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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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책은 1903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난 항일 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항일 운동에 참여, 중국 공산당과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다. 해방 후 김일성을 보좌하며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산업상, 인민군 전선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중 사망했으며, 북한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김책시, 김책공업종합대학 등 여러 시설에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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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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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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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책 |
본명 | 김홍계 |
로마자 표기 | Gim Chaek |
한자 표기 | 김책(金策) |
로마자 표기 | Gim Hong-gye |
한자 표기 | 김홍계(金洪啓) |
출생일 | 1903년 8월 14일 |
출생지 | 함경남도 학성군 성진 |
사망일 | 1951년 1월 31일 |
사망지 | 평안남도 평양시 |
국적 | 북한 |
시민권 | 북한 |
자녀 | 김국태 김정태 김신태 |
직업 | 북한 장군 및 정치인 |
종교 | 공산주의 (무신론자) |
별칭 | 자(字): 홍계(洪啓) 호는 홍계(洪溪) 가명: 김락(金樂), 김인식(金印植), 김인식(金仁植), 김홍인(金洪印), 김동인(金東印), 김인(金印) 등 중국식 이름: 라동현(羅東賢) |
수상 | 북한의 조국통일상 |
군사 복무 | |
소속 | 조선인민군 |
복무 기간 | 1932년–1951년 |
지휘 | KPA 전선 사령관 |
참전 | 한국 독립운동 만주국 평정 중국 국공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폭풍 작전 포항 전투 제1차 서울 전투 부산 전투 경주 전투 대구 전투 부산 교두보 공세 인천 상륙 작전 흥남 철수 작전 1950년 9월 유엔 북진 |
최종 계급 | 예비역 소련군 육군 소령 조선인민군 육군 대장 1계급 특진 추증(조선인민군 원수 추서) |
정치 경력 | |
직책 | 북한 내각 부총리 |
임기 시작 | 1948년 9월 9일 |
임기 종료 | 1951년 1월 31일 |
총리 | 김일성 |
부총리 | 박헌영 홍명희 허가이 |
직책 1 | 산업상 |
임기 시작 1 | 1948년 9월 9일 |
임기 종료 1 | 1951년 1월 31일 |
전임자 1 | 직위 신설 |
후임자 1 | 정일룡 |
총리 1 | 김일성 |
주요 경력 | 항일운동가 교육자 군인 정치인 소련군 88극동여단 예하 중대장 중국공산당 초급위원 조선로동당 대표상임위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겸 전선사령관 북한 군사위원회 군사위원 북한 민족보위성 부상 북한 산업상 북한 내각 부총리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조선로동당 명예고문 겸 명예최고위원 |
정당 | 조선로동당 |
소속 군대 복무 | 1932년 4월 25일 ~ 1936년 7월 31일 만주항일유격 복무 1936년 8월 1일 ~ 1945년 9월 1일 동북항일련군 복무 1946년 2월 ~ 1951년 1월 31일 조선인민군 복무 |
배우자 | 안경숙 |
학력 | 룡정 동흥중학교 중퇴 |
서훈 | 북한 국기훈장 1급 추서 북한 공화국 영웅 2급 추서 북한 조국통일상 추서 |
2. 생애
김책은 1903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나, 일본의 식민 통치 시기 만주로 이주했다. 1927년 중국 공산당과 반일 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되었으나, 석방 후 1935년 동북 항일 연군에 합류하여 김일성과 함께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1940년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 하바롭스크에서 김일성을 만나 제88 특별 여단을 결성했다.
1945년 소련군과 함께 조선으로 귀환한 김책은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 김일성 밑에서 산업부 장관 겸 부총리,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북한군 최전선 사령관으로 참전했다.
김책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김책이 밤샘 작업 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2] 반면, 일본의 김일성 가계사는 인천 상륙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숙청되어 1951년 1월 미군 공습으로 사망했거나 권력 투쟁 이후 암살당했다고 주장한다.[1]
2. 1. 생애 초반
1903년 함경북도 학성군(현 김책시)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으며[12], 본명은 김홍계(金洪啓)였다. 형제로는 형 김홍선과 동생들이 있었다. 형 김홍선은 3.1 만세 운동 때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만주의 독립군 부대에서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했다가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룡정 동흥중학교[13] 교사였던 형 김홍선은 러시아에서 온 학생과 접촉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후 김홍선은 녕안현 일대에서 공산당 구위로 일하다가 희생되었다. 동생 김홍희 역시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다.일제의 강점으로 가족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하였다.[14] 1910년 가족을 따라 중국 간도 옌지로 이주하여 유년 시절을 보냈다. 옌지에서 성장하다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지주 집 목동으로 보내졌다. 지주 집 목동으로 일하면서 공산주의 혁명 서적을 탐독하여 반일 혁명 투쟁 활동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917년 룡정 출신 안경숙과 결혼하였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야학교에 다녀 글을 배웠고, 만주 지린성 룡정촌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동흥중학교 재학 중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으나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1926년 겨울 리주화의 소개로 조선공산당 화요파인 만주총국 동만도 지구당 책임비서 안기성(安基成)을 찾아갔으며, 안기성과 리주화의 권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아들 국태와 정태를 처남에게 맡긴 뒤, 처남이 준 소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만주로 건너갔다. 이후 반제지하청년단체에서 활동하였고, 연길현 수신향(守信鄕) 지구 세포원으로 봉천, 길림성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927년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지하조직원들을 검거할 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받아[15]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동흥중학교에서는 퇴교당하였다. 이후 만주 펑톈, 지린 등에서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풀려나오기를 반복하면서 무장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초기에는 엠엘파와 대립되는 화요파 계열로서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어 요직을 맡았고, 이후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했다.
중국 망명 후 김책, 김락(金樂) 등의 가명을 사용하였고 이후 김인식(金印植), 김인식(金仁植), 김홍인(金洪印), 김동인(金東印), 김인(金印) 등 다양한 가명을 사용하였다. 1927년 4월 7일 조선공산당 재만총국 국원으로부터 조선공산당 북만도지부 집행위원에 천거되었다.
2. 2. 항일 독립 운동
1926년 겨울, 동흥중학교 재학 중 리주화의 소개로 조선공산당 화요파 만주총국 동만도 지구당 책임비서 안기성(安基成)을 만나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아들을 처남에게 맡기고, 소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만주로 건너가 반제지하청년단체에서 활동했다. 봉천, 길림성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927년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지하조직원들이 검거될 때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했다.[15]
출감 후 북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1928년 1월부터 12월까지 평안북도 고현보통학교 훈도로 채용되었다.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영안현의 사립 영안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강신태(강건으로 개명)를 만났다. 1930년 5월 30일 만주 5.30 폭동을 지휘하였다.
1930년 10월 영안현에서 조선공산당원들로 조직된 조선 소비에트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으나, 만주지역 일본 경찰과 국민당 군대의 대대적인 검문검속으로 해체되고, 1930년 11월 28일 체포되어 하얼빈 호로군사령부 구류소에 구금되었다. 1931년 9월 길림성 감옥으로 옮겼다가 봉천 심양형무소 감옥으로 넘겨져 7년형을 언도받았다.
1931년 9월 9.18 사변 때 빨치산 게릴라들이 심양형무소를 습격하여 허형식, 리희산 등과 함께 구출되었고,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도움으로 하얼빈 빈현 특별당지부 당 서기에 임명되었다. 1932년 9월 중국공산당 주하중심현위원회(珠河中心縣委員會) 군사위원이 되었다. 1933년 1월 중공만주성위에서 그를 주하중심현위 위원 겸 마이하동 당지부 서기로 임명했다. 1933년 가을 리복림과 함께 마이하동에서 천여 명의 주민이 참가한 반일 시위행진을 기획하여 성공했다. 1933년 10월 10일 주하중심현위 서기로 있으면서 주하항일유격대를 창건했다.
1934년 6월 29일 주하항일유격대가 500명의 대원으로 증가하자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로 이름을 바꾸고 3개 종대와 9개 대대로 개편하였다. 김책은 제3퇀 정치지도원이 되었다가 제2퇀 정치위원, 다시 제1퇀 정치위원을 담임하였다. 1934년 7월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 지대사령부 군수처장이 되고, 1935년 1월 합동지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으로 조직을 확대했다. 김책은 제2퇀대 정치부 주임, 1935년 3월 1퇀대 정치부 주임직을 맡았다. 1935년 10월 동북인민혁명군 3군이 5개 퇀대로 증원되자 제4퇀대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936년 6월 제4사는 제4군의 리연록 부대와 같이 보청현으로 원정하였다. 김책은 원정할 때 4군 군부와 같이 행동하면서 4군의 정치 사업을 주관하고, 4사는 군사, 정치 면에서 3군의 모범부대로 되었다. 1936년 봄 김책은 자신의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을 인솔하여 보청, 밀산 등을 공략하여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했다. 1936년 5월 조국광복회를 조직하는데 가담했다. 1936년 8월 1일 그가 이끌던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은 동북항일련군 제3군으로 개편되면서 김책은 동북항일연군 제4사단 정치부 부주임직에 임명되었다. 9월 18일 탕원 모아산 3군 피복공장에서 열린 회의에서 김책은 15명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당선되었다.
1937년 겨울 제7군과 합동하여 우쑤리강 연안에서 일본 관동군을 습격하여 승리하였다. 1937년-1938년에 이르는 쑹화강(송화강) 유역에서의 군사활동에 참여하고, 1939년의 흑룡강성 북안진, 풍락진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1938년에는 북만주 중화인민지원군 제3군의 정치부 주임이 되었다. 1939년 4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북만당대회에서 그는 중국공산당 북만임시성위원회 서기에 선거되었다.
1940년 봄에 있은 수룡현 전투에서 일본 관동군을 대파하여 명성을 얻었다. 1940년 1월과 2월에 열린 동만주 항일유격대 지도자들과 소련 공산당, 소련 인민군과의 회의인 제1차 하바로프스크 회의에 참석, 항일유격대의 소련으로의 이동을 결정하였으나 김책은 마지막까지 소련 이동을 거부하였다. 1941년 7월 10일 만주 로금구 체류 중, 소련군 제3로군 정위에 임명되었다.
1942년 3월 19일 소련군 제3로군 총지휘부에서는 김책이 발에 상처가 있어서 활동이 불편하므로 소련에 돌아와 휴식하도록 하였으나, 그는 계속 거부하다가 1943년 10월부터 만주에서 철수를 시작, 소련으로 넘어갔다. 1944년 1월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단(다른 별칭은 소련 인민군 제88보병려단 혹은 8641보병특별려단)에 합류하였다. 1945년 7월 조선에서의 해방 사업과 당 건설을 목적으로 김일성, 최용건과 함께 교도려 내에서 조선공작단을 만들고 김일성을 단장으로 선출했다.
2. 2. 1. 김일성과의 관계
1930년 5월 국제공산당의 1국 1당정책과 중국공산당 중앙당의 지시에 따라, 1930년 7월 27일 김책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동경성지부 조직간사가 되었다. 8월에는 중공 동경성당지부가 중공동경성구위로 개편되면서 동경성구위 구위서기를 맡았다. 이때 김책은 형 김홍선과 안면이 있던 김일성을 처음 만났다.[1] 1940년대 동북항일련군 시절 김일성을 다시 만나 함께 활동했으며, 이 인연으로 광복 후 김일성의 측근이 되었다. 소련으로 이동하여 재편된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도 함께 있었다. 당시 직급은 김일성, 강건, 안길과 동급이었다.[2]1945년 5월 당시 소련군 내 조선인 병사 중 김책과 이동화는 소령이었고, 김일성은 대위였다. 그러나 김책은 보천보 전투로 명성이 높았던 김일성을 만주 빨치산의 지도자로 추천하고 그에게 충성을 맹약했다.[1]
2. 3. 해방과 북조선 건국 활동
1945년 9월 19일 김일성과 함께 배편으로 원산항을 통해 귀국한 후, 김일성의 비밀 정치공작 사업을 도왔다.[16]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을 시작으로, 1946년 평양정치군사학원 원장이 되었다. 이후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1948년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평양학원 초대 원장 등을 지냈다.[16]김책은 김일성보다 지위는 낮았지만 나이는 열 살 이상 많았고 경력도 뒤지지 않았다.[16] 그러나 김일성이 지도자가 되었고, 최용건과 김책은 김일성에게 절대 충성을 바쳤다.[16] 김책은 1920년대 조선공산당의 양대 파벌 중 하나였던 화요회파와 연계되어 만주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참가했고, 당시 공산주의자로서의 경력도 상당했다.[17]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내에서도 상당한 발언권을 갖고 있었으며, 그의 지지는 김일성에게 큰 힘이 되었다.[17]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중앙조직위원회 준비위원이 되고,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결성되자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김일성을 도왔다. 1946년 1월 평양대학이 개교하고 김일성이 명예총장, 김책이 총장이 되었다.[18] 1946년 2월 평양에서 조선인민군이 창건되자 지휘관이 되었고, 같은 해 2월 8일 북조선 최초의 인민군 군간부 양성소인 평양군사학원이 설치되면서 원장에 임명되었다.
1946년 3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치공작대와 염동진의 백의사는 최용건과 김책의 집을 습격하여 폭탄을 던졌으나, 당시 집에 없었던 김책은 폭탄을 피할 수 있었다.[19][20][21]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과 북조선신민당이 통합하여 북조선로동당으로 결성되자, 김책은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북조선인민위원회로 개편되자, 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되고 북조선인민위원회 공동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 민족보위부장을 겸직하였다.
1948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선거되자 초대 인민위원으로 선출되고, 인민위원회 민족보위국 초대 국장에 선출, 겸직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 대표로 참석하였고, 1948년 8월의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도 참여하였다. 같은 해 6월 남북 로동당이 통합되어 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로동당 정치위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이 설립되자 김책은 내각 부수상 겸 산업상이 되고 민족보위성 부상도 겸임하였다.[22] 1948년 9월 2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선거에 당선되고, 같은 날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 회의에서 내각 산업상과 민족보위성 부상에 선출되었다. 그는 산업상으로 민족보위성 부상을 겸직하였고, 리강국과 함께 외무성 부상에도 임명되어 겸직했다.
2. 4. 한국전쟁과 최후
1950년 조선인민군 군사위원회 위원, 전선사령관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24] 1950년 9월 강건의 전사 후, 조선인민군의 혼란 수습과 지휘권을 최용건과 함께 맡았다. 미군의 공습이 계속되고 조선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최용건 등 다른 지휘관들은 평양 북방으로 피신하게 하고 홀로 평양을 지키겠다고 자처하였다. 1951년 1월 31일 평양에서 사망했다.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주장이 존재한다.
- 과로사: 한국 전쟁 중 1951년 1월 31일 평양의 최전선에서 과로로 전사했다는 설.[24]
- 심근경색: 평양의 지하 방공호에서 과로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는 설.
- 일산화탄소 중독: 미 공군 비행기 폭격 중 연탄 가스(일산화탄소) 중독으로 급사했다는 설.[24]
- 암살: 권력 투쟁 중 암살당했다는 설.[1] 임은은 김책이 죽기 전 김일성과 한국전쟁 책임에 대해 논의했다고 말하며, 김일성에 의한 암살을 의심하고 있다.[10]
- 인천 상륙 작전 실패 책임 추궁 후 숙청: 일본의 김일성 가계사는 김책이 인천 상륙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숙청되어 1951년 1월 미군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한다.[1]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김책이 밤샘 작업 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2] 북한의 공식적인 역사에서는 오랫동안 전사(戰死)로 기록되었으나, 김일성이 죽기 직전에 공개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世紀とともに)』에 따르면, 전선 지휘의 격무로 인한 과로로 심장마비(心臟麻痺)를 일으켜 사망했다고 한다.
사망 직후 김일성, 최용건, 박헌영이 직접 그의 관을 메고 장례식을 주관했고, 이때 최용건은 현장에서 통곡하며 오열하였다. 생전 김책을 사석에서 형님이라 부르던 김일성은 김책의 전사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한다. 김일성 수상은 바로 그가 부수상으로 재직하던 당시의 내각집무실 전체를 통째로 옮겨서 평양전승기념사적관에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그의 시신은 가매장했지만 한국전쟁 중 잃어버려, 조선로동당 당창건 30돐을 맞이하는 1975년 10월 10일 평양 대성산의 대성산 혁명렬사릉에 그의 가묘를 세우고 반신상을 세웠다.
3. 사후
조선인민군 전선사령관직은 전선사령부 참모장인 김웅이 맡았다. 사후에 공화국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이 추서되었다.[3]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인 함경북도 성진시와 학성군은 김책시와 김책군으로 개명되었고, 학성면은 김책읍으로 개명되었다. 이후 시군 통폐합으로 김책시가 되었다. 김책제철소(청진시), 김책공업종합대학(평양시), 김책군관학교 등 여러 시설들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6]
1962년 10월 23일 제1부총리에 추서되었다.
1968년 8월 29일에는 김책시에 김책 동상 제막식을 하였으며, 김일성 주석이 직접 참석하였다.[25]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26][4] 10월 15일 당 창건 30돐을 기념하여 혁명렬사릉에 그의 반신상이 세워졌다.
김일성 주석은 생전에 애용하던 금고에 수많은 사진들 가운데 김책과 함께 찍은 한 장의 사진만을 보관하였다고 한다.[14][7][8][9]
4. 평가
김책은 항일 무장 투쟁과 북한 정권 수립, 한국 전쟁 초기까지 북한의 주요 결정 과정에 참여한 핵심 인물이다. 특히, 김일성의 최측근으로서 김일성의 권력 기반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14]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석의 사상과 로선을 지키고 명령 지시를 관철하는 데 헌신하였으며, 항일 투쟁과 경제 건설에서 뛰어난 조직적 수완을 발휘한 인물로 묘사된다.[29]
김일성은 김책에 대해 "유능한 유격대 지휘관으로서 군사정치활동을 능숙하게 조직 진행하여 일제를 격멸하고 조국을 해방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라고 평가했다.[14] 또한 "해방 후 함흥 거리를 《김일성 장군 만세!》 구호로 일색화하여 전체 시민이 수령 칭송의 감정으로 들끓게 하였고,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창작 완성하도록 창작가들을 이끌어 주어 주석의 절대적인 권위를 보장하는데 빛나는 공헌을 하였다"라고 평가했다.[14]
김일성 사후 금수산태양궁전 집무실 비밀 금고에서 김일성과 김책이 함께 찍은 사진이 발견된 것은 김일성과 김책의 각별한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7][8][9]
사후 “공화국 영웅”으로 추대되었으며, 고향과 가까운 성진시는 1953년 김책시로 개명되었다. 김책제철소(청진시), 김책공업종합대학(평양직할시), 김책군관학교(현 김일성정치대학)도 그의 이름을 따 개명되었다.[6]
5. 가족
관계 | 이름 | 비고 |
---|---|---|
부인 | 안경숙(安慶淑) | |
아들 | 김국태(金國泰, 1924년 8월 27일 ~ 2013년 12월 13일) | 당 간부부장, 조직지도부장, 김일성정치학교 교장 역임[27] |
김정태(金正泰, ? ~ 1987년 11월) | 민족보위성 정찰국장, 인민군 중장, 1.21 사태 가담[27] | |
김신태(金信泰) | 강건의 본명을 따서 지음 | |
손자 | 김광일 | |
손녀 | 김문경 | |
손녀사위 | 리흥식 | 외무성 근무 |
형 | 김홍선(金洪善, ? ~ 1933년 7월)[28] | |
동생 | 김홍희(金洪熙, 다른 이름은 김중희(金重熙) 또는 김종희) |
6. 작품
7. 기타
1948년 5월 2일 평양의 통일전선 탑에서 남북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열렸는데, 돌에 새겨진 이름 중에는 김책, 김구 등의 이름이 있었다.[30]
김일성 주석의 집무실에는 작은 쇠 금고가 하나 있었다. 조선로동당 간부와 일반인 모두 그 안에 대단한 보물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 금고를 개봉하자 금고 안에는 작은 상자가 있고, 그 안에 누렇게 변한 김책과 김일성이 함께 찍은 옛날 사진이 한 장 있었다.
허헌과 친분이 있어 가깝게 지냈으며, 허헌은 김책이 이름을 김홍계에서 김책으로 바꾼 뒤에도 김홍계 선생이라 불렀다. 그는 이름의 한자를 바꿔서 아호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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