 조선이 된다 해도 언제나 독립국일 것이라고 말했으나,[175] 존스턴 기자는 이를 교묘하게 왜곡하여 '박헌영이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하지 않으며, 조선이 몇 십 년 후에는 소련에 편입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는 내용의 허위 기사를 작성했다.[176]

1월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방송은 이 왜곡된 내용을 그대로 보도했고, 미군정은 이를 '보도자료' 형태로 만들어 배포했다.[177] 국내 신문, 특히 동아일보는 이를 인용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박헌영을 '매국노'로 몰아갔다. 동아일보는 1월 16일자 신문에 '조선을 소련의 속국으로-상항 방송이 전하는 박헌영의 희망', '박헌영의 매국언동, 한민당에서 배격을 결의' 등의 자극적인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고,[175] 17일에는 '조공 박헌영씨 언동에 큰 파동, 전국적으로 배격운동, 각 정당과 50개 단체 분연 궐기'라고 보도하며 파문을 키웠다.[175]

박헌영은 즉시 부인 담화를 발표했고, 인터뷰에 동석했던 다른 외신 기자들도 박헌영의 주장이 옳다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175] 그러나 존스턴 기자는 자신의 보도가 맞다고 재차 주장했고, 동아일보는 '뉴욕타임즈에 오보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정정과 사과 요구를 거부했다.[175] 이 사건으로 박헌영은 찬탁론자이자 친소 매국노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고, 반탁 단체들의 집중적인 비난과 성토 대상이 되었다. 우익 청년단 등은 박헌영을 여운형 등과 함께 암살 대상으로 지목하기도 했으며,[179] 송진우 암살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박헌영은 여러 거처를 옮겨 다니며 활동해야 했다.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발생하자 미군정은 이를 빌미로 조선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이에 박헌영은 7월 22일 하지에게 장문의 서한을 보내 정판사 사건이 공산당에 대한 악의적인 파괴 공작이라고 비판하며 자위적 수단을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미소공위 휴회, 이승만의 정읍발언, 좌우합작 문제 등 복잡한 정세 속에서 박헌영은 새로운 대응책, 이른바 '신전술'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는 정판사 사건과 좌우합작 문제를 논의하며 신전술을 구상했고, 이를 북한 지도부와 조율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194]

1946년 6월 3일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보도한 서울신문 1면 기사.


1946년 6월 3일 이승만전북특별자치도 정읍에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시사하는 이른바 '정읍 발언'을 하자, 박헌영은 이승만이 민족 분열을 획책한다며 강하게 비판하고 '반동 두목의 고립화만이 공위(共委) 속개, 독립을 촉진'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6월 13일).[195]

1946년 7월 초, 박헌영은 김일성과 함께 소련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에게 남한 정세를 보고하고 격려를 받았다. 7월 말에는 평양에서 김일성과 다시 회동하여 향후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8월 조선인민당 당수 여운형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신민당의 3당 합당을 제안하자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서 이를 수락했다.[196]

그러나 좌우합작운동 참여 문제를 놓고서는 내부적으로 이견이 있었다. 7월 말 모스크바와 평양 방문에서 돌아온 박헌영은 민전 협의회에서 좌우합작에 강력히 반대하며, 미군정에 이용당하지 말고 남북 좌익 세력의 단결을 통해 남한의 우익 반동 세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98][199] 좌우합작 참여 여부는 결국 표결로 결정되었고, 다수결에서 패배한 박헌영은 5개항의 원칙을 수용할 경우 합작을 지지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198] 하지만 여운형김원봉은 5개항 중 토지 몰수 조항이나 행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는 조항, 입법기구 수립 반대 조항 등은 우익 측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울 뿐 아니라 합작 자체를 반대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며 수정을 요구했다.[198][200] 그럼에도 박헌영은 7월 27일 일방적으로 좌우합작의 좌측 5원칙을 발표해 버렸다.[198][200]

1946년 9월 초, 박헌영은 소련스티코프로부터 "테러와 압제에 항의하는 대중적인 시위를 벌이고 항의집회를 개최하라"는 지시와 함께 두 차례에 걸쳐 총 500만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는 이후 1946년 9월 총파업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미군정의 탄압이 계속되고 신변의 위협이 커지는 가운데, 1946년 2월 15일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장에서 김두한에게 납치될 뻔한 사건도 발생했다. 결국 정판사 사건 이후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지면서 박헌영의 활동은 더욱 위축되었고, 이는 그가 월북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2. 3. 4. 남조선로동당 창당과 월북



제1차 미소공위 환영 시민대회 집회에서. 왼쪽부터 김원봉, 허헌, 박헌영.


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박헌영은 8월 20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열고 '8월 테제'를 발표하며 활동을 재개했다.[260] 그는 곧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가 되었으며,[260] 당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공산주의자였다.[5] 1945년 11월 5일 출범한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의 명예의장으로 추대되었고,[155] 전평은 결성대회에서 박헌영의 노선을 절대 지지한다고 결의하기도 했다.[155]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이후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지자, 박헌영은 처음에는 김구 등이 주도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에 참여했으나,[162][156] 이후 소련의 입장을 따라 찬탁으로 선회하였다. 1946년 1월 5일 기자회견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밝혔고,[264] 이는 우익 진영의 격렬한 비난을 샀다. 한국민주당2월 16일 박헌영 성토대회를 열고 그를 매국노로 규정했다.[188] 신탁통치 오보 사건[180][181] 등과 맞물려 박헌영은 극심한 비난과 테러 위협에 시달렸고, 수시로 거처를 옮겨 다녀야 했다.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개막하자 박헌영은 미소공위 활동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4월 초에는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소련 군정 인사들과 회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미군정의 좌익 탄압이 강화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박헌영은 9월 총파업을 주도했는데, 이는 최대 25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참여한 대규모 투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대구 10·1 사건 등 유혈 사태가 발생하자 미군정은 9월 4일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196]

체포령 이후 박헌영은 지하로 잠적하여 미군정의 추적을 피해 은신 생활을 시작했다. 1946년 10월, 그는 관 속에 숨어 삼팔선을 넘어 월북했다는 기록이 있다. 소련 군정 사령관 스티코프의 일기에 따르면, 박헌영은 10월 6일 북한에 도착했으며, 9월 29일부터 산속을 헤매다 관을 이용해 옮겨졌다고 한다.[209] 또한 일기에는 박헌영이 수시로 스티코프에게 행동 지침을 구하는 등 소련에 크게 의존하는 모습이 나타난다.[209] 당시 서울 주재 소련 부영사 아나톨리 샵신은 박헌영을 자신의 심복(henchman)이라고 말하기도 했다.[210]

한편, 1946년 남북한에서는 각각 소련의 지시에 따라 좌익 정당 통합 작업이 진행되었다. 북한에서는 8월 북조선노동당이 창당되었고, 남한에서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의 합당이 추진되었다. 박헌영은 여운형에게 합당을 제안하며 논의가 급물살을 탔으나,[206] 조선공산당 내부의 친박/반박 갈등과 다른 당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난항을 겪었다.[206] 박헌영 자신도 처음에는 3당 통합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207] 그러나 결국 소련의 개입으로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이 결성되었고, 박헌영은 부위원장이 되었다.[206] 이 과정은 소련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헌영의 승리로 평가되지만,[206] 합당 과정에서 이질적인 세력이 유입되면서 내부 갈등의 불씨를 안게 되었다. 월북 이후 박헌영은 북한 정권에 참여하게 되지만, 이미 소련김일성을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낙점한 상태였고[182][183] 박헌영의 입지는 점차 좁아지게 된다.

2. 3. 5. 남북협상 참여와 북한 잔류

1946년 서울의 조선공산당 창건 2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박헌영(중)과 허헌(왼쪽)


1947년 1월 박헌영은 조선적십자사 이사(理事)에 선출되었다. 박헌영은 각 정당사회단체 대표 자격으로 조선적십자사의 회원으로 가입하였으나, 그의 조선적십자사 가입을 불쾌해 하던 조선적십자사 총재 우사 김규식과 수시로 마찰, 충돌을 빚었다. 강원용에 의하면 김규식은 “나는 박헌영이 이사를 맡은 조직에 앉아서 일 못한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211] 1947년 2월 27일 미 군정청 경무국장 명의로 '박헌영 체포 유공자에게 황금 120돈을 수여하겠다'는 현상금이 내걸렸다. 박헌영은 미군정과 우익단체, 친일파의 공격을 피해 각처로 숨어다녔고, 3월 21일 작성된 미군 정보문서에는 만일 총선거가 바로 실시된다면 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이 새 정부의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그 뒤 박헌영은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강하게 반발했고, 1947년 10월경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건너갔다. 이후 황해남도 해주 등지에 이동, 체류하며 남한의 남로당을 서신과 통신으로 지휘하기도 하였다. 1948년 2월 평양으로 가 국기를 태극기에서 인공기로 교체하는 교체식에 참석하였다.

1948년 4월 5일 남북연석회의에서 로동당 부위원장 자격으로 축사를 낭독하는 박헌영


1948년 4월의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남북협상이 개최되자 평양에 체류하며 협상에 참여하였고, 북행길을 방문한 인사 중 김규식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남북협상 당시 소위원회 회의에서 박헌영은 미국을 '제국주의'로 5.10 단독총선거 참가자를 '망국노, 반동분자' 등으로 과격한 언어를 구사하며 비판하자, 협상에 참가했던 여운홍은 박헌영의 발언에 격분하여 '이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결정서가 좋을지 모르지만, 우리 다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안되겠으니 어구 수정이라도 하라.'고 항의하였다.[212] 그러자, 박헌영은 '왈거왈부하지 말고 민주주의적으로 가부를 결정하자.'고 했다.[212] 초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다시 반대발언을 했다가는 서울에 돌아갈수 없다는 공포감을 느끼게 되자 여운홍은 일체의 발언을 중지하고 표결 등에서도 기권하였다.[212]

5월 남북협상이 종결된 후, 박헌영은 다시 남한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가 남북협상 후 북한에 잔류한 것은 그의 정치행보 중 최악의 실수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 뒤 박헌영은 김일성과 함께 소련으로 소환되어 스탈린을 만났으나, 스탈린은 일찌감치 위성국가의 지도자로 김일성을 점지했다. 스탈린은 박헌영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꺼렸던 것이다.[213] 해방정국 초기까지만 해도 당수였던 박헌영과 북조선분국의 비서였던 김일성의 관계는 스탈린의 선택으로 역전되었다. 이를 두고 명지대학교 이지수 교수는 스탈린이 국내파 공산주의자 박헌영 대신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택한 것은 KGB 라인의 승리이기도 하다고 봤다.[214]

남조선노동당과 북조선노동당이 통합될 무렵 당대 당 통합에 의해 그의 지위는 김일성의 아래로 격하당하였다. 박헌영은 1948년 9월 남조선노동당 당수의 자격으로 북한 정권수립에 참여하였다. 그는 남조선노동당 서기장직을 유지하면서 새로 수립된 북한 정부의 부수상 겸 외무상이 되었다.[3] 1950년 4월 남북 노동당이 통합되면서 박헌영은 조선노동당 서기가 되었다. 박헌영은 1949년부터 1953년까지 북한의 정치국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3] 1953년 축출되어 체포될 때까지 북한의 외무상을 지냈다.[3]

왼쪽부터: 김일성, 아나스타스 미코얀, 안드레이 그로미코, 박헌영, 홍명희가 야로슬라블 역의 명예 경비대 앞을 지나가고 있다. 모스크바, 1949년 3월


한편 남북협상을 계기로 월북한 이후 그는 해주 또는 평양에서 사자를 보내 남조선로동당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1930년대부터 스탈린을 비판했고, 박헌영을 스탈린의 앞잡이로 봤기 때문에 미군 고문관들을 활용해 남로당을 탄압했다.[215] 한편 그는 이현상지리산으로 투입한다.

2.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활동과 숙청

1948년 4월 남북협상 참여를 위해 방북했다가 평양에 잔류한 박헌영은 같은 해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내각 부총리 겸 외무상에 임명되었다.[3] 그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당수 자격을 유지하며 북한 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1950년 4월 남북 노동당이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창설되자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비서(서기)를 맡았고,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정치국 위원으로 활동했다.[3]

박헌영, 1952


박헌영은 김일성과 함께 한국전쟁 준비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1949년부터 1950년 사이 김일성을 수행하여 소련스탈린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을 방문하며 전쟁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는 데 참여했다.[47][6] 특히 1950년 3월 말부터 4월 말까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승인과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다.[6]

그러나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김일성의 권력 기반이 공고해지면서,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 인사들은 점차 권력 중심에서 밀려났다. 한국전쟁의 실패 책임은 박헌영에게 전가되었고, 1953년 정전 협정 직후인 8월 3일, 김일성은 대대적인 남로당계 숙청을 단행하여 박헌영을 '미제의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3] 당시 박헌영은 부총리 겸 외무상, 당 부위원장 등 고위직을 유지하고 있었으나[3], 숙청을 피할 수는 없었다.

체포 후 약 2년 4개월 만인 1955년 12월 15일, 박헌영은 북한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에서 간첩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7] 그의 정확한 사망일은 불분명하지만, 사형 선고 직후인 같은 달 또는 이듬해에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7][8][9][266] 김일성 정권은 박헌영을 한국전쟁 패배의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2. 4. 1. 북한 정권 수립 참여와 권력 투쟁

1948년 4월, 박헌영은 김구, 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고, 협상이 끝난 5월 이후 북한에 남았다. 같은 해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자 남조선로동당(남로당) 당수 자격을 유지한 채 초대 내각 부총리 겸 외무상에 임명되었다.[3] 그는 1949년부터 정치국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50년 4월 남북의 노동당이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창설되자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서기가 되었다. 박헌영은 1953년 숙청될 때까지 부총리, 외무상, 당 부위원장 등의 고위직을 유지했다.[3]

박헌영은 6·25 전쟁 발발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1950년 1월 미국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다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자, 박헌영과 소련 지도부는 이를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신호로 해석하고 남침을 추진할 기회로 여겼다.[226] 박헌영은 전쟁 직전 남한 내 남로당 조직을 이용해 조선인민군의 남침에 호응하는 민중 봉기를 일으키려 시도했다.[227] 전 남로당원 김남식의 연구에 따르면, 박헌영과 이승엽은 1950년 6월 초, 심복들을 남한 각 도에 파견하여 당 조직을 정비하고 인민군 남침 시 군중 봉기를 유도하려 했다. 서울, 충남, 전남, 전북 등지에 5~10명씩 정치공작원이 파견되었으나[227], 이들의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례로 6월 22일 밤 전남 영광 해안에 상륙한 무장 공작원 32명은 주민 신고로 출동한 군경에 의해 전원 사살되기도 했다.[227] 박헌영이 장담했던 남한 내 대규모 민중 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일부에서는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이 농민들의 불만을 완화시킨 효과가 있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228]

1950년 4월,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계획에 대한 승인을 얻어냈다. 스탈린은 전격전 수행과 세부 계획 수립을 지시했다.[229] 이 자리에서 박헌영은 "북조선에서 첫 신호만 보내면 남조선 인민들이 즉각 봉기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것으로 알려졌다.[226] 미국의 언론인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박헌영이 자신의 인기도와 남한 민중의 봉기 가능성을 과대평가하여 남침을 부추겼다고 비판했다.[226] 이후 5월에는 베이징으로 가 마오쩌둥을 만나 스탈린의 지지 사실을 알리고 남침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230] 5월 29일에는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과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에프 사이에 '선제타격작전계획'이 완성되었고, 6월 16일 스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의 최종 승인이 이루어졌다.[229]

그러나 박헌영은 김일성의 전면 남침 계획에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는 전면전 대신 황해도의 옹진반도를 먼저 점령하여 남한 내 민심을 흔들고 협상을 통해 유리한 고지에서 통일을 이루자고 제안했으나,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준비 과정에서 박헌영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남침 실패의 책임은 이후 김일성에 의해 박헌영에게 전가되었다. 김일성은 훗날 "박헌영 도당이 1949년 여름부터 '조국 통일이 임박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당원과 유격대원들을 위험에 빠뜨렸다"고 비난했다.[122]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10일, 박헌영은 남한에 체포되어 있던 남로당 지도자 김삼룡이주하를 북한에 억류 중이던 민족주의자 조만식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북한은 동시 교환을 주장했으나 이승만 정부는 북측의 선송환을 요구하며 맞서 결국 교환은 성사되지 못했다.[265] 전쟁 발발 후인 7월 2일, 박헌영은 외무상 명의로 미군의 참전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김일성의 권력 기반이 강화되면서, 남로당 출신들은 점차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1952년 4월 김일성의 40회 생일에는 공개적으로 그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기도 했으나[224], 이는 권력 투쟁에서 밀리고 있던 박헌영의 불안한 입지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했다. 결국 1953년 정전 협정 직후인 8월 3일, 김일성은 '미제의 간첩' 혐의를 씌워 대대적인 남로당계 숙청을 단행했고,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핵심 인물들이 체포되었다. 같은 해 말, 박헌영은 전 부인 주세죽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55년 12월 5일 (일설에는 1956년) 박헌영은 '미제 고용 간첩' 및 '반당 종파 분자' 등의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266]

연도날짜내용
1948년9월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총리 겸 외무상 임명
1949년6월평양에서 윤레나와 재혼
1949년 ~ 1950년2월 ~김일성을 수행하여 스탈린 2회, 마오쩌둥 1회 방문[47]
1950년4월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선출
1950년4월김일성모스크바 비밀 회담 참석
1950년5월50회 생일 기념 축사 받음
1950년5월 27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훈장 제1급 수여
1950년6월북한 군사위원회 위원 임명
1950년6월 10일김삼룡, 이주하조만식의 교환 제안[265]
1950년7월 2일외무상 명의로 미군 6·25 전쟁 참전 비난 성명 발표
1950년10월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임명
1951년2월조선인민군 창건 3주년 기념 평양시 경축대회 연설
1952년4월김일성 40회 생일 축원[224]
1953년8월 3일남로당계 숙청으로 체포
1953년전 부인 주세죽의 사망 소식 접함
1955년 또는 1956년12월 5일사형 집행[266]


2. 4. 2. 한국전쟁과 김일성과의 갈등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전, 박헌영은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발언을 했다. 1950년 5월 17일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북한 당·정 간부 및 인민군 주요 지휘관 연석회의에서 그는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이 들고 일어나 남조선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다. 인민군의 진격은 해방된 지역을 향한 승리의 행진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236] 그러나 이는 남한의 현실과 동떨어진 예측이었다. 이미 이승만 정부는 4·3 사건과 여순 반란 이후 빨치산 토벌과 보도연맹 결성 등을 통해 좌익 세력을 크게 약화시킨 상태였고[227], 남한 내 민심도 남로당에 등을 돌린 상황이었다.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은 "20만 남로당원 봉기설은 박헌영이 조선로동당에서 자기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평가했다.[227] 김일성이 박헌영의 이러한 '남로당 20만 봉기설'을 그대로 믿고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구소련 문서에 나타나듯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원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236]

김일성(왼쪽)과 박헌영(오른쪽)(1948년)


한국 전쟁 계획은 박헌영 단독이 아닌 김일성과의 공조 하에 추진되었다. 1949년 8월 스티코프 소련 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김일성과 박헌영은 함께 무력 남침의 필요성을 제기했다.[6] 1950년 3월 말부터 4월 말까지 김일성과 박헌영은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전쟁 승인을 받았고, 상세한 지침까지 받았다.[6]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10일, 박헌영은 외무상으로서 남조선로동당 지도자 김삼룡이주하조만식과 교환하자고 제안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265] 전쟁이 발발하자 7월 2일 박헌영은 외무상 명의로 미국의 참전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주로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되었다.[236]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던 10월 8일, 평양 모란봉 지하 김일성 집무실에서 박헌영은 즉각적인 군대 철수를 주장했지만, 김일성은 남한 산악 지대에서의 유격전을 고집하며 언성을 높였다.[236]

갈등은 1950년 11월 7일 만포진의 임시 소련 대사관에서 열린 볼셰비키 혁명 기념행사에서 극에 달했다. 술에 취한 김일성은 전쟁 열세의 책임을 물으며 박헌영에게 "당신이 들고 일어난다고 했던 빨치산들은 다 어디 갔나?"라고 소리쳤고, 박헌영이 "어째서 낙동강에 군대를 죄다 내려보냈나?"라고 반박하자 김일성은 격분하여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어!"라고 외치며 대리석 잉크병을 집어던졌다.[236]

1932년 무렵의 박헌영


김일성과 박헌영의 근본적인 대립 배경에는 서로 다른 출신과 경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말까지 국내에서 항일 운동을 지속한 공산주의 운동의 거물이었고,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한 대선배였다. 반면 김일성은 소련군 장교 출신으로, 소련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고 북한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박헌영에게 김일성은 경력이 짧고 소련의 힘에 의존하는 인물로 비쳤을 가능성이 크다.[236] 신복룡 교수는 이들의 대립이 노선 차이보다는 주도권 다툼의 성격이 강했다고 분석한다.[240]

한국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자, 전쟁 책임론이 불거졌다. 북한과 친북 성향 학자들은 전쟁의 책임을 박헌영에게 전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박헌영이 김일성을 속여 전쟁을 일으켰다거나, 스탈린, 마오쩌둥과 단독으로 공모했다고 주장한다.[275][276] 김일성 역시 1954년 12월 군·정 간부회의에서 "박헌영의 거짓말에 속았다"며 남로당 봉기설이 허구였음을 비난했다.[236]

그러나 한국 전쟁의 책임을 박헌영에게만 돌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전쟁 결정 과정에는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 등 여러 행위자가 관여했으며, 구소련 문서들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전쟁 계획 수립에 함께 참여했음을 보여준다.[6] 박헌영이 남로당의 역량을 과장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김일성이 전쟁을 결심한 유일하거나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또한 박헌영은 1952년 1월2월, 그리고 중국의 펑더화이와의 면담에서 전쟁의 피해를 지적하며 중단을 원한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277][237]

전쟁이 실패로 끝나면서 김일성은 책임을 남로당파에게 돌리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남로당 계열 유격대는 대부분 소탕되었고, 1953년 초 남로당파가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15] 쿠데타 계획의 실재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이를 빌미로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파는 제거되었다. 박헌영은 1953년 8월 3일 체포되었고, 1955년 또는 1956년 12월 5일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66]

2. 4. 3. 체포와 숙청

1952년 8월 3일, 리승엽을 포함한 13명이 '북한 정권 전복 음모 및 반국가적 간첩 활동' 혐의로 체포되었다.[241] 이는 남로당 계열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의 시작이었다. 같은 해 9월, 스탈린 주재 하에 모스크바에서 펑더화이, 김일성 등이 참석한 긴급 회의가 열렸고, 박헌영도 이 자리에 배석했다.[242] 그러나 10월 귀국 직후, 그는 앞서 체포된 이들의 '반란' 배후로 지목되어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241]

한국전쟁 휴전 직전인 1953년 3월, 박헌영은 결국 '미제의 스파이', '반당 종파분자'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3] 3월 31일, 김일성소련 대사에게 박헌영과 그의 추종자들이 당내 분파를 만들고 미국에 정보를 넘겼으며, 한국전쟁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243] 하지만 박헌영은 체포 직후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를 전면 부인했으며, 자기 비판을 거부하고 질문에만 답변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전해진다.[244] 그는 체포와 동시에 당에서 제명되었고, 부총리 겸 외무상 직위에서도 해임되었다.[244] 이후 평안북도 철산군의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되어 고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 사회에 퍼진 지도부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김일성이 희생양을 찾았다는 분석도 있다.[17]

1955년 12월 15일, 북한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에서 박헌영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재판의 공식 명칭은 '피소자 박헌영의 북한정권 전복음모,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행위에 대한 사건'이었다.[244] 재판 과정에서 북한 당국은 박헌영을 일방적으로 '미제의 간첩'으로 몰아붙였다.[245] 이에 박헌영은 격노하며 안경을 벗어 던지고 "그래, 네 말대로 스파이였으니 멋대로 해라!"라고 외쳤다고 한다.[246] 재판에는 남로당 출신 당원들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그가 남한 활동 당시 미국을 도왔다는 불리한 증언을 하기도 했다.[103]

같은 날 열린 선고 공판에서 박헌영은 사형 및 전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7] 재판 과정에서 그는 혐의를 인정하는 듯한 질문에 '그렇다' 대신 '그렇겠지'라고 모호하게 답변했다고 전해진다. 재판장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최후 진술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이 자리에 오기 훨씬 전부터 살아나갈 수 없는 신세임을 느끼고 있었다. (...) 너희들의 주장대로 나는 미제의 간첩이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주장하는 미제 간첩과 내가 주장하는 미제 간첩은 엄격히 다르다. 나는 남조선에 있을 때, 아니 그 훨씬 전부터 미국 사람들과 교분이 있었다. 그 교분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 통일을 위한 차원이지 결코 간첩행위가 아니다. (...) 그대들 말대로 내가 미국의 스파이였다고 하자. 모든 것은 내가 주도했을 뿐 남로당 간부들은 전혀 책임이 없다. 그들은 모두 조국의 해방과 통일, 사회주의 혁명과업을 위해 밤낮으로 일해온 정직한 애국자들이다. 나에게 떨어진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이든 간에 달게 받겠으니 죄 없는 남로당 간부들을 용서해달라. 거듭부탁한다.[247][248]


이 진술에 대해 친북 성향의 증언자들은 박헌영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재판 직후 증인으로 출석했던 이강국 등 남로당 계열 인사들은 즉결 처형되었고[77], 권오직은 농장으로 추방되었다. 재판장 최용건은 박헌영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은 약 5시간 동안 진행되어 밤 10시에 종료되었으며, 재판 후 김일성 계열의 갑산파 인사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인 반면, 소련파연안파 간부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퇴장했다고 전해진다.[249]

박헌영을 따르던 박영발 등 일부 인사들은 "미제 간첩 박헌영의 주선으로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것을 반성한다"는 자기 비판을 하고 직위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북한 당국은 박헌영이 1946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만나 북한 정권 장악 지령을 받고 월북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사형을 선고했다.[250]

사형 선고 이후에도 박헌영은 즉시 처형되지 않았다. 북한 당국이 그를 '미제 간첩'으로 규정하고 국제적으로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간첩 행위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77] 또한, 소련중국에서 박헌영 구명 움직임이 있었다. 소련 대사 이바노프는 여러 차례 김일성을 만나 박헌영을 소련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며[252], 마오쩌둥 역시 박헌영을 중국으로 망명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스탈린 사후 사회주의권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 마오쩌둥의 박헌영 구명 소식은 북한 내 연안파 세력을 고무시켰다. 이들은 1956년 2월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을 계기로 김일성 축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8월 종파 사건 ), 주모자들은 숙청되거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김일성은 박헌영이 연안파와 연계될 가능성을 우려하여 처형을 서둘렀다. 그는 방학세 등에게 "증거고 뭐고 필요 없다! 오늘 밤 이내로 즉시 목을 따버려!"라며 처형을 지시했다고 전해진다.[213][244]

박헌영의 정확한 처형 시점과 장소는 불분명하다. 1956년 12월 15일 또는 12월 19일 평양 외곽 야산에서 처형되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202][253], 7월 19일에 처형되었다는 증언도 있다.[213][244] 처형 연도 역시 1955년설, 1956년설, 1958년설 등 다양하다.[7][8][9][266] 김일성이 처형을 서두른 배경에는 '8월 종파 사건' 세력과 박헌영의 연계 가능성에 대한 우려, 그리고 중국의 구명 시도 발각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남조선로동당원의 미국 접촉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일각에서는 한국전쟁의 책임을 박헌영에게 전가하기 위한 희생양이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1956년 9월 18일, 베이징에서 소련 부수상 미코얀과 마오쩌둥이 만나 '8월 종파 사건' 이후의 대책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박헌영 처형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하며 "일개 문인일 뿐"이라고 언급했고[254], 미코얀 역시 "박헌영은 지식인이며 (...) 조선로동당 창시자 중 한 명"이라며 처형 반대 입장을 밝혔다.[254] 마오쩌둥은 이후 북한 대표단과의 면담에서도 "과거에는 남조선 인민의 지도자로 절대 죽여서는 안 되는 박헌영도 죽였다. 당신들은 그가 미국의 간첩이라고 하는데 미국은 그가 간첩인지도 모르고 있다. 마구잡이로 살인을 하면 이로울 게 없다."고 강하게 비판하며, 박헌영이 미국 간첩이 아니라는 인식을 드러냈다.[254]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헌영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이 함경북도 화성 제16호 관리소(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다.[251]

박헌영의 북한 활동 및 숙청 관련 주요 연표
연도주요 활동 및 사건
1948년 9월남조선로동당 당수 자격으로 북한 내각 부총리 겸 외무상 임명
1949년 6월평양에서 윤레나와 재혼 (김일성 등 참석)
1949년 2월 ~ 1950년김일성 수행하여 스탈린 2회, 마오쩌둥 1회 방문[47]
1950년 4월남북 노동당 합당으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선출
1950년 4월김일성모스크바 방문, 스탈린과 비밀 회담
1950년 5월50회 생일 기념 축하 행사
1950년 5월 27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훈장 제1급 수여
1950년 6월북한 군사위원회 위원 임명
1950년 6월 10일김삼룡, 이주하조만식 교환 제안 (불발)[265]
1950년 7월 2일외무상 명의로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 비난 성명 발표
1950년 10월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임명
1951년 2월조선인민군 창건 3주년 기념 평양시 경축대회 연설
1952년 4월김일성 40회 생일 축하 메시지 발표[224]
1952년 8월 3일리승엽 등 남로당계 인사 13명 체포[241]
1952년 10월귀국 후 가택 연금[241]
1953년 3월미제의 스파이, 반당 종파분자 혐의로 체포, 당에서 제명 및 직위 해임[244][3]
1953년 말전 부인 주세죽모스크바 사망 소식 접함
1955년 12월 15일북한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에서 사형 및 전 재산 몰수형 선고[244][245][7]
1955년 또는 1956년처형 (정확한 날짜 불명)[7][8][9][202][253][266]


3. 평가와 논란

북한에서는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와의 만남을 근거로 '미국의 앞잡이'로 몰렸으며, 남한에서는 '골수 빨갱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213] 이러한 평가 속에서 그의 이름은 문중의 족보에서조차 삭제되었다.[213][255] 그러나 박헌영이 북한의 주장대로 미국의 간첩이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주체사상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한국 전쟁 패배의 책임을 박헌영에게 전가했으며[257], 그는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반당종파분자' 등으로 규정되어 숙청되었다.[268] 이러한 평가는 현재까지 이어져 북한에서 박헌영은 절대악의 상징적 인물로 여겨진다. 2013년 12월 장성택 숙청 당시에도 조선중앙텔레비전은 장성택을 박헌영, 이승엽과 같은 부류로 언급하며 비난했다.[20]

개인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이고 편협하며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조선공산당 시절 동료였던 조봉암은 그를 편협하고 종파적이라고 비판했으나[137][138], 두 사람의 관계가 1920년대 후반부터 원만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또한 고집이 세고 괴팍한 성격[301], 자기 주변 인물만 신뢰하는 편협성, 대중적 선동력 및 포용력 부족 등[77][306] 대중 정치인으로서 자질이 부족했다는 평가도 제기된다.

정치 노선과 관련해서는 좌우 합작 운동을 무원칙한 야합으로 간주하여 반대한 점, 이념적으로 교조주의적이라는 비판[309] 등이 있다. 정치학자 최장집은 박헌영과 김일성 모두 국제 정세를 이해하는 시야가 좁았다고 지적하며[300], 해방 후 여운형 세력과의 분열 등 다른 정치 세력과의 갈등이 혁명 세력의 통합을 저해했다고 평가했다.[122] 또한, 서울 주재 소련 부영사였던 아나톨리 샵신이 박헌영을 자신의 심복(henchman)으로 여겼다는 증언[210]과 소련의 지시에 따라 신탁통치에 대한 입장을 바꾸고[305] 스티코프 등에게 지침을 구한 행적 등은 그가 소련에 종속적이었다는 비판의 근거가 되며, 이는 자주독립 노선을 강조한 김구와 대비되기도 한다.[305]

1946년 7월 한국여론협회 조사, 초대 대통령 후보 지지율 (동아일보 1946-07-23)


남한에서는 그를 남한의 적화를 시도한 인물[307]이자 한국 전쟁의 주요 책임자 중 한 명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있다.[308] 전쟁 발발 시 20만 남로당원의 봉기를 장담했다는 주장[224]이 이러한 평가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해방 직후 초기 여론조사에서는 비교적 높은 지지를 받기도 했으나(1945년 10월 선구회 조사 16%[298]), 이후 대통령 후보 지지율 조사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지지를 기록했다(1946년 7월 84표[298], 1948년 6월 62표[298]). 당시 미군정은 사회주의 세력을 억압하지 않을 경우 박헌영이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299]

박헌영의 숙청은 김일성의 권력 강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해석된다. 최장집은 김일성이 전쟁 책임을 박헌영과 남로당계에 전가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유일체제를 공고히 했다고 분석했다.[269] 박헌영의 제거는 북한에서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쇠퇴하고 김일성 개인숭배에 기반한 체제가 확립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기도 한다.[236] 역사학자 박명림은 그의 죽음을 '북한 현대사 최대의 의혹[258]'이라고 표현했다.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박헌영에 대한 재평가와 복권 시도가 있었으나, 전두환 정부의 탄압 등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1983년 전직 남로당원 박갑동이 쓴 박헌영 전기는 검열로 인해 절판되기도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박헌영 관련 연구와 평전 등이 다시 출간되며 재평가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사회주의자였다는 점, 자발적으로 월북하여 북한 정권의 고위직을 역임했다는 점 등을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그의 항일 활동이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순수한 독립운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시각도 제기되지만, 이념적 잣대가 독립운동 평가의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도 존재한다.

4. 가족 관계

박헌영의 자녀 중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자녀는 딸 박 비비안나와 아들 박병삼(법명: 원경)이다. 가까운 친척 중에는 후사가 없는 경우가 많았으며, 5촌 조카인 박병일(한국 전쟁 중 사망)이 양자를 들여 후사를 이었다. 충청남도 예산에는 그의 5대조 묘가 있다.[293]


사위: 빅토르 마르코프(? ~ 2003년)

  • * 정순년(鄭順年, 1922년 ~ 2004년 12월 15일) - 두 번째 배우자.
  • ** 아들: 박병삼(1941년 ~ 2021년) - 법명은 원경, 승려.
  • * 윤레나(1920년경 ~ ?, 생사불명) - 세 번째 배우자. '윤리나'로도 표기된다.
  • ** 딸: 박 나타샤(朴Наташа, 생사불명)
  • ** 아들: 박 세르게이(朴Серге́й, 1952년 ~ 생사불명)
  • * 이순금 - 네 번째 배우자로 알려져 있다.

  • 진외증조부: 이일석(李逸錫)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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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뉴스 붉은왕조 증언요약 소, 김일성에 강제로 북한 떠맡겼다 조선일보 1997-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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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웹사이트 인터넷 경향신문 - 경향닷컴 | Kyunghyang.com http://weekly.kh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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